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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16년 5월

정보
출간일 2016년 5월
이매거진 가격 9,000

기사리스트

[CODA] 창업, 그러니까 그럼에도
2010년 10월 1일의 일이다. 전날의 숙취가 남아있었지만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기계적으로 씻고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고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는 하루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주 잠깐 망설인 순간은 자동차 문을 열고 핸들을 잡았을 때다. ‘아, 오늘부터는 파주가 아니라 일산으로 출근해야지!’ 경로를 머릿속에 한 번 그려보고는 액셀을 ‘힘껏’ 밟았다. 내 사무실로 출근하는 첫 날이니까. 그렇게 환경과조경이 아니라 나무도시 편집장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구청에 가서 서류 접수를 하고 받아든 나무도시의 사업자등록증에는 아내의 이름 석 자가 박혀 있었다.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편집장을 하고 싶다는 소박한(요즘 같은 종이책 멸종위기 상황에서는 원대한) 꿈을 지키기 위해 발행인 직함을 아내에게 양보(?)한터였다. 딸아이의 주민번호를 외울 때처럼 사업자등록번호를 되뇌었다. ‘일사일영삼… 일사일영삼… 일사일영삼…’, 업태는 제조업, 종목은 출판. 조경설계사무소는 업태가 서비스업이지만, 잡지나 출판은 제조업이다. 그 차이는 쉽게 말하자면, 조경설계사무소는 사무실 임대료와 직원 인건비만 해결하면 되지만, 출판사는 임대료와 인건비는 물론이고 제작비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책이라는 물리적인 제품을 제조하려면 저자 인세, 인쇄비, 용지비, 출력비, 제본비 등을 지불해야 하니까. 편집장 명함을 (생전 처음) 내 돈 주고 팔 때만 해도 참 신이 났었는데, 첫 책의 제작비 지급 시점이 다가오니 제조업의 숙명이 실감났다. 언제였더라?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 ‘화장을 글로 배웠어요’ 따위의 유머가 유행한적이 있다. 나는 출판사 창업을 책으로 배웠다. 『편집자란 무엇인가 - 책 만드는 사람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하여』,1 『출판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 - 23인의 출판편집자들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편집자의 세계』,2 『편집에 정답은 없다 - 출판 편집자를 위한 철학 에세이』,3 『유혹하는 에디터 - 고경태 기자의 색깔 있는 편집 노하우』,4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5 『편집자 분투기』,6 『그대로 두기 - 영국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 여성 편집자의 자서전』,7 『소설거절술 - 편집자가 소설 원고를 거절하는 99가지 방법』8 (이 책은 도대체 왜 샀는지 모르겠지만, 은근히 읽는 재미가 있다)을 비롯해서 ‘편집자’를 키워드로 한 책들이 지금도 내 책장 한 칸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대부분 창업을 목전에 둔 시기에 사들인 책들이다. 그런데 그게 결정적 패착이었다. 무엇보다 키워드 선택이 옳지 않았다. ‘출판 마케팅’을 키워드로 한 책을 주야장천 읽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제대로 잘 만들면 잘 팔린다’는 명제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아름다운 문구가 아니었다. 편집자가 출판사를 차리면 10명 중 7~8명은 망하고, 영업자가 출판사를 창업하면 10명 중 7~8명은 성공한다는 속설이 유독 내게는 해당하지 않을 거란 기대 역시 허황된 것이었다. 잘 만드는 것보다 잘파는 것이 중요했다. 잘 팔아야 다음 책도 만들 수 있으니까. 물론 내가 책을 잘 못 만든 탓은 아닐까 하는 반성은 새 책이 나온 후 3개월 뒤에는 어김없이 했다. 다음 책은 꼭 잘 만들어보리라는 다짐과 함께. 이번 호 특집을 준비하며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연 9인에게 부가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창업에 필요한 준비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거기에 이런 예를 덧붙였다. ‘예: 꿈, 첫 번째 일거리, 10년의 사업계획서, 재무 지식, 동업자, 플로터, 책상 등등.’ 창업 자금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준비물이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가지고…. 그러면서 잠시 시계를 거꾸로 되돌렸다. 한창 창업 준비를 하던 2009년의 어느 날로 말이다. 나는 무엇을 준비했더라? 아마 이런 것들이었을 거다. “적극적 지지까지는 아니지만 대놓고 말리지는 않았던 아내의 불안한 동의, 그 불안을 해소하고자 준비한 20종의 출판 아이템과 10명의 필자 리스트,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서가 한 칸을 내가 편집한 책으로 채우고 말겠다는 (불가능하지만 이루고 싶은) 꿈, 누가 봐도 근사해 보이는 원목 테이블, 사무실 2면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책꽂이….” 아 그렇지, 제작비 부담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는 마이너스 통장도 빼놓을 수 없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내가 창업을 고민하며 샀던 책들은 대부분 2009년에 출간되었다(각주 1번부터 5번까지). 전후 10년 동안의 데이터를 아무리 검색해 보아도 ‘편집자’를 키워드로 한 양질의 책이 그렇게 1년 동안 쏟아진 해가 없었다. 어떤 모종의 세력이 나의 출판사 창업을 부추기기 위해 작정한 것이 아닌가 싶은, 허황된 음모론을 지금까지 내가 주장하는 이유다. 그게 아니라면 결국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정성껏 욕심껏 오래 하고 싶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창업을 꿈꿨던 까닭은. 누군가 ‘그래서 창업을 권하는 것이냐’라고 정색하며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배움을 주었던 어떤 책에는 이런 대목이 쓰여 있었다. “과연 출판 창업에 모범 답안이 있을까. 대개 있다고들 한다. 창업 자금 3억 원, 첫 책을 출간하기전에 완성 원고를 세 가지 정도 준비하고 첫 책 출간 이후 1년 안에 열 종(혹은 3년 안에 서른 종) 이상 낼 자신이 있다면 창업해도 된다. … 창업 자금이 많을수록, 완성된 원고를 많이 확보할수록 성공 확률은 높아진다.”9 단, “완성된 원고” 앞에 생략된 단서가 있다. ‘일정한 독자층이 있는 완성도 높은’ 원고여야 한다. 그것이 가장 기본이니까. 그런데 불행히도 이 모범 답안은 7년 전 상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출판동네는 ‘해마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을 기록적으로 경신’하고 있으니 현재의 상황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출판사 창업을 꿈꾸며 관련 도서를 사들이고 창업 강좌를 듣고 선배를 만나 꼬치꼬치 캐묻고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답변이 잿빛 일색이더라도 말이다. 나만은 다를 거란 확신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하고 싶은 일이니까(실제로는 할 줄 아는 일이 그것뿐이어서 창업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할 줄 아는 일’은 ‘하고 싶은 일’로 포장된다. 물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인 경우도 많다). 조경설계사무소를 새로 연 9인의 좌충우돌 창업기를 읽고 있노라니 자연스럽게 6년 전의 고민과 떨림과 설렘이 오버랩됐다. 별 재미도 없는 해묵은 기억을 끄집어낸 이유다. 참, 각주 9번의 글을 쓴 김홍민 대표는 저런 모범 답안을 일러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창업 자금 9,000만 원, 준비된 원고 한 종”10만 달랑 들고 북스피어란 출판사를 차린 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신나게 흥이 넘치게 회사를 꾸려가고 있다.
[편집자의 서재] 달려라, 아비
불효의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고향에 내려가는 횟수는 줄어든 지 오래고, 최근엔 전화도 통 드리질 못했다. 특히 2주 전에 집에 내려가겠다는 계획을 취소해 버린 것이 영 찜찜하다. 분명 엄마는 전날부터 (엄마 눈에만 핼쑥한) 딸을 살찌우려고 상다리가 휘도록 음식을 준비하고 계셨을 텐데. 어버이날까지 이어지는 5월 초의 황금연휴 기간에도 고향에 다녀오지 못할 것 같다. 할 수 없이 꼼수를 부렸다. ‘5월에는 ‘편집자의 서재’ 꼭지를 빌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지, 특히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는 ‘부모님 전상서’를 올려 점수 좀 따야겠다.’ 그런 이유로 선택한 소설은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 하지만 애초에 효도를 글로 하고자 한 심보 때문이었을까? 아무래도 글이 영 써지질 않아 원래 쓰려고 했던 책을 막판에 바꾸어 버렸다. 우선 구구절절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는 글을 쓸 자신도 없거니와, 우리 엄마는 『엄마를 부탁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불멸의 첫 문장―“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에 도저히 이입할 수 없게 하는, 오히려 시골이라면 몰라도 도시에서는 절대로 잃어버릴 리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에 따르면 엄마는 ‘시골 흙바닥보다 도시 아스팔트길을 걸을 때 신이 나는 사람’이고, 삼촌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가장 무서운 큰누나’이며, 아빠의 푸념에 따르면 ‘절대 지고는 못 참는 여편네’다. 그러니 제아무리 신경숙 작가가 2인칭 시점을 써서 독자를 소설 속으로 밀어 넣고, 그녀 특유의 섬세한 표현으로 눈물샘에 십자 포화를 퍼부어도 나는 여간해서는 소설에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 3년 전(2005년) 출간된 김애란 작가의 『달려라, 아비』에서 엄마의 모습을 찾았다. 소설을 발표했을 당시 스물다섯이던 김애란 작가는 젊은 작가답게 기발한 상상력과 경쾌한 문체로 이 시대의 새로운 ‘어머니’를 창조했다. 주인공 ‘나’는 반지하방에 사는 미혼모 택시 운전기사의 딸. 분홍색 야광 반바지를 입고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달리는 아버지에 대한 상상을 끊임없이 전개하면서 자신의 탄생과 아버지의 가출, 외할아버지와의 일화 등의 신변잡기를 풀어놓는다. 하지만 자신과 어머니를 버려두고 무책임하게 떠난 아버지에 대해 원망이나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딘가 어리숙하고 철없는 아버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상상했던 십수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 아버지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워드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먼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기대감에 부푼,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작게 웃고 있다. 아버지가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다.”1 이전의 한국 문학에서 결핍과 상처로 그려지곤 하는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주인공이 보여주는 긍정의 태도에서 단순한 경쾌함과 발랄함을 넘어서 깊은 성숙미가 느껴진다. 주인공의 따뜻하고 긍정적인 세계관은 주인공의 어머니 조자옥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소설은 아버지에 대한 상상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전부 주인공이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기에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조자옥의 삶에 주목하게 된다. 조자옥은 만삭인 자신을 두고 애인이 도망갔을 때에도 홀몸으로 아이를 낳고 스스로 탯줄을 자른 강인한 ‘어머니’이고, 고집 세고 욕도 잘하는 ‘택시기사’이며, 동시에 ‘여성’적인 매력2도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3 주인공이 어머니가 자신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대목은 미혼모 택시기사 조자옥의 삶을 위대하고 존엄하게 그려낸다. 『달려라, 아비』의 가장 큰 미덕은 심각하게 내용이 전개되는 상황에서도 유쾌한 농담을 건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농담과 유머는 가벼움이나 경박함이 아니라 자기긍정에서 비롯된다. 이혼한 아내의 새 남편을 피해 잔디 깎기 기계를 타고 최고 시속으로 도망가는 아버지, 자신을 버리고 간 옛 애인의 부고 소식에 상심하며 잘 썩고 있을지 궁금해 하는 어머니 등 소설 전반에 따뜻한 유머 코드가 넘친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은 누구 딸이냐고 묻는 외할아버지의 능청스런 질문에 ‘나’가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며 “조자옥이! 조자옥이 딸이오”라고 온힘을 다해 소리치는 부분이다. 내게 누구 딸이냐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쩌렁쩌렁 엄마 딸이라고 외칠 텐데. 아쉽게도 나는 엄마와 너무 똑 닮아서 누구 딸인지 이미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작은 모임이 틔우는 공원에 대한 큰 상상
“도시숲에 대해 관심이 많다. 공원에서 산림 치유 프로그램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에 모임에 참석했다.” “서울시인대학에서 시를 쓰고 있는데 숲, 공원, 환경이 주는 치유의 힘을 시로 써보고 싶다.” “협동조합원들이 겪는 경영상의 문제를 컨설팅하면서 서초구에 있는 양재시민의숲 인근의 사회적 기업들과 마을 사업을 하는 분들을 만나고 있다. 공원에 대해 배우고 교류하고 싶다.” “공원에서 놀이마당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서 공원시설과에 문의했더니 필요한 서류도 많고 과정도 복잡했다. 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공원을 좀 더 쉽게 활용할 수 있을까 묻고 싶어서 왔다.” “양재시민의숲에서 작년부터 작은 음악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시민의숲이 재조성 된다고 해서 공원이 어떻게 바뀔까 궁금하던 차에 모임에 참석했다.” 20명 남짓이 모인 작은 모임. 하지만 그들이 모인 계기와 공원에 대한 꿈은 다양하고 원대했다. 지난 3월 31일 서울시 서초구 밸류가든에서 밸류토크 ‘공원이 주는 가치 1’이 열렸다. 밸류토크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잊고 있었던 가치에 대해 영화, 책, 사람 등을 통해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밸류가든에서 진행하는 모임이다. 서울시 푸른도시국은 1989년 조성된 이래, 근 30년 만에 재조성되는 도시숲 공원인 시민의숲에 대한 시민의 의견을 듣고 공원의 미래를 함께 그리기 위해 ‘공원이 주는 가치’를 밸류토크 시리즈로 기획했다. 김연금 조경작업소 울소장이 ‘공원의 시작’에 대해, 정용숙 생명의숲 사무국장이 ‘공원의 생태적, 문화적 가치’에 대해 발제했다. 진화하는 공원, 성장하는 공동체 김연금 소장은 공원의 기원부터 현대의 공원까지 공원의 발전 과정을 소개했다. 그는 “과거에는 ‘도시는 악, 공원은 선’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최근의 공원은 도시의 인프라나 조직에 스며들어 새로운 도시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정용숙 사무국장은 도시의 공동체적 기능을 회복시키는 공원의 생태적, 문화적 가치를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으로 마을마다 ‘마을 숲’이 있어서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이자 휴식처 역할을 했다며 오늘날의 도시에도 현대적인 개념의 ‘마을 숲’, 즉 공동체 기능을 회복시키는 공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정용숙 사무국장은 “사실 서울시에서 공원 프로그램의 기획과 진행을 너무나 잘 하고 있지만, 소박한 아이디어라도 시민들이 함께 기획하고 실행해볼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차려놓은 밥상에서간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공원을 ‘도시 속에서 만나는 나의 정원’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만들어가야 공원에 대한 애착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작은 모임, 큰 상상 참가자들의 자기 소개로 시작한 이날 모임은 자유분방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발제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2~4명씩 조를 이뤄 본인이 생각하는 공원이 주는 가치와 시민의숲에 대한 비전을 나눴다. 어떤이는 공원 재조성에 따른 지역 경제 활성화와 직업 창출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고, 어떤 이들은 공원의 심리 치유 기능을 활용하고자 했으며, 어떤 이들은 도시숲의 야생성과 생태적 가치에 주목했다. 이에 대해 정용숙 사무국장은 “공원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와 요구는 사람마다 너무 다르고 다양해서 자칫하면 서로 요구사항만 늘어놓다가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며 “시민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공원의 상황이나 공원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시민들의 요구가 단순히 민원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오순환 푸른도시국 공원조성과 과장은 “조그만 소모임이지만 시민들의 손으로 직접 공원을 바꾸는 가치 있는 모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했다.
