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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공터의 힘
    개관과 동시에 장소 덕후들의 성지로 등극한 안국동 서울공예박물관. 400년 수령의 장엄한 은행나무, 테라코타 관을 둥그렇게 쌓은 크레이프 케이크 형태의 파사드, 곡선형 콘크리트로 유려하게 지형 틀을 잡은 경사 초지, 지극히 이질적인 이 세 요소를 한 프레임에 담으면 대충 찍어도 어느 각도에서나 그림이 나온다. 요즘 인스타그램을 도배하고 있는 장면이다. 공예박물관 안마당의 이 매력적인 풍경은 포토제닉할 뿐 아니라 고즈넉한 산책과 휴식도 넉넉히 담아낸다. 그러나 공예박물관의 도시적 잠재력은 감고당길과 안국역 쪽으로 담장 없이 활짝 열린 박물관 앞마당에서 펼쳐진다. 이 공터는 2017년까지 70년 넘게 풍문여고의 운동장으로 쓰였다. 겹겹이 쌓인 기억의 지층은 훨씬 더 두껍다. 감고당길 입구에는 ‘안동별궁 터’ 표지석이 서 있다. “조선 초부터 왕실의 거처였다가 마지막 황제 순종의 가례처로 사용된 궁터.” 안동별궁은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별궁으로 쓰였고, 세종이 승하한 곳이자 문종의 즉위식이 열린 곳이며, 고종이 건물을 개축해 순종의 혼례를 역사상 가장 성대하게 치른 축제의 장이기도 했다. 근대 여성 교육을 이끈 학교로 변모했다가 이제 공공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안동별궁과 풍문여고를 함께 써넣어 검색해보면 풍문여고 교정 안에 안동별궁이 있는 1950년대의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뜬다. 근대식 교사에 옛 별궁 한옥들이 이어져 있고 그 앞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줄 맞춰 조회를 하는 기묘한 광경이다. 게다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인사동과 북촌 사이라는 도시적 맥락까지 겹친 장소성, 만만치 않다. 설계공모 당선 이후 박물관 건축을 주도한 송하엽 교수(중앙대)의 말처럼, 이곳은 “시간을 걷는 공간”이다. 하지만 공예박물관 외부 공간이 뿜어내는 힘의 원천은 시간도, 기억도 아니다. 그 힘의 열쇠는 빈 땅 그 자체에 있다. 안국역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모두에게 열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터와 담장을 둘러친 학교 운동장의 차이를 바로 실감할 수 있다. 여름과 가을의 기 싸움이 팽팽하던 오후, 조경 설계로 이 빈 땅의 잠재력을 극대화한 박윤진 소장(오피스박김)을 만나 공터 곳곳을 느릿느릿 산책했다. “처음 방문한 날, 풍문여고 흙 운동장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어요. 설계비만 계산하면 손해일 게 뻔했지만 무조건 프로젝트를 맡기로 마음먹었죠. 담장만 걷어낼 수 있다면 서울에서 가장 인상적인 오픈스페이스를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어요.” 이미 블로썸 파크(『환경과조경』 2016년 9월호)와 경기도 북부청사 광장(2020년 5월호)뿐 아니라 민간과 공공을 가리지 않는 다양한 작업에서 바닥면 실험과 지형 설계 혁신을 실천해온 오피스박김은, 빠듯한 예산과 층층시하 간섭이라는 서울시 프로젝트의 고질적 난맥을 설계 역량과 노하우로 극복하며 도심 공터의 장소적 가치를 가시화하는 성과를 거뒀다. 