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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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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4년 8월
이매거진 가격 9,000

기사리스트

[CODA] 다르게 생산하고 공유하기
잡지사의 편집부에는 매달 새 책이 쌓인다. 『환경과조경』은 조경 전문지이니 대개 조경, 원예, 건축, 도시 관련 신간이 보도자료와 함께 도착한다. 그 가운데 새 책 담당기자의 안목 그리고 선배 기자들의 간섭(!)과 추천으로 서너 권의 책이 선정되어 이 달의 ‘새 책’ 꼭지가 꾸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루는 색다르게도 인터넷 관련 신간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텔레코뮤니스트 선언The Telekommunist Manifesto』.1 사실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의 오마주인 듯한 제목보다는 그 밑의 부제목에 눈이 갔다. “정보시대 공유지 구축을 위한 제안, 카피파레프트와 벤처 코뮤니즘”이 그것이다. ‘공유지’ 그리고 ‘카피파레프트’란 단어에 눈길이 닿은 것이다. 사실 요즘 ‘공유’란 용어가 흔하게 쓰이는 만큼(비슷하게는 ‘공동성’, ‘공유 도시’, ‘공유 경제’ 그리고 ‘공공 공간’에서 ‘셰어하우스’까지) 그 의미가 명확하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카피파레프트’는 낯선 단어이기는 해도 카피라이트 혹은 카피레프트와 같이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이야기이리라 짐작되었다. 이 문제 역시 설계 분야와 무관하지 않다. 일례로 설계공모에서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상금을 걸고 안을 공모한 발주처에 저작권이 돌아가야 하는 가, 아니면 창작자인 설계자에게 있는가 등은 가늠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이렇게 둘다 ‘올바르게’ 보이기는 하지만 함께 놓기 어려운 두 개념이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는 지 궁금했다. 그런 연유로 새 책 담당 기자에게 압력을 넣어 책을 먼저 손에 들었다. 『텔레코뮤니스트 선언』은 인터넷 상에서 일어나는 ‘공유’에 관한 통상적 이해를 뒤집는다. 흔히 웹2.0으로 통칭되는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 유튜브 같은 커뮤니티 공유 사이트의 등장은 과거 콘텐츠의 일방적 수용자를 직접적인 생산자이자 유통자로 참여하게 하면서 수평적 소통과 자유로운 협력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클라이너Dmytri Kleiner는 과연 웹2.0이 새로운 소통과 협력의 모델을 제시하는 혁명적인 모델인가 질문한다. “웹2.0은 공동체가 창출한 가치를 사적으로 포획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일례로 “유튜브의 진정한 가치는 사이트 개발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에 비디오를 올리는 사람들이 만든다. 그러나 유튜브가 10억 달러가 넘는 주식으로 구글에 매각될 때 이 비디오를 만든 사람들이 받은 주식은 얼마나 되는가? 아무것도. 전혀. 없다.” 웹2.0 기업들은 자신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발행하기 위한 수단이 없는 사용자들의 ‘집단 지성’을 중앙 집중화시켜 공동체가 창출한 가치를 사유화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실제 물리적 세계인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지리학자인 하비David Harvey는 『반란의 도시Rebel Cities』2에서 도시를 “온갖 유형, 온갖 계급의 사람들이 서로 싫어하고 적대하면서도, 하나로 뒤섞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공유재common를 생산하는 장”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부동산 개발업자가 활기찬 거리, 다채로운 다문화 생활양식 등 그 지역의 ‘개성’을 부유층에 매각”하는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문제를 거론한다. “지역 원주민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공유재를 약탈당할 뿐만 아니라 종종 지대와 부동산세가 치솟는 바람에 쫓겨나기까지 한다.” 때로는 재활성화 정책으로 지역에 근근이 남아 있던 활력이 사라져 공유재 자체가 훼손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만들어낸 뉴욕 소호 지구의 활력은 이 지역의 경제적 가치가 올라가면서 망가져갔다. 그리고 이 활력을 만들어냈던 예술가들은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빠져나가게 된다. 우리 도시에서도 가회동이나 삼청동,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이러한 변화를 목도하게 된다. 그렇다면 공유지·공유재를 생산자들이 자유롭게 활용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 가? 클라이너는 ‘또래생산peer production’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용어는 하버드 대학교 법대 교수인 요카이 벤클러가 자유소프트웨어와 위키피디아 그리고 유사 작업들이 생산되는 방식을 기술하기 위해 만들었다. 또래생산은 다른 사람들의 소비를 방해하지 않는 ‘비경쟁적인 자산’으로서 공유지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재생산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산한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바꿀 수 있을 까? 바꾸어 말하면 또래생산자들이 자신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물질적 필요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클라이너는 독립적인 또래peer들 간에 필요한 물질 자산을 배분하는 시스템인 ‘벤처 코뮤니즘’을 제시한다. 벤처 코뮤니즘이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를 위한 새로운 모델이라면, 카피파레프트 copyfarleft는 비물질 재화를 공유지로 가져오기 위한 수단이다. 아이디어에 대한 배타적 권리인 카피라이트는 ‘창작하는 사람들의 땀과 노력을 인정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는데, 클라이너는 사실 이것이 보호하는 것은 창작자가 아니라 창작물을 판매하고 유통하는 기업의 수익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카피라이트를 비판하며 나온 것이 안티카피라이트anti-copyright나 카피레프트copyleft다. 둘 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비-소유의 공유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시도다. 그러나 여전히 기업들은 해당 라이선스를 어기지 않으면서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클라이너는 카피라이트의 대안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는 크리에 이티브 커먼즈(CC)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CC에서 저자는 다른 이용자들의 상업적 이용을 금지할 수 있지만, 그 역시 저자 자신이 상업적 이용의 권리를 보유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저작물은 전혀 공유지에 속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카피파레프트를 주장하며 상업적 이용에 대한 계급적 제한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도입한다. 노동자 소유 기업은 카피파레프트 저작물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지만 사적 소유 기업의 사용은 제한된다. 카피파레프트는 이러한 기준을 통해 상업적 이용이 아니라, 공유지에 기반하지 않은 사용을 제한하고자 한다. 클라이너가 주장하는 공유의 방식을 실제 물리적 공간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과 가치를 공유하려는 창작자들에게 의미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리고 이번 호에 실린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에서 그런 실마리를 찾게 된다. 필자인 유영수 소장의 말을 다시 옮겨본다. “이 같은 공모과정의 가장 큰 가치는 무엇보다 각 팀들이 단순한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 각자가 수행한 지역에 대한 분석과 그로부터 도출한 중요한 아이디어를 다른 모든 이들과 공유함으로써 지역 전체를 위한 더 나은 해법을 찾아내려는 공통의 목적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즉 공모 과정에서 생산된 모든 지적 결과물은 어느 팀에 제한적으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으로 활용된다는 의미다.”