환경과조경 32기 통신원 간담회
지난 4월 9일 그룹한빌딩에서 ‘환경과조경 제32기 통신원 간담회’가 열렸다. 이번 간담회는 전국 36개 대학의 32기 신임 통신원과 지난 한 해 동안 활발히 활동한 31기 전임 통신원, 통신원 OB 모임인 ‘아라리’ 선배 통신원, 환경과조경 임직원 등 약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행사는 남기준 편집장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임직원 소개 및 발행인 인사말, 전 기수 우수통신원 시상, 임명장·기자증 수여, 박명권 발행인의 특별강연, 오리엔테이션 및 기자교육, 31기 통신원 활동 발표, 32기 신임 통신원 1분 스피치, 기장 선출 등이 이어졌다. 우수통신원 시상에서는 전국 기장을 맡아 한 해 동안 다양한 행사를 열정적으로 이끈 백규리 경희대학교 통신원이 우수통신원상을 수상했으며, 조소연 한경대학교 통신원과 박성민 전남대학교 통신원이 각각 우정상과 우수기사상을 받았다. 박명권 발행인은 ‘조경은 과학인가, 예술인가’를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현대 조경의 변천사를 바탕으로 다양한 사례를 소개한 후 “조경은 과학적이기도 하지만 예술적인 특성도 갖고 있어, 젊은 조경가들이 다양한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분야”라며 조경학과 학생들이 전공에 보다 많은 관심과 애착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오리엔테이션과 기자 교육을 담당한 남기준 편집장은 통신원 제도의 운영 배경과 취재 범위, 기사 작성 요령등을 소개해, 통신원이 담당해야 할 역할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백규리 전임 기장은 31기 통신원이 진행한 주요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했다.‘플레이 포 안산Play for Ansan’과 서울정원박람회 서포터즈 ‘그린핑거스Green Fingers’ 1기 활동이 바로 그것으로, 특히 ‘그린핑거스’ 활동은 환경과조경 통신원이 주축이 되어 진행하는 활동으로 신임 통신원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그린핑거스는 제1회 서울정원박람회 당시, 학생기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온·오프라인 홍보는 물론 박람회 현장에서 시민들의참여를 유도하는 이벤트를 개최하여 주최측과 관람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백규리 기장은 그린핑거스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6 꽃 피는 서울’ 유공자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날 참석한 김도훈 선배 통신원은 ‘아라리’의 2기 출범을 선포했다. 2기 회장은 김도훈 안산희망마을만들기 사업단장이, 총무는 윤호준 서호엔지니어링 팀장이 맡게 됐으며, 부회장은 지난해에 이어 원덕희 디에이치 조경 부장이 맡았다. 김도훈 회장은 “32기 통신원이 된 것을 환영한다. 올해 새롭게 출범하는 아라리 회장단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해보자”며 신임 통신원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1분 스피치 이후 진행된 기장 선출에서는 전국 기장으로 박예림 가천대학교 통신원과 설윤환 단국대학교 통신원이 선출됐다. 서울·경기지역은 신채영 서울대학교 통신원과 이선균 서울시립대학교 통신원, 강원·충청지역은 김혜수 강원대학교 통신원과 주영석 배재대학교통신원, 영남지역은 권도형 영남대학교 통신원과 신수경 동아대학교 통신원, 호남지역은 김강산 순천대학교 통신원과 김은솔 전남대학교 통신원이 선출됐다. 환경과조경의 통신원 제도는 전국 각 대학 및 지역의 조경계 소식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조경학과 학생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 1985년에 처음 신설되었으며 지금까지 40여 개 대학교 총 981명이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이번에 선발된 32기 통신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가천대학교 박예림, 강릉원주대학교 김미경, 강원대학교 김혜수, 건국대학교 이하나, 경북대학교 박정연, 경희대학교 김지호, 계명대학교 정다솜, 고려대학교 이정철, 공주대학교 김우리, 단국대학교 설윤환, 대구대학교 김수진, 대구한의대학교 조명지, 동국대학교 최유라, 동신대학교 국승철, 동아대학교 신수경, 배재대학교 주영석, 부산대학교 김소현, 삼육대학교 김현지, 상명대학교 박소연, 서울대학교 신채영, 서울시립대학교 이선균, 서울여자대학교 김다영, 순천대학교 김강산, 신구대학교 허강일, 영남대학교 권도형, 우석대학교 김승은, 원광대학교 변강현, 전남대학교 김은솔, 전북대학교 이중주, 중부대학교 권기덕, 천안연암대학교 박미지, 청주대학교 김문경, 한경대학교 김수진, 한국농수산대학교 홍혜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정혜수, 호남대학교 구민지. 한편 OB 통신원들의 모임인 ‘아라리’는 2014년 5월 공식 발족했고, 조경설계, 엔지니어링, 조경시설물, 환경복원, 조경관리, 공공기관, 연구기관 등 다양한 관련 분야에 근무하는 조경인들의 네트워크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2015년도에 진행한 ‘플레이 포 안산’과 같은 사회 공헌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도시에서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잡담은 때때로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한다. 많은 사람들이 몰아치는 과제나 며칠째 이어진 야근에 지쳤을 때, 어떤 고민이 생겼을 때,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카페나 술집을 찾곤 한다. 맛있는 음료나 음식이 목적일 때도 있지만, 잡담이 목적일 때도 많다. 잡담에는 뚜렷한 논점이나 결론이 필요하지 않다. 직장 상사나 교수님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할 때처럼 논리적으로 말하기 위해 긴장할 필요도 없다. 떠오르는 이야기를 편안하게 풀어놓다보면 고민에 대한 해결 방안이 생기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마음이 후련해지기도 한다. 잡담의 힘이다. 빅바이스몰Big by small이 도시를 살아가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가진 생각을 잡담처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도시와 공간, 사람과 지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빅토크Bigtalk’에 참여할 수 있다. 빅토크는 이를 주최한 빅바이스몰이라는 단체의 이름에걸맞게 소수의 강연자가 다수의 관객에게 말하는 일반적인 형식small for big이 아닌 다수의 사람이 함께 이야기하는 관객참여형 잡담회 형태로 진행됐다. 지난 3월 24일, 제1회 빅토크가 시청역 인근 스페이스노아 4층에서 열렸다. 이날 빅토크는 ‘도시 그리고 생존: 디자이너로 살아남기’라는 주제로 진행됐으며 도시·건축·조경 분야의 학생들과 실무자 등 40여 명이참석해 강연장을 가득 채웠다. 참석자들은 강연장 입구에서 포스트잇과 볼펜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질문을 받았다. ‘나에게 디자인이란’, ‘나에게 서울이란’, ‘생존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은’ 이 질문은 강연의 뼈대이자 관객들을 잡담회에 참여시키는 촉진제였다. 행사 시작 전, 박영석(빅바이스몰 대표)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나 궁금한 점 등을 포스트잇에 작성해주기를 부탁했다. 행사는 크게 스몰 토크인 1부와 잡담회인 2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1부에서는 사회자 중 한 명인 문정석(도시연대 커뮤니티디자인센터 센터장)이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도시를 디자인하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후 스몰 토커인 조반장(고가산책단 대표), 박경탁(삶워크숍(salmworkshop) 소장)의 강연이 이어졌다. 경계와 욕망 조반장은 디자인은 ‘경계를 걷는 일’이라며 현재 진행하고 있는 ‘서울역 7017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서울역 고가는 과거 차가 다니는 도로였지만, ‘서울역7017 프로젝트 국제 설계공모’의 당선작인 서울수목원The Seoul Arboretum의 계획안에 따라 수목이 가득한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이렇게 조성된 공원은 기존의 서울역 고가가 뻗어 있던 서울 곳곳을 연결하게 된다. “그렇다면 서울역 고가는 과연 길일까, 공원일까”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중 이어진 갑작스러운 질문에 관객들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이를 본 그는 “어렵다. 디자인이란 그런 거다”라며 다양한 영역이 만나는 지점을 균형감 있게 디자인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서울 7017 프로젝트’가 시민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진행된 점에 아쉬움을 표하며 자연스럽게 ‘나에게 서울이란’이라는 질문의 답을 이어나갔다. 조반장에게 서울은 산책하고 싶은 도시로 만들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먹잇감’이다. ‘재생’이라는 탈을 뒤집어쓴 ‘개발’을 막아내는 방법과 시민과 함께 도시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방안 등을 고민하며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에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노려보던 주인공처럼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경탁은 자신의 작품들을 소개하며 욕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에게 있어 디자인은 ‘튀고 싶은 마음’, ‘나를 봐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과 같은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벤틀리 리저브 빌딩Bentley Reserve Building의 ‘페이퍼 폴딩 인스톨레이션Paper Folding Installation’도 남들과 다른 것을 만들고 싶은 욕망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빌딩의 로비에는 매년 새로운 예술 작품이 설치되는데, 2013년 이 리뉴얼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그는 남들처럼 캔버스에 인쇄한 그림을 걸고 싶지 않았다. 40만 원이라 는 예산 안에서 작업이 가능한 재료를 찾다가 종이를 선택하게 되었고 가로 3m, 세로 3m의 종이에 칼집을 내고 손으로 일일이 접어 조립하기 시작했다. 매우 고된 작업이었지만 덕분에 벤틀리 리저브 빌딩의 벽면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작품이 전시 될 수 있었다. 그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현재 정부에서 지원을 받아 진행 중인 ‘해루HAERU’라는 프로젝트를 소개했고 자신에게 서울은 아직 도전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은 ‘기회의 땅’이라고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 1부가 끝난 뒤, 화이트보드 위에 세 가지 질문의 답이 적힌 노란 포스트잇이 가득 붙여졌다. 이 중 몇 가지 흥미로운 답변들을 뽑은 후, 2부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관객들과 함께 나눴다. 어떤 이는 자신에게 있어 서울이란 ‘마음에 안 드는 엄마 집’이라고 답했다. 오랜 시간엄마의 취향에 맞게 꾸며진 집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이유로 함부로 손댈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살아야 하는 곳이라는 점이 서울과 닮았다는 것이다. 서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원하는 바가 다 다르다. 서울이라는 공간을 유지하는 기존의 시스템을 나 하나를 위해 바꿀 수 없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서울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디자인이란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라는 답에 다른 관객이 “우리는 익숙한 공간을 가장 편안하게 느낀다. 새로운 것을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의문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에 박경탁은 오히려 “디자인의 고객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헤어 디자이너와 동네 미용사 중 누가 더 훌륭할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 후 “고객이 동네의 아줌마인지, 헤어 쇼에 참가하는 관객인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고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덧붙였다. 이와 같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세 가지 질문들뿐만 아니라 도시·건축·조경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로 관객들의 이야기가 오고갔다. 빅토크는 단순한 잡담회에서 멈추지 않고 이 안에서 오고간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도 가질 계획이다. 제2회 빅토크는 ‘도시 그리고 생존: 겸업, 미필적 고의에 의한(가제)’이라는 주제로 5월 말 열릴 예정이다.