애초의 생각처럼 폐쇄적 담장을 허무는 데 성공했음은 물론이다. 풍문여고 담장을 헐면서 옛 안동별궁 담장의 기단석과 행각 터가 발견되었고 문화재위원회는 노출 전시를 결정했다. 야심 찬 계획과 달리 허술하게 완결되기 마련인 공공 도시·건축 프로젝트를 조경가의 안목과 솜씨가 어떻게 살려냈는지, 세세한 설명은 아끼기로 한다. 가보면 바로 느낄 수 있다. 조경가의 안목과 지혜를. 감고당길을 사이에 두고 서울공예박물관 맞은편에는 이건희미술관의 유력 후보지인 송현동 숲이 자리한다. 박물관 교육동 전망대에 오르면 야생의 숲처럼 장엄한 송현동 일대의 녹색 풍경이 멀리 인왕산을 배경으로 넓게 펼쳐진다. 주변 고층 건물에서 찍은 조감 사진은 고밀한 도시 조직, 송현동 숲, 공예박물관 공터의 극명한 대조와 긴장을 전시한다. 열린 공터의 도시적 잠재력을 감각적으로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감고당길에 서서 박물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관람 목적을 가지고 오는 사람 못지않게 목적 없이 ‘그냥’ 들고나는 사람이 많다. 모처럼 도심 산책을 즐기다가, 즐거운 퇴근 걸음으로 안국역으로 향하다가 뻥 뚫린 공간을 보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공터에 들어서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어, 뭐지? 외마디 혼잣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의 매력, 담 없는 도시 공터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공예박물관 앞마당은 길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부지 서쪽 감고당길과 동쪽 윤보선길을 가로지를 수 있는 한가롭고 여유로운 연결 통로인 셈이다. 박윤진 소장과 나도 통과 동선으로 박물관 앞마당을 사용하는 이들 뒤를 쫓아 윤보선길로 접어들었다. 인왕산에 걸린 노을을 따라 골목을 걷다 보니 마침 그럴싸한 노포 호프집이 등장했다. 유달리 높고 파란 하늘과 불타는 노을 사진으로 SNS가 북적이는 이 가을, 잠시 틈을 내 가볼 만한 조경 작업과 전시도 풍성하다. 오피스박김의 ‘서울공예박물관’뿐 아니라 이달 지면에 모은 김아연의 ‘가든카펫’(덕수궁, ‘상상의 정원’ 전), 김봉찬·신준호의 ‘어반 포레스트 가든’과 정영선의 ‘나의 정원’(피크닉, ‘정원 만들기’ 전), 안마당더랩의 ‘일분일초’(소다미술관, ‘오픈 뮤지엄 가든: 우리들의 정원’ 전)에서 반나절 가을 나들이의 여유를 맛보시길. 아쉬운 소식을 전한다. 2018년 6월호(362호)부터 함께 지면을 만든 윤정훈 기자가 402호를 끝으로 환경과조경 생활을 마무리한다. 마흔한 권 잡지 곳곳에 밴 그의 흔적을 기억하며, 새로운 도전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풍경 감각] 스노볼의 파수꾼
    한낮 버스에 앉아 창밖 보는 걸 좋아한다. 파란 하늘 아래 산들거리는 가로수와 제각기 다른 차림으로 오가는 사람들. 신호등 불이 자리를 바꾸면 자전거가 멈춰 서고 버스가 다시 움직인다. 평범한 풍경이지만 버스 창문 너머로 보면 무엇이든 안온하고 괜찮아 보인다. 늘 평화로운 스노볼처럼.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이런 감상은 모두 휘발되어 사라진다.뭉개진 은행나무 열매 냄새와 간판을 가리는 무성한 가로수에 불평하는 목소리가 도시의 소음과 뒤섞여 시끄럽다.
