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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아무튼, 잡지
  • 환경과조경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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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당신에게는 그런 한 가지가 있나요?’ 에세이 시리즈 아무튼은 다양한 사람이 저마다 매료된 한 가지를 한 권의 책으로 소개한다. 1인 출판사 세 곳(위고, 제철소, 코난북스)이 따로, 또 같이 펴내는 이 책은 각 출판사가 추구하는 방향에 따라 필자도 주제도 가지각색이다. 피트니스, 서재, 망원동, 스웨터, 로드 무비, 일본 철도 등 이쯤 되면 다음 나올 책은 무엇을 다룰지 궁금해진다. 각기 다른 주제는 한 사람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데 일조했다는 공통점으로 묶인다. 그래서 아무튼의 부제는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과 문화를 공유하고 전시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흐름 속에서, 이런 주제의 글들을 묶으면 좋은 시리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기획 의도로 볼 때, 이 책의 정체성은 가벼운 정보서라기보다 취향에 관한 소소하고 사적인 기록물에 더 가깝다. 각 책의 저자는 본인이 쓰는 주제의 전문가가 아니다. 아무튼, 피트니스는 십여 년간 폭식과 폭음을 일삼던 인권 운동가가 살기 위해운동을 결심하면서 점점 운동의 즐거움을 알아간다는 내용이고, 서재 편은 목수가 저자이며, 심지어 게스트하우스 편은 약사가 쓴 책이다.

 

이 시리즈에 입문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아무튼, 잡지였다. 한 독립 서점에 들러 여유롭게 책 구경을 하던 중, 서가 한 칸에 나란히 나열된 책들을 발견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은 잡지라는 글자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탓이었다. 스스로에게 읽혀야만 할 것 같은 모종의 의무감이기도 했다. 잡지가 생산되는 주기에 삶의 박자를 맞춰가며 한 달에 한 번씩 노동의 집약체를 두 손에 받아 들었을 때, 서점 한 구석을 차지하는 잡지 코너에 누가 무슨 책을 읽고 있나 무심한 듯 곁눈질했을 때, ‘요즘 잡지 어렵지 않냐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웬수 같은 친구 놈 앞에서 괜히 발끈했을 때, 잡지의 무게는 얼마큼 인지 잡지가 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를 (답은 빤하니 어디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궁금해 했다. 취미가 독서인 사람은 여럿 봤어도 잡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잡지를 다루는 책이라니. 소설도, 시도, 만화도 아닌 어떻게 잡지인 것인지, 어떤 사정이 들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했는데 잡지 읽는 거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질문하는 사람이 잡지를 즐겨 읽는 이가 아니라면 , , 그렇군요라는 식의 슴슴한 대답이 돌아온다. 잡지 읽기가 취미라는 저자 황효진은 상대방의 이러한 미적지근한 반응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잡지는 저자에게 오랜 서랍장 같은 존재다. 만화 잡지 나나로 입문한 순정 만화의 세계, 패션 잡지에 딸려 오는 화장품으로 어설픈 화장을 해 보던 시절, 각양각색의 일본 잡지에 반해 일본어를 더듬더듬 공부하던 기억 등, 잡지를 통해 차곡차곡 쌓아 올린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 대부분을 공감하기 힘든 시대가 되어 버렸다.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도나도 잡지를 읽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나만 읽는 시간대에 놓인 저자는 퍽 당황스럽다. 그는 사라져가는 잡지를 보면서 씁쓸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다가도, 잡지에 대한 책을 쓰자니 잡지를 읽는 이유를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그래서 잡지에 얽힌 에피소드 사이사이 잡지를 읽는 나름의 이유(속에 감추어 둔, 잡지를 읽었으면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 이유 중 하나인즉슨 좀 더 제대로 살고 싶어서란다. 잡지를 안 보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닌가? 벌써부터 발끈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는 잡지에 있지도 않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속셈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잡지가 애당초 꼭 필요한 것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팩트를 짚고 넘어가며 잡지의 존재 이유를 대변한다. “나는 그게 꼭 있어야 돼?’라는 말이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망친다고 생각한다. 그게 없어도 살 수 있다. 그러나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무언가는 아니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지만, 다만 있으면 더 좋은 것들, 더 알면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왜 기본만 챙기며 살아가야 할까. ‘가성비의 세계에서 벗어나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닌 무언가를 보고, 사고, 해보며, 우리는 조금 더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잡지의 무게를 가늠하니 조경의 무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인 산업의 규모를 떠나 필요성의 기준에서 볼 때 잡지의 무게와 조경의 무게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조경을 공부하고 조경 전문지 기자라는 포지션에 놓인 나는, 멀쩡한 길을 놔두고 괜히 보도 경계석 위로만 걸어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알아챘어야 한다. 꼭 필요한 것에서 살짝 비켜난 길 위로 아슬아슬하게 걸어갈 거라는 걸.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만은 아닌 두 개의 중간에 걸쳐 있는 이 애매한 자리는 종종 약간의 씁쓸함을 삼키게 한다. 잡지에 실을 프로젝트를 찾다 빈곤한 조경 작품 수에 비해 차고 넘치는 건축 작품을 보면서, (작품은 훌륭하지만)압도적인 건물이 선심 쓰듯 제공한 공간에 마련된 아모레퍼시픽 본사 정원을 바라보면서, 취재를 준비하던 부천아트벙커 B39의 조경 계획이 무산됐다는 소식을 알고 나서, 조심스럽게 조경의 위치를 헤아렸다. 여유가 있으면 하고, 없으면 과감히 포기해버리는, 생략 가능한 것들의 목록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번 달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를 다루며 아무튼, 조경이라는 기획 목록에도 없는 책의 이름을 떠올렸다. 대상지에 일어난 미미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보며, 좋은 공간을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청년들을 인터뷰하며, 잡지든 조경이든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든 공간이든 더 나아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잡지가 삶에 한 결을 더 해 좀 더 제대로 살게 해 주는 것이라면, 공간에 한 결을 더해 좀 더 제대로 된 공간으로 일구는 것이 조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헛헛한 마음을 조금 채웠다.

 

각주 1. 황효진, 『아무튼, 잡지』, 코난북스, 2017,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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