용산역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을 잇는 공원길 조성 계획
2009년 용산참사 이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던 용산4구역 사업 추진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 2016년 4월 6일 용산4구역 정비계획 변경(안)이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2009년 1월 철거세입자 5명과 경찰 1명이 숨지고 2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용산참사 이후 8년여를 정체했던 용산4구역(용산구 한강로3가 63-70번지 일대 국제빌딩 주변, 5만3,066m2) 일대에 도시공원과 주거ㆍ상업ㆍ문화 복합 지구가 조성될 예정이다. 특히 이번 정비계획 변경(안)은 용산4구역을 넘어 이 일대 도시 공간과 오픈스페이스의 통합적 계획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귀추가 주목된다. 2006년 용산의 국제빌딩 주변이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된 후 용산4구역은 시공자(삼성물산, 대림산업, 포스코건설)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다 2009년 용산참사가 발생(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이 이 대상지에 있다)한 뒤 재개발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사업은 표류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2011년 8월 삼성물산 컨소시엄이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공사도급계약 해지), 이후 사업을 맡겠다는 시공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2천억 원에 달하는 이자비를 조합(국제빌딩 주변 제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이 떠안게 되었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이자비 부담에 파산 위기에 몰렸던 용산4구역 조원들은 2014년 8월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나 사업정상화를 요청했다. 이에 서울시는 도시행정 전문가인 김용호 정비사업 코디네이터를 파견해 용산구, 조합, 전문가가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했다. 작년 6월에는 승효상 총괄건축가의 지휘 하에 공공건축가인 박인수(파크이즈건축 대표)와 김창균(유타건축 대표)을 MP로 투입해 기존 계획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기본구상안을 만들었다. 서울시는 용산4구역 내 공원(가칭 ‘용산파크웨이’, 1만7,615m2)을 미디어광장(8,740m2, 내년 조성 예정), 용산프롬나드(1만4,104m2) 등 주변 공원 및 획지와 연계하는 광역적 계획을 통해 이 일대를 대표하는 대규모 공원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 구상안이 실현될 경우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을 합친 것(3만2천m2)보다 약 1.3배 큰 규모(약 4만m2)다. 용산4구역은 오는 10월 착공해 2020년 6월준공이 목표다. 본지는 용산4구역의 MP인 박인수 공공건축가와 공원계획에 참여한 조경설계 서안(주)의 이진형 부소장을 만나 그간의 과정과 공원의 콘셉트, 이번 계획의 의의에 대해 들어보았다. 공공 공간과 사유지의 관계 서울시는 뉴욕의 배터리 파크나 베를린의 포츠다머 플라츠와 같이 대규모 공원과 건물이 조화를 이루는 복합 지구가 기본 콘셉트이며, 용산4구역 구상안이 기존계획의 한계였던 공공성을 확보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기존의 정비 계획이나 일반적인 재개발 방식과 비교해어떤 방식으로 공공성을 확보한 것인가? 박인수(이하 박): 용산공원(현 용산미군기지)과 중대부속 용산병원(근대건축 문화유산) 사이에 위치한 사업 부지(연면적 36만 1,298.09m2)에는 주상복합 아파트와 업무 시설 등이 들어서고, 기부채납으로 만들어지는 도시공원(용산파크웨이)이 조성될 계획이다. 기존 계획안대로라면 대형 민간건물이 공원에 바로 면하게 되어 마치 공원을 앞마당처럼 사유화 할 우려가 컸다. 따라서 건물 전면부의 방향을 틀거나 건물의 위치를 변경해 공공성이 침해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공원에 면한 주상복합 아파트의 저층부에는 로드숍과 같은 상업 시설이 들어오도록 해 공공 공간으로서 공원과 가로가 활성화되도록 계획했다. 기존 계획안은 (설계의) 좋고 나쁨을 떠나 공공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부지 경계를 중심으로 내부지향적인 계획은 그간 많은 개발에서 사용되는 방식이었으나, 이번에는 외부 공간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도록 했다. 특히 조합원 중 지분이 큰 교회와 사무소 등과 협의가 잘 이뤄진 것이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서울시는 대상지 내 주상복합 아파트 1층 전체 면적의 21%가 넘는 공간을 공공 보행 통로로 설치해 단지 내부를 전면 개방하는 새로운 모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박: 주상복합 아파트의 1~2층에는 상가, 그리고 3층에는 아파트의 부대복리 시설이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계획을 통해 저층부는 최대한의 공공성을 확보했다. 이진형(이하 이): 저층부를 공공 공간으로 열어 둠으로써 공원과 함께 대규모 오픈스페이스를 확보하고 3층 이상은 주민들이 쓰도록 하는 것이 큰 개념이다. 이로써 공원에 바로 면해 상업가로가 만들어지면 공원과 가로가 함께 활기를 얻을 수 있고 공원의 프로그램은 자생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될 것이다. 박: 처음에는 불만을 제기하던 조합원들도 수익성이 올라가니 상업 시설의 비율을 높이고 싶어 했다. 뿐만 아니라 서빙고로와 용산파크웨이를 남북으로 잇는 길들이 활성화되면 용산병원에서 용산공원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낙후된 용산병원 블록까지도 살아날 것이다.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사회적 실천으로서 모바일 건축
임시적이고 가변적인 주거 공간은 역사 속에서 ‘건축가 없는 건축’으로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움직이는 집은 역사적으로 유목민의 천막 구조로부터 비롯한다. 몽고 유목민의 텐트형 공간, 미국 인디언의 티피 천막, 집시의 왜건 마차 등이 그 예다. 이동 가능한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20세기 운송 수단의 발전과 여행의 확산에 따라 여행용 카라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오늘날 움직이는 집의 형태는 바퀴 달린 공간, 임시적 구조, 조립식 건축, 텐트 구조 등 이동과 변형이 자유롭고 어느 환경에나 유연하게 적용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삶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이동형 공간은 196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건축적 실험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모바일 건축mobile architecture’의 등장은 획일적인 주거 공간과 권위주의적이고 형식적인 건축 양식에 반발하는 비판적 의식을 배경으로 한다. 이번 지면에서는 ‘모바일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실천에 주목해 동시대 건축가와 예술가의 프로젝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1960~70년대 건축 분야에서 실험적으로 등장한 모바일 건축은 재료, 기능, 테크놀로지, 공상 등 다양한 측면의 실험을 거쳐 왔다. 오늘날에는 건축뿐만 아니라 미술, 연극, 퍼포먼스 등 시각 문화 전반에서 상호 융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동시대 예술에서 임시적 공간은 건축, 디자인 등 타 분야와의 교류 속에서 전시와 비엔날레, 게릴라성 프로젝트 등 확장된 형태로 펼쳐진다. 그 대표적인 예로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의 파빌리온 프로젝트, 파리 퐁피두센터의 이동형 천막으로 구성된 모바일 미술관, 잘츠부르크의 템포러리아트 파빌리온 외 세계적인 아트 페어와 미술관의 팝업 공간이 있다. 모바일 건축은 동시대 문화에서 트렌디한 공간으로 주목 받고 있으나 사실 오랜 시간 삶 속에서 구축, 변형, 확장되고 있는 자생적 공간이다. 노숙자들의 박스와 텐트, 파리근교 비동빌Bidonvilles의 대규모 카라반 집시촌, 소비에트 시기에 제작된 폴란드의 키오스크Kiosk, 유대교의 임시적 공간인 수카Sukkah, 암스테르담 운하의 보트하우스, 오사카의 집단 판자촌인 부라쿠민Burakumin과 서울 도곡동의 구룡마을, 한국의 불법 노점상과 가판대 구조물 외에도 다양한 임시적 공간을 찾아볼 수 있다. 일상 속 모바일 건축의 다수는 정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삶을 지키기 위한 임시적구조로 드러난다. 숲 속의 건축가들 파리에서 기차로 1시간가량 가면 시 외곽에 뱅센 숲Bois de Vincennes이 나온다. 주말이면 시민들이 피크닉이나 나들이로 찾는 장소다. 그런데 평소에는 인적이 거의 드문 이곳에 비밀스럽게 모여든 사람들이 있다. 바로 파리의 노숙자들이다. 도시를 부랑하던 노숙자들이 숲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노숙자들은 머물 곳을 찾아 도시의 거리로,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와 급기야 숲으로 오게 되었다. 도시의 혼란과 불안에서 벗어나 숲 속에 은밀히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들의 거주지는 우선 쉽게 이동 가능한 텐트를 기본 골격으로 한다. 주로 상용화된 텐트를 각자의 필요에 맞게 변형해 사용하고 있는데, 천막형, 이글루형 등 제각각 창의적인 구조가 인상적이다. 숲에서 거주하는 노숙자들의 텐트는 비좁은 도시 공간과는 달리 여유 있는 숲의 조건을 활용해 복합적 기능을 가진 독특한 공간을 창출한다. 음식을 구해 숲으로 귀가하는 노숙자들은 도시 시스템에 기생하지 않아도 되는 나름의 자립적인 공간과 삶을 모색한다. 이들의 변형된 텐트 공간은 거주하고자 하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주거 형식이다. 노숙자들의 텐트와 같이 임시적 형태의 공간에는 정주할 수 없는 삶을 꾸려나가고자 하는 인간의 강한 의지가 담긴다. 난민, 소수자, 거리의 부랑자, 노숙자 등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추방된 사람들에게 임시 공간은 물리적인 정주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소외된 삶의 존속 여부와 직결된다.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건축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송원아트센터, 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송원아트센터, 2014), ‘Hidden Dimension’(갤러리 스케이프, 2013)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갤러리 스케이프 책임큐레이터, 갤러리킹 공동디렉터,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2015년 동북아시아 도시 리서치(예술경영지원센터 후원)를 진행했으며,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시네마 스케이프] 조이
영화 ‘조이’를 보고나서 힘겨운 상황에 처한 여성이 어느 날 갑자기 성공하는 데에 방점을 둔 이야기가 아니라서 안심했다. ‘성공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고비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꿈 많은 소녀가 어떻게 한 가정의 고단한 주부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조이는 무책임하고 게으른 남편과 이혼한 후 두 아이를 맡아 키운다. 전 남편은 조이네 집 지하실에 얹혀산다. 조이의 부모도 이혼했는데 어머니는 우울증으로 온종일 텔레비전만 본다. 아버지는 애인과 헤어지고 무작정 조이네 집에 들어와 전 남편과 지하실에서 매일 다투며 지낸다. 이 집에서 제일 멀쩡한 사람은 조이를 믿고 항상 응원해주는 할머니와 5살짜리 딸이다. 다니던 회사에서 감봉당한 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물 새는 배관을 고치려고 마룻바닥을 뜯다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은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워킹맘의 고단함을 전한다. 왜 쓸데없이 꿈 따위를 강요했냐고 할머니에게 불평하는 장면에서는 마음이 아팠다. 조이는 우연히 깨진 와인 잔을 치우다가 손대지 않고 물기를 제거할 수 있는 걸레를 발명한다. 제품으로 만들어지기까지, 홈쇼핑으로 ‘대박’이 나기까지, 특허를 안정적으로 쓰기까지 파산의 위기로 매번 벼랑에 내몰린다. 하지만 제품에 투자한 아버지의 새 애인이 하필 부자였고, 무작정 찾아간 대형 홈쇼핑 회사의 최고 결정권자는 대뜸 그녀를 밀어주기로 한다. 특허 분쟁으로 사업을 이어나가기 어려워지자 머리를 손수 자르고 혈혈단신 찾아가 담판을 짓는다.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지만 다소 비현실적인 면이 있고 매력적인 조연 배우들을 병풍 역할로만 그린 점은 아쉽다. 그러나 성공 신화의 핵심이 달콤한 결과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지난한 과정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기에 볼 만한 영화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페르시아 정원과 이슬람 정원
#81 파라다이스와 사분원의 원작자를 찾아서 ‘파사르가다에’에 가다 지금 이슬람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바로 그 지역에서 ‘파라다이스’라는 개념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동쪽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서쪽의 스페인 안달루시아까지 보석 같은 이슬람의 파라다이스 정원들이 수없이 흩뿌려져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다. 인간의 가슴 속에는 천국과 지옥이 늘 공존해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기후 조건이 가장 험난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한반도의 경우, 봄부터 가을까지 사실상 반도 전체가 낙원과 같았다. 뒷동산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면 낙원이 따로 없었다. 고대 그리스 등 지중해 유역은 물론이고 온화한 기후대의 숲 속에 자리 잡고 살았던 유럽인에게도 자연 환경이 그리 험난하지 않았다. 굳이 사방에 담을 두르고 지하수를 퍼 올려 연못에 물을 대고 큰 나무들을 심어 그늘을 만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살 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낮이면 지옥의 불구덩이로 변하는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정원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지옥 불과 낙원의 개념이 모두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불구덩이와 모래바람을 피해 사방에 담을 두르고 별개의 세계를 구축하려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왜 하필 그런 곳에서 살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시작은 까마득한 옛날,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정주하여 농사를 짓고 부족 국가를 형성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실제 남아 있는 흔적은 기원전 6세기경 고대 페르시아 제국 때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이 지금의 이란이다.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가 합세하여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켰음은 지난달에 이미 언급했다.1 그 후 융성했던 바빌로니아는 다시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했다. 페르시아는 메소포타 미아의 경계를 넘어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서쪽으로는 지금의 터키,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인더스 강까지 이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팽창했다. 이 제국을 건설한 왕이 키루스 2세(B.C. 590년경~530년)였다. 사람들은 그를 대왕이라고 불렀다.구약 성경은 유대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기도 하다. 당시 이웃 나라들의 소식은 물론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강대국의 왕들이 구약에 자주 언급된다. 공중 정원을 지었던 산헤립 왕이나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도 여러 번 악역으로 등장한다. 키루스 대제의 경우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의외로 선한 역을 맡았다. 구약에 언급되는 타국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묘사되었다. 바빌론을 정복하고 나서 마침 그곳에 끌려와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도록 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로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바빌론을 항복시켰다고 기록했다.2 이렇게 제국의 주인과 왕조가 바뀌는 사이, 에덴동산보다도 아름답다고 했던 아시리아의 정원이 바빌론을 거쳐 페르시아로 전승되었다. 도시 건설, 건축, 물 관리 기법 역시 물려받았다. 키루스 대제는 현재 이란 남서부 산악 지대의 파르스Fars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첫 수도를 건설했다. 당시에는 ‘파사르가다에Pasargadae’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시라즈에서 약 13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로써 세상의 중심이 동쪽의 이란 고지대로 이전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파사르가다에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유적지로 등재되어 있지만, 담장의 흔적과 궁터, 매머드 사이즈의 기둥, 키루스 대제의 무덤 외에는 남은 것이 많지 않다. 