    • 조현진 / 2021년10월 / 402
  • 서울공예박물관 Seoul Museum of Craft Art
    구법의 기술 처음 방문한 풍문여고의 흙 운동장에 반해서,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무조건 프로젝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지금의 폐쇄적인 담장만 허물 수 있다면, 도시의 인상적인 오픈스페이스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공공 공간을 설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프로젝트 초청 당시 서울공예박물관장이 오피스박김에게 보여준 신뢰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자문과 심의 그리고 동료의 불평 불만 속에서 초기안은 당연히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그동안 만들고 구현한 ‘박김사례’의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었고, 그 안에 담겨진 구법의 기술은 수많은 사변을 넘어서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구법의 진화 형태나 형상이 아닌 과거의 물성―풍문여고의 흙 운동장, 안동별궁 터의 지형 언덕―을 구현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를 위해 재료 실험을 했고 수차례에 걸친 목업시공을 통해 배수가 잘되며 하이힐을 신고도 편히 다닐 수 있는 흙 포장을 구현할 수 있었다. 관행적인 흙포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 새로운 흙 포장은 야구장에서 착안한 것으로, 마사토와 섞였을 때 점성이 생겨부드럽지만 단단한 경도를 갖는다. 수직으로 단절된 축대 위에 놓인 400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완만한 지형 언덕을 구상했다. 이미 사라진 안동별궁의 지형을 재현하되 오피스박김만의 진화된 방식으로 제안했다. 선형의 콘크리트는 지형의 높이와 함께 경관에 변화를 만들어내며, 지형의 미세한 차이를 더욱 드러낸다. 우리는 이 선형의 콘크리트를 ‘지형틀’이라고 불렀다. *환경과조경402호(2021년 10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및 시공 감리 오피스박김(박윤진, 김정윤) 시공 아이엠유건설(김충호) 발주 서울공예박물관 위치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3길 4 면적12,830m2 준공2021 사진 김종오 오피스박김(PARKKIM)은 2004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박윤진, 김정윤이 설립한 조경설계사무소다. 2006년 서울로 이전했고, 2018년 김정윤 대표의 하버드 GSD 교수 임용을 계기로 보스턴 지사를 개소했다.
    • 박윤진, 김정윤 / 2021년10월 / 402
  • 블랙메도우 Black Meadow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연작’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들을 관통하는 것은 ‘바닥’이다. 낮게 깔리는 것, 내려다봐야 하는 것, 수평적인 것, 그리고 우리가 하찮게 여겨왔던 것. 풍경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기하학은 바닥 면과 그에 직각으로 선 것들이다. 인류는 직립 보행을 시작하며 손의 자유를 얻었고, 그로 인해 두뇌가 발달하며 다른 동물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됐다. 나아가 지표면에 수직적인 것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대표적 사례가 건축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조경 작업을 건축적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힘들어졌고, 자연과 경관에 내재한 고유의 언어와 법칙으로 우리의 작업을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고 산다. 아마도 수직에 저항하는 것, 높은 것에 반대되는 것, 보잘것없는 배경이나 바탕으로 치부되는 것, 손이 아닌 발의 영역에 속한 것에 대한 반항적 끌림이 지구의 표면, 풍경의 바닥으로 향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지구의 표면에는 어마어마한 생태계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인 메도우(meadow)는 천이의 초기 단계에서 볼 수 있는 초지로, 숲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사람들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는 취약한 생태계다. 2021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에 설치된 블랙메도우(black meadow)는 초록과 생명이 사라진 자연을 의미하는 바닥 설치물이자 빗자루로 만든 카펫이다. *환경과조경402호(2021년 10월호)수록본 일부 작가 김아연 디자인팀시대조경(안형주,최진호,송민원,김현근,나준경,이온),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김희원,김선주,이필립,이주은,윤정원,진소형,오혜지,손영호,김단비,박정은,김현정,박공민,한지훈,강건희,강성수,이현우,이영현) 전시 기획2021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전시추진단 위치 이탈리아 베니스 카스텔로 공원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면적50m2(지름 약8m) 재료 빗자루,마대 설치2021. 5. 사진 김아연, 2021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전시추진단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대학원 및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을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국내외 정원,놀이터,공원,캠퍼스,주거 단지 등 도시 속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담당해 왔으며 동시에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의 변화가 드러내는 시학을 표현하는 설치 작품을 만들고 있다.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아름다운 꿈과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 조경 설계라고 믿고,이를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중요시한다.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자 스튜디오 테라 대표다.
