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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다양성과 정체성
  • 환경과조경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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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가 높을 때의 ‘숨은 선
 

내가 JCFO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경험한 몇몇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에게는 꽤 명확한 취향과 목표가 있었다. 아이코닉iconic, 랜드마크, 강한 아이덴티티 같은 단어로 자신이 원하는 공간을 설명한 그들은 보다 눈에 띄고 다른 곳과 차별화될 수 있는 디자인을 원했다. 당연히 그들의 요구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작업을 진행했다. 여기엔 물론 화려하고 과감해 보이는 디자인도 마다하지 않는 JCFO의 스타일이 가미되었다. 이러한 프로젝트에서는 작업의 과정, 개념, 내러티브보다 공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가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 위해 가장 먼저 고려되었다.

 

반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스튜디오 MRDO가 거쳐온 대부분의 작업은 ‘조성된 공간이 왜 좋은지’ 설명하는 데 힘쓰기보다는 ‘그 땅에 왜 그러한 디자인이 나오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춰 왔다. 누가 보더라도 감탄할 만한 공간을 만들려고 하기에 앞서, 대상지의 주어진 조건을 중재하고 이를 디자인 언어로 변환하는 작업이 주를 이뤘다. 불특정 다수가 클라이언트였거나 비교적 그들을 의식하지 않고 나 스스로 원했던 방법론을 따랐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JCFO에서의 작업과는 그 성향이 확연히 구분된다. 

 

이처럼 스튜디오 MRDO와 JCFO의 프로젝트는 설득해야 하는 대상이 다른 탓에 설계에 접근하는 과정, 결론, 표현 방법이 크게 다르다. 연재의 마지막 회가 될 이번 글에서는 스튜디오 MRDO와 JCFO의 대조적 작업 방식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나에게 디자이너의 다양성과 정체성은 어떠한 의미인지 짧게나마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어 소개할 스튜디오 MRDO의 작업들은 대상지의 특수한 상황 자체가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주변 맥락이 디자인의 기본 골격이자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JCFO에서의 두 작업은 맥락이 결론을 좌우한다기보다 공간 자체가 전달하게 될 경험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다.

  

스튜디오 MRDO_ 숨은 선

‘센트럴파크 서머 파빌리온 공모전 2016(Central Park Summer Pavilion Competition 2016)’은 아키아이디어스(Arquideas)가 주최한 국제 공모전으로, 여름 동안 일시적으로 이용할 파빌리온을 뉴욕 센트럴파크 내부 어디든 대상지로 선정해 제안하는 것이 과제였다. 면적 약 3.4km2의 이 대형 공원은 경계 10km가 도시와 면하고 있으며, 숲, 초지, 크고 작은 잔디밭과 저수지 등 다양한 형태의 녹지 공간뿐만 아니라 운동 경기장, 놀이터, 식당, 야외 공연장 등 매우 다양한 시설을 포함한 거대 도시 기반 시설이자 복합 녹지 시스템이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파빌리온을 짓느냐를 고민하기 전에 어떤 땅에 어떤 공간을 디자인해야 하는가를 먼저 결정해야 했다. 파빌리온 자체의 디자인만큼이나 대상지와 디자인이 맺게 될 관계가 중요하다고 여겼으며, 설계하게 될 공간이 주변의 맥락과 세트를 이루어야 공모전의 취지에 부합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센트럴파크의 수많은 공간 중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저수지(Jacqueline Kennedy Onassis Reservoir)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리서치하던 중 현재는 기능을 잃은 길이 720m, 너비 4.8m 댐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위성 사진으로나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이 옛 기반 시설은 수면과 비슷하거나 조금 낮은 레벨에 있어, 대부분의 뉴요커도 그 존재를 모를 만큼 공원 이용자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수위가 낮을 때만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720m의 긴 선과 저수지에 큰 흥미를 느꼈고, 이 선의 존재를 부각할 수 있는 구조물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작품 제목인 ‘숨은 선(Hidden Line)’은 물론 저수지의 댐을 의미한다. 그 위에 다섯 가지 유형의 파빌리온을 배치해 숨겨져 있던 선을 디자인의 큰 골격으로 활용했다. 버려지다시피 잠겨있던 거대 기반 시설을 뼈대로, 우리의 디자인은 비교적 미미한 간섭을 통해 720m의 선을 전혀 새로운 공간으로 재인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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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가 낮을 때의 ‘숨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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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선’에 자리한 다섯 가지 유형의 파빌리온

