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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청오의 핀테스트] 관객과 관계 유청오 조경사진가 (blueophoto@naver.com)
입력 2020-08-27 19:04 수정 2020-08-2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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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의 시대다. 결국 한때가 될 것을 기대하지만 돌풍의 한 가운데인 요즘 심란한 소식에 연일 어지럽다. 어느 공원 한 가운데에는 하릴없이 뛰노는 마스크 속 아이들과 걱정스런 눈으로 쫒기 바쁜 부모들의 실랑이가 멀리서도 마냥 정겨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서로 간의 거리가 필요한 요즘, 서로의 간극은 필요한 만큼의 여백이 아닌 생을 위한 공백이 되었다.


누군가 사진구도에 대해서 물으면 공백이 아닌 여백을 강조하곤 한다. 스스로 지어낸 방법이다. 맥락을 벗어난 빈 공간은 공백으로, 잘 그린 수묵화의 빈 곳처럼 여운이나 내용의 맥락을 이어나가는 비어있지만 내용을 이어주는 곳은 여백이 된다.


여백은 구도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여백은 비어있지만 어떤 대상을 서로 잇는다. 대상(피사체)과 사진가, 사진과 사진가, 사진과 관객, 사진가와 관객 안에서 서로가 공명하는 한 여백은 비워져 있다. 한편으로는 채워져 있다. 어쩌면 채우는 것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니 서로를 이어줌으로써 무엇으로 될 수 있다고 여기는 편이다. 그러니 무엇이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두 가지 이상의 주체가 서로를 잇는 가운데의 빈 공간이 있으면 된다. 사진촬영의 과정에 빗대 보자면 거대한 미술관에서 관람하던 작은 사진집으로 혹은 모니터나 휴대폰 화면으로 관람하던 작자와 관객의 관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진다. 전파를 타고 관객과 사진가는 여백을 두어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수단이 혹은 도구가 정작 방향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다. 좋은 카메라가 좋은 사진을 만들지는 않지만(물론 좋은 카메라가 좋은 사진을 찍기에 유리한 점이 있으므로 너무 깊게 이야기 하지 않겠다. 가벼운 비유라고 생각해 주시길)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카메라의 기종을 살피기 이전에 사진가가 무엇을 찍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경험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혹자는 나이로 판단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것이 구도 안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 이것을 나는 이것을 공백이라고 부른다. 물론 배후의 이야기는 중요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관계없음은 작가가 내용이라고 부르는 것과 도구의 관계로 한정한다.


창조적인 작업에서 작가와 관객의 사이를 잇던 많은 것들이 허물어져가고 있다. 붓을 쓰지 않는 화가, 펜으로 쓰지 않는 작가, 종이에 드로잉을 하지 않는 설계가가 많아지고 있다. 붓으로 그리지 않았더라도 화가의 그림은 그대로다. 마찬가지로 글이, 도면이 무의미해지지 않듯 작가와 관객 사이 방식이 달라졌을 뿐 그들은 서로 공명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있다. 반드시 붓이나 펜과 같은 것에 짐을 지워낼 필요는 없다. 물론 아날로그의 도구들이 떠난 자리는 공허함을 남기겠지만 그래도 작가와 관객의 공명은 이루어지고 있다. 빈자리, 공명을 위한 곳을 여백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진은 카메라로 찍는다. 작든 크든지 카메라라고 부르고 렌즈라고 부른다. 실상을 담아내어 가공하고 비추어 주는 각각의 단계는 디지털이라는 이름 아래 있지만 역시 카메라로 담아내야 한다. 방식을 보면 구식이다. 사진가 역시 카메라로 담아내어 보여주려 애쓴다. 사진가 역시 구식이다. 현장을 가야하고 찍어야 하고 (디지털)암실 작업을 해야 하고 인화 또는 (인터넷)게시 혹은 전시를 해야 한다. 절반의 진화를 하고 있는 것은 사진가 자신이 아닐까. 무엇으로 공명하고 있을까. 무엇이 관객을 감동하게 하는 것일까. 여러 질문이 앞선다.


정해진 공간을 3일 동안 공사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서울에서 매년 진행된다. 소외된 시유지에 변화가 일었다. 학생들이 주로 참가하는데 마무리 되었을 때 참가했던 학생에게 무엇이 기억에 남는지 궁금해 물었다. 그는 “누군가 문득 저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의 짜릿함”에 관해 상기된 얼굴로 답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작은 시설물 하나가 특별해지는 순간에 굳이 ‘좋다’고 말하지 않아도 됐던 걸까. 새롭게 시작하는 조경가의 시작은 단순히 누군가 그곳에 앉는 것에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닐까. 길이를 알 수 없는 작가와 관객과의 거리는 말하지 않은 일종의 유대관계 속에서 ‘앉아 쉬는’ 행위 위에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곳에는 누군가 다시 앉아 쉴 것이다. 카메라 속 그 빈자리는 공명하는 여백처럼 다가왔다. 


연결하는 방식은 최초에 어땠는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최초인지도 모르거니와 설사 최초의 부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속한 큰 줄기의 최후, 끝단이 어디인지 모른다면 아직도 최초의 변화의 와중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변화하는 방식들은 한낱 잔물결일지 모른다. 다만 무엇이 그것을 있게 했는가에 대한 물음은 계속될 것이기에 보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남기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은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알 수 없는 함수가 있다는 단서다. 


마스크의 시대다. 약간씩 떨어져 대면하는 우리는 마스크라는 막으로 한 겹 속에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간극에서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라는 바람을 조심스레 가져본다. 부디 마무리되어 긴 시간 뒤 잠시 여백의 한 순간으로 반추되기를 끊임없이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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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들 ⓒ유청오

 

 

유청오 / 조경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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