    • 김아연 / 2021년10월 / 402
  • 메도우카펫 Meadow Carpet
    한국의 주거 유형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다. 부동산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약속되는 아파트는 ‘집’이라는 삶의 영역이 아닌 정치의 영역이 되었다. 이웃과 소통하고 기억과 이야기가 축적되는 ‘마을만들기’로서의 주거 단지 개념은 설계 스튜디오나 설계공모 안에서만 힘을 얻는 것 같다. 설계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시절, 아파트 설계가 제일 어려웠다. 익혀야 할 공식과 규칙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인동간격처럼 다양한 계산식을 통해 도출되는 단지 배치의 구조뿐 아니라 자연을 다루는 조경 역시 관습의 영역에 있었다. 단지 입구에는 소나무를 군식한 뒤 석가산을 만들고, 출입구와 시선이 꽂히는 모퉁이에는 선주목, 생활 가로에는 왕벚나무, 주동 측벽에는 메타세쿼이아를 심어야 한다. 1m2당 심어야 하는 식물의 밀도가 주요 수종별로 정해져 있고, 녹지 경계에는 회양목과 철쭉을 밀식하고, 수급과 관리가 어려운 초화류는 준공 직후 입주민들을 ‘웰커밍(welcoming)’하는 용도로는 쓰되 과도하게 사용하면 안 된다. 화목류를 중간중간 섞어 계절감을 살리고 겨울철 녹시율과 상록수 법정 의무 비율을 채우기 위해 경계부나 군식 녹지대에는 저렴한 스트로브잣나무를 심는다. 건설사와 공사는 촘촘한 그들만의 공식을 정해두었고 설계사의 창의성은 그 안에서만 허락된다. 아마 입주민의 민원을 최소화하는, 수십 년 동안 검증된 노하우가 만들어낸 안전장치였을 것이다. IMF 시대를 거치면서 아파트 조경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했다. 건축 설계의 하도업이 아니라 아파트의 브랜드 가치를 좌우할 핵심 상품이 됐다. 건설사의 조경팀은 주택상품개발부서에 편입되고, 매해 상품 개발을 위해 경쟁한다. 상품은 끊임없이 개발되고 곧 복제된다. 새로운 상품의 개발은 곧 새로운 공식의 생산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시장이고, 아파트 조경은 시장에 내놓은 상품이다. 이러한 아파트 조경의 자기 복제성이 가장 장소적이어야 할 집과 동네를 비장소적, 탈장소적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파트는 한국을 전형적인 ‘무인도시’1로 만드는 주범이자 그 결과물이다. *환경과조경402호(2021년 10월호)수록본 일부 디자인팀 스튜디오테라(안형주, 최진호, 오혜지) 시공 스튜디오 이레, 다원녹화건설 위치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 690-1 면적 약 200m2 재료 식물, 목재, 석재, 타일 등 복합 재료 완공2021. 1. 사진 현대건설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대학원 및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을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국내외 정원,놀이터,공원,캠퍼스,주거 단지 등 도시 속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담당해 왔으며 동시에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의 변화가 드러내는 시학을 표현하는 설치 작품을 만들고 있다.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아름다운 꿈과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 조경 설계라고 믿고,이를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중요시한다.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자 스튜디오 테라 대표다.