보행자를 위한 도시 정책
지난 7월 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보행자를 위한 도시, 정책 현안과 과제’라는 주제의 포럼이 열렸다. 2013년 서울시에서 발표한 ‘보행친화도시 서울 비전’의 10대 사업의 일환으로 ‘생활권 보행자 우선도로 시범사업’과 ‘아마존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건축도시공간연구소AURI가 보행자 관련 법제 개선 방안, 각 사업의 기획 취지와 의의, 실질적인 개선 효과 등을 공유하고 사업 추진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점을 점검해 보고자 자리를 만든 것이다. ‘아마존’ 프로젝트 첫 번째 주제 발표에서 다뤄진 ‘아마존amazone’은 그 아마존amazon이 아니다. 현재 시범 사업이 시행 중인‘아이들이 마음껏 다닐 수 있는 존zone’의 약자로, 그 성격은 어린이보호구역과 유사하다. ‘아동 교통사고 및 범죄 예방 그리고 쾌적한 보행 환경의 조성’이라는 목표는 같지만, 어린이보호구역이 학교 근처의 도로에 국한된다면, 이 프로젝트는 주변 공원은 물론이고 학원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의 행동반경 전체를 포괄한다. 발표자 심한별 연구원(서울대학교 공학연구소)은 “보행자 우선 환경을 조성하려는 적극적 시도였고,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어린이 보행 환경이라는 쉽지 않은 대상을 다루었다는 점과, 그동안의 접근법과는 다른 시도였기에 학부모의 반발로 인해 사업 진행이 어려웠다는 점도 토로했다. 덧붙여서 “프로그램의 필요성에 대한 지역 사회의 인식이 널리 확산된다면 사업 확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사업 취지의 적극적인 홍보와 제도화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국판 ‘보차공존도로’ 도입 두 번째 주제 발표는 ‘보행자우선도로 시범사업 추진현황과 과제’였다. ‘보차공존도로shared street’란 현재 시행 중인 ‘보행자우선도로’의 도입 배경이 된 시스템으로서 물리적인 공간 분리나 특정 시설물, 교통 규제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도로 이용 주체간의 자율적인 배려와 상호 작용에 의해 작동하는 도로 운영 체제를 말한다. 남궁지희 연구원(AURI 공간문화정책연구본부)은 보차분리 방식의 한계점을 지적하며 보행자우선도로의 설계 목표와 전략을 설명했다. 남궁 연구원은 “물리적 시설과 투입 비용을 최소화하고, 접근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안전한 보행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며, 이를 위해 국내 도로 상황에 적합한 설계 기법 개발과 보행자의 우선권을 보장하는 제도적 근거 마련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당부했다. 현실성 없는 ‘도로교통법’ 김지엽 교수(아주대학교 건축학과)는 ‘보행자 관련 법제 현황과 개선 방향’에 대해 발표했다. 김 교수는 ‘도로교통법’ 제8조와 제10조를 예로 들며 “현행 도로교통법과 관련 판례는 보행자의 안전이나 권리보다는 차량의 통행 및 운전자 보호에 치우쳐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렇게 자동차 위주로 구성된 법 체계는 국민 대다수를 범법자로 만들고 있다”며 현실성 없는 법률의 개정을 촉구했다. 아울러 해외 사례를 바탕으로 “보행자와 자동차가 공존할 수 있는 법 제도를 갖춰야 하며, 보행자의 안전과 편의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주제 발표에 이어 진행된 토론은 박소현 교수(서울대학교 건축학과)가 좌장을 맡은 가운데, 이병민 사무관(국토교통부 도시정책과), 이원목 과장(서울시 보행자전거과), 김종식 팀장(성북구 교통행정과), 김중효 선임연구원(도로교통공단 교통공학연구실), 오성훈 본부장(AURI 공간문화정책연구본부)이 참여하여, 보행도시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였다. 현재까지의 성과에 대한 진단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시행 상의 어려움도 주목을 끌었지만, 그보다는 김종식 팀장의 한 마디가 더 진한 여운을 남겼다. 김 팀장은 “이 자리에 와야 할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선생님, 학부모님 그리고 경찰 관계자가 같이 얘기를 나누어야 하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분들이 오지 않았다”며 정책과 사업을 추진하는 발주처와 전문가만의 토론회는 반쪽이 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했다. 좌장을 맡았던박소현 교수의 말처럼 1년 후에 이런 자리가 다시 만들어 진다면, 양쪽 모두의 토론다운 토론을 듣게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이번 토론에서는 어린이, 임산부, 노인 등 누구보다 ‘보행권’을 보장 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직접 들을 수 없었다.
남산 공원 연구로 본 근대 공원의 민낯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탑골공원이 세워진 지 올해로 117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공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남산의 ‘공원’ 변천 과정으로 본 근대 공원의 일면을 조명한 연구가 발표됐다. 지난 6월 26일, 서울시립대학교 경농관 빨간벽돌갤러리에서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의 심포지엄 ‘근대 동아시아 수도의 재편’이 열렸다. 세션1에서는 ‘남산의 근대화로 본 서울의 수도성’을 주제로 우동선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의 “이토 츄타와 조선신궁”, 박희성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의 “근대기 남산의 ‘공원’ 변천 과정으로 본 한국 도시공원의 일면”, 염복규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의 “일제하 조선의 전원도시론 수용과 남산 남록 개발 논의의 의미” 등 3개의 주제 발표와 토론이, 세션2에서는 ‘동아시아 수도의 근대화’를 주제로 박삼헌 교수(건국대학교 일어교육과)의 “도쿄 투어리즘과 ‘제도帝都’, 도쿄의 탄생”, 신규환 교수(연세대학교 의사학과)의 “20세기 전반 북경의 도시공간과 위생”, 이길훈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의 “철도로 본 도쿄의 근대화” 등 3개의 주제 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이 심포지엄에서 박희성 교수의 발표는 남산의 ‘공원’ 변천 과정을 당시의 역사적 맥락과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파악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연구였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일본인’을 위한 공원 서울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남산공원은 오늘날 서울시민에게 여가와 휴식을 제공하는 안식처인 동시에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다. 서울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서울타워, 연인들이 남기고간 수천 개의 자물쇠가 달린 조망대, ‘남산’ 하면 떠오르는 음식인 ‘남산 왕돈까스’까지 남산공원과 남산을 둘러싼 일대는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하지만 남산에 생긴 첫 공원인 왜성대공원의 개원 당시(1898년 11월, 대신궁 봉안식 기준) 남산 일대는 일본인을 위한 행락지로 개발됐다. 왜성대공원이 자리했던 남산의 북사면 일대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이 주둔했던 곳으로 일본인 거류지인 본정통과 인접하며 이후 조선신궁이 세워져 종교적 기능까지 담당하게 된다. 박희성 교수는 이 점에 주목해 근대 공원의 일면을 포착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와 같이 시민 사회의 성숙과 함께 자생적으로 ‘공원park’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한, 일본식 공원’이 세워졌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초기 근대공원의 한계를 조명했다. 공원park과 정원garden, 공공정원public garden 개념이 혼재되어 사용되었던 당시 일본의 조원학은 우리나라에 그대로 이식되었고 엄밀한 의미의 공원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공공 정원에 머물게 되었다는 요지다. 또한 박희성 교수는 신사와 사찰을 중심으로 공원과 행락 문화가 결합한 일본 특유의 양식이 남산에 조선신궁이 세워지는 데 일조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발표에 관해 토론의 패널로 참석한 성종상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는 “남산 공원은 우리와 친숙한 곳이지만 그 족보나 역사에 대해 정확히 알 기회가 없었는 데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고 평가하며 “공공 정원과 공원의 개념 정의에 대한 부분은 논의가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남산에 조성된 공원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고, 시민에게 건강과 휴식, 레크리에이션 기능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공공 정원에 적합하다고 보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공공 정원의 개념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식물’이라며 초창기의 근대 공원이 식물원과 과수원을 포함한 식물과 관련된 시설을 어떻게 갖추고 있었는가가 중요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근대 공원의 민낯을 보는 일 지난해 한 인터넷 신문에 “남산 케이블카 ‘오 마이 갓’, 볼거리 부족 ‘오, 노’”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다. 드라마나 영화 등을 보고 남산을 찾은 외국인들이 생각보다 즐길 거리가 부족하다며 실망감을 안고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남산을 찾은 외국인들은 케이블카, 서 울타워, 야경 등의 파편적이고 단순한 이미지만 기억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남산이 축적하고 있는 역사와 문화의 지층이 깊고 두터움에도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이기에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친숙한 공간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했다는 점에서 서울학연구소 심포지엄은 의의가 있다. 남산에 조성된 공원의 변천 과정을 통해 어원과 개념,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뿌리를 더듬으며 근대 공원의 민낯을 보는 일은 당시의 근대성을 이해하고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남산의 ‘공원’ 변천 과정으로 근대 도시 공원의 일면을 추적한 박희성 교수뿐만 아니라 조선신궁의 건립 이유와 양식과 유형을 연구한 우동선 교수, 남산주회도로 부설과 고급 주택지 개발 등에서 나타나는 일제강점기 전원도시론을 연구한 염복규 교수는 남산 일대의 근대화 과정을 재구성하며 남산을 다각도로 바라보았다. ‘근대 동아시아 수도의 재편’ 심포지엄은 ‘근대이행기남산’을 조경적, 건축적, 도시학적 시각을 통해 봄으로써 서울에 근대적 요소가 유입됨에 따라 도시가 어떻게 변화·재편되었는지 심층적으로 접근했다. 우리의도시가 한 가지 얼굴로만 보인다면 얼마나 따분할까?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화려하게 화장한 얼굴로만 인식되던 서울의 민낯을 본 듯한 느낌이다.