그런데도 조경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바로 이곳에서 이른바 ‘사분원four gardens’의 최초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분원이란, 단어 그대로 해석하자면 하나의 정원이 네개로 분열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으나 반대로 네 개의 정원이 하나로 모였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3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분원을 탄생시킨 페르시아가 동서남북의 땅을 통합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네 개의 강과 네 개의 하늘을 합쳐 웅대한 제국을 이루었노라’는 자랑과 이념이 배어 있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키루스 대왕은 처음부터 정원에 중점을 두고 설계했다. 건물에 정원이 딸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였다.4 가로240m, 세로 200m 규모의 터를 높은 담으로 둘러쌌으며 이 방대한 정원 공간을 여러 단위로 나누고 그 안에 궁궐의 전각을 드문드문 배치했다. 이런 배치법은 오히려 창덕궁 등 동양의 궁궐을 연상시킨다. 큰 전각은 사방을 주랑으로 둘렀으며 작은 건물에는 앞뒤로 거대한 문주를 만들어 붙여 정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했다. 큰 전각들은 왕의 처소 혹은 알현실로 쓰였을 것이고 작은 누각들은 연회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석조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며 전각과 누각을 서로 연결했다. 수로의 중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원형 혹은 사각형의 석조 연못들이 배치되었다. 전각들 사이의 정원은 이렇게 수로가 중심이 된 사분원으로 단정하게 장식했지만, 건물 뒤편의 넓은 땅에는 수렵원을 조성했다. 사자부터 노루, 사슴 등 온갖 사냥감이 득시글거렸다고 전해진다. 이 또한 아시리아로부터 넘겨받은 전통이었다. 키루스 대왕은 소년 시절 수렵원에서 사냥을 해야 한다는 규칙을 무시하고 친구들과 담장을 몰래 넘어가 산에서 사냥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키루스와 그 뒤를 이은 페르시아 왕들의 정원 집착증에 대해서는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가 증언한 바 있다. 페르시아 왕은 가는 곳마다 우선 정원부터 만들고 보았는데 그 정원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과 식물이 가득차 있었다고 했다.5 물론 소크라테스가 직접 글을 써서 남긴 것은 아니고 그의 제자였던 크세노폰(B.C. 430년경~354년경)이 기록으로 옮긴 것이다. 이때 ‘페르시아 왕들의 담 높은 정원’이라는 개념을 그리스어로 옮겨야 했다. 그런데 왕도 없고 담 높은 정원도 없던 그리스에 같은 뜻을 가진 단어가 있을 리 만무했다. 구 페르시아어로는 ‘pairi-daeza’라고 했다.6 크세노폰으로서는 발음을 비슷하게 하여 그리스어로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파라디소스’였다. 우리 조상들이 처음으로 영어를 번역할 때와 흡사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크림’을 ‘구리무’라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후, 약 백 년쯤 지나서 유대인들의 경전 『토라』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때는 아직 기독교가 시작되기 전이었으므로 교회와는 무관하게 순수한 학문적 관점에서 타문화의 ‘고전’을 번역한 것이다. 당시 창세기를 번역하는 데 “하나님이 에덴이라는 곳에 정원을 조성했다”는 대목이 나왔다. 히브리어로는 ‘간 에덴Gan Eden’ 정도로 발음하는 데 이에 또 갖다 붙일 그리스어가 부족했다. 번역해 본 사람은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어려움이다. 문득 예전에 크세노폰이 창조했던 파라디소스라는 단어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이를 가져다 썼다. 그래서 페르시아 왕들의 담 높은 정원이 창졸간에 에덴 정원으로 둔갑하여 구약 성서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조경의 경제학] 공원, 누가 공급할 것인가
‘시장’이 공원을 공급할 수 있는가 정부는 공원을 ‘적정하게’ 공급할 수 있는가 우리 정부는 공원의 공급자 역할을 잘 하고 있는가 ‘시장’이 공원을 공급할 수 있는가 어릴 때는 공원이 좋은지 몰랐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1970년대에는 집 근처에 공원이 흔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공원에 관심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나니 어느새 공원이 삶 속에 들어와 있었다. 내 아이가 유모차를 타고 처음 산책을 한 곳은 분당중앙공원이었고, 보조 바퀴를 떼고 처음으로 두발자전거를 탄 곳은 한강공원이었다. 이제 산책을 즐기는 나이가 되고나니 집 뒤에 나지막한 근린공원이 있는 것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공원은 사람들이 집을 고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무심한 사이, 누군가는 꾸준히 공원을 만들어온 것같다. ‘이렇게 좋은 일을 한 그(녀)는 누구일까?’ 공원은 다양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도시인의 여가를 위해 조성되기도 하고, 자연을 보전하기 위해 지정되기도 한다. 근대적 의미의 공원은 권력을 잃은 왕과 귀족으로부터 빼앗은 사냥터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열악한 도시 환경에서 노동자의 생산성을 최소한이나마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가 고안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어두운 기원이 사실일지라도, 지금의 공원은 노동과 자본이 집적된 도시에서 녹색의 허파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조경가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공원의 편익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 좋은 공원을 공급하는 그(녀)는 누구일까?’ 이 글에서 공원public park은 ‘사적으로 소유되지 않고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를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자연공원보다는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조성해야만 공급되는 도시공원에 관심을 둔다. 지난 4회의 연재를 통해 우리는 ‘정원의 경제학’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정원private garden은 ‘사적으로 소유되고 소유자 임의로 사용, 수익, 처분되는 장소’다. 따라서 정원과 공원은 비록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경제학적 특성은 전혀 다르다. 정원은 이윤을 추구하는 누군가에 의해 공급될 수 있지만, 공원에 대해서는 그러한 누군가가 시장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적재화private goods인 정원과 달리 공원은 공공재public goods이기 때문이다. 매우 자주, 때로는 의도적으로 오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공공재다. 부동산 가격이 치솟을 때마다 심심치 않게 들리는 ‘토지와 주택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가격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 사례다. 토지와 주택이 다른 재화에 비해 공공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틀린 말이다. 경제학에 기원을 둔 공공재라는 개념은 상당히 엄격한 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공공재라는 단어의 오용이 심각한 문제인 것은 개념적 혼란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공재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가 사적재화와 다르기 때문이다. 사적재화는 시장기구에 의해 적절히 공급될 수 있지만, 공공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경제학자의 시각이다. 따라서 토지와 주택이 공공재로 취급되는 순간 부동산 시장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따라서 공공재라는 단어는 주의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공공재란 무엇일까? 경제학자는 경합성rivalry과 배제성excludability이라는 두 기준으로 우리 주변의 재화나 서비스를 분류하기 좋아한다. 여기서 경합성이란 어떤 사람이 한 재화나 서비스를 사용하면 다른 사람이 그 재화나 서비스를 사용할 수 없는 성질을 말한다. 내가 풀빵을 먹어버리면 당신은 그것을 먹을 수 없다. 이것을 경제학자는 ‘풀빵에 경합성이 있다’고 표현한다. 배제성이란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특정한 사람들만 사용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막을수 있는 성질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정한 사람들’이란 사용의 대가를 지불한 사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풀빵 장수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풀빵을 먹을 수 없다. 이것을 경제학자는 ‘풀빵에 배제성이 있다’고 표현한다. 다음 표는 경합성과 배제성을 기준으로 분류된 네 가지 재화나 서비스를 보여준다. 민성훈은 1994년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2년간 일했다. 그 후 경영학(석사)과 부동산학(박사)을 공부하고 개발, 금융, 투자 등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2012년 수원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가장 오래 가졌던 직업은 부동산 펀드매니저다.
창업 설계를 위한 매뉴얼
바야흐로 청년 창업가들의 시대다. 한때 새 시대의 개척자로 여겨지던 빌 게이츠, 래리 앨리슨 등의 기업가들은 어느덧 구세대의 인물이 되었다. 마크 주커버그, 에반 스피겔, 네이선 블레차르지크 등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른 청년 창업가들의 성공 신화가 전 세계의 젊은이에게 ‘스타트업 정신’을 불어넣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중소기업청 자료에 따르면 청년이 창업한 기업의 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30세 미만 대표자의 신설 법인 수는 2008년 2,027개에서 2015년 4,986개로 2배 이상 늘어났으며, 30대 대표자의 신설 법인 수 또한 2008년 13,751개에서 2015년 20,418개로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청년들 사이에 번지고 있는 ‘창업’, ‘스타트업’ 열풍만큼 젊은 기업들의 미래가 늘 밝은 것만은 아니다. 2013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30세 미만 대표자 기업의 1년 생존율은 49.6%로 절반이 채 안 되는 기업만 살아남았고, 5년 생존율은 16.6%로 80% 이상의 기업이 문을 닫았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준비 없이 젊음과 패기만믿고 창업에 뛰어들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설계사무소 창업을 꿈꾸는 젊은 조경가들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정부와 지자체에서 실시하고 있는 청년 창업가를 위한 지원 제도와 프로그램 중에 실질적으로 설계사무소 창업자에게 도움이 되는 지원 제도와 프로그램은 무엇일까?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젊은 창업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설계사무소 소장으로 산다는 것, 그 냉정과 열정 사이
“그래서 창업을 권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말리려는 것이냐” 설계사무소 소장들에게 이번 특집 이야기를 꺼냈더니 한결같이 이런 질문이 되돌아왔다. 건축설계사무소 소장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디자인 전문지에서 설계사무소를 열지 말라는 특집을 준비할리 만무한데도 말이다. 그 냉소적인 되물음은, 그만큼 지금이 어려운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설계사무소를 여는 일이 마냥 쉬웠던 시절이 있었을까. 시베리아 같은 바깥 세상에 뛰어드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결심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내 설계’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창업은 그 모든 갈등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전해보고 싶은 길이다. 이번 특집에 참여한 어느 소장이 말했듯 “설계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여는 것은 (그 자체가) 큰 꿈”이다. 자신의 사무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 같은 길을 먼저 걸어간 선배를 찾아 조언을 구하는 일일 것이다. 앞서 ‘좌충우돌 창업기’를 들려준 창업자들은 모두 30대에 자신의 사무소를 열었다. 공부를 마치고 각자 필요한 만큼의 실무와준비 과정을 거치면 30대 초반에서 후반의 나이가 되기 마련이다. 혹시라도 20대에 독립한 용기 있는 (혹은 무모한?) 소장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 젊은 창업자들의 선배 가운데 20대에 독립한 우리엔디자인펌의 강연주 대표를 찾았다. “멋모르던 시절이라 준비랄 것 없이 시작했다”며 사양의 뜻을 전하려는 그녀에게 사무소 운영 경험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달라 거듭 청했다. 정답보다는 늘 차분하고 냉철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 뒤에 숨겨진, 지난 20년을 버티며 회사를 성장시킨 뜨거운 열정과 과정이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이들에게 용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연주 대표의 창업 스토리는 『환경과조경』 2009년 7월호 조경가 인터뷰 꼭지에서 짧게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인터뷰는 7년 전 이야기에서 출발해 좀 더 자세한 속내를 들어 보기로 했다. 1997년 7월에 조경설계연구소 우리환경을 설립했다. 28살이란 이른 나이에 독립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강연주 대학 때 학교를 열심히 다니진 않았지만, 설계가 내 일이란 생각을 늘 했었다. 근사한 말로 포장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확고한 신념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설계가 좋았고, 무엇보다 매력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나 싶다. 어떤 일에 대한 매력 말이다. 졸업 즈음에 선배의 권유로 청산조경 설계실에 입사했는데, 이후 박명권 대표와 함께 조경기술사사무소 효신으로 옮겼다가 그룹한을 설립할 때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직장 생활 체질이 아닌지 그룹한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조경설계 서안으로 옮겨서 다시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는데, 다시 다른 회사로 옮겨가고 싶지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남편이 사업자를 내고 독립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서 아는 분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고 그렇게 혼자 시작한 게 첫 출발이었다. 1997년, 28살에 사무실을 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무 경험이 필요한 설계 분야에서 창업하기에 20대는 이른 나이가 아닌가 싶다. 처음부터 창업을 하겠다는 뚜렷한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많겠지만, 당시는 건설사나 설계사무소에서 그때그때 일을 받아서 도면을 그려주는 경우가 꽤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프리랜서를 생각했다. 그러다 회사를 여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했다기보다는 설계는 하고 싶었고, 일은 스스로 선택해 하고 싶다는 의지가 복합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독립적인 성향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설계가 무엇인지 막 배운때였기 때문에 나만의 설계 스타일을 추구하기 위해 사무소를 연 것은 아니다. 요즘엔 경력을 쌓고 자격증을 따거나 유학을 다녀오는 등 차근차근 준비해서 독립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나는 그렇게 계획적으로 준비한 경우는 아니다. 직원도 뽑고 이제 정식으로 ‘회사’라고 생각한 것은 언제쯤인가? 처음부터 ‘회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들었다. 사실 번듯한 사무실 공간을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직원을 뽑은 것은 회사를 만들고 1년쯤 지났을 때다. 당시 자리를 빌려 쓰던 사무실에서 나오게 되면서 신혼집 거실에 책상을 놓고 직원들 한두 명을 불렀다. 창업할 때 어떤 종류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가? 또 경력이 많지 않았는데 어떻게 수주를 했는지도 궁금하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고 비교적 설계비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분야가 아파트 조경이었다. 항상 집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아파트 조경이란 기초부터 하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 경험을 쌓으면 다른 일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창업 당시 IMF의 여파로 경기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아파트 조경 설계에 대한 요구가 막 생겨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룹한에서 설계 하도급을 받기도 하고 짧지만 3~4년의 실무 경험 가운데 알게 된 건설사에서 일을 받아 아르바이트하듯 일했다. 그렇게 기반을 쌓았다.