    • 김아연 / 2021년10월 / 402
  • 가든카펫 Garden Carpet
    서구식 근대화를 꿈꿨던 고종은 대한제국을 공간적으로 근대화하기 시작했다. 도시적으로 독립문과 파고다공원 건설을 포함한 도시 개조 사업을 진행하는 동시에, 건축적으로 덕수궁 내 서양 공관들을 건설하고 서구식 생활 양식을 도입했다. 서구식 공간은 건축물의 구조와 외관뿐만 아니라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 자체를 바꿨으며, 근대적 생활 양식에 걸맞은 가구가 도입되면서 황실의 바닥 역시 변화했다. 그렇게 근대의 삶 바닥에는 카펫이 놓였다. 카펫은 공간의 영역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장치이자 그 자체로 정원을 상징하기도 한다. 깔개 하나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간편한 창의성과 깔개 문양의 상징 체계가 만들어내는 한시적 헤테로피아(heterotopia)의 상상적 측면은 나를 매료시킨다. 나아가 문명이 만들어내는 수직적 기념비와 대비되는 수평적 공간은 두께를 갖는 대지의 표면이자 낮은 곳에 주목하게 하는 지구의 근원적 기하학이다. 카펫(carpet)은 ‘털을 뽑다pluck’라는 의미의 라틴어 카르피타(carpita)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서아시아나 유럽의 건조하고 냉랭한 기후에 버티기 위한 유목민의 생필품이었던 카펫은 서구의 상류 계층에 소개되면서 신분과 문화적 취향을 나타내는 기호품이 됐다. 또한 종교 예술과 결합해 낙원을 상징하는 화려한 문양과 상징체계를 가지게 됐고, 각국의 왕실은 권력을 과시하는 화려한 카펫을 수입하거나 제작했다. 가든카펫의 문양은 1918년 「매일신보」에 게재된 고종 황제 일가의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됐다. 대한제국의 황궁인 경운궁 석조전에 도입됐던 가구들은 영국 메이플사Maple & Co의 제품으로 추정된다.1 주문 제작이 아닌 기성품을 수입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국력을 보여주는 쓸쓸한 증거다. 카펫에 대한 단서는 남아있지 않지만 가구와 함께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그렇다면 정원으로서의 카펫, 황실의 상징으로서의 식물 문양을 새롭게 구성하여 상상의 정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일반적으로 카펫의 문양은 구성 방식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석조전의 카펫은 올 오버(all over)구도, 즉 중심부에 메달(medal2)과 같은 핵심 상징이 없이 바탕에 같은 문양이 반복되는 유형3으로 볼 수 있다. *환경과조경402호(2021년 10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김윤희, “대한제국기 덕수궁 석조전 건립과 서양가구 유입”, 『문화재』 47권 3호, 2014, pp.4~23. 2. 신의 눈 혹은 눈물을 상징하는 신성한 문양으로, 이를 상징하는 화려한 패턴이 중심에 자리한 패턴을 메달리언(medallion) 구도라고 부른다. 디자인팀 안형주, 최진호, 박근우, 오혜지, 손영호, 하영권, 이필립, 이주은 시공 쌔즈믄 식물 천지식물원 크기900×1,800×40cm 재료 식물, 목재 등 복합 재료 전시명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 전시 위치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정원 및 전각 전시 주최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전시 기획 박혜성(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전시 기간2021. 9. 10. ~ 2021. 11. 28. 사진 김경태, 김아연
    • 김아연 / 2021년10월 / 402
  • 일분일초 Production of Atmospheres
    오픈 뮤지엄 가든: 우리들의 정원 소다미술관은 경기도 화성시 최초의 사립 미술관이다. 건설이 중단된 후 오랫동안 방치된 대형 찜질방을 디자인·건축 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킨 문화 예술 재생 공간이다. 지난 5월, 소다미술관이 선보인 ‘오픈 뮤지엄 가든(Open Museum Garden): 우리들의 정원’ 전은 조경가와 디자이너, 예술가가 모여 미술관 앞마당을 관객이 소요할 수 있는 야외 정원으로 변화시키는 프로젝트다. 팬데믹 시대, 미술관이라는 용도에서 잠시 벗어나 지역민이 필요로 하는 공간을 구현하고 그곳에 예술을 얹어 공동체가 함께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 의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에 일분일초라는 주제의 정원을 조성했다. 일분일초 일분일초(一分一初)는 극히 짧은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시간성에 일분일초一盆一草(하나의 분, 하나의 식물)라는 자연의 의미를 더했다. 