도시, 캔버스가 되다
“아름답게 세상을 입히는 삶, 관심 있게 잘 감상했습니다. 정말 감동이네요.” “숨 쉴 수 있는 도시를 만들었군요.” “이면지 도시에 젊음이 색을 입혔네요. 그들의 열린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앱솔루트Absolut의 2분 40초짜리 광고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www.citycanvas.kr). 지난 6월 13일에 업로드 된 앱솔루트의 시티 캔버스City Canvas 광고는 현재 35만 명 이상이 시청했다. 앱솔루트 페이스북 페이지의 시티 캔버스 게시물에는 2만 명 이상이 ‘좋아요’를 눌렀고 천 개 이상의 댓글이 달렸다. 시티 캔버스 프로젝트로 새롭게 변신한 골목길은 블로거 사이에서 새로운 출사出寫 장소로 떠오르고 있다. 보드카 브랜드 앱솔루트는 브랜드 정신인 ‘트랜스폼투데이Transform Today’를 모토로 한 문화, 예술 프로젝트를 전 세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시티 캔버스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서울 도심을 캔버스삼아 젊은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거리를 예술적으로 변화시키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40명의 젊은 아티스트들은 가회동, 문래동, 성수동, 이태원, 홍대 등 서울 시내 주요 장소 5곳을 선정해 5월 2일부터 18일에 걸쳐 완성했으며 완성작은 6월 16일에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 공사장 가벽, 철공단지의 골목길, 주택가의 외벽, 지하철 교각 등 도시의 미관을 해치거나 무심코 지나칠만한 평범한 공간이 예술가의 손에서 생동감 넘치는 장소로 재탄생했다. 특히 공공을 위한 예술 사업을 정부나 사회단체가 아니라 민간 기업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앱솔루트의 프로젝트는 사람들의 호응을 샀다. 골목은 마케팅 시험장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티 캔버스 프로젝트에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부정적인 의견도 종종 눈에 띄었다. 한 누리꾼은 “마케팅의 이름으로 도시에 마구잡이 그림을 그리는 이런 마케팅 행위는 매우 폭력적이라 생각한다. 골목은 마케팅 시험장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남겼고, 다른 누리꾼은 “공공 영역에서는 젊은 아티스트들의 참여가 아름답지만 적어도 지역 마을의 담장은 그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함께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보존과 관리가 중요하다. 상업적이라 아쉽다” 등의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 시티 캔버스 프로젝트를 비롯한 이른바 ‘벽화 마을’ 사업은 2006년 경남 통영시 동피랑 마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철거가 계획되었던 낡은 마을 골목길과 담벼락이 벽화로 꾸며지면서 동피랑 마을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광 코스로 떠올랐고 철거 계획도 철회되었다. 동피랑 마을이 ‘도시재생’과 ‘공공 미술’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하자 서울 삼청동 벽화골목, 부산 감천동 벽화마을 등 전국적으로 100여 곳이 넘는 마을이 ‘지역 경제 활성화’와 ‘골목환경 개선’을 기치로 조성됐다. 하지만 지역 주민과의 소통 부재, 지역성에 대한 고려 부족, 관리 소홀 등으로 인해 예술이 아닌 ‘흉물’로 전락한 곳도 적지 않다. 진정한 ‘트랜스폼 투데이’ 될까? 시티 캔버스 프로젝트에 의해 새롭게 바뀐 모습을 기대하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하면서 직접 프로젝트 대상지를 방문했다. 과도하게 알록달록한 페인팅이 오히려 도시 미관을 해치고 있지는 않을까 우려했던 나의 걱정과는 달리 세련된 색채와 디자인이 눈을 사로잡았다. 주변의 상가나 주택과의 분위기를 고려한 설치 작품과 벽화는 주변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시티캔버스는 대상지에 대한 이해와 고려를 바탕으로 작업이 진행됐다. 수제화 타운이 형성되어 있는 성수동에는 위트 있는 신발 그림이, 문래동의 노쇠한 철공단지에는 기계 부품을 소재로 한 컬러풀한 벽화가 그려졌으며, 주점과 바가 많이 들어선 홍대의 한 빌딩은 보드카 모양의 설치 작품으로 장식했다. “언제 이런 것이 생겼어”하면서 신기해하는 젊은 커플들, “큐트cute!”를 외치며 사진을 찍는 외국인 관광객 등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앱솔루트의 시티 캔버스 프로젝트는 ‘트랜스폼 투데이’라는 브랜드 정신처럼 일단 ‘오늘’을 변화시키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하지만 ‘오늘’이라는 단어는 어렵다. ‘오늘’이 과거형으로 지나가버리지 않고 지속적인 현재 진행형이 되기 위해서는 이 프로젝트가 일회성의 환경 미화 프로젝트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시티 캔버스 프로젝트 관계자에게 작품의 관리는 어떻게 할 예정인지, 작품과 연계한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이 있는지 등 향후 계획에 대해 물었다. 칠이 벗겨진 벽화 작품을 보수하는 계획이 잡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이상의 구체적인 답변은 이어지지 않았다. 진정한 ‘트랜스폼 투데이’가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의 작품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거리의 흉물로 전락하거나 변화하는 거리의 모습에 뒤쳐져 이질적인 공간이 되지 않도록 공공 미술의 새로운 ‘내일’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시티 캔버스 프로젝트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삼성전자 TV ROAD 캠페인
친환경 캠페인을 담은 조경 공간 삼성전자는 지난 5월부터 약 한 달 반 동안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승리 기원의 길-TV ROAD’ 캠페인을 진행했다. TV ROAD는 삼성전자의 폐 브라운관 TV로 친환경 길을 조성하는 ‘TV 굿 스위칭good switching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4 FIFA 브라질 월드컵을 맞아태극 전사들의 선전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시민들이 기증한 폐 브라운관 TV 1만여 대를 에코 블록으로 재생산해 길을 조성했는데, 캠페인은 폐 브라운관으로 인한 환경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의지의 발로다. 버려진 폐 가전제품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기존 시설의 노후화를 개선해 지속가능한 길을 제안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디자인 전략 TV ROAD가 설치된 수원월드컵경기장 조각 공원은 2002년 월드컵 당시 많은 방문객을 수용할 수 있는 진입 광장으로 이용되었고, 이후 월드컵 개최를 기념하는 조각 작품을 설치해 문화 휴식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TV ROAD 조성 시 고려한 사항은 외부 도로와 광장의 전이적 공간이라는 점과 매표소가 잘 인지되게 하여 접근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조각 작품과 잔디식재 구간은 보전하기로 했으나, 인조 잔디 포장은 노후화로 훼손된 부분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잔디와 조각으로 구성된 공간에 상징성을 부여해 월드컵경기장과 어우러질 수 있는 길을 조성하고 폐 브라운관을 이용해 만든 시설을 통해 시각 효과, 휴식, 재미, 편리성이 더해진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공간으로 계획했다. 그리고 월드컵 이후 공간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 CRT 재활용 블록의 홍보 효과를 높이고, 일시적인 포장이 아닌 지속성을 갖춘 상징적인 길이 되도록 했다. 승리 기원의 길 노력, 열정, 역동성을 테마로 1,315m2 공간에 슈퍼그래픽을 패턴화 하여 걷고 싶은 길을 조성했다. 승리 기원의 길에 사용된 재료는 다성기업에서 연구 개발한 199×99×T60 규격의 CRT 재활용 콘크리트 블록을 사용했고, 주위 구조물 및 천연 잔디 등과 어우러지도록패턴의 주조색을 녹색 계열로 선정했다. 그래픽의 인위적인 느낌을 줄이고 친환경적인 캠페인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비슷한 색이 어우러져 표현되는 임의 포장패턴을 반영했다. 또한 슈퍼그래픽 패턴에서 자연스럽게 그러데이션gradation 되는 느낌을 주도록 계획하여슈퍼그래픽과 공간의 조화로운 연결과 확장을 도모했다. 산책로의 진출입 부분에는 TV ROAD 글씨를 패턴으로 반복하여 공간의 의미와 장소성을 나타내었다.