최윤석 그람디자인, 정원사친구들
01 창업을 결심하게 된 시점은 경력은 오래 되지 않았지만 회사 생활에서 어색함보다 익숙함(혹은 능숙함)이 몸에 배기 시작한 때인 것 같다. 어이없게도 창업 동지들과 술자리에서 나누던 이야기들―직장 상사 뒷담화부터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바람―이 1, 2년 사이에 창업 이야기로 구체화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오고간 것 같은데, 조경 설계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는 디자인에 대한 열정이 주로 기억에 남는다. 한 프로젝트의 A부터 Z까지 전 과정을 직접 체득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고 무엇보다 디자인 빌드design build 방식의 사업을 꿈꿨다. 근무와 작업 환경도 다른 방식을 추구하고 싶었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보다 더 좋은 수입을 기대한 측면도 있었다. 근데 이건 아직까지는 실패 상태다. ‘사업 준비는 치밀하게’라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어서 책을 찾아 읽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많은 선배들을 만나서 묻고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런데 사실 설계사무소 개업 자체는 사업자등록증 하나면 되더라(고향 친구가 보습학원 하나 차리는데 옆에서 보니 그게 더 복잡했다). 그래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마음에 수주될 프로젝트는 제로 상태인데도 법인설립, 사무실 위치, 기자재, 세무사 계약, 협회 등록, 조달청 입찰 참가 등록 등 이것저것 알아보며 일반적인 회사의 모습을 먼저 갖추고자 했다. 창업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보고 조금씩 준비하고 있을 때에도 사실 속으로는 주저하고 있었다. 일거리 수주에 대한 걱정, 어쩌면 현 직장에서 더 나은 커리어를 쌓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갈등, 불안정한 수입에 대한 두려움 역시 존재했다. 전반적인 준비 여건이 마련되었을 때, ‘조경 바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던 아버지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당신은 이십대 때 장사를 시작했다며 “시작하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 시작하고망할 사업이라면 빨리 망해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시 시작해라(취업이든 뭐든). 갑을관계로 보자면 원래 또래의 갑들은 은퇴하고 지금 내 나이에 젊은 갑들 맞춰주려니 정말 힘들다”고 조언해주셨다.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했다. 당시 막 결혼했을 때여서 ‘망할 거면 애가 태어나기 전에 빨리 망해야지’ 하는 생각도 있었고 비슷한 연령대의 갑과 을실무자들끼리 세대 공감할 수 있는 교류도 경쟁력이 있겠다 싶었다(근데 이 부분은 착각이었다. 당시엔 우리가 너무 어렸다). 회사 규모가 작으니 당연히 동업을 시작한 창업주들이 실무자이자 사장이자 경리이자 청소부인 1인 다역을 맡아 출발했다. 최윤석은 1977년생으로 경희대학교에서 환경조경디자인을 전공했고 선진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조경레저부에서 근무하다 2008년 경정환 대표와 그람디자인을 설립했다. 2012년부터 ‘정원사친구들(gardening friends)’을 결성하여 다양한 정원 문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2009년 대구 신천 공룡문화놀마당 디자인 공모 1등, 2011년 한글 글자마당 아이디어 현상공모 당선, 2012년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실내정원 설계공모 대상,2012년 한강 여주저류지 및 강천섬 활용 아이디어 공모 대상,2013년 시흥시 100년 타임캡슐 설치 공간 디자인 아이디어 현상 공모 대상,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참여정원 대상, 2014년 코리아가든쇼 우수상,2014년 노들섬 활용 아이디어 공모 대상을 수상했다.
최영준 Laboratory D+H
01 10년 전, 학부 3학년 때 진로의 방향을 설정하는 수업에서 정했던 30대 중반의 목표는 좋은 동료와 함께 작은 설계 스튜디오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정말 감사하고 운 좋게도 첫 직장에서 3년차가 되었을 즈음, 친구이자 동료였던 현재의 파트너 후 이챙 종钟惠城에게 좋은 창업의 기회가 왔고, 그 친구는 나에게 함께 하기를 제안했다. 함께 운동한 후나 퇴근길에서 “언젠가 함께 해보자”고 희망사항처럼 얘기만 나누던 우리에게 찾아온 진짜 기회였다. 설립 당시인 몇 년 전 만해도 중국의 건설 경기가 매우 호황이었다. 파트너십을 제안한 중국 현지의 사무실과 연계된 미국 회사라는 회사 모델을 설정하고 주로 중국 대륙의 프로젝트를 목표로 삼았다. 창업을 결심한 후에도 거의 2년 가까이 창업 준비와 신분 변경 등에 시간이 소요되었고 2014년에 이르러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회사 이름이 다소 길고 거창한 느낌이 있는데, 회사의 지향점을 잘설명하는 키워드를 담고 있다. 파트너십을 제안한 회사의 이름이 DH라는 이니셜로 요약되는데, 우리 사무실은 그보다 실험적이고 혁신을 추구하는 작업을 하자는 취지로 ‘Laboratory’를 앞에 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LAB의 지향점을 순수 ‘디자인design’ 실무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이슈나 환경 문제를 다루는 ‘희망hope’을 담은 작업도 추구하자는 의미로 ‘Design+Hope’라고 재정의했다. 아직 회사의 기반을 잡아가는 중이라 본래의 지향점에 온전히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설계비와 상관없이 학교와 같이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프로젝트나 저영향 개발 방법을 적용한 프로젝트에는 최대한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02 창업을 결심한 시기가 결혼을 서너 달쯤 앞둔 시점이었는데, 안정적인 미래를 꿈꾸고 보여줘야 할 시기에 기존 회사의 아늑한 울타리에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또한미국에 있다 보니 신분 문제를 해결하기가 복잡하고 까다로웠고 오랜 기다림을 필요로 했다. 주된 시장이 중국이라는 사실 또한 나에게는 불안 요소였다. 언어의 장벽이나 먼 거리에서 올 수 있는 물리적 한계와 더불어 중국인만의 문화적인 고유성, 중국의 사회적인 특성 또한 언제, 어느 때에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영역이 었다. 다행히 아내가 같은 분야의 일을 하기에 이해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비자 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거의 2년이 걸렸지만, 그 사이에 여러 경험을 쌓으며 회사의 창업을 준비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과의 문화적 차이는 동료들의 도움과 신뢰를 바탕으로 극복할 수 있었고 최근에는 전 직장 동료였던 친구도 합류하여 큰 힘이 되고 있다. 최영준은 1982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설계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과 한국의 오피스박김에서다양한 성격의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Archiprix International 본상, 뉴욕 신진건축가 공모 대상,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공원을 읽다』, 『용산공원』 등의 공저가 있으며, 현재는 후이챙 종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설계사무소 Laboratory D+H를 설립해 활동 중이다.
정성빈 Miners+100. Inc.
01 ‘서울100’ 프로젝트1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시작됐다. 2014년 봄, 책 한 권을 같이 만들어 보자고 꾸렸던 모임이 회사가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서울100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기회와 마주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사무실 한켠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이 들어왔다. 2014년 9월, 서울연구원과 용역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법인사업자가 필요했고 이 일을 계기로 모임이 회사(법인)가 됐다. 2014년에 우연히 생겼던 모임이 회사가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지면에 매끄럽게 적어내는 게 쉽지는 않다. 그럴듯한 창업의 계기를 기대했던 독자를 위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적고 싶지만, 서울100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 계획에 없던 일과 기회를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회사가 된 것이 전부다. 명함 속 회사 로고 아래에 ‘Landscape 3.0’을 큼지막하게 넣었다. 모임이 시작되던 무렵 라펜트에 ‘한국 조경 3.0 시대’라는 제목의 칼럼이 올라왔다. 변화하는 시대에 새로운 조경을 당부하는 오휘영 명예교수(한양대학교)의 선언적인 글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막연하게 우리 세대(3.0)의 조경은 무엇일까 함께 고민하고 있었다. 그 고민은 우리가 배운 조경으로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와 맞닿아 있다. 이는 여전히 유효한 고민이며 나 또한 표류하며 답을 찾고 있다. 02 공동 창업자 3인은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조경학과 선후배 사이로, 스무 살 무렵부터 10여 년간 가까이 지내왔다. 한 명은 네덜란드 유학길에 오르기 전 룸메이트이자 가장 좋아하는 형이고 또 다른 한 명은 현재의 룸메이트로 가장 좋아하는 동생이다. 이따금씩 만나 맥주 한 잔과 함께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가 매일 만나 함께 일을 하는 묘한 관계가 되면서 시너지와 한계점이 공존하게 됐다. 준비 없이 시작한 창업이기에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데 많은 부족함과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좋은 상황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최근에는 법인세를 납부하는 과정에서 따끔한 수업료(세금)를 내면서 사무실 살림을 야무지게 꾸려가는 방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회사를 다닐 때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4대 보험을 올해가 되어서야 시작했다. 서울시 창업 지원 프로그램2으로 지원 받은 6평 남짓한 공간에 집기들이 하나둘씩 채워지며 사무실의 모습이 갖춰지고 있다. 정성빈은 1981년생으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조경학과를 졸업한 후네덜란드 베를라헤 인스티튜트(Berlage Institute)에서 도시 건축 석사 학위를 받았다.이후 2014년 9월, 대학 동문인 이재원, 원광연과 함께마이너스플러스백(Miners+100)을 설립했다. 이들은 조경 설계, 지역 계획,도시 기획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2015년 5월, 리서치 결과물인『서울100 Vol.1 이태원』을 발간했다.
이호영 + 이해인 HLD
01 결심 디자이너로서 설계사무소를 열어 나만의 디자인 철학을 펼치고자 하는 꿈은 설계를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무소를 열기 전, 충분한 경험을 통해 설계에 대한 신념이 확고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설계는 개인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디자인의 최종 결정자가 내가 아닌 경우가 많다. 설계에는 정확한 답이 없기에 나의 설계안이 유지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최종 결정자의 의견보다 나의 의견이 더 좋은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잦아지면서 창업할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계사무소를 차리는 것은 디자인의 최종 결정을 할 뿐만 아니라 조직을 꾸리는 리더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조직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된 것 역시 창업에 큰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무엇보다 창업을 결심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파트너가 있는지의 여부였다. 우리는 ‘같이 일 해볼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공유한 지 1년 만에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함께 설계사무소를 열었다. 차별화 한국에서 창업을 했지만 과거에 국제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유학 중에 하버드 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만났던 친구들 그리고 AECOM, 파퓰러스POPULOUS, 오피스 maoffice ma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 홍콩, 독일, 영국 등 여러 국가에서 디자이너나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협업 중이다.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오피스 ma와 한국, 중국 프로젝트에 공동으로 제안서를 제출하고 있고 현재 진행중인 국제 설계도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네트워크를 통해 소규모 설계사무소가 단독으로는 진행하기 어려운 국제 프로젝트와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여할수 있었다. 회사 운영에 있어 꼭 지키고 싶은 원칙 중 하나는 모든 구성원이 회사가 돌아가는 데 필요한 역할을 고루 나눠 갖는 것이다. 설계에 참여하지 않고 프로젝트 관리만 하는 사람, 디테일 설계는 잘 하지만 콘셉트 설계는 못하는 사람, 설계는 잘 하지만 발표는 전혀 못하는사람 등이 생기면 작업이 비효율적으로 진행된다. 이호영은 1977년생으로, 고려대학교에서 원예학을 전공하고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조경설계 서안에서5년간 실무 경험을 쌓고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지역 계획 및조경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미국 AECOM과 오피스 ma(office ma)에서6년간 조경과 도시설계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해인은 1982년생으로, 서울대학교와 UC 버클리에서 도시계획을 공부하고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 설계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미국 AECOM과 파퓰러스(POPULOUS)의 샌프란시스코 지사에서 약 5년간다양한 조경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자하 하디드의 프로젝트 팀에서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건축 감리에 참여하기도 했다.
박종완 플레이스랩 기술사사무소
01 조경을 전공으로 선택하면서 막연하게 설계사무소 창업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화된 시기는 설계사무소에 취업하면서인 것 같다. 설계 실무 경력이 쌓이면서 창업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했고 나름 몇 가지 창업을 위한 큰 조건을 만들었다. 다양한 프로젝트 수행, 경력 등에 관한 것들이고 기술사 자격 취득이 창업을 위한 가장 마지막 조건이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특정한 시기에 생긴 것이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라 창업을 결심한 명확한 시점은 따로 없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작은 생각들이 커지고 현실화되면서 창업이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해왔다. 상호에서 그 회사의 성격이나 지향하는 목표가 드러나야 한다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몇 달 동안 여러 가지 대안을 두고 고민을 했는데 그 과정을 설명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것 같다. 사무소 이름을 놓고 몇 가지 안이 있었다. ‘‘조경 설계’라는 명칭을 넣을 것인가? 아니면 조금 확장해서 ‘설계(디자인)’라는 단어만 포함할 것인가? 아니면 기억이 잘 될 수 있는 인상적인 이름을 붙일 것인 가’라는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 결국 상호를 ‘플레이스랩PLACELab’으로 정했는데 무엇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지 나타내기 위해 ‘장소place’라는 단어를 썼다. ‘공간space’이라는 물리적 환경에 사람과 이야기, 기억 등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장소場所’를 만드는 회사임을 나타내고 싶었다. 그리고 ‘laboratory’는 요즘 회사 이름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단어인데 전체적인 어감을 고려하는 동시에 최근 트렌드를 반영한 작명이다. 정원을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가 몇 년 전부터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법 제정과 더불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가든쇼, 박람회 형태의 행사들이 많이 열리고 있다. 그래서 플레이스랩은 기본적으로 조경 설계 작업을 위주로 하지만 정원 프로젝트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대학교와 연계해서 도시환경계획 관련 연구 프로젝트에도 꾸준히 참여를 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설계사무소의 업무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 다양한 분야와 협업하는 프로젝트의 경우, 조경뿐만 아니라 타 분야의 업무 방식이나 이슈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설계나 시공으로 이어지기 전 단계의 연구, 정책적인 측면의 내용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박종완은 1979년생으로 경북대학교에서 조경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우리엔디자인펌에서 2013년까지 조경설계와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창원대학교에서 진행된 보행, 습지, 마을만들기,도시미기후 등 다양한 도시환경계획 관련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현재 플레이스랩 기술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박은혜 denovo studios
01 계기는 필연적이면서도 우연적이었다. 처음부터 창업을 위해 모인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같은 회사를 다니며 디자인과 창업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다. 시간이 흐른 뒤,각자 개인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고 우연히 과거에 나눈 이야기가 구체화되어 창업으로 이어지게 됐다. 필연적 갈증과 우연한 시기가 만나 창업의 시작점이 되었다. 필연적 갈증이라는 말이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는 우리에게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동안 회사 안에서 할 수 없었던 것, 우리가 도전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고 아파트 방 한 칸에서 쓰기 시작한 사업계획서가 점차 구체화됐다. 각자가하고 싶었던 일이 더욱 명확해진 시간이었으며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뚜렷해졌다. 나는 국내가 아닌 중국 패션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성격과 감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고 이들은 내게 신선한 자극을 줬다. 당시 패션계에서는 아르마니Armani가 인테리어 디자인을 주도하고 있었으며 아르마니 카사Casa(가구와 인테리어 소품 전문 브랜드)를 론칭 중이었다. 아르마니뿐만 아니라 다양한 회사가 패션 분야에 국한되지 않은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국내로 돌아와 조경 설계를 하면서 패션계와 비교했을 때 조경계가 생각보다 많이 경직되어 있다고 느꼈다. 보이지 않는 벽이랄까? 우리는 좀 더자유롭고 싶었다. 이런 의기투합으로 만들어진 것이 데노보스튜디오denovo studios다.우리는 조경부터 패션까지 다양한 디자인 분야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여러 분야의 회사와 협업도 하고 있다. 그 중 조경 설계와 패션 디자인이 우리의 주된 분야다. 박은혜는 1979년생으로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전공했고 2년간 패션 디자인업무를 경험했다. 중국에서 4년 동안 패션 디자인 및 컨설팅을 수행한 뒤,인터조경기술사사무소와 오피스박김에서 근무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현재 인터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만난 강천기와 함께 denovo studios를이끌고 있다.
