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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디지털 세상, 아날로그 취향
  • 환경과조경 2017년 9월

대학에 다닐 때, 학교 앞에는 작은 사회과학 서점이 있었다. 그 서점의 문에는 늘 흰색 대자보가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각 동아리의 약속 장소와 시간이 빼곡하게 적혀 있곤 했다. 삐삐를 들고 다니던 시절이라, 어스름해질 무렵이면 누군가 메모판에 적어 놓은 약속 장소에 삼삼오오 모여들곤 했다. 지난밤에 적어 놓은 메모인줄 모르고 엉뚱한 술집에서 하릴없이 사람들을 기다린 적도 있다. 요즘 같으면 단톡방에 주소와 지도를 올리며 시간과 위치를 공지할 테니, 정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동아리에서 공연을 올릴 때면, 학교 앞 서점들은 단골 광고주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대학가의 작은 서점들이 대형 서점에 밀려 문을 닫기 시작했고, 몇몇 선배들은 학교 앞 서점을 살리기 위해 후원을 하기도 했다. 그 시절 학교 앞 서점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지역ㆍ문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일종의 연대감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후 많은 학교 앞 서점이 사라졌다. 나도 대형 서점에 포인트를 쌓기 시작했다. 출판 업계에 종사하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오프라인 서점보다 온라인 서점을 더 자주 이용하고, 때때로 아마존 같은 글로벌 온라인 서적 유통망을 이용하기도 한다. 여전히 종이책의 책장 귀퉁이를 접거나 밑줄을 그으며 보는 것을 선호하지만, 더 이상 종이책을 쌓아둘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여행갈 때 짐을 줄이기 위해 이북e-book을 구매하기도 한다.

 

2002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긴 서점이라는 종로서적이 문을 닫았다. 이후 몇몇 대형 서점이 오프라인과 온라인 서점을 제패하는 듯했다. 이미 오프라인 서점은 대형 쇼핑몰이나 영화관 등과 결합했고, 서점 내부는 문구류나 디자인 용품 매장과 카페가 큼지막한 공간을 차지하는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변모했다. 동네 서점에는 사망 선고가 내려진 듯했다. 디지털 세상에서 종이책이 예전과 같은 영화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즘 소위 핫한 동네에는 어김없이 작은 서점들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독립 서점에서는 대형 서점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독립 출판사의 책들을 볼 수 있다. 책방 주인의 관심사에 따라 서점마다 다른 색깔의 책들이 모여 있고, 한 사람을 위한 책을 처방해주는 서점도 있다. 홍대 주변이나 이태원에는 연예인이나 아티스트가 서점을 열고 책을 큐레이팅하기도 한다. 내가 사는 망원동에도 작은 동네 서점이 서너 개는 되는 것 같다. 이런 책방들은 핫한 장소로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 등에 소개되기도 한다. ‘길’들이 인기 있자 서울시에서는 최근 책방길 11선(망원, 홍대앞, 연남, 이대앞, 해방촌, 이태원, 경복궁, 종로, 혜화, 관악, 강남)을 홍보하고, 책방길 지도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한다. 역대 최대 규모로 흥행했다는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는 20여 개 독립 서점이 참가했다. ‘서점의 시대’라는 기획전을 통해 작은 서점들은 독자의 마음을 잘 읽었다는 평가를 받았다.(각주1)

 

물론 이러한 작은 서점들이 대형 유통망이 쥐고 있는 헤게모니를 가져올 수 있다거나, 하다못해 ‘생존’ 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종이책과 서점이 사양 산업으로 치부되는 요즘, 책을 파는 작은 공간에 대한 관심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들은 정보의 바다에서 사실은 선택지가 줄어들기를 간절히 바라는 욕구를, 작은 공간에서 면대면 접촉을 통해 해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지역을 토대로 한 유대감, 혹은 세련된 취향을 공유하고 독특한 문화를 소비한다는 만족감이 덧붙여지지 않을까.

 

비단 책과 서점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지드래곤이 USB 앨범을 내면서 ‘이것이 음반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영영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레코드판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디지털에 비해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아날로그에 대한 관심이 다시 자라고 있다. 실리콘밸리와 같이 아날로그를 파괴한 디지털 테크놀로지 업계 종사자들은 “낮에는 코딩을 하지만 밤에는 LP레코드판을 모으고 수제 맥주를 만들고 보드게임을 하고 낡은 오토바이를 수리”한다.(각주2)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색스는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디지털 라이프가 일반화된 오늘날 아날로그가 다시 유행하고 있는 현상은 일부 힙스터에게 국한된 일시적인 트렌드나 노스탤지어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훨씬 더 잘하는 영역에서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증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종이책/잡지 출판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디지털 콘텐츠를 판매해 돌파구를 찾으라고 권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많은 출판사, 매체들이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고 독자적인 콘텐츠를 생산하거나 종이책을 디지털화했지만, 아직까지 명백한 성공 사례는 나오지 않고 있다. 아니 투자비를 회수하거나 뚜렷한 수익을 낸 사례를 들어보지 못했다. 일례로 한때 태블릿 PC용 전자 잡지가 만들어져서 시장의 변화를 예고했지만, 지금은 태블릿 PC 자체의 인기가 시들하다. 하지만 이것이 국내에 한정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양한 사례를 수집한 데이비드 색스는 전자책의 성장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음악 업계에서 MP3가 했던 일을 출판 업계에서 전자책이 해낼 거라는 섣부른 예측은 점차 빗나가는 듯하다”고 평가한다.

 

디지털 콘텐츠를 읽는 것과 종이 매체를 읽는 경험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날로그의 반격』에서는 「뉴욕타임스」를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에 비유한다. 하이퍼링크나 경쟁 신문들에 의해 주의를 빼앗기지 않는 환경에서 읽기 때문이다. “종이에 인쇄된 뉴욕타임스를 읽는 것은, 세상의 나머지 소식들을 함께 전달하는 디지털 플랫폼에서 뉴스를 읽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면 종이로 만든 조경 잡지를 보는 것은 디지털 콘텐츠와 비교해 어떤 장점이 있을지 생각해보자. 우선 배터리 잔량이나 와이파이 연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로딩을 기다리지 않고도 손으로 훌훌 넘겨가며 고해상도 사진을 자유롭게 볼 수 있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아두면 인테리어 효과도 훌륭하다. 그리고 마치 책방 주인이 권해주는 책을 읽듯이, 수많은 정보 중에 엄선되어 잘 배치된 콘텐츠를 보면서 만족감을 얻을 수도 있다. 혹시 자신의 글이나 작품이 실렸다면, 남에게 선물하기도 좋다. 물론 디지털 콘텐츠라면 링크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종이 잡지에는 쉽게 휘발되지 않는 물리적 실체가 주는 ‘진짜’라는 느낌이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한 달 한 달 종이 잡지를 만들다보니 아날로그에 대한 관심을 일시적 트렌드가 아니라 균형을 찾아가는 현상으로 읽고 싶어진다.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요즘이다.

 

1. 이대희, “서울국제도서전 성공의 의미는?”, 프레시안 2017년 6월 30일.

2. 데이비드 색스, 박상현ㆍ이승연 옮김, 『아날로그의 반격: 디지털, 그 바깥의 세계를 발견하다』, 어크로스, 2017. 이하 모두 같은 책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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