2014 IFLA 학생 공모전
지난 6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제51회 세계조경가협회(이하 IFLA) 국제 회의에서는 ‘2014 IFLA 학생 공모전’의 심사도 함께 진행되었다. ‘Urban Landscapes in Emergency’를 주제로 한 이번 공모전에는 29개 국가에서 총 408개 팀이 출품했고, 최종 심사 결과 탄광지대의 재생 방안을 제시한 ‘Prospect of Rebirth’가 영예의 1등작에 선정되었다. 본지는 IFLA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로부터 자료를 협조 받아, 1등작과 2등작을 소개한다. 공모전의 목적 IFLA 학생 공모전은 세계적으로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조경에 대한 사고와 실천’의 중요성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지리학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의 공간을 다시 연결하고, 지역의 정체성과 가치의 정수를 회복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공모전의 또 다른 역할은 교육을 통해 조경의 전문성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데에 있다. 학생들은 이 공모전을 통해 조경을 배우는 전 세계 학생들의 작품과 함께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또 IFLA로서는 학생들이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고, 조경가의 역할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공모전의 주제: Urban Landscapes in Emergency –Creating a Landscape of Places 이번 공모전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도시 경관을 되돌아 볼 것을 요구했다. 자연과 지역의 문화에 대한 인간의 공격적인 행동 이후에 버려지고 폐허가 되어 땅의 가치를 잃어버린 경관, 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변화를 받아들였지만 그 결과 환경적으로 균형을 잃어버린 부지 등이 이번 공모전에서 다루려 한 도시 경관이라 할 수 있다. 학생들은 도시에서 발생하는 불안전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반성적 사유’를 담아야 했다. 이‘반성적 사유’는 가장 적절한 제안을 통해 지속가능한 새로운 도시 경관의 건설 및 관리를 가능하게 할 대응법을 제시해야 했다. 1등작: ‘Prospect of Rebirth’ Qi Li, Huishu Sun, Shuang Zheng, Chen Li _ College of Arts, Xi’n University ofArchitecture and Technology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산시Shaanxi성 퉁촨Tongchuan시에 위치한 유화Yuhua 탄광의 생태적 재생 방법을 제안한다. 탄광 산업이 지역 경제를 책임졌던 곳이었기에 지속적인 석탄 채굴은 불가피했지만, 그 결과 환경은 파괴되고 오염되었다. 이곳은 관광 산업으로도 유명한 지역이었지만, 최근에는 이 역시 좋지 못한 상황을 겪고 있다. 1등작은 오염된 땅과 물을 정화시켜 다시 아름답고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들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땅의 표면 조직에 대한 작은 수정만으로 대상지의 생태적 재생이 가능함을 보이고 있으며, 대상지와 유사한 형상을 보인 잎사귀의 ‘잎맥’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프로젝트라 할 수있다. 2등작: ‘The Great Wall’ Yuan Xu, Hui Lyu, Simin Bian _ Department of Landscape Architecture, Tsinghua University 2등작은 티벳의 고원지대 북동쪽에 위치한 기아나 Gyana 마을의 방재 시스템을 제안한다. 이 계획은 2012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파괴된 보행로를 재건축함과 동시에 마을로 흐르는 일종의 진흙 산사태mud-rock flow(이류(泥流) 혹은 토석류라고도 한다)에 대한 방어책을 보여준다. 이 대범한 계획을 진행시키는 데에 있어, 지역내에 버려진 건물을 건설 자재로 이용한다는 점과 이 벽을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경제적으로도 유용한 계획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벽을 건설할 때 습득된 기술은 지진 피해를 입은 마을 내의 다른 곳에 다시 쓰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자활적인 재생이 가능함도 역설하고 있다. 심사평 우리는 매우 심각한 환경 문제에 직면했으며, 자연 재해의 규모 역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기술적 접근이 중요해진 상황에 처한 것이다. 조경가 역시 도시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해법 제안을 요구받고 있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도시 문제가 단지 새로운 기술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는 법이다. ‘위급 상황’이 주제로 주어진 탓일까? 이번 학생 공모전에는 다양한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기보다, 색다른 기술적 접근에만 집중한 출품작이 많았다. 다음과 같은 심사평은 그래서 더욱 기억할만하다. “학생들과 대학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경은 매우 광범위한 학문이고, 조경에서는 기술적인 측면만큼이나 사람과 그들의 인식, 자연 환경, 문화 등의 중요성 또한 담아야 한다.” 2015년 IFLA 국제회의는 러시아에서 얼마 전부터 IFLA 학생 공모전은 중국 학생들의 잔치가 되고 있다. 올해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7개의 수상작 중 6개를 중국 학생들이 차지했다. 29개 국가에서 408개 팀이 출품했지만, 중국에서만 전체 출품작의 70%가 넘는 292팀이 참가하여 마치 중국 학생 공모전이 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미국 21개 팀, (개최국인) 아르헨티나 15개 팀을 제외하면, 10팀 이상 참여한 나라가 전무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 팀’ 만이 출품했다. 참여가 저조한 국가의 학생들에게 탓을 돌리기보다, 주최 측에서도 심각하게 검토해보아야 할 불균형 현상이 아닐 수 없다. 1등상의 공식 명칭은 ‘Group Han Prize for Landscape Architecture’(상금 3,500달러)로 2007년부터 그룹한 어소시에이트에서 후원하고 있으며, 2등상은 ‘IFLA Zvi Miller Prize’(상금 2,500달러), 3등상은 올해부터 독일 브룬스 너서리Bruns Nursery에서 후원하는 ‘Special Prize Bruns Nursery’(상금 1,300달러)가 수여된다. 2015년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6월 10~12일에 제52회 국제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신선놀음’하는 젊은 건축
“산 할아버지, 구름 모자 썼네. 나비같이 훨훨 날아서 살금살금 다가가서 구름 모자 벗겨오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당에 설치된 ‘문지방(최장원, 박천강, 권경민)’의 작품 ‘신선놀음’에 올라 인왕산 자락을 바라보니 산울림의 ‘산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둥실둥실 흔들리는 공기 풍선 구름 사이에 설치된 트램펄린에서 신나게 뛰어 놀다보면 산 할아버지의 구름 모자도 벗길 수 있을 것만 같다. 국립현대미술관, 뉴욕현대 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New York, 이하 MoMA), 현대카드가 공동 주최하는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15: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전시가 7월 8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공식 오픈했다. 프로젝트 팀 ‘문지방’의 ‘신선놀음’은 이 프로그램의 최종 우승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도심의 미술관 마당에 신선 세계를 옮겨 온 듯,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 펼쳐졌다. YAP, 건축의 트렌드를 보여주다 1998년, MoMA에서 처음 시작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Young Architects Program(이하 YAP)은 젊은 건축가를 발굴하고 재능을 펼칠 기회를 주고자 기획된 공모 프로그램으로 매년 재기 발랄한 신진 건축가의 작품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있다. YAP은 2010년부터 칠레, 이탈리아, 터키 등의 미술관에서도 개최되어 YAP International로 확장됐으며 올해엔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 도입되었다. 현재는 글로벌 프로젝트로 거듭난 YAP이지만, 맨 처음 MoMA에서 시작된 계기는 단순했다. ‘여름에 해변에 온 느낌이 들게 하는 설치 작품을 도심 속 미술관에서 선보이자’는 의도였다. 미술관에서 관람객이 피서를 즐기고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한 YAP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후 YAP은 도심 속 휴식 공간을 제공하는 프로젝트이자 신선하고 재능 있는 젊은 건축가를 발굴하는 프로젝트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때때로 아주 실험적이고 기이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하는 YAP은 변화하는 건축의 트렌드를 보여준다. YAP은 건축의 환경적인 책임에 관심을 갖고 ‘지속가능성’을 작품의 선정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한 예로, 미디어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던 MoMA YAP 2014에 선정된 우승팀 The Living의 ‘HY-Fi’는 작품에 사용된 모든 재료가 옥수숫대, 버섯 등의 유기물질로 되어 있어 이산화탄소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과 MoMA, 현대카드가 공동 주최한 YAP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페드로 가다뇨Pedro Gadanho(뉴욕 MoMA 현대건축 큐레이터)는 7월 8일 ‘신선놀음’ 공개에 맞춰 국립현대미술관에 방문하고 완성작을 관람했다. 