박영석 Place_On
01 2015년 여름, 독일 뮌헨에서 도시 공간과 미디어 테크놀로지 사이의 접점을 찾고 있었다. 조경가로서의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서울에서 ‘노들꿈섬 운영구상 1차 공모’에 함께 참가하자는 연락이 왔다. 네덜란드 로테르담과 독일 쾰른, 뮌헨을 오가며 주민참여형 프로그램과 단계별 협의체 조직을 위시한 새로운 운영 조직과 전략을 담은 ‘노들노들 놀아들: 도시 야생터에 우리들의 놀이로 만드는 문화의 섬’을 완성해 제출했다. 이 설계안은 ‘노들꿈섬 운영계획·시설구상 2차 공모’에 참가할 수 있는 10개의 작품 중 하나로 선정됐고, 보다 구체적인 계획안을 작성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왔다. 반팔을 입기에는 조금 추웠지만, 자신감으로 가슴이 가득 찼던 초가을이었다. 노들꿈섬 공모의 형식과 제출 내용은 주최 측에게도 참가자에게도 생경한 방식이었다. 우리는 팀 이름처럼 ‘빅바이스몰Big by small’하기 위해 최대한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고 협조를 요청해야 했다. 건축가, 조경가, 관계 부서 공무원 등 조경 산업 분야의 종사자뿐 아니라 문화 기획자, 사회 활동가, 예술가, 요리 연구가, 유아 교육 전문가, 공연 연출가, 사회적 기업가, 도시 양봉가,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임원, 지역 협동 조합원, 지역 구청장 등 도시 안에서 나름대로의 생태계를 구축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났다. 이때의 만남과 대화는 조경가로서 도시를 공간적인 행위만으로 접근하려던 관점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노들꿈섬 운영구상 1차 공모’의 최종안을 제출한 뒤 3일을 쉬기로 했다. 밤낮으로 사람을 만나느라 체력적으로 지쳐있었고 5개월여를 노들섬에서 노들거리는 꿈을 꾸느라 정신적으로도 그로기groggy 상태였다.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다잡을 필요도 있었지만, 제안서를 작성하면서 구축된 네트워크와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결국, 휴식 후 곧장 마을만들기 사업에 동참하기로 했다.쉬는 동안 노들섬 운영 관리에 시간을 오롯이 바쳐야 하는지 다시 연구자로 돌아가 지난한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지 따위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늦은 오후에 잠에서 깼을 때, 핸드폰 액정에서 노들섬을 계기로 알게 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임원에게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를 발견했다. 그 임원은 선뜻 서울 압구정 로데오역에 위치한 지플러스G+ 스타존의 시즌 5 리뉴얼 작업을 맡겼고, 그날 저녁에는 몇 년 만에 연락이 온 대학 선배가 국가기술표준원의 휴게 공간 설계를 부탁해왔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데도 없는 듯 했지만 사실 어디에나 있었다. 박영석은 1984년생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에서생태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도시연대 커뮤니티디자인센터에서 다양한 주민참여형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독일 뮌헨 공과대학교 경관 및 산업 경관 연구소에서초청 연구생으로 수학했다. 도시 경관 웹진 ‘지니어스케이프(Geniuscape)’의설립자이자 편집장이며 도시 공간 연구 집단 빅바이스몰(Big by small)의 공동 대표다.뿐만 아니라 마을 드라마 연구소 ‘이웃(OIOTA)’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공간 작업소‘플레이스온(Place_On)’을 이끌고 있다.
박경탁 salmworkshop
01 작년 11월에 창업을 했다. 회사에서 쫓겨난 지 8개월 만이다. 미국에서 5년간의 회사 생활을 뒤로하고 만난 자유는 예전에 비해 나를 느긋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때는 이보다도 2년 전의 일이다. 마음은 있었지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시작을 몇 년 후로 미루고 있었다. 회사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락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 한 때 거침없던 심장도 안락한 보금자리 덕택에 새로운 시작을 조금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획보다 좀 더 일찍 등 떠밀려 퇴사한 덕분에 다른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경험해 볼 시간과 기회가 생겼지만, 만약 다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자의로 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창업을 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덜 두려운 곳으로 가기 위함일 것이다. 창업을 결심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5년을 보낸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삶을 회상하게 되면 아마 그때의 경험이 내 커리어에 가장 중요한 변곡점을 만든 행운의 순간이라 생각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테크숍Techshop에서 수업과 프로젝트를 통해 워터젯waterjet, 비닐커터vinyl cutter, 3 or 4 axis router 등의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 장비와 진공성형vacuum forming, 사출성형injection molding, 샌드블라스트sand blasting, 분체도장powder coating 등의 패브리케이션fabrication 장비, 직물 및 전자 장비를 배우고 사용하게 됐다. 이는 구상을 먼저 한 후 구현에 대해 고민하던 나의 디자인 관성을 재료와 제작 방식의 선택과 구상을 시작할 때부터 함께 고려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변화시켰다. 직접 시공을 한다는 가정 아래에서의 재료와 제작 방식·장비의 선택은 디자인의 디테일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콘셉트와 방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이러한 경험과 디자인 프로세스의 변화는 큰 스케일의 디자인에서 중간 또는 작은 스케일의 디자인으로, 늘 사용해왔던 재료에서 새로운 재료의 활용으로, 현장 중심의 공사 방식에서 사전 제작을 적극적으로 늘린 공사 방식으로 나의 관심사를 옮겨 놓았다. 결국 이러한 관심사를 실천할 수 있는 틀을 만들고 싶어 창업을 하게 됐다. 삶워크숍salmworkshop은 그러한 실천의 틀로써, 샌프란시스코 피어pier에 위치한 전 세계 메이커maker들의 꿈의 공간인 오토데스크 피어 9 워크숍Autodesk's Pier 9 Workshop1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박경탁은 1979년생으로,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고 하버드 GSD에서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SWA 그룹의 샌프란시스코 사무소(SWAGroup San Francisco Office)에서 5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계획 프로젝트를수행하며 미국조경기술사(RLA) 자격증을 취득했다. UC 버클리 익스텐션(UCB erkeley Extension)에서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으며 테크숍(Techshop)에서프로토타이핑(prototyping), 패브리케이션(fabrication), 제조(manufacturing) 등과관련된 다양한 장비 사용법을 익혔다. 후에 이 장비 사용법을 활용한 프로젝트를수행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 프로젝트 팀 O3스코프(O3scope)를 이끌고 있으며2015년에 salmworkshop을 열어 운영 중이다.
김호윤 Landscape Design Office HOWON
01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최근 조경 분야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사무실을 열었다. 일주일 만에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했고 일주일 후 사무실을 오픈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기존의 회사를 다니며 느꼈던 경제적인 문제와 업무에 대한 낮은 만족감 등을 해결하겠다는 거대한 포부 때문도 아니었다. 설계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여는 것이 큰 희망 중 하나일 것이다. 나 역시 꿈꿔온 일을 실천했을 뿐이다. 조경에 대한 나만의 틀을 구성하고자 했던 것이 계기일지도 모른다. 오래 전부터 설계에 대한 개인적인 철학과 방향에 대해 생각해왔다. 현재 짜인 틀에서 생각을 발전시키고 실행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고 창업은 그 갈증의 해소 방법이었다. 국내 조경설계사무소는 소장의 마인드, 인력의 구성, 구성원의 세대와 경험, 주요 프로젝트의 성격 등에 소소한 차이가 있지만 단조롭고 비슷한 직능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 게다가 다른 분야에 비해 대화와 토론이 빈곤하다. 최근에야 생성되기 시작한 담론에서 다른 영역이나 조직과의 연대를 통해 다양한 활동에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을 들었을 때, 왜 기본은 강조되지 않는지 답답했다. 포화 상태에 이른 조경 산업의 기반 영역을 확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계의 기본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바른 설계 집단 = HOWON 기초가 튼튼한 조직을 구성하고 싶다. 조직의 구성은 사람이기 때문에 직원 설계 교육에 많은 역량을 기울이고자 한다. 직원의 입에서 우스갯소리로 ‘HOWON 아카데미’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교육 때문에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아프다. 이런 설계 교육을 받은 신입, 경력 직원들이 국가로 비유한다면 비상시국처럼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조직은 사람과 함께 성장해야 하고 이런 집단이 조용하 지만 강한 설계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정통성을 기반으로 한 스타트업 특별한 차별화 전략은 없다. 단지 기본에 충실히 더 세심하게 더 강하게 더 즐겁게 일할 뿐이다. 안정적인 조직 구성이 가장 큰 목표다. 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스타트업start-up이 가져야 할 덕목 중 하나가 무모함이 아닐까. 시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설계 조직에서 진행했던 수많은 프로젝트 경험을 토대로 설계를 기반으로 하는 디자인 빌드design build 오피스를 구성하는 것이 현재의 희망사항이다. 이를 사무소 구성원의 공통된 목표로 만드는 것이 지금 나의 임무다. 나무와 설계사무소 소규모 농장을 준비하고 있다. 조경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 중 하나가 수목이기에 직접 다뤄보고 싶었다. 회사의 경영적인 측면에도 일부분 보탬이 될 것이다. 또한 직원이 가진 식재 설계에 대한 이상을 현실화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며 수목의 생리적 특성을 접하기에도 좋을 것이다. 생각 없는 빵빵이는 이제 그만! 김호윤은 1978년생으로, 청주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시립대학교도시과학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기술사사무소 아텍플러스에서조경 설계의 기본을 다진 후 삼성에버랜드 디자인그룹에서 8년간 조경 디자이너로서영업·설계·시공의 관계를 조율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현재는 Landscape Design Office HOWON을 설립해 운영 중이며바른 설계 집단을 구성하기 위해 기초 중심의 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NEW START, MY DESIGN OFFICE
조경을 전공한 그 많은 학생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설계 분야로 진로를 택하는 학생들이 매년 줄어들고 있다. 설계사무소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눈에 띄게 줄어든 만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는 젊은 조경가도 찾아보기 힘들다. 신생 벤처기업을 뜻하는 ‘스타트업’이 주목받는 시대적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지만 조경에서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번 호 특집에서는 자신의 디자인 오피스를 열고 설계가로서의 꿈을 묵묵히 실천해나가고 있는 이들을 소개한다. 이들의 좌충우돌 창업기가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는 이들에게뜨거운 자극이, 또 새로운 희망이 되기를 기대한다. 01.좌충우돌 창업기 김호윤(Landscape Design Office HOWON), 박경탁(salmworkshop),박영석(Place_On), 박은혜(denovo studios),박종완(플레이스랩 기술사사무소),이호영+이해인(HLD), 정성빈(Miners+100. Inc),최영준(Laboratory D+H),최윤석(그람디자인) 02.설계사무소 소장으로 산다는 것, 그 냉정과 열정 사이 강연주(우리엔디자인펌) 03.창업 설계를 위한 매뉴얼 조한결 + 젊은 창업자들에게 던진 세 가지 질문(공통) Q1. 창업을 결심하게 된 계기와 창업한 회사의 지향점은? Q2. 창업 전후로 가장 어려웠던 점과 창업하길 정말 잘했다고 느낀 순간이 있다면? Q3.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나 작업은?
