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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도큐멘테이션
  • 환경과조경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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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운 건지 슬픈 건지 모르겠지만, 책을 만드는 나도 좀처럼 책을 읽지 않고 있다. 책보다 더 최신이고 유용하며 무엇보다 흥미를 돋우는 것들이 너무 많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시시각각 구미를 당기는 콘텐츠가 올라오고, 넷플릭스와 왓챠 같은 OTT 서비스에는 볼거리가 차고 넘친다. 그러다 문득, 손바닥만 한 화면 속 무한한 세계가 공허하고 LTE의 속도감에 급 피로해질 때 그제야 책에 눈을 돌린다. 일단 클릭하게 만드는 광고나 추천 영상이 없는 책 속 시간은 스마트폰보다 한층 느긋하게 흐른다. 클릭, 재생, 공유로 바빴던 손가락에겐 때에 맞춰 종이를 넘기는 단순 업무가 주어진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촉감이 오랜만이라 어색하기도 하지만 곧 나만의 속도로 활자와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뇌가 말랑하던 어린 시절부터 스마트폰을 쓰지 않아서인지 화면을 통해 무언가를 읽고 이해하는 일은 영 더디기만 하다. 돌고 돌아 책의 영향권 안에 다시 들면 진화가 덜 된 호모스마트쿠스2에서 간만에 제 기능을 하는 호모사피엔스가 된 기분이다.

 

도큐멘테이션1은 디자인 스튜디오 loci10(2007~2017)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묘한 매력을 가졌다. 누드 사철 제본으로 실로 엮인 종이의 단면이 책등에 그대로 드러나고, 모든 페이지는 180도로 시원하게 펼쳐진다. 600쪽이 만드는 두께감에 비해 의외로 가볍고 재생용지의 거친 듯 보드라운 촉감과 구수한 냄새는 친숙하다. 책의 물성을 극대화한 외관에 비해 구성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SNS를 닮았다. “먹고 노는 일, 일에 대한 생각 등이 사용자가 올리는 순서대로 게재”3된 페이지를 죽 나열하면 하나의 인스타그램 피드처럼 보일 것이다. 누군가의 SNS 계정을 통해 그사람에 대해 대강 알 수 있듯이 특별한 구분 없이 지면에 포개진 사진들은 조경가 박승진의 일과 일상을 예사롭게 드러낸다. 도면, 모형, 작업 테이블, 출장과 여행 중 만난 소소한 풍경은 감각적이면서도 일상적이다. 그에 반해 어둡고 잔뜩 흔들린 사진, 공사 현장, 출장 중 묵은 숙소, 특별할 것 없는 거리 풍경은 흔히 볼 법한 사진이다. 박 소장이 난생처음 퍼머를 하며 찍은 셀피나 (그를 패닉 상태에 빠뜨린) 18대 대통령 개표 방송 화면은 책보다는 SNS와 어울린다.


대부분 사진이고 실린 글을 다 합쳐도 30쪽에 불과한 책쯤이야. 금세 읽겠다는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오래 잡혀 있었다. 박승진의 글은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어서 찬찬히 보게 되는 그의 작품과 닮아 있다. 글에 종종 등장하는 목욕탕과 맥주처럼 소소한 만족감을 주는 문체에 정이 갔고, 자연과 땅에 대한 고민의 말들 앞에서는 죽죽 밑줄을 긋고 싶었다. 속도를 내지 못한 데는 책의 생김새도 한몫했다. 어느 페이지든 활짝 펼쳐지니 종이 한 장 가득 채운 사진

에 눈이 좀 더 오래 머물렀다. 사진에 대한 설명은 맨 뒷장의 색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일일이 쪽수를 확인하며 사진과 정보를 대조하는 일은 아날로그적 감각을 자극했다. 사전을 보듯 종이를 뒤적이는 경험은 수고스럽지만 싫진 않았다. “무의미한 과장과 무책임한 소거가 동반되지 않은 사진들은 시간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막 시작한 프로젝트, 마무리에 접어든 프로젝트, 기본 설계를 다시 조정해야 하는 프로젝트, 준공된 프로젝트, 준공 후 점검하는 프로젝트. 저마다 다른 시제를 가진 수 개의 현장을 동시에 다뤄야 하는 고단함, 하나의 공간이 완성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책장을 넘기는 느린 손을 통해 어렴풋하게 체감됐다.


막연한 긍정 혹은 암울한 이야기로 종이책의 미래를 점치는 일은 이제 조금 촌스러운 유난인지도 모르겠다. 세계적인 아트북 출판사 슈타이들Steidl의 대표 게르하르트 슈타이들은 어반라이크(Urbanlike)와의 인터뷰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관계는 논쟁이 아니라 논의에 가깝다고 말했다.4 책은 아날로그의 산물이지만 정교한 만듦새를 구현하거나 홍보를 하는 데 디지털 기술의 덕을 크게 보고 있으므로 공존에 가깝다는 것이다. 영상으로만 전할 수 있는 콘텐츠가 있듯 책만이 주는 이야기와 경험이 있다. 이번 호에는 지난 7월 오픈과 동시에 조경가들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열렬히 채운 브릭웰(Brickwell) 정원이 실렸다. 소식을 뒤늦게 전하는 아쉬움은 뒤로 하고, 인스타그램 속 공간이 종이를 통해 색다르게 각색되길 바라본다. 460×275mm의 지면에 놓인 박승진 소장의 다정한 글과 일련의 시퀀스로 배열된 사진들이 어 이거 봤던 건데하는 독자에 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기를.

 

각주 정리

1. 박승진, 도큐멘테이션, design studio loci, 2018.

2. 스마트 시대의 기기와 서비스를 주도적으로 사용하며 일과 삶의 영역을 변화시키는 신인류를 뜻하는 말

3. 김모아, “조경가의 일과 일상 사이”, 환경과조경20184월호, p.140.

4. 어반라이크40, 어반북스, 2020,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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