그는 이날 현대카드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강연에서 “YAP이 올해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개최되면서 진정한 글로벌 프로젝트로 거듭났다고 생각한다”며 “건축에 대한 전 세계적 담론이 형성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5: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의 우승작 ‘신선놀음’은 국내뿐 아니라 뉴욕(MoMA PS1), 산티아고(CONSTRUCTO), 로마(MAXXI), 이스탄불(ISTANBUL MODERN)의 미술관에서도 전시되어 전 세계 우승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경계 위에서 ‘신선놀음’하다 ‘문지방’이라는 팀명에는 건축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겠다는 의미가 담겼다. 문지방의 ‘신선놀음’은 이번 프로그램의 필수 요소로 제시되었던 그늘, 쉼터, 물을 활용해 도가 사상에서 그려지는 신선 세계를 형상화했다. 직경 2m, 높이 3~5m의 거대한 공기 풍선 기둥 60개를 마당에 세워 그 사이를 지나는 사람이 마치 구름 속에 들어간 느낌을 받도록디자인했으며 구름다리를 설치해 전체적인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구름 모양의 공기 풍선 기둥 사이에 2개의 트램펄린을 설치해 그 위에서 뛰어노는 사람들이 구름 위를 떠다니는 느낌을 받도록 했다. 작품 안쪽에 설치된 안개 분사기는 작품 전체를 감싸는 안개를 만들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구름 모양의 기둥, 구름다리, 안개 등의 요소가 만들어낸 ‘신선놀음’의 아이디어는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다. 화단이 조성된 바닥과 휴게 공간을 보면 조경적 요소가 담겨 있고, 구름다리가 만들어 내는 구조적인 틀에서는 건축적 특징이 나타난다. 공기 풍선과 안개가 자아내는 신비로운 미감과 트램펄린을 이용한 유희적 요소는 설치 미술 작품을 보는 듯하다. ‘신선놀음’은 건축, 설치 미술, 조경 등 그 어느 분야에 한정할 수 없는 새로운 경계에 도전한 작품이다. ‘신선놀음’은 신선하고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아쉬운 부분도 눈에 띄었다. 우선 YAP은 건축의 환경적인 책임을 강조하며 ‘지속가능성’에 가치를 두고 있다. 하지만 ‘신선놀음’의 신비로운 미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계속 뿜어져 나오는 안개는 순환적인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소모적인 느낌이었다. 또한 도심 속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는 YAP의 취지에 맞게 ‘신선놀음’에는 공기 풍선 기둥 안쪽으로 벤치를 설치해 휴게 공간이 마련됐다. 그런데 벤치와 안개 분사기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벤치는 습기로 젖어 있었다. 실제적인 쓰임을 고려했을 때 이용객의 불편이 예상되는 부분이다. 구름 모양의 공기 풍선기둥 너머로 도약하는 느낌을 주도록 설치한 트램펄린은 실제로 뛰어보았을 때 높이가 낮아 ‘구름 위로 튀어오를 것 같은 느낌’은 받지 못했다. 공기 풍선 기둥의 높이와 트램펄린 위에서 도약했을 때의 높이를 고려해 디테일을 살렸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또한 안개로 인해 트램펄린에 물방울이 많이 맺혀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섬세한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보였지만, 상상 속으로만 그려왔던 공간을 현실에 마음껏 구현했다는 점에서 ‘신선놀음’을 기획한 젊은 건축가들의 ‘패기’는 유쾌하고 재기 발랄하게 다가왔다. 건축은 ‘건축=건물’이라는 사고를 깨부수며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번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에서 그 실험의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다.
‘바다의 변화: 보스턴’ 전시회
해수면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금세기 중반이 되면 2피트, 2100년에는 6피트가량 높아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새롭게 형성될 해안선은 보스턴 지역의 해안 경관을 크게 바꿀 것이며, 도심지를 초토화시킬 만한 거대 폭풍의 발생 가능성 역시 한층 높아질 것이다. 지난4월 7일부터 6월 15일까지 보스턴에 위치한 디스트릭트 홀District Hall에서 개최된 ‘바다의 변화: 보스턴’ 전시회를 통해 보스턴이 해수면 상승에 얼마나 취약한지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 도시 그리고 지역 차원에서 취할 수 있는 적극적인 전략들은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었다. 전시의 기획 의도는 해수면 상승이 초래할 여러 문제들과 지역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해 보다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미국 전역의 다양한 해안 지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사키 어소시에이츠Sasaki Associates의 전문가들은 기후 변화, 해수면 상승 그리고 생태적 복원력 등에 대한 이해를 증진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또한 허리케인 샌디Sandy가 보스턴을 살짝 비껴가는 사건이 있은 후, 사사키 어소시에이츠는 자연 재해를 입고 나서야 비로소 마지못해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보스턴의 회복탄력성 증진을 위한 프로그램을 선제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일 년여의 기간 동안 각기 다른 분야의 구성원으로 이뤄진 디자인 팀은 향후 나타날 수 있는 위험요소가 무엇인지, 그리고 보스턴 지역이 미래의 기후변화에 대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디자인 팀의 구성원들은 사사키의 연례 인턴십 프로그램은 물론 보스턴 건축대학Boston Architectural College(이하 BAC)의 디자인 스튜디오와 함께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BAC의 경우 보스턴의 남부 및 동부 지역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환경 변화에 취약한 이들 지역을 위한 맞춤형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사키 어소시에이츠는 BAC, 보스턴 시 정부, 그리고 보스턴항만 협회Boston Harbor Association 등과의 협력 관계를 보다 공고히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 사회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시네마 스케이프] 경주
대한민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40대 이상이라면 경주에 대한 첫 기억이 수학여행일 확률이 높다. 동트기 전부터 산에 올라가 졸린 눈을 부비며 화장실인 줄 알고 들어가서 본 석굴암은 충격적으로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첨성대는 상상했던 것보다 작았고 포석정은 미니어처 같이 느껴졌다. 사진 속에서 본 유적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전통 양식을 어설프게 모방한 기와 장식의 4층 민박집과 넓은 잔디밭 위의 벚꽃이 석가탑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바람에 흩날리던 벚꽃 아래에서의 수다는 눈부셨고, 민박집에서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여전히 단골 안줏거리다. 경주의 첫인상은 불국사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내 얼굴 찾기도 힘들다)처럼 박제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첨성대 뒷모습의 표정이 앞모습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황룡사의 빈터가 어떤 울림을 주는지 느끼게 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영화 ‘경주’(감독 장률)에는 불국사나 첨성대 같은 경주의대표 선수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래된 골목, 찻집의 정원, 노래방 앞, 아파트 주변, 자전거 길 등 일상의 공간이 주요 무대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공간은 고분과 찻집 정원이다. 장률 감독은 재중 동포 3세로 특정한 장소가 가진 정서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감성을 주로 그려 왔다. 장률은 경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백 개가 넘는 고분이 일상과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는 모습이 특이해 보였다고 한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베이징 대학 교수로, 선배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남은 시간을 경주에서 보낸다. 남자는 고분 앞에서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이 입을 맞추거나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 재잘대며 지나가는 장면을 본다. 장률이 실제 느꼈을 경주의 첫인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남자는 미모의 찻집 여주인과 얽히면서 그녀의 일상에 하루 동안 동행하게 된다. 여자는 아파트 창문을 열면 보이는 고분을 바라보며 “경주에서는 단 하루라도 능을 보지 않고는 살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여자의 모임에 따라가 술을 마신 남자는 그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술에 취한 채 걷다가 고분 위로 올라간다. 그녀는 고분에 엎드려 고분을 향해 소리치기도 하고, 건너편 고분에 올라가 자신과 똑같은 포즈로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기도 한다. 