[재료와 디테일] 디딤돌, 장식재인가 바닥재인가
외부 공간, 특히 조경 공간을 설계할 때 중요한 사항 중 하나는 사람의 이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그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이 사람들이 공간을 어떻게 이용하고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예측하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절대 설계가가 의도한 패턴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또 다른 어려움 중 하나는 방향, 길의 흐름을 잡는 일이다. 사람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으며 필요한 길의 폭을 예측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기본이 되는 기능적인 큰 흐름을 먼저 만들고 작은 흐름을덧붙여 공간과 공간의 연결을 도모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공간을 만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핏줄에 비유하면, 큰 동맥(큰 선)에서 뻗어나간 수만 갈래의 작은 실핏줄이 신체 기관(공간)을 연결하고 분리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본디 길이란 연결하기 위한 것이지분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길이 전체 공간에서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 공간 활용에 부담을 주는 부정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아야 하기에 길 만드는 일은 몹시 예민한 작업이다 공간을 계획하는 디자이너라면 늘 전체 공간을 적절하게 배분해 쓰임이 좋은 공간으로 만드는 데 온 신경을 곧추 세울 것이다.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기 위해 길의 부피를 줄여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간 활용이 쉬우려면 길은 단순히 연결 기능만 수행해야 한다. 디딤돌로 길을 만든다. 이 길은 많은 부피를 차지하지 않으면서 연결 기능을 충분히 수행한다. 길이 부피를 적게 차지하기 위해서는 면이 아닌 점의 개념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에 듬성듬성 놓아 부피를 줄일 수 있는 동시에 연결의 기능을 수행하는 디딤돌은 최고의 효과를 가진 재료다. 견고하며 필요에 따라 쉽게 제거하고 변경할 수 있어 가변적인 재료이기도 하다. 재료의 선정에 따라 다양한 공간 연출도 할 수 있다. 재료 선택의 폭이 이처럼 넓은 설계 언어가 또 있을까.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공간 공감] 국회의사당 사랑재
20대 총선 직전의 긴장감과 벚꽃의 화사함이 교차하는 시기에 국회의사당을 찾았다. 국회라는 다소 중압적인장소가 상춘객으로 북적거리는 장면도 의외였지만, 더욱이 의원동산 자락 화합의 꽃밭에서 깽깽이풀의 꽃을 무더기로 본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팔도에서 모인 다양한 꽃들의 환대를 받으며 오른 의원동산의 상부에는 너른 평지가 펼쳐졌고 사랑재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재까지 이르는 시퀀스는 ‘화합의 꽃밭 → 의원동산의 경사지 계단 → 너른 마당과 사랑재’의 3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의원동산은 그 높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한강을 볼 수 있는 전망대로서의 기능을 부여받았고, 사랑재 역시 전망의 잠재력이 다분하다. 사랑재 일대를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방식이야 다양하겠지만 우선 떠오른 것은 ‘돌아들어가는 맛’을 부가 하는 것이다. 화합의 꽃밭에서 의원동산으로 곧바로 오르는 동선 대신 경사를 완만하게 즐기면서 사랑재에서 먼 쪽으로 돌아 오르게 하는 방식이다. 낮은 담이나 지형, 식재로 공간을 구분지어 두세 공간으로 나눈 후 사랑재에 다다르게 하면 어떨까? 마지막에 당도한 사랑재에서는 깔끔한 마당과 한강으로의 막힘없는 뷰를 맛볼 수 있게 하고…. 한눈에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화끈함보다는 발품을 팔면서 점진적으로 새로운 장면이 전개되는 방식은 우리의 오래된 공간에서 애용되던 기법임을 상기해본다. _ 정욱주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디자인 노트] 갯골에서 찾은 경관 김기천
시흥시는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프로젝트 경험이 많은 도시다. 얼마 전 공원의 일부를 준공한 배곧신도시의 중앙 및 수변 공원을 비롯해 LH에서 시행한 시흥 은계지구, 그리고 이번 장현지구 조경 설계공모 등에 참여했다. 덕분에 잊을 만하면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변해가는 도시의 모습을 꾸준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시흥에 방문할 때마다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만큼 최근 몇 년 사이에 도시경관적 차원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시흥시는 전략적으로 지역성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이 상당해 도시의 특성이 분명하다. 때문에 대상지의 디자인 방향을 끌어내는 과정이 비교적 빨리 진행됐다. 갯벌 담은 공원 시청과 서해 바다의 초입을 연결하는 갯골길(늠내길 2코스), 긴 언덕인 장현長縣, 새재마을 등의 지명은 갯골, 갯등, 언덕 등 고유의 자연 환경에서 비롯됐다. 이 자연 요소를 디자인 언어로 삼아 설계를 진행했다. 과거의 지명인 ‘잉벌노仍伐奴’는 뻗어나가는 장소라는 뜻이며 ‘늠내’는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드넓은 경작지를 통해 물과 뭍으로 열려 있는 풍경은 시흥시의 경관적 특징과 스케일을 보여 준다. 현장 답사 때 둘러본 대상지는 좁은 폭 때문에 실제보다 협소해 보였다. 폭은 좁고 길이는 긴 개별 공원 부지에 기능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안 그래도 좁아 보이는 공원이 더욱 작게 느껴지리라 생각됐다. 통일된 디자인 언어를 바탕으로 대상지가 하나로 읽혀야 장현천을 중심으로 한번에 읽히던 개발 전 경관의 스케일이 유지될 수 있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공원의 상징성과 존재감을 위해서도 일체화된 디자인 언어는 필수적이었다. 김기천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룹한에 입사하여 현재 전략디자인본부를 맡아 이끌고 있다. 2007년 행정중심복합도시 국제 공모전 이후 현재까지 국내외 다양한 형태의 도시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작업으로는 서울대공원 재조성, 시흥 군자 배곧신도시 수변 공원, 브루나이 워터프런트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공공 오픈스페이스를 통한 도시 환경의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장려작: 바라지 시흥 그리고 장현 사람 소통터
‘바라지’는 ‘돌보다’, ‘돕다’, ‘기원하다’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이다. 예부터 시흥의 방죽, 논, 간척지를 가리켜 ‘바라지’라 불러왔으며 바라지물길은 시흥시를 대표하는 새로운 도시 브랜드다. 바라지물길은 늘 같은 자리에서 시흥 사람의 삶을 보듬으며 수많은 생명을 품어왔다. 장현 사람 소통터가 바라지물길처럼 늘 장현의 사람들과 자연을 돌보고 시흥시의 중심 도시로서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길 기대한다. 설계 목표 마을 내음을 간직한 도시: 마을 사람들이 소통했던 장소인 우물터, 도시 개발로 잊힌 능소화 길, 유실수가 많던 너믄들, 삼대 시장 중 하나인 능곡삼거리장터 등 장현 사람들의 이야기와 마을 풍경이 고스란히 배인마을 내음을 간직한 도시를 만든다. 지속가능한 마을: 다른 도시보다 2~3% 정도 높은 이주율은 시흥시가 70만 인구의 대도시로 변모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다. 애향심, 마을 문화, 도시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시흥시가 추진하고 있는 희망마을만들기, 바라지물길 브랜드 사업 등의 정책과 상응하는 계획으로 지속가능한 마을을 제안한다. 전략 1. 도시 브랜드 바라지 시흥 시흥시의 대표 브랜드 ‘바라지물길’과 연계한 도시 이미지를 정착시키고 역사와 함께 숨 쉬며 미래 100년을 내다보는 시흥광장을 조성한다.
우수작: 시흥始興 초록바라지
‘바라지’는 ‘돌보다’, ‘기원하다’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이다. ‘방죽’을 이르는 말이자 소금기가 가득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에 붙인 이름이기도 했다. 300년 간척의 역사와 함께 해온 시흥 호조벌은 땅과 자연에 순응하는 옛 시흥 사람들의 지혜의 결실이다. 현재 기능적인 개발로 격자 형태가 된 도시 위에 사라져버린 땅, 산수 경관의 기억과 흔적을 재배열하여 사람과 자연이 교감하는 새로운 시흥바라지로 거듭나게 한다. 시흥 장현의 옛 지명에서 드러나는 우리 고유의 경관을 바탕으로 산山, 수水, 곡谷, 고개峙, 들野에 순응하는 공간을 계획했다.
최우수작: 늠내골 시오리, 갯향기의 추억길
굽이굽이 끝없이 펼쳐진 시흥의 넓은 갯벌은 서해 낙조의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다. 수많은 철새와 바다 생물에게는 소중한 생명의 땅이며 예로부터 이곳을 지키며 살아온 갯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다. 긴 고개를 뜻하는 ‘장현長峴’이라는 지명처럼 바다로 향하는 길고 굴곡진 옛 길의 흔적은 삶과 풍경, 생명이 어우러진 이 땅의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땅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갯골의 흔적, 갯등 위의 생명의 쉼터인 숨골, 바다를 향해 굽이쳐 흐르는 긴 고갯마루 길의 풍경과 그와 관련된 기억을 되살려 대상지가 가진 고유한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 낸다. 이를 통해 땅이 가진 과거의 기억, 현재의 가치, 미래의 개발 사이에서 역동적인 작용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시흥장현 공공주택지구
설계공모 경과와 심사평 지난 3월 8일, LH 본사의 3층 2회의실에서 ‘시흥장현 공공주택지구 조경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 설계공모’의 심사가 진행됐다. 심사는 1차와 2차로 나뉘어 이루어 졌으며 1차 심사를 통해 총 7개의 출품작 중 2차 심사에 진출할 3개의 작품이 선정됐다. 2차 심사의 결과 최우수작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와 건화의 ‘늠내골 시오리, 갯향기의 추억길’이, 우수작으로 서안알앤디조경 디자인과 최정민의 ‘시흥始興 초록바라지’가, 장려작으로 조경설계비욘드의 ‘바라지 시흥 그리고 장현 사람 소통터’가 선정됐다. 시흥장현 공공주택지구는 남쪽과 북쪽, 서쪽의 세 면이 군자산 자락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부지 내에는 완만한 구릉지가 분포하고 있으며 부지의 왼편에는 장곡천이, 오른편에는 장현천이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흐르고 있다. 이런 지형적 특징을 활용하고 자연 요소를보존할 수 있는 친환경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이번 공모의 목표 중 하나다. 장곡천과 장현천의 경우 수변 학습 공간, 저류지 활용 방안 등을 통해 테마별 친수 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 이 같은 생태 환경적 특화계획을 통해 구축되는 그린-블루 네트워크의 구체성도 설계안의 평가 요소다. 부지의 중앙에는 장현천을 기준으로 왼편에 시흥시청, 오른편에 시흥시청역이 위치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문화의 거점이 될 것으로 예상돼 장현천을 따라 흐르는 선형 공원과 시청 맞은편의 중심 광장을 시흥시의 상징적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는 공모의 가장 큰 목적으로, 평가 항목 중 ‘지역 특성을 감안한 특화 용도 제안의 독창성 및 명소화 가능성’이 100점 만점 중 20점을 차지해 심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최우수작 늠내골 시오리, 갯향기의 추억길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 건화 우수작 시흥始興 초록바라지 서안알앤디조경디자인 + 최정민(순천대학교) 장려작 바라지 시흥그리고 장현 사람 소통터 조경설계비욘드
올보르 워터프런트 2단계
올보르 워터프런트의 2단계 마스터플랜은 1단계에서 도출된 여러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피오르fjord 경관의 특별한 특징인 사구와 평평한 해변 사이의 만남에서도 영감을 이끌어냈다. 기존의 항구가 비교적 낮은 높이이기 때문에 콘서트홀, 캠퍼스, 학생용 기숙사 등 새로운 건물은 효율적인 홍수 방지를 설계의 핵심 요소로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2단계 과정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대상지 전체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는 프롬나드를 일종의 ‘습지’로 활용하고 완만한 곡선의 플린스plinth를 이용해 그 위에 독립적으로 세워진 독특한 건물들이 마치 솟아오른 사구와도 같은 경관을 형성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조화 속에서 콘서트 홀 주변에 들어선 광장은 직사각형 형태의 독립적 플린스에 의해 부각되게 된다. 도시의 플린스는 홍수에 대한 방비책이 되는 동시에 다양한 활용이 가능한 일련의 공간을 제공하게 된다. 플린스의 측면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되며,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계단식 좌석이 마련된다. 널찍한 광장들이 프롬나드의 한 부분으로 통합되며, 노스 유틀란트North Jutland 피오르 경관의 토착 식물로 구성된 빽빽한 수목을 바탕으로 풍성한 녹지 공간을 제공한다. Landscape ArchitectC.F. Møller Landscape EngineerCOWI CollaboratorÅF Hansen & Henneberg(lighting design) ClientAalborg Municipality LocationAalborg, Denmark Size170,000m2(total) Year of Competition2012 Construction Period2013~2015 PhotographsJoergen True
올보르 워터프런트 1단계
현재 12만5천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올보르는 인구 규모로 치면 덴마크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또한 덴마크에서 두 번째로 큰 산업 도시이기도 한 올보르는 1970년대부터 산업의 침체에 따라 쇠퇴의 길을 걷다가 1990년대부터 연구 및 지식의 중심지로 새롭게 부흥하고 있다. 현재 올보르의 문화적 활동은 피오르fjord를 따라 들어선 과거의 공장 건물로 확대되었다. 산업 사회가 종말을 거둔 바로 그 지점에서 항만 활용의 대안적 방안들을 새롭게 모색하고 있다. 올보르 시정부는 항만 지역을 새로운 여가 공간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공모전을 개최했다. 공모전의 기본 골격은 시민과 여러 기업들이 참여한 토론회 등을 통해확보한 아이디어를 기초로 했지만, 설계를 통해 추가적인 구상을 하도록 요구했다. 과거 대상지에는 터미널과 창고 건물, 도심과 피오르 지역을 단절시키는 혼잡한 4차선 접근로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항구로의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로의 방향을 재설정했고 3동의 창고 및 터미널 건물이 철거되었다. 이 지역의 소중한 역사 유적인 창고, 로열 커스텀 하우스Royal Custom House, 올보르 성Aalborg Castle은 그대로 보존해 새롭게 건립한 4동의 건물과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했다. 학문과 지식의 도시로서 올보르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을 유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항구 지역에서 최적의입지를 지닌 장소에 청년 및 학생들을 위한 레지던스와 기숙사가 들어섰다. 공모전은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생태 친화적 공공 공간을 설계하고 피오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낼 수 있는 시설물을 계획하도록 했다. 또한 제한된 예산 안에서 합리적으로 건설 가능해야 한다는 점도 지침에 포함되었다. 당선작에서 가장 쟁점이 된 아이디어는 4차선 도로를 2차선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이 도로에는 매일 2만5천 대 가량의 차량이 통행했는데, 재조성 과정에서 극심한 교통 혼잡이 초래되어 4년의 공사 기간 내내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후 새롭게 마련된 대로를 통해 도시에서 항구까지 방해받지 않고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차량 통행 역시 하루 약 1만8천 대 수준으로 감소했다. 