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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비밀기지 만들기
  • 환경과조경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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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이전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개중 또렷한 몇 가지는 조금 어둡고 비밀스러운 장소에 관한 기억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박스로 만든 집. 아빠가 어디서 커다란 냉장고 박스를 주워와 거실 한가운데 집을 만들어주었는데, 남다른 손재주로 꽤 그럴듯한 집을 만들었다. 문은 물론 커튼 달린 창도 있었다. 일곱 살의 나와 네 살배기 동생은 그 안에 쭈그려 앉아 소꿉놀이를 하거나 그림책을 만들었다. 또 다른 기억은 의자 밑에서다. 사촌 언니로부터 업라이트 피아노를 물려받았는데, 피아노를 치는 시간보다 피아노 아래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피아노 의자는 다른 의자에 비해 높고 널찍해서 엎드려 인형 놀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피아노에 대한 흥미가 시들해질 즈음 의자 딸린 식탁이 생겼다. 엄마는 식탁 의자 두 개를 적당히 떨어뜨려 그 위에 젖은 이불을 널어놓곤 했는데, 이불을 걷고 들어가니 또 다른 아늑한 공간이 펼쳐졌다. 환한 형광등 빛이 두툼한 이불로 필터링돼서 무섭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어두워 좋았다. 그 후로 한동안 식탁 의자 위에 이불 지붕을 만들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 놀곤 했다. 이외에도 숨바꼭질 할 때 장롱 안이나 긴 커튼 뒤에 몸을 숨기며 숨죽였던 순간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멀쩡한 집과 놀이터를 두고 왜 그렇게 좁고 어두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을까. 장소가 주는 특별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에 설레고, 뭔가 비밀한 일을 벌이는 것 같아 신이 났다. 이제는 옷장 안이나 미끄럼틀 아래로 숨어들지 않지만 카페의 구석진 자리를 찾거나 다락을 선호하는 습성이 그때의 흔적처럼 남아 있다.


이런 사소한 기억을 소환한 것은 비밀기지 만들기. 제목은 비장해 보이지만 실은 무진장 귀여운 책이다. 토관과 드럼통 사이에 앉아 멍 때리고 있는 남자애가 그려진 표지를 보자마자 훔치듯 집어들었다. (이 책의 진짜 귀여움은 비밀기지처럼 숨겨져 있다. 책을 구하면 커버를 잘 살펴보시라.) 책의 저자인 건축가 오가타 다카히로는 일본기지학회라는 단체를 운영하는데, 군사 요새가 아닌 유년 시절의 비밀스러운 놀이 공간을 연구하며 워크숍 등을 진행한다. 이에 관한 책 비밀기지 만들기는 비밀기지를 짓기 적합한 장소(주로 데드 스페이스)부터 재료, 위장하는 법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할 만한 (만화책 보기, 숙제 베끼기, 흙장난, 불장난 등 집에서 했다가는 큰 화를 면치 못할) 활동까지 알려준다. 설문 조사를 토대로 누군가 어린 시절 실제로 만들었던 비밀기지를 소개하는데, 소소한 추억을 상기시키는 것부터 진짜인지 믿기 어려운 것도 있다. 아파트 1층 베란다 아래, 우산 세 개를 겹쳐 만든 공간, 나무 위의 집을 보며 피식피식 웃다가 쓰레기봉투를 떨어뜨리는 긴 통로, 영화 괴물’(2006)에서나 봤던 대형 배수로 안을 보고는 설문 응답자의 진실성을 살짝 의심했다. 이런 데서 놀았는데 살아남았다고?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비밀기지에 대한 다카히로의 철학은 분명하다. 비밀기지를 만들며 친구와 힘을 합치는 법, 갖가지 실패를 경험하기에 유년 시절에 꼭 필요한 활동이라는 것. 특히 위험에 둔감한 아이들이 크고 작은 위험을 경험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어른들이 이러한 아이들의 놀이를 (적당히 모른 척하며) 기꺼이 도와주기를 독려한다. 어른에게도 나름 유용한 측면이 있다. 자신만의 공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법이니까. 구본준 건축칼럼니스트의 추천사처럼, 어린이로 되돌아가 꿈꾸던 비밀기지를 짓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책이다. “비밀기지 만들기는 전혀 재미없어 보이는 풍경 속에서 적당한 틈새를 찾아내고 그 속에 들어가, 그곳에서 익숙한 일상의 풍경을 조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주변 세상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재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힘이 아닐까.”2돌아보면 언제부턴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너무 곧이곧대로만 받아들여 왔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상상 속에서 나만의 비밀기지를 건설했다.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딴짓거리를 하고 싶을 때 몸을 숨길 수 있는 나만의 은신처! 엉성해 보이지만 꽤 그럴듯하다(부모님도 편집장님도 몰라야 하므로 구체적 장소는 밝힐 수 없다).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머리를 집어넣는 순간, . 그새 몸이 너무 커져 버린 걸 잊고 있었다.

 

*각주 정리

1. 오가타 다카히로, 임윤정·한누리 역, 『비밀기지 만들기』, 프로파간다, 2014.

2. 같은 책,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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