옆으로 누운 여자의 허리선과 고분의 부드러운 곡선이 닮아 보인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자는 그의 아버지가 고분 위에서 술을 마신 후 깔고 앉았던 돗자리를 타고 내려오곤 했다는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분에서 술 취한 채 썰매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난다. “알 만한 사람들이 문화재 위에서 뭐하는 짓들이냐. 문화재는 너희가 올라가 노는 데가 아니야”라고 호통치는 경비원에게 그들은 결국 쫓겨난다. 엄숙한 죽음의 공간과 자잘한 일상이 얽히는 상황은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고분들과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을 한 프레임에 담은 장면은 영화의 공간과 주제를 함축해서 보여주는 마법 같은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고분이 경주의 실제 모습이라면, 찻집은 경주를 은유한다. 찻집은 오래전 모습을 간직한 채 현재의 시간이 흐르고 있으며 낯선 사람들이 방문하는 공간이다. 비밀을 간직한 아름다운 여주인이 있고 전통차라는 콘텐츠가 있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작은 정원이지만 깊이와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내부 공간과 정원은 주인공들의 시선, 움직임, 감정의 변화로 점점 그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정원의 빛은 방으로 들어와 인물을 비추고, 방안의 인물은 정원에 있는 인물을 훔쳐본다. 소나기가 잠시 왔다가 그치면서 정원의 빛이 석양으로 노랗게 물들면 방안의 빛도 변하면서 인물의 마음도 움직인다. 여주인공으로 분한 신민아는 키가 커서 집과 정원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든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한겨레 영화평론전문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전공으로 삼아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극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그것이 주는 감동과 함께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텍스트라 믿고 있다.
찰스 랜드리와의 아주 ‘평범한’ 인터뷰
창조 도시의 주창자로 알려진 찰스 랜드리Charles Landry(Comedia 대표)와 메타기획컨설팅(이하 메타)의 인연은 약 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메타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단이 개최한 국제 콘퍼런스에 『The Creative City: A Toolkit for Urban Innovator』라는 저서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랜드리를 초청하는 작업을 도 왔다. 이후 그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인 『The Art of City-Making』의 한국어판인 『크리에이티브 시티 메이킹』 출간을 기획했고, 대구, 부산, 서울, 광주 등에서 랜드리를 초청할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 관계를 돈독히 해왔다. 이번 전라북도에서 개최한 콘퍼런스를 앞두고도 랜드리는 자신의 일정을 미리 공유하면서 서울에서 다시 한 번 메타 식구들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2014년 6월 9일 오후 4시 반 용산역에서 시작되어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진행된 이 밀착 인터뷰는 기존의 포럼·콘퍼런스·세미나 등에서 이루어졌던 공식적인 인터뷰 형식이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고 산책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궁금한 내용을 서로 묻고 답하는 아주 평범한, 그래서 더욱 특별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용산역에서 서머셋 호텔로: 랜드리의 전북 방문기 몸집이 큰 백인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약속 장소로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랜드리 대표님이시죠.” “오, 반갑습니다. 전화했던 정 부소장이신가요” “네, 이쪽으로 가시죠.” KTX를 타고 용산역에 막 도착한 랜드리와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역 앞 광장으로 내려갔다. 길을 건너 신속하게 광화문 방향 택시를 타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갑자기 랜드리가 발걸음을 멈춘다. “와우, 저기를 좀 찍어야겠어요!” 용산역을 올려다보면서 이곳저곳을 끊임없이 자신의 갤럭시 스마트폰에 담는다. 택시에 올라서도 랜드리의 사진 찍기는 멈추지 않았다. 간판, 길거리, 나무, 독특한 건물들… “저게 국보남대문이죠? 저쪽으로 가면 서울시청이 있고요.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아요.” 오세훈 시장 시절, 디자인서울 정책 자문을 위해 시청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랜드리는 그 뒤를 이은 박원순 시장에 대해서는 잘 알지못하고 있었다. “새 시장님 이름이 뭐라고요” “메이어 박이에요. 박.원.순.” 그는 끝끝내 그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정종은(이하 정): “그건 그렇고, 이번이 한국에 일곱 번째 방문이신데, 전북 방문은 어떠셨나요?” 찰스 랜드리(이하 랜): “매우 흥미로웠어요. 흥미로운 콘퍼런스들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도 있었어요. 콘퍼런스 전날 밤에 호텔에 도착해서 자고 일어났더니, 다음날 아침에 바로 기조 강연을 하도록 일정이 짜여 있었죠. 저녁까지 콘퍼런스를 진행하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내가 있는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일단 도시를 둘러보고 나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야 했는데, 기조 발표를 마친 다음에야 도시를 볼 수 있었죠. 저로서는 그 반대로 일정이 짜여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 외에는 만족스러웠어요. 시골에서 전통 장인이 도자기 만드는 것을 본 일도 기억에 남구요, 한옥 마을에서 도시 속의 오아시스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공간들을 여럿 만난 것도 좋았습니다. 오늘 기차를 타기 전에 익산에서 한 예술 큐레이터가 오래된 거리를 재생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곳을 방문했는데, 너무 멋졌어요. 그런 시도들 이야말로 정말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 영국 최초로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된 글래스고에 대한 연구 보고서에서 ‘창조 도시creative city’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으니, 랜드리가 이 개념을 파고든 지도 벌써 25년이 가까워진다. 그 세월 동안 그가 직접 방문해서 들여다보고 컨설팅을 진행한 도시의 숫자가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전역에 걸쳐 수백 개를 헤아린다. 따라서 ‘그 경험에서 나온 알짜배기 교훈을 정제해서 들려주십사’하는 요청이 크게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내용이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이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처럼,난생 처음 한 도시를 방문한 사람에게 최소한의 ‘내용’을 스스로 채우기 위한 시간을 미리 확보해주었다면 더욱 유익했으리라. 정: “예전에 방문했던 한국의 도시들은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들이었는데, 이번에는 전주에 머무셨죠. 어떤가요? 전하고는 좀 느낌이 달랐나요?” 랜: “네, 전주는 인간적인 규모human scale를 갖고 있더군요. 게다가 콘퍼런스 장소가 한옥 마을 주변이었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전통문화가 갖고 있는 독특한 힘이 분명히 있죠. 그런데 제가 더 궁금했던 것은 일상 문화였어요. 그 도시에 관한 생생한 느낌real feeling은 특별한 것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에서 포착되는 법이거든요. 제가 자꾸 다른 곳, 더 평범한 곳을 가자고 하니까 사람들이 좀 이상해 하더라구요. 한옥 마을 바깥을 충분히 보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쉽습니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타산지석: 한옥 마을과 이태원의 미래를 위한 레시피 잠깐 서머셋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서울의 ‘평범한’ 것들을 들여다본 후, 저녁 약속 장소인 이태원의 고깃집으로 이동했다. 소맥으로 시작하겠다고 우겨서 우리 일행을 놀라게 한 랜드리. 쌈장을 잔뜩 묻혀 차돌박이와 꽃등심을 흡입하시더니 급기야는 옆 테이블의 쌈장까지 자기 앞으로 가져간다. 한국식 음주 문화에 대한 싸이의 새 뮤직비디오, 중국에서 시작된 한류의 기원, 최근 K-Pop의 기세 등에 대해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누다가 상하이, 베이징, 칭다오 등 재빠르게 ‘창조 도시’ 트렌드에 올라탄 중국의 도시들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랜: “언급한 도시들 외에도 여러 도시들에 초청을 받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나는 매우 걱정스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도시들이 ‘미쳐가고 있다obviously going crazy’ 또는 ‘폭발할 것 같다explode’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최근 방문한 베이징에서 갖게된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여러 도시들이 창조 도시를 언급하지만, 슬로건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중국 정부의 문화 부처차관과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창조도시에 관한 얘기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창조 경제’에관한 논의, ‘소프트 파워’에 관한 논의였습니다. 