 

 

일 년 중 서너 달 정도 저수지의 수위가 낮아질 때 모습을 드러내는 댐은 이용자의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원의 그 어느 공간보다 강력한 경험을 전달하는 축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용자는 그동안 관망의 대상이기만 했던 거대한 열린 공간, 즉 저수지 한가운데에서 녹지와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조망하게 된다. 센트럴파크에서 가장 독특한 이 산책로를 통한 경험은 다섯 가지 유형의 파빌리온―tilted, quiet, sky, open, floating room―을 통해 더욱 풍성해진다.

 

수위가 낮은 기간을 제외하면 선은 물 아래로 잠기고, 파빌리온들은 수면 위의 점선이 되어 육지로부터 격리된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선의 존재를 암시하고 맨해튼의 스카이라인과 병치되며 센트럴파크의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플로팅 파빌리온은 다른 네 유형과 기본적인 형태, 크기, 재질을 공유하는 또 다른 유형의 파빌리온으로, 물 위를 떠다닐 수 있는 구조체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등장하는 호수 위의 사찰과 같이, 저수지의 수위가 높을 때 다른 파빌리온으로의 접근은 이 플로팅 파빌리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때 파빌리온들은 실제 거리상으로도 맨해튼에서 가장 외딴 장소이자 가장 큰 오픈스페이스를 가진 공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붐비고 혼잡한 도시 뉴욕에서 저수지 위의 점들이 가장 고립되고 외로운 장소가 된다.


우리는 전에 없던 새로운 공간을 디자인했다기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장소의 매력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 수 있을지, 그 방안을 제시했다. 순천 미술관 프로젝트는 대상지의 물리적 요소를 직접적으로 디자인에 포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시의 흐름이 관입되어 공간을 완성한다는 점에서 대상지와 디자인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작업의 시작이자 뼈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튜디오 MRDO_ 순천 아트월

순천 아트월(Sunchon Art Wall)은 ‘순천예술광장 국제건축공모전 2016(Suncheon Art Platform International Competition 2016)’에 도시 전문가 송민경·김유진, 조경가 조용준, 건축가 지강일·김남주와 함께 참여한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먼저 형태적으로 경계를 강조했다. 도시와 미술관 사이에 세워지는 ‘두터운 경계’가 새롭고 독특하면서도, 이 장소에는 그런 새로움이 매우 당연한 제스처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순천 아트월은 ‘벽wall’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분리나 차별화가 아니라 대상지와 도시, 예술과 일상,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대상지와 도시: 첫 다이어그램에서부터 이 디자인이 전적으로 대상지의 맥락에 반응한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대상지의 경계를 따라 선형으로 계획된 매스들을 주변 도시 조직의 연장으로 보았고, 중앙의 비워진 광장 역시 주변 오픈스페이스가 연속되어 형성된 공간이라고 정의했다. 대상지 주변에 오픈스페이스를 제공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은 아마도 중앙에는 건물을, 가장자리에는 공개 공지를 배치하는 형태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정확히 반대되는 형태인 중정형 배치가 대상지의 가장자리를 주변 도시에 포함시키고 비워진 중앙 광장을 보다 강력한 성격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작동시키고자 한 우리의 의도에 부합하는 방식이었다.

 

예술과 일상: 연속된 프레임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두터운 경계’ 구조는 도시와 중앙 광장 사이의 물리적·시각적 연결성을 향상해 예술과 일상 활동의 흥미로운 혼합을 유도한다. 사람들은 거리의 낙서와 마주치듯 도시를 거니는 동안 미술관에 설치된 작품들과 조우한다. 대중과 유리된 순수 예술, 그리고 그것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이러한 일상적 경험을 통해 도시와 좀 더 적극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월(wall)을 통해 우리가 실제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열림’이고, 이 열림은 ‘도시에 열려 있는 문화 시설’뿐만 아니라 ‘일상에 열려 있는 예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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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바라본 미술관

 

과거와 현재: 순천 구시가지에는 옛 성벽을 비롯해 사대문, 교차로, 다양한 형태의 필지 등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이러한 도시적·건축적 유물은 순천이라는 도시의 역사적 유형을 보존하고 관찰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현대 개발 패턴을 반영하는 블록 유형을 사용함과 동시에 옛 순천 성벽의 형태를 차용했다. 여기서 순천의 옛 성벽(old Suncheon wall)과 새로운 예술 장벽(new art wall)은 강한 대구를 이루며, 과거와 현재를 개념적으로 연결한다.

