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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땐뽀걸즈, 버티는 청춘에 관하여
  • 환경과조경 2017년 11월

민족 최대의 ‘연휴’ 마지막 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해외로 나갔는지 ‘도떼기시장’이 되었다는 인천공항의 모습을 뉴스로 보면서, 항공 티켓 한 장 발 빠르게 구하지 못했다고 한탄하며 휴일을 마무리하던 중, 약속 장소인 홍대 근처로 향했다. 정면에 보이는 건 헌팅천국으로 불리는 ‘쏠로포차’. 메르스포비아도 비켜갔다는 청춘사업에 이곳은 여전히 젊은이들로 바글바글. 그들의 젊은 열기가 부럽기도 하면서 얼른 이 시끄러운 곳을 뜨고 싶은 기분이다. 오랜만의 상상마당. 그날 모인 ‘언니들’은 돌아가며 홍대 일대와 얽힌 무용담을 꺼내들지만 10년이 훌쩍 넘은 일들이다. 머쓱해진 어제의 용사들은 서둘러 어두운 영화관으로 몸을 옮겼다. 

 

다큐멘터리란 것만 알고 보기 시작한 영화는 ‘땐뽀걸즈’. 올해 4월 KBS 스페셜로 방송된 거제여상 댄스스포츠반(이하 땐뽀반) 학생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다시 편집한 작품이란다. 따뜻한 성장 영화나 성공한 도전기이겠거니 짐작했고, 전형적인 스토리에 쉽게 감동받지 않을 작정으로 삐딱한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했다. 

조선소의 도시, 거제도 풍경을 스치듯 지난 카메라는 빠르게 경연 대회에 참가한 땐뽀반 아이들과 이규호 선생을 비춘다. 그리고 다시 몇 달 전으로 돌아간다. 수능철이 되면 그 또래 학생들이 모두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것처럼 온 나라가 떠들썩하지만 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인문계 고교생에게는 입시가, 실업계 고교생에게는 취업이 지상 과제이련만 지금 이 아이들에게 소중한 것은 댄스스포츠다. 이들은 댄스스포츠를 가르치는 교사와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며 경연 대회를 준비한다. 아니, 거의 반말에 가까운 소녀들의 말을 50대의 선생이 자연스럽게 받는다. 지난 6월호 이 지면에서 윗사람은 공공연하게 반말을 하고 아랫사람은 높임말을 하면서 실질적인 불평등을 되먹임 하는 한국 사회를 진단하며, 아랫사람이 반말을 할 수 있어야 몸에 밴 순종의 문화를 걷어낼 수 있다는 김광식 교수의 주장을 소개한 적이 있다.(각주1) 그러니까 땐뽀반 학생과 교사는 눈높이를 맞춰가며 수평적 관계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카메라는 술도 먹고, 수업도 땡땡이치는 아이들을 불량 청소년이나 문제아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화도 하지 않는데,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권위 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교사는 술을 마신 아이들을 야단치기보단 걱정하며 숙취해소제를 건넨다. 연습이 끝나면 선생은 아이들에게 천 원, 이천 원 버스비를 쥐여주고, 기다리는 동생들에게 나눠줄 빵을 사 손에 들려 집으로 들여보낸다. 그 집 안까지 카메라가 따라 들어가 가정사를 속속들이 들추지 않아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소녀들에게서 느껴지는 위태로움은 거제도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이 영화의 이승문 감독은 ‘거제시의 조선업 몰락’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기 위해 거제도에 내려갔다가 거제여상의 땐뽀반을 우연히 만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한 소녀가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에게 왜 조선소를 그만뒀냐고 웃으며 묻는다. 다른 일이 해보고 싶었냐고. 아버지는 묵묵히 밥을 먹는다. 그리고 조선소에 취업할 지 묻는 딸에게 니가 원한다면, 이라고 대답한다. 또 한 소녀는 조선소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로 떠나는 아버지와의 마지막 저녁 식사에 가지 못한다. 늦어진 땐뽀반 연습 때문인데, 원인 제공자인 친구와 갈등을 빚는다. 그 친구는 생계를 위해 땐뽀 연습 대신 아르바이트를 가야 한다. 선생님은 그 친구의 어려운 집안 사정을 모르고 춤을 배우자고 했다고 미안해한다.

산업 구조 변화는 우리 도시와 가정, 그리고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다. 그 변화가 청춘들에게 그대로 투영된다. 안전판이 부실한 사회에서 학생들이 흔들리는 이 시기를 무사히 통과하기를. 이 감독은 말한다. “사실 옆에서 지켜보면 아이들이 많이 위태롭다는 걸 알 수 있다.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실제로 촬영하는 동안에도 아이들 주변에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이 아이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 위태로운 시간을 붙잡아서 버티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각주2) 이아 이들에게 그 누군가는 이규호 선생이고 댄스스포츠다. 갈등과 화해, 걱정과 희망의 시간을 통과한 소녀들은 반짝이는 옷을 맞춰 입고 지역의 큰 문화예술홀에서 공연을 하고 입상도 한다. 영상 편지로 사소한 일에서 느꼈던 감사를 표현하는 아이들, 그 모습을 보며 감동이 번지는 선생의 얼굴이 화면 가득 잡힌다.

경연 대회가 끝나도 학생들을 둘러싼 현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 꺼내보며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추억은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사회 변화가 일으키는 파동을 슬기롭게 넘기는 것은 어른들, 우리 모두의 몫이 아닐까.

 

어두운 영화관을 빠져 나오니 바깥은 불야성이다. 뜬금없지만 이곳의 청춘도 한결 가깝게 느껴진다.

 

1. 김정은, “말맛과 글맛”, 『환경과조경』 2017년 6월호, p.143.

2. 서지연, “땐뽀걸즈 이승문 감독 ‘결국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IZE Magazine, 2017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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