각 도시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섬세한 논의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물론 나의 주관적 인상이 중국의 대표적인 도시들의 운명에 대해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나와 교류한 일군의 중국인 전문가들도 매우 유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문제의 근원은 ‘자유의 결핍’입니다. 자유를 동반하지 않은 창조성을 진정한 창조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서로 다른 문명에서 서로 다른 창조성 개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슬람권의 ‘창조성’과 기독교권의 ‘창조성’, 그리고 유교권의 ‘창조성’ 개념은 같을 수가 없을 테지요. 또한 같은 유교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일본의 ‘창조성’과 한국의 ‘창조성’과 중국의 ‘창조성’ 역시 상당히 다를 겁니다. 다시 베이징과 상하이로 돌아가 볼까요? 우리는 중국인들이 보여주는, 무언가 일이 되게 하는 것, 과감한 의사결정 등에 대해서 감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뭐죠? 점점 더 그 도시들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오염과 같은 건강 이슈, 사회적 불신과 양극화 등은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례로 아까 내가 언급한 전문가들은 꽤나 부유한 사람들이었는데요, 거의 모두가 유럽이나 북미에 따로 집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회만 되면 중국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어요.” 랜드리는 유럽의 창조 도시가 표방하는 ‘창조성’은 구성원 모두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을 전제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유의 결핍’이야말로 중국의 ‘창조 도시’를 진정한 창조 도시로 인정하기 어려운 이유이며, 중국의 도시들이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직면하지도 못하고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는 것이다. 다소 주제가 무거워지기도 하였으나, 저녁 식사 이후 이태원 구석구석을 산책하게 되자랜드리는 금세 이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진 천진난만한 아이로 되돌아갔다. 이견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 지명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한국에서 이태원梨泰院/異胎院보다 더 국제적인 공간, 더 이문화적인 공간이 있을까? 이태원 뒷골목의 매우 모던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마치자마자 랜드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통문화의 본산인 전주 한옥 마을과 이문화의 집합소인 이태원 중에서 어디가 더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기느냐고…. 정종은은 서울대학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문화 정책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메타기획컨설팅에서Knowledge본부의 부소장으로 ‘세계문화정상회의 의제 설정 연구’,‘이야기산업 산업범위 확정 연구’, ‘꿈의 오케스트라 합동공연 효과성연구’, ‘콘텐츠코리아랩 아이디어융합공방’의 프로그램 개발 등을 수행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예술과 사회’를 가르치고 있으며,한국문화정책학회 학술이사를 맡고 있다.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경관의 발견
#21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꿈 구겐하임 미술관을 위시하여 불후의 명작을 무수히 남긴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에게 “당신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입니다”라고 누군가 칭송하자 “당대뿐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지”라고 응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천재였던 모양이다. 그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폭포 위에 지은 집’(낙수장(落水莊) 혹은 Fallingwater)인데 건축주 에드거 카우프만이 애초에 원했던 것은 폭포 맞은편에 집을 지어 창밖으로 폭포를 바라보며 즐기는 것이었다. 라이트는 이를 무시하고 폭포 위에다 집을 지어버렸다. 그리고 폭포 소리, 즉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카우프만을 설득했다. 그때 집을 폭포 위에 짓지 않고 맞은편에 지었다면 과연 역사에 남을 작품이 되었을까. 라이트는 차갑고 비인간적인 인구 밀집형 도시를 못마땅하게 여겨 평생 그에 대한 대안을 고민했다. 그 결과 1932년, ‘리빙 시티Living City’의 비전을 펼쳐보였다. 한 가족당 1에이커, 즉 4,000m2 정도의 땅을 고루 분배받기 때문에 브로드에이커 시티Broadeacre City라고도 불렀다.2 미국 영토를 4,000m2 단위로 나누어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대륙에 고루 퍼져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정한 장소에 집중적으로 모여 도시를 형성하지 않게 되므로 도시로부터 자유로운 대륙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미 대륙 전체가 하나의 도시이자 국가가 될 것이므로 도시는 결국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게’ 된다. 4,000m2의 땅에서 농사도 짓고 살고 싶은 대로 산다면 새로운 사회가 형성될 것이라 했다. 결국 그는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었던 것이며 건축가적 시선에서 도시설계를 통해 이를 이룩해 보려 했다. 만약 그의 비전대로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졌다면 미국인들은 현재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프레리 스타일’의 집에서 살고 있을 것이며 모기지론이니 금융사고니 하는 것도 모른 채 평화로울지도 모를 일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위시한 소위 ‘시카고 학파’의 건축가가 중심이 되어 19세기 말에 짓기 시작한 프레리 스타일 혹은 프레리 하우스의 건축적 특징은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듯한 강한 수평성이며, 황토색, 적토색 등 자연적인 색과 소재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자연순응적인 건축 양식이라고도 한다. 프레리 스타일의 건축가들은 그들이 지은 집이 주변 경관에 스며들기를 원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프레리였을까. 프레리는 대초원이라고도 하여 북미 중서부 평원 지대를 이루는 독특한 경관을 말하기도 하고 그 경관을 이루는 식물 군락을 일컫기도 한다. 서부 활극에서 인디언이나 카우보이들이 프레리에서 시원하게 말을 달리는 장면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프레리 위의 작은 집Little House on the Prairie’이라는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었는데, 1976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에서도 ‘초원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어 많은 사랑을 받은 적이 있다. 서부 개척 시대에 대초원을 ‘개간’하여 마을을 만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후세의 우리들에게는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지만 당시의 개척민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풀밭을 갈아엎어야 했으므로 힘겨운 싸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풀이 너무 커서 말 탄 사람들이 완전히 그 속으로 사라질 정도라고 했다. 건조기에도 지하수를 빨아들일 수 있도록 뿌리를 깊이 내리는 프레리의 ‘큰 풀’ 중에는 1.5m에서 7m 깊이까지 뻗는 것도 있었다. 농사 지을 땅을 마련하기 위해 억센 풀과 싸움을 하는 동안에는 프레리가 가진 생태적 가치라거나 경관의 아름다움 등에 연연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1840년경 강철 쟁기가 도입된 후 1900년경까지 프레리는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 갔다. 애초에 70만km2, 즉 한국 국토 면적의 일곱 배가 넘던 프레리 면적 중 현재 0.01퍼센트 정도만 남아 있다.3 19세기 말, 사람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프레리 경관의 유일성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의 일리노이 주가 바로 한 때 큰 풀 프레리가 지배했던 곳이다. 시카고를 중심으로 프레리 보존 및 복원 운동이 일어났다. 1901년 헨리 챈들러 카울즈Henry C. Cowles(1869~1939)라는 생태학자가 시카고 주변의 프레리의 형성 과정,변천사와 유형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4 물론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래 수많은 식물학자가 대륙을 종횡으로 다니며 식물을 수집하고 기록하긴 했지만 하나하나의 개체에 대한 관심에 그쳤다. 