 

그밖에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2015) 출품작 역시 도시와 세운상가가 만나는 수많은 교점node이 디자인의 주요 골조였고, ‘세종대로 역사문화공간 설계공모’(2016)의 출품작 ‘서울 연대기’에서도 서울이라는 도시와 대상지에 존재하는 수평적 레이어가 설계의 가이드라인이었다. ‘미래의 새로운 아웃라인(Plotting New Outline for the Future, 2017)과 ‘서울 어반디자인 공모전’(2013) 출품작인 ‘하이퍼 랜드스케이프(Hyper Landscape)’에서는 대상지의 능선과 골짜기가 작업의 뼈대가 되어 지형이라는 물리적 현황이 디자인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대상지의 맥락이 결과에 크게 반영되는 방식의 작업에서 설계 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면, JCFO의 작업에서는 설계 과정이나 이유에서 당위성을 찾기보다는 최상의 결과 그 자체를 내기 위해 노력한 기억이 많다. 어떠한 공간에서 살고 싶은지, 그곳을 어떻게 디자인할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사실 대상지의 맥락이 철저하게 반영된 공간이라기보다 나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으면서도 공간적으로 매력적인 곳이다. 왜 그곳에 연못을 두는지, 왜 여기는 복층이고 저기는 단층인지, 왜 그곳에 천창을 뚫는지, 왜 그런 타일을 쓰는지, 별다른 논리 없이도 공간이 그것을 사용할 나에게만 만족스럽다면 성공적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 소개할 JCFO의 작업에서도 맥락에서 비롯된 논리보다는 의뢰인들의 요구 사항과 공간의 심미성이 디자인의 가장 큰 이유이자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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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타오푸 센트럴파크 프로젝트의 콘셉트는 ‘새로운 자연’으로, 타오푸라는 새로운 도시가 필요로 하는 현대적 의미의 자연을 재구성하는 것이 그 목표다.

  

JCFO_ 상하이 타오푸 센트럴파크

상하이 타오푸 센트럴파크(Shanghai Taopu Central Park)는 중국의 신도시 상하이 타오푸 스마트시티의 기반 시설로, 건설과 동시에 실시 설계가 진행 중인 면적 약 1km2의 대형 공원이다. 프로젝트의 콘셉트는 ‘새로운 자연(New Nature)’으로, 타오푸라는 새로운 도시가 필요로 하는 현대적 의미의 자연을 재구성하는 것이 그 목표다. 절토와 성토를 통해 구성되는 구릉과 골짜기는 움직이는 구름, 흐르는 물과 같은 자연을 닮았다. 또한 동양의 붓글씨나 춤사위 같이 전통적이고 문화적인 맥락과도 연결되는 형태로 디자인되었다. 나는 공원 전체의 콘셉트와 구성이 완성되어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디자인이 시작되는 시점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디자인의 내러티브나 개념을 만들기보다는 디자인된 공간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경험을 제공할지에 초점을 맞추며 작업했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언덕과 골짜기’라는 큰 틀 내에서 구체적인 동선과 마운드 구성을 시작으로, 각종 시설물을 디자인하고 이를 도면에 옮기는 작업을 약 1년에 걸쳐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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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 플레이(Water Play)

 