자연은 짧은 순간에도 변화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은 공간에 분위기를 생성한다. 자연은 물리적으로 객관화된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을 모방하거나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들어가 자연을 관조한다. 바라보며 떠올린 감정으로 자연 안에서 정서적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분위기로 연출되며, 분위기를 지각하는 주체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을 이해한다. 분위기는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자연을 경험하는 주체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경험이 각기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일분일초라는 시간 속에서도 일분일초라는 자연 속에서도 무한한 공간의 분위기가 생산된다. 하나의 건축물 안에도 어떤 곳은 빛이, 어떤 곳은 바람이 잘 통하는 등 다양한 조건의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을 이용해 부서져 들어오는 햇살과 교목의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분위기, 돌과 건축물이 만나 보여주는 물성을 극대화한 분위기,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풀의 분위기를 담는 세 개의 공간을 계획했다. 나무, 돌, 풀의 재료를 각 공간에 분리하여 배치해 재료 자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도출했다. 어느 시점에서는 재료들이 겹쳐지며 조화를 이루게 된다. *환경과조경402호(2021년 10월호)수록본 일부 정원 기획·설계·시공 안마당더랩(이범수, 오현주, 이상아, 김명천, 이주현, 백찬민) 전시 기획 소다미술관(장동선, 류다움, 김민정)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전시지원팀 위치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707번길 30 전시 기간2021. 5. 1. ~ 2021. 10. 31. 사진 소다미술관, 유영진(255mov), 박성욱(still negative club) 안마당더랩(Anmadang the Lab)은 이범수, 오현주가 2016년 공동 설립한 조경설계사무소로, 조경 지식을 기반으로 외부 공간을 기획, 설계, 시공하는 디자인 작업실이다. 다양한 접근 방식으로 외부 공간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작동하지 않던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자 한다. 섬세함이 만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예술성과 대중성의 중간에서 새로운 환경을 제안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공공 공간, 상업 시설, 개인 주택, 전시, 실내 연출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 이범수, 오현주, 이상아 / 2021년10월 / 402
  • 어반 포레스트 가든 Urban Forest Garden
    남산 자락에 위치한 피크닉(Piknic)은 1970년대 지어진 제약 회사 사옥을 리모델링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카페, 레스토랑, 전시관을 갖춘 이곳은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공간과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전시를 기획해 왔다. 올해 열린 ‘정원 만들기’ 전은 외부 공간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시다. 그 일환으로 건물 옥상과 지상 외부 공간에 정원을 조성해 전시가 열리는 봄부터 가을까지 정원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게 했다. 인공 지반에 마련된 숲과 초원 어반 포레스트 가든(Urban Forest Garden)은 도심 속에서 오래된 숲과 자연스러운 초원을 경험할 수 있는 정원이다. 단순히 식물로 가득 채워진 녹지가 아니라 건강하게 살아 숨 쉬는 생명을 들여 진정한 자연의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다. 자연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도시 사람들이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로 인해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랐다. 취향 또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 그저 구경거리나 즐길 거리에 그치는 정원이 아닌, 다양한 생명을 담는 정원을 만들고자 했다. 