올보르 워터프런트의 마스터플랜은 도시의 중세 시대 중심지와 주변의 피오르 지역을 하나로 연결한다. 산업용 항만과 이로 인한 과중한 교통량으로 인해 피오르지역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시민들의 접근이 그리 용이하지 않은 편이었다. 도시의 전반적인 구조와 결합하면서 도시와 피오르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전에는 배후에 가려져 있던 공간이 새롭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모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다섯 가지 핵심 구역 마스터플랜은 다섯 가지 핵심 구역을 강조했다. 먼저 ‘블러바드Boulevard’는 폭이 넓은 간선 도로를 중심부에 여백을 둔 2차선 도로로 탈바꿈시켰다. 도로의 경로가 남쪽으로 변경되었는데, 워터프런트를 확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를 통해 시내에서 피오르로 접근하는것이 가능해졌다. 부두를 따라 약 1km 이어지는 블러바드의 양변에는 나무를 식재했으며 자전거 이용자와 보행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세밀한 디테일에 신경 썼다.‘프롬나드Promenade’는 워터프런트를 따라 배치된 일련의 광장으로서 계단, 테라스, 전망 플랫폼 등을 통해 사람들이 물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고, 다채로운 경험과 조망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욤프루 앤 파크Jomfru Ane Park’는 다양한 테마와 특성을 지닌 일련의 도시 정원들로서 프롬나드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다. 주변의 상업 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공놀이, 일광욕 등의 활동을 즐길 수 있다. 다양하고 많은 이용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견고하고 매력적인 공간을목표로 했다. ‘캐슬 스퀘어Castle Square’는 도시와 항구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휴식 공간들의 가장자리에 해당된다.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제방을 둘러싼 넓은 녹지 공간을 마련해 중세에 건립된 올보르 캐슬Aalborg Castle이 다시 한 번 항구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했다. 끝으로 무성하게 숲이 우거진 ‘우촌 파크Utzon Park’는 구불구불한 산책로와 벚나무가 학생 및 청년들을 위한 주거지와 우촌 센터Utzon Centre를 둘러싸고 있다. 올보르 태생의 세계적인 건축가 이외른 우촌Jørn Utzon을 기념하기 위해 공원과 건물이 조성되었다. Landscape ArchitectC.F. Møller Architects,Vibeke Rønnow Landscape Architects EngineerCOWI CollaboratorÅF Hansen & Henneberg(lighting design) ClientAalborg Municipality LocationAalborg, Denmark Size170,000m2 Year of Competition2004 Construction Period2005~2012 PhotographsAalborg Kommune, Helene Høyer Mikkelsen,Julian Weyer, Martin Kristiansen, Vibeke Rønnow C.F. 묄러(C.F. Møller)는 1924년에 설립된 건축설계사무소로 북유럽과전 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선도적인 회사다.현재 C.F. 묄러 본사는 덴마크 오르후스에 있으며 코펜하겐, 올보르, 오슬로, 스톡홀름, 런던 등지에 5개의 지사를 운영하고 있다. C.F. 묄러는장소 특정적이고 지속가능하며 창조적인 설계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칼럼] 뻘 비치를 사뿐하게 누볐다
시대가 변했고 가치도 변했다 내가 조경학과에 다니던 시절은 피터 워커와 그의 후학 조지 하그리브스로 대표되는 ‘개인’의 선구적 프랙티스에 매료되었던 시절이다. 그리고 소위 ‘조금 한다’는 학부생들은 설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내 사무실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부터 이렇게 자라고 있었다. 설계사무소를 연다는 것을 ‘창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색한 이유는, 이 일을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며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워커나 하그리브스가 비즈니스 면에서도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그 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한국에서 적용하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많지 않았다. 시장의 크기, 수주 구조, 계약과 지불 등 모든 면에서 한국과 미국은 달랐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취직할 곳이 없어 경계 없는 국경을 넘어 쏟아져 들어오는 인턴들로 넘쳐나는 네덜란드도 아니었다. 2006년에 서울에서 사무실을 열기는 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일을 수주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고, 사실 지금도 잘 모른다. 우연한 계기로 일이 생겼고,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클라이언트를 소개 받았다. 이런 불확실성을 관통하여 지금까지 10년을 버티어 냈으니, 한편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하다. 오피스박김의 지난 10년을 뒤돌아보면, 당시에는 힘겨운 시도 혹은 실패로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적 역량이 축적되었고 우리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안내하였다. 그간 남겨 놓은 텍스트를 묶어 단행본으로 출판하자는 의견에 공감하게 되어 올 가을에 그 축적물이 책으로 나올 예정이고, 오피스박김 후학들을 중심으로 랜드스케이프의 미래Landscape for Tomorrow를 조망할 작은 컨퍼런스를 준비 중이다. 앞으로 10년의 미래 역시 불분명하겠지만, 계속 도전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있는데, 나부터가 일을 제대로 해서 제대로 지어야 우리의 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고, 이러한 것들이 쌓이다 보면 우리의 후학들이 지금의 오피스박김 보다 조금이라도 더 수월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다. ‘돈 주고 조경 설계 처음 맡겨 본다’는 분들이 여전히 있고, 이런 클라이언트의 ‘계몽’ 역시 우리의 일이다. 사실 사명감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생존을 위한 반사 작용이기도 하다. 스스로 우리의 것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과연 누가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인가? 어느 주말, 우리 집 강아지 마리와 함께 양화한강공원에서 왕복 4km를 뛰었다. 뛰면서 돌아본 주변에는, 나만큼이나 고된 한 주를 보냈을 것으로 짐작되는 어느 가장이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잔디 사면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고, 휠체어를 탄 어느 중년은 한강물이 찰랑대는 강가까지 내려가 하염없이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다리는 당시 공원 설계와 시공을 회상하며, 갈대지형과 사석호안그리고 뻘 비치를 사뿐하게 누볐다. ‘세상에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하는 생각은 또 그 후 한동안 진격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아직 일천하여 의견 개진이 매우 조심스러우나, ‘창업’에 관한 기획 의도를 존중하며 소견을 밝히자면, 한국에서 설계사무소를 여는 것을 굳이 장려하고 싶지도, 그렇다고 말리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들은 있다. 먼저, 너무 빨리 열려고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설계를 하다가 자기 사무실을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그때 열면 된다. 르네상스 이후 별로 변한 것이 없는 설계라는 직능은 가장 고전적인 업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개업 초기의 열정도 좋지만 대형 회사에 소모되지 않고 직원들 월급 안 밀리려면 현실을 이겨 낼 수 있는 명확한 대차 대조표가 있어야 한다. 원한다면 때는 언젠가 올 수 있다. 그러나 오지 않더라도, 사무소에서 일하되 소장처럼 일하면 된다. 그렇게 주인처럼 설계하다 보면 자연히 어떤 위치에 있던 소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훈수에도 심장박동이 느려지지 않는다면, ‘주변부’를 주목하기 바란다. 설계라는 중심 영역 대신 이와 관련된 새로운 외연을 탐험하는 것도 개척자의 특권이다. 우리가 여전히 조경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도입 4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 개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공자 역시 “부귀가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을 잡고 말을 모는 사람 노릇이라도 하겠지만 만약 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겠다”라고 하니, 나의 발걸음이 양화의 뻘 비치를 사뿐하게 누빌 수 있나 보다. 김정윤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 GSD 졸 업 후 네덜란드 West 8 등에서 실무를 쌓았다. 치치 지진 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당선을 계기로 박윤진과 함께 오피스박김을 설립했다(2004). 네덜란드 조경건축사이며 바허닝엔 대학교에 출강했다. 차세대디자인리더(산업자원부 2007), 광교공원 디자인커미셔너(2008), 서울형공공건축가(2011)로 선정되었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놀튼 건축대학원이 선도적 조경가에게 수여해온 글림처특훈교수(2011)로 임명되어 강의했다. ‘양화한강공원’, ‘광교신도시 공원시스템’, ‘SBS 프리즘 타워’, ‘현대캐피탈 배구단 캠프’, ‘CJ 광교통합연구소’ 등 공공과 민간 영역을 넘나드는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에디토리얼] 그들의 참신함을 응원한다
강의실이나 작업실이 아닌 내 연구실에서 학생 설계안 크리틱하는 일, 대학원생 논문 지도하는 일, 가끔 찾아오는 졸업한 제자와 대화하는 일을 나는 ‘외래 본다’라고 총칭한다. 물론 그들을 환자 취급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유 있게 호흡하며 이야기 나누지 못하고 종합병원 의사처럼 분초를 다투며 대하는 나 자신을 반성하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모든게 새로 시작되는 계절인 탓일까. 이번 봄에는 정말 많은 외래를 봤다. 학업 상담, 진로 상담, 인생 상담이 줄을 이었다. 그중 몇 가지 이야기를 간추려 옮긴다. #1. 고3 티가 여전한 한 신입생. 놀랍게도 중학생 때부터 조경가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한다. 어느 ‘미드’의 배경으로 나온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매료됐고, 몇 번의 클릭으로 그곳의 설계자가 캐서린 구스타프슨임을 알아냈다고 한다. 마사 슈왈츠에게도 강한 팬심을 느끼고 있다 한다. 놀란 내 표정에 고무되어 어떻게 하면 그들 같은 스타 조경가가 될 수 있는지 돌직구 질문을 날린다. 말문이 막힌다. 글쎄, 많이 보고 읽고 그리며 안목을 기르라는, 하나마나한 답을 우물거린다. #2. 3학년 미학 시간에 눈에 띈 한 낯선 남학생. 언제 제대했는지 묻자 이번에 복학한 건 맞는데 군대를 다녀온 게 아니라 2년간 휴학하며 창업 동아리활동에 전력을 쏟아 부었다 답한다. 내성적인 인상이지만 말문이 트이자 미래의 사업 계획이 줄줄 쏟아진다. ‘생태적 디자인으로 지구와 인류를 구하는’ 기업을 고등학교 때부터 구상해 왔다고 한다. 포어스ForEarth.ForUs라는 사명도 미리 지어놓았다고. 뭐라 내가 말을 보탤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관심과 응원의 미소면 충분. 생태학과 상상력을 함께 다룬 책 몇 권을 소개. #3. 수시 입시 면접 때부터 대학원생급 전공 지식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한 4학년 여학생. 학년이 올라가며 설계 스튜디오는 물론 이론 과목에서도 빼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고 공모전 수상도 다수. 졸업 후의 계획을 묻자 명문 디자인 스쿨로 유학 가서 도시설계를 전공해 사회적 기여를 하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엉성하고 허약한 조경판이 못마땅하거나 불안한가 보다. 상담의 제1원칙은 잘 들어주는 것임을 알지만, 아까운 인재 하나 놓칠 판이니 적당히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다 안하려고 할 때 하면 100미터 달리기 혼자 하는 것처럼 쉽지 않을까. 늘 고상한 척 하는 교수가 평소와 달리 현실적으로 접근하자 다시 생각해 보겠다 한다. 갑자기 책임감 비슷한 게 생긴다. #4. 비교적 늦은 나이에 유학해 조경학 석사를 마치고 유명 설계사무소에서 2년여 일하다 돌아온 삼십대 중반의 제자. CG 숙련공 역할만 반복하다 보니 세계 최고의 오피스라는 간판에서도, 뉴요커 생활의 그럴싸한 허세에서도 만족감을 얻지 못했다한다. 비슷한 처지로 십 년씩 버텨온 선배들 그림자를 밟느니 열악하더라도 한국 조경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게 낫겠다 싶어 미련 없이 짐을 쌌다고 한다. 돌아오니 광야에 던져진 것처럼 막막하다는 그에게는 오백 몇 잔이 답이다. 책임질 수 없어 주저했지만 취기를 빌어 독립을 권했다. 자, 건배사, 내가 ‘독’하면 넌 ‘립’하는 거다. #5. 대학원 졸업 후 신생 설계사무소에 들어가 근십 년을 묵묵히 버텨 온 제자. 세상 잘 읽는 영민한 친구들이 줄줄이 설계 일을 접는 중에도 말없이 설계실을 지키며 집중해 온 그, 제자지만 존경한다. 그런 그가 요즘 조금 흔들리나 보다. 보수나 근무환경 탓이 아니라 한다. 십 년 하면 뭔가 통찰력 있는 디자인 감각이 생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란다. 앞으로 십 년 더 한다고, 그러다 오십대가 된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음을 절감한다고 고백한다. 언젠가 자신의 사무실을 열어 따뜻한 공간, 좋은 환경설계하는 걸 꿈꾸지만 그럴 수 있을지 의심된다며의기소침. 괜찮아, 조금 더 가면 길이 나올 거야. 내말이 형식적으로 들렸을 테지만, 분명히 진심이다. 테이블에 빈 맥주잔이 가득 찬다. 얼핏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키워드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하는 일’과 소통하고 또 ‘잘 하는 일’과의 교점을 찾는다면 그들은 앞에 마주친 두꺼운 벽을 유연하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생각이 선생들처럼, 선배들처럼 진부하지 않고, 참신하기 때문이다. 막 자신의 작업 공간을 꾸려 독립한 삼십대 조경가 아홉 명의 이야기를 다룬 이번 달 특집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을 기획하며 여러 젊은 조경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맥주 살이 더 늘었음은 물론이다. 경험해 보지 못해서인지 나는 ‘창업’이라는 두 글자에 심한 중압감을 느낀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았다. 설계 배우고 설계해오면서 늘 가졌던 꿈이 이제 현실로 다가왔을 뿐이라고 한다. 누구는 우연한 기회에 갑자기, 누군가는 몇 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시작한 차이가 있을 뿐. 그들에게서 발견한 또 하나의 공통점은 태도와 작업 방식의 참신함이다. 그 참신의 바탕에는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잘 하는 일의 행복한 동거가 있었다. 그들과 만나고 돌아와 참신斬新의 뜻을 사전에서 확인해 봤다. 새롭고 산뜻하다. 그런데 ‘참斬’자의 유래가 예사롭지 않다. 고대 중국에서 죄인을 죽이던 극형 틀인 수레와 도끼로 이루어진 글자다. 참신이란 과거를 도끼로 치는, 완벽한 단절을 뜻하는 말이다. 참신함을 유지하는 일은 더 어렵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참신은 진부가 된다. 진부陳腐. 사상, 표현, 행동 따위가 낡아서 새롭지 못함. 썩은 고기腐를 남들 보라고 전시陳한다는 뜻이다. 어렵게 구한 고기를 자랑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꺼내 보여주다 보면 고기는 썩고 악취가 난다. 고기주인은 썩은 고기에 익숙해져 고약한 냄새가 나는지도 모른다. 교훈과 계몽으로 흘러버린 글, 한 번 더 막 나가며 맺는다. 한국 조경 40년, 그러나 아직 걸음마 단계다. 미숙하다. 새로운 시작, 당신들의 영토가 무한히 펼쳐져 있다. 진부함을 경계하고 참신함을 이어가길 당부한다.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