일곱 개의 놀이 시설을 디자인했는데, 모두 주변의 구릉 지형에 반응하도록 설계해야 했다. 이는 오히려 경사지를 적극 활용한 놀이터를 디자인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이었다. 경사도는 이용자의 행태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비워진 평지가 불특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다면, 경사지는 기어오르기, 매달리기, 미끄럼타기, 조망하기, 올라타기 등 조금 더 구체적이면서도 활동적인 행태를 끌어낸다. 이 공원의 놀이 시설은 모두 그러한 행태를 더욱더 적극적으로 끌어내도록 설계되었으며, 그중 몇몇은 일상에서는 하기 힘든 공간적 경험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슬로프 플레이(Slope Play)는 언덕 한편에 놀이 시설이 삽입된 다른 놀이터들과는 달리 언덕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길이 놀이 공간이 된다. 앤털로프 캐년Antelope Canyon같이 곡선형의 켜가 층층이 쌓인 좁은 골짜기를 통과하는 체험은 특히 어린이들에게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타오푸 센트럴파크는 총 열 개 블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남쪽 네 블록의 지하에는 각종 문화·상업 시설이 입지한다. 이러한 시설과 오픈스페이스를 어떤 방식으로 연결하는가 또한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지상과 지하를 잇는 각종 구조물과 선큰 플라자는 이용자에게 그곳이 입구임을 강하게 인지시키며 활동의 거점으로 작동하게 한다. 그중 몇 개의 공간에는 보다 역동적인 공간감을 더하기 위해 전형적인 수직 동선의 입면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앉음벽을 제안했다. 선클 플라자의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앉음벽의 폭이 점진적으로 넓어져 상층 경관과 지층 구조물이 흥미로운 방식으로 섞인다. 이러한 방식을 바로 뒤이어 진행한 ‘상하이 슈헤완 도시 공원(Shanghai Suhewan Urban Park) 공모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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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슈헤완 도시공원 공모전’의 스터디 디자인 안. 도시의 전형적 격자 구조와 대비되는 곡선 형태의 디자인이 이 지역의 새로운 아이콘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데, 이 설계의 장점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개념이나 맥락이 아니라 공간 자체다.

 

JCFO_ 상하이 슈헤완 도시 공원 공모전

이 프로젝트는 2017년 차이나 리소스(China Resources)라는 중국의 국영 개발 기업이 주최한 지명초청 설계 공모로, JCFO는 세 팀 중 하나로 초대받았다. 이 디자인은 JCFO 내부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상업 시설 면적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클라이언트의 선택을 받지 못해 스터디 디자인에 그친 안이다. 대상지는 약 5만m2로 그리 넓지는 않지만, 슈헤완이라는 상하이의 행정 중심지 한가운데에 있어 상당한 잠재력을 지닌 곳이다. 클라이언트는 이 오픈스페이스가 대규모 상업시설로 개발될 곳이기 때문에 주변의 랜드마크로 작동함과 동시에 강력한 정체성을 가진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주변 상업 시설과 블록을 연결하는 지하 공간과 보행교를 반드시 설계해야 했고, 방문객의 자연스러운 유입을 고려한 수직 동선 설계도 필요했다. 또한 2차선 도로로 인해 두 덩이로 나뉜 대상지에는 역사적 건축물을 비롯해 존치해야 하는 시설물이 다수 있어 제약 사항이 상당히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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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푸 센트럴파크에서 선큰 플라자를 디자인할 때 이용했던 언어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점진적으로 넓어지고 좁아지는 앉음벽의 폭이 대상지 전체를 더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보이게 했다.

 

나는 클라이언트가 무엇보다도 ‘일상의 공간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공간’을 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적이고 차분한 디자인 언어는 처음부터 배제하며 작업을 시작했다. 차이나 리소스라는 클라이언트에게 이 공모전 프로젝트에서만큼은 예산에 대한 고려가 우선순위가 아니기에 다소 화려하고 역동적인 디자인을 실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먼저 존치해야 할 시설을 피해 큰 동선과 디자인의 기본 골격을 만들었다. 보행교와 지하 공간이 연결되는 지점 또한 우리가 임의로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디자인의 큰 형태를 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스튜디오 MRDO의 작업에서도 주변 맥락이 디자인의 큰 방향을 결정했지만, 그 경우에는 설계의 개념 및 전략과 직접 연결된다는 점에서 두 작업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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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의 기둥을 뒤집어진 언덕 형태로 디자인했는데, 이는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공중에 떠 있는 섬들처럼 비일상적 체험을 제공하는 주요 구조물이다.