콘크리트 위에 재현한 초원과 숲의 식생에는 생태적 식재 기법과 정원 조성 기술이 적용됐다. 빛과 어둠, 생기 있는 것과 시든 것, 있다가 사라지고 없다가도 다시 생겨나는 것들의 반복을 통해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보이고자 했다. 거대한 빌딩숲으로 둘러싸인 주변 풍경까지 아름다워 보일 수 있도록 메마르고 황량한 도심 속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오아시스와 같은 숲을 구상했다. *환경과조경402호(2021년 10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더가든(김봉찬, 신준호, 지소희) 시공 더가든(김봉찬, 신준호, 지소희, 박선영), 김미홍 시설물 에스디레이저 설비 금강SK 전시 기획 피크닉(Piknic) 위치 서울시 중구 퇴계로6가길 30 면적 276.8m2 준공 2021. 4. 사진 더가든, 이형주, 피크닉 김봉찬은 서귀포에서 나고 자라 제주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생태학을 전공했다. 자연과 식물 사회에 대한 관심을 계기로 정원 공부를 시작했으며 평강식물원, 백두대간수목원, 서울식물원 조성에 참여했다. 자연의 원리를 이용한 생태정원과 자연주의정원 디자인을 지속적으로 고민해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최근 베케정원을 비롯해 아모레 성수, 모노하 한남 등에 정원을 조성했다. 신준호는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서울시립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조경을 전공했다. 2007년 미국조경가협회 학생부문과 2008 함부르크 국제정원박람회 학생공모전에서 수상했다. 2015년부터 더가든에서 근무하며 김봉찬과 다수의 정원 작업을 함께 했으며, 2021년 7월 ‘자연스럽게 심는 집’이라는 뜻의 가든 스튜디오 연수당(然樹堂)을 개소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김봉찬, 신준호 / 2021년10월 / 402
  • 나의 정원 My Garden
    “나만의 정원을 갖는다는 건 그저 몽상에 불과한 걸까?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노력은 그것이 결코 불가능한 꿈만은 아님을 일깨워 준다. 흙을 가꿀 한 뼘의 땅이 아직 없다 해도 상관 없다. 실내든 옥탑이든, 설령 너무 비좁거나 그늘진 공간밖에 없어도 괜찮다. 시작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작은 풀 한 포기에 기울이는 관심과 사랑, 자연과 생명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가려는 노력이다.”(피크닉 ‘정원 만들기’ 전 작품 소개문 일부) 나의 정원은 피크닉 ‘정원 만들기’ 전시의 일환으로 만든 정원이다. 지난 4월에 시작한 이 전시는 정원을 통해 헌신과 돌봄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확인하게 하고, 나아가 모두가 자신만의 한 평 정원을 만드는 꿈을 꾸도록 독려한다. 전시는 늦가을인 10월에 마무리되지만 전시관 4층 옥상에 조성된 나의 정원은 존치된다. 나의 정원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있어도, 한결같이 아름다운 풀과 꽃과 나무를 불러 모아 정원을 만드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서울은 흔히 난개발의 도시, 밀도 높은 고층 아파트로 꽉 찬 도시로 인식된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남산을 비롯한 산들로 켜켜이 둘러싸여 있고 한강이 유유히 흐르며, 옛 궁궐들이 남아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건물 옥상, 테라스, 베란다, 밋밋하게 솟아오른 건축 벽면을 활용한 정원은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게 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풍요로움을, 나아가 자연과의 교우를 선사할 것이다. *환경과조경402호(2021년 10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조경설계 서안(정영선) 시공 조경설계 서안 전시 기획 피크닉(Piknic) 위치 서울시 중구 퇴계로6가길 30 면적 230m2 준공 2021. 4. 사진 조경설계 서안, 피크닉 정영선은 1941년 대구에서 출생한 한국의 조경가다. 1987년 조경설계 서안을 설립했다. 주요 작품으로 호암미술관 전통정원 ‘희원’, 예술의전당, 선유도공원, 국립중앙박물관, 청계천, 광화문광장,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 기본 및 실시설계 등이 있다. 희원으로 환경문화대상(1998), 선유도공원으로 서울시건축상(2003), 세계조경가협회 동부지역회의 조경작품상(2004), 미국조경가협회 프로페셔널어워드(2004), 한미 원불교 원다르마센터 조경설계로 미국건축가협회상(2013)을 받았다.
