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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공간은 어떻게 장소가 되는가
  • 환경과조경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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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가 다가오면 시험만큼이나 긴장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한 학기의 운명을 좌우하는 수강 신청 기간. 학점이 후한 수업이나 팀플이 없다는 교양도 좋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1교시 수업을 탐내곤 했다. 당시만 해도 아침형 인간에 가까웠던 나는 기왕이면 일찍 하루를 시작해 단 일 분이라도 빨리 학교에서 벗어나겠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운 좋게 수강 신청의 전쟁에서 썩 괜찮은 승리를 거둔 난 오후 세 시면 캠퍼스를 탈출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됐다(그래봤자 설계 스튜디오 과제 때문에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 했다).

 

시간만 많고 돈은 없는 대학생의 발걸음은 뻔한 루트를 따라 돌았다. 경비 없이 여행할 수 있는 낯선 동네를 탐색하거나 티켓값이 만만한 전시회에 들락거렸다. 주머니 사정이 괜찮은 날에는 영화관에 갔다. 한 잔에 오천 원가량 하던 아메리카노와 비교하면 영화 감상은 가성비가 좋은 취미 활동이었다. 더울 땐 시원하고 추울 땐 따뜻하고, 무엇보다 설계 스튜디오 하나를 마무리할 때마다 바닥을 드러내는 머릿속을 영화의 무언가가 채워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컸다. 서랍 한구석에 쌓인 영화표가 설계에 도움이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이 보다 보니 영화가 좋아졌다. 전공 때문일까 유독 영화의 배경에 눈이 갔고, 한때는 그런 풍경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도 싶었다. 갑자기 영화 이야기를 꺼내든 첫 번째 이유는 최근 그 꿈을 어설프게나마 이루게 됐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영화 공부를 시작한 친구가 20분가량의 단편 영화를 찍는다며 도움을 요청해왔다. 기껏해야 짐을 옮기거나 심부름을 하는 허드렛일인 줄 알았는데, 그는 내가 설계를 배웠다는 이유 하나로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미술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다. 덕분에 뜻하지 않은 책임감에 허덕이며 주말과 저녁 시간을 자진해서 내어놓아야 했다. 가구와 소품 배치 위주의 실내 공간을 꾸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야간 야외 촬영이 문제였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말싸움을 한 두 주인공이 갈등을 해소할 겸 맥주 한 캔을 나눌 장소가 필요했는데, 벤치와 테이블이 있으며(주인공의 키, 앉은키 모두에 어우러지는 적당한 높이어야 한다) 뒤로는 녹지가 적당히 풍부하고(주인공은 낡은 아파트에 살기에 잘 관리된 느낌을 풍기면 곤란하다)많은 조명을 설치할 필요가 없이 밝기가 적절하며(테이블

 

근처에 가로등이 있으면 역광이 진다)인적이 드물어야 했다. 분위기가 그럴듯한 어느 골목은 녹지가 지나치게 잘 관리되어 있어 좋은 동네라는 느낌이 물씬 났고, 가로등이 많은 놀이터에는 저녁 산책을 즐기러 온 사람도 많았다. 편의점 앞 테이블을 찍자니 촬영 감독이 차도 한가운데서 서 있어야 할 판이였다.

 

결국 찾아간 곳이 아파트 내 녹지였다. 심심하게 심긴 수목과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조명, 그 아래 어디에나 있을 법한 테이블과 벤치, 뒤를 스쳐 지나는 몇몇 주민과 고양이까지. 틀에 박힌 지겨운 풍경이 프레임에 담기자 새삼 정겹게 느껴졌다. 줄곧 다세대 주택에 살아온 내겐 조금 부러운 모습으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더불어 이 정도의 녹지와 벤치와 테이블과 조명이면 밤에도 즐길 수 있는 휴게 공간으로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로케이션 헌팅 중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한 수경 시설이나 독특한 모양의 퍼걸러가 보이는 곳은 번번이 후보에서 제외됐는데, 일상적 이야기를 담던 뷰파인더에 그러한 공간이 잡히는 순간 극의 흐름이 틀어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유독 그런 공간에 오가는 사람이 적었던 걸 보면, 그 일상적 흐름이 뷰파인더 안에서 깨지는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짐작을 하게 된다.

 

영화 이야기를 시작한 두 번째 이유는 이번 호로 막을 내리는 시네마 스케이프에 대한 아쉬움과 고마움 때문이다. 영화 속 경관을 풀어낸 서영애 소장의 글은 여러 번 보아 익숙해진 영화를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들어주었다. 내겐 공간이 누군가의 경험과 기억으로 새로운 정서와 의미를 갖게 되며 비로소 장소로 탈바꿈한다는 사실1을 가장 흥미로운 방식으로 보여준 글이기도 하다. 영화와 조경의 경계를 리드미컬한 걸음으로 오가던 연재를 떠나보내며, 언젠가 조경과 또 다른 무언가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연재 필자를 발굴해 오겠다는 약속을 드리며 글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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