 

슈헤완 공원의 맥락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수용해야 하거나 배제해야 할 대상일 뿐 그것이 개념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디자인이 완성된 후에야 만들어낸 피치카토(pizzicato, 바이올린 등의 현을 손끝으로 튕겨 연주하는 기술)라는 개념은 도시의 전형적 격자 구조와 대비되는 곡선 형태의 디자인이 이 지역의 새로운 아이콘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설계의 장점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개념이나 맥락이 아니라 공간 자체다.

 

타오푸 센트럴파크에서 선큰 플라자를 디자인할 때 이용한 언어를 이곳에서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점진적으로 넓어지고 좁아지는 앉음벽의 폭은 대상지 전체를 더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보이게 한다. 지하 레벨은 크게 네 덩이의 선큰 플라자와 지하도로 구성되는데, 각각의 선큰 플라자는 대상지 주변의 교점이나 주요 시설물을 향하고 있다. 리듬감 있게 변화하는 지하 공간의 폭은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 음악의 선율처럼 극적인 시퀀스를 전달한다. 보행교 역시 지하 공간의 형태와 흐름에 맞추어 머물고 통과하는 장소의 조합을 고려해 디자인했다. 특히 다리의 기둥을 뒤집어진 언덕 형태로 디자인했는데, 이는 영화 ‘아바타(Avatar)’에 나오는 공중에 떠 있는 섬들처럼 비일상적 체험을 제공하는 주요 구조물이다. 지상 레벨과 선큰 플라자가 연결되는 곳은 입구 광장으로, 나머지 공간은 잔디광장이나 정원으로 조성하여 도시 광장과 근린공원의 기능을 함께 수행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이 프로젝트는 조경가로서 접하기 쉽지 않은 입체적 공간 설계를 다루어 볼 수 있던 좋은 경험이었다. 무엇보다도 슈헤완 공원은 얌전하고 정적이었던 과거의 내 작업에서 완전히 벗어난 디자인 언어를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디자이너의 정체성

설득 대상에 따라 명확히 달라지는 디자인을 보면 확실히 결과물의 주인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클라이언트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의뢰인의 취향이 제아무리 제각각이라 한들 이를 존중하고 만족시키려 노력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디자이너는 다양한 요구를 들어줄 수 있다. 그러나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 혹은 고유성은 남과 자신을 구분 지어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아직 그 경지를 경험해 본 조경가가 아니기에 다소 막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좋은 디자이너란 자신만의 뚜렷한 정체성 안에서 다양한 색을 보여줄 수 있는 디자이너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의 위치를 설계 인생 위에 놓고 보면 아직 사춘기 같은 단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 외부의 요구에 휘둘릴 때가 많아서인지 그런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디자이너의 소임을 다했다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조경을 안지 이제 10년 남짓한 나는 자신만의 확고한 디자인 정체성 혹은 일관성을 확보한 디자이너는 분명 아니다. 내가 중심에 있으면서도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수 있는 날이 오기나 할까 싶으면서도 이 일을 계속해서 하다 보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언젠가 자연스레 다가올 일인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어떠한 중심, 어떠한 정체성을 가진 디자이너가 될 것인가다. 지금의 미숙한 단계를 벗어나려 성급히 애쓰기보다 아직은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분야를 접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내가, 우리가 좀 더 확고히 흥미를 갖고 집중할 만한 방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방향이 나와 스튜디오 MRDO의 색을 좀 더 독특하게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완성된 작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닐지라도 디자인의 방법론과 색은 물리적 결과보다도 더 가치 있는 우리만의 무형 자산으로 남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세 달간의 연재를 마친다(연재 끝).


전진현은 스튜디오 MRDO(Studio MRDO)를 공동 설립해 조경뿐 아니라 더욱 확장된 영역에서 디자인을 실험·연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과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GSD 입학 전 신화컨설팅에서 근무했고, 현재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조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보더스: DMZ 지하 대중목욕탕(Borders; Korean DMZ Underground bath house Competition), 세종대로 역사문화공간 설계 공모, 서울 도시 디자인 공모전 등 다수의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www.studiomr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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