    • 정영선 / 2021년10월 / 402
  • EV6 언플러그드 그라운드 성수 EV6 Unplugged Ground Seongsu
    기업 전시 공간 기획에 조경이 무얼 한다고 프로젝트의 시작은 기아의 새 전기차 ‘EV6’를 홍보하는 전시 기획 중 조경 공간의 의뢰를 HLD가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기획 초기 단계부터 조경이 전시의 시퀀스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 논의가 진행됐다. 전기의 흐름과 에너지에서 영감을 받은 유동적 3D 디자인 언어, 자동차의 엔진과 프레임 등을 첨경물로 활용한 쇼 가든, 차를 타고 산과 강을 여행하는 콘셉트의 구릉과 수경 시설 등 거칠지만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아이디어 제안과 논의가 이루어졌다. 수개월간 장소를 물색한 끝에 인더스트리얼한 분위기의 성수동 레이어10을 전시 공간으로 결정했다. 레이어10은 큰 규모의 촬영 스튜디오로 쓰이던 공간으로, 촬영 장비를 나르는 차량을 위한 주차 공간이 널찍한 부지였다. 이 주차장을 정원으로 탈바꿈시켜 전시 공간의 앞마당이자 앞뜰로 역할하도록 하는 공간 기획의 방향을 설정했다. 한 프로젝트에 두 조경 디자인 회사가 양립할 수 있을까 기획이 본 궤도에 오를 시점부터, 공간을 실제로 만들어 나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과 토의를 시작했다. 가장 많이 고민했던 부분은 머릿속 생각과 디자인을 실현할 ‘재료’에 대한 것이었다. 그중 식물 재료에 대한 고민을 하던 차에 이전에 전시 공간 프로젝트를 함께했던 정원사 친구들이 떠올랐다. 인더스트리얼한 공간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자연스럽고, 화려하면서도, 과하지 않고, 트렌디한 정원을 만들 정원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원사 친구들은 프로젝트 참여 제안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든든한 조력자가 생겨 기뻤지만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디자인 팀이 다수 참여한 프로젝트에서 팀들이 각자 개성을 발휘하느라 좋지 못한 결과를 낸 사례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으며 함께 논의했고 다행히도 순탄하게 서로의 역할을 정리할 수 있었다. HLD가 총괄 디자인 및 공사 감리를 수행하고, 정원사 친구들이 세부 식재 계획과 식재 공사를 맡았다. 좋은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두 조경 회사의 협업이 시작됐다. *환경과조경402호(2021년 10월호)수록본 일부 조경 설계HLD 조경 시공 정원사 친구들(식재 계획 및 가드닝), 아름다운길(포장) 발주 기아자동차, 이노션 월드와이드 건축 설계 및 시공CA Plan(CA 플랜) 위치 서울시 성동구 상원4길 10 준공2021. 8. 사진 유청오 안동혁은 HLD에서 조경가, 도시설계가, 디자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의 JCFO에서 9년간 근무하며 필라델피아 레이스 스트리트 피어, 부산시민공원,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 홍콩 침사추이 워터프런트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2년간 대림산업 상품개발팀에서 아크로, e편한세상 브랜드의 조경 상품을 총괄하는 디자인 디렉터로 일했다. 조혜령은 경희대학교, 영국 그리니치 대학교, 서울대학교에서 원예와 조경을 전공했다. 현재 정원사 친구들에서 정원을 계획하고 만드는 일을 한다. 정원은 개인적 휴식과 위안을 넘어 사회적 차원의 만남과 소통을 위한 공동체적 가치를 지닌다고 믿고, 프로젝트마다 의미 있는 성과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부산과 서울의 대림e갤러리, 국립수목원 어린이숲정원, 서울식물원 온실기획전시 ‘식물탐험대’와 ‘식물극장’을 기획하고 시공했다. 서울을 시작으로 런던, 파리, 요하네스 버스를 순회하고 있는 ‘DMZ 가든’ 전에도 참여했다.
    • 안동혁, 조혜령 / 2021년10월 /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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