이제 처음으로 생물지리학적 관점 하에 기후, 토양, 식물, 인위적 영향 등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독특한 ‘경관’을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인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레리는 백퍼센트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서부 건조지대의 ‘짧은 풀 초원Shortgrass Prairie’을 제외한다면 이미 인디언들의 손때가 묻은 경관이었다. 초지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숲으로 천이하게 되어 있다. 들소를 사냥해서 먹고살았던 북미 중서부의 인디언은 정기적으로 불을 질러 초원 상태를 유지하는 ‘들불 관리’ 기법을 일찌감치적용했다. 초기 생태학자들은 그 사실을 미처 몰랐으므로 프레리를 복원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진땀을 흘렸다. 수시로 비집고 올라오는 그악스런 목본식물을 근절하기 위해 농약을 엄청 뿌리기도 했다. 프레리를 복원하고자 하는 의도가 그만큼 절실했다. 사람들은 곧 프레리를 ‘미국적 경관의 이상형’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경관에 인간적 이념을 이입시킨 것이다. 이에 가장 앞장 선 인물이 빌헬름 밀러Wilhelm Miller(1869~1938)였는데, 그는 1915년, 조경에 프레리의 ‘영혼’을 담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32쪽짜리 책자를 발간했다.5 프레리를 거의 종교적으로 찬양했던 밀러는 다음과 같은 ‘프레리 헌장’으로 글을 맺는다. “나는 프레리에서 가장 우수한 인종들이 탄생할 것을 믿는다. 프레리에 세워진 국가와 지역사회의 아름다움을 옹호하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며, 이 아름다움을 훼손하고자 하는 탐욕에 대항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빌헬름 밀러는 독일계 학자이며 조경가이며 지식인이었다. 위의 첫 문장과 독일이라는 국가를 합쳐보면 좀 듣기 거북한 대답이 나온다. 조경계의 나치 사냥꾼들 귀에 경종이 울렸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베끼기
양심의 가책 중간 발표는 꽤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나의 설계를 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던 교수님도 지적보다는 긍정적인 조언을 많이 주셨고, 어떤 교수님은 최종 발표가 기대된다는 격려까지 해주셨다. 그런데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저 설계는 며칠 전 잡지에서 본 그럴듯한 작품들을 짜깁기하여 베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베낄 의도는 없었다. 참조만 한다는 것이 결국 베끼기가 되어버렸다. 다른 안을 다시 그려보아도 내 눈앞에 있는 모작만 못한 느낌이다. 그냥 이 안으로 끝까지 가볼까? 그러다 원작을 알고 있는 교수님이 지적을 하시거나 친구들이 알아채고 비아냥거릴까봐 걱정이다. 지적과 비웃음을 제쳐두고, 좋은 조경가가 되고 싶다는 내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작가는 자신만의 생각과 개성을 작품에 담아야 한다고 배워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문득 의문이 생긴다. 생각을 해보면 어디까지가 참조이고 표절인지 헷갈린다. 좋은 사례를 찾아보라는 교수님들의 조언이 베끼기를 어느 정도 용인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배우는 과정이라면 어느 정도의 베끼기는 공부의 일부가 아닐까? 그렇다면 실무에서는 베끼기가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일까? 베끼기는 과연 나쁜 짓인가? 베끼기의 역사 믿기지 않겠지만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가 베끼기였던 때가 있었다. 오늘날 예술을 논할 때 대개는 르네상스, 바로크처럼 시대를 기준으로 삼거나 낭만주의, 사실주의, 초현실주의와 같이 생각과 작업 방식을 공유하는 예술가들의 그룹을 묶어서 이야기한다. 처음 이러한 방식으로 예술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한 이가 독일의 미술사가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이다. 빙켈만은 한 편의 논문을 통해 작가 개개인의 분석 수준에 머물던 미술사의 담론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빙켈만이 1755년 출판한 논문, ‘회화와 조각 예술에서 고대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에 관한 생각’은 귀족 출신도 아니었던 빙켈만을 단번에 저명 인사로 만들 정도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1 빙켈만은 이 책에서 고대그리스 예술을 서양 문명이 도달한 최고의 예술적 경지로 극찬한다. 그리고 예술이 창조적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문화로 돌아가 철저히 당시의 예술을 베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들으면 궤변 같아도 당시 이러한 생각은 나름 오랜 문화적 근거를 갖고 있었다. 로마 시대의 예술은 대부분 그리스 예술의 모작이다. 예외가 있다면 정치인들의 동상이나 전승 장면을 묘사한 부조 정도밖에는 없다. 그러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로마인이 그리스인보다 능력이 떨어졌던 것은 아니다. 로마 예술의 독창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예술가의 능력 문제라기보다는 미의 기준이 고대 그리스 예술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에 예술의 가치는 창의성보다는 얼마나 그리스의 작품을 잘 모방하였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2 예술가를 높이 평가했던 르네상스 시대에도 모방은 여전히 예술의 중요한 가치였다. 빙켈만은, 라파엘로도 제자들에게 그리스의 조각 작품들을 소묘하라고 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라파엘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르네상스의 대가들 역시 고대 그리스의 조각을 훌륭한 예술의 전형으로 여기고 작품에 반영하려 했다. 또한 르네상스 예술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알베르티 역시 『회화론』에서 자연 풍경을 대상으로 습작하는 것과 함께 그리스 작품의 모사도 훌륭한 예술가라면 반드시 따라야 할 훈련 방법이라고 기술할 정도로 모방을 중요시했다.3 놀랍게도 예술가는 철저하게 고대 그리스를 베껴야 한다는 빙켈만의 주장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다. 실제로 빙켈만 이후 18세기 후반 예술계의 목표는 고대 그리스의 모방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조를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라고 부른다. 신고전주의는 단순히 회화나 조각에 국한된 움직임이 아니었다. 미술은 물론 문학, 연극, 음악 역시 고대 그리스 비극의 구성을 따르려 했으며 건축에서 역시 그리스 신전의 양식을 재해석한 건물들이 도시의 주요 공간을 지배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베끼기의 전통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지속되고 있다. 빙켈만의 시대처럼 오늘날 예술의 목표가 모방에 있지는 않지만, 사실 모방만큼 설계의 질을 단기간에 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모방이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될 죄악은 아니다. 모방을 통해서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뛰어난 디자이너들의 설계를 체득하게 되고 그들의 문제점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베끼기에 너무 익숙해지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잡지나 작품집을 통해서 설계를 하다 보면 누군가의 아류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모방은 분명 양날의 칼이다. 문제는 모방을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에 있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모방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첫째, 다른 분야에서 베껴라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모방을 해야 좋은 베끼기가 될 수 있을까? 가장 안전한 방법은 다른 분야에서 베끼는 것이다. 분야가 다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매체나 사고의 체계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른 분야의 작품을 베낄 때는 체계를 변환하는 고도의 해석이 필요하다. 이 경우 해석 자체가 결국 창조의 과정이 되기 때문에, 마음먹고 베끼려 해도 표절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작곡가가 외국 곡을 표절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건축 작품을 표절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 베끼려면 유사한 인접 분야인 것이 좋다. 접근 방식에서 너무 차이가 생기면 베끼는 과정에서의 해석이 하나마나한 비유의 차원에 머물고 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화감독들은 유사한 영상 예술 분야인 사진 예술에서 많은 영감을 받으며, 건축가나 조경가의 작업은 회화나조각과 같은 미술 분야의 작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운동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였던 데 스틸De Stijl이 이러한 베끼기의 대표적인 예를 보여준다. 네덜란드어로 데 스틸은 ‘양식the style’을 뜻한다. 데 스틸은 그 의미처럼 예술의 다양한 매체를 넘어서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보편적인 시각 예술의 양식을 제시하고자 했다.4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으로 이루어진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회화는 데 스틸이 생각한 예술의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에 가장 가까웠다(그림1).5 주로 화가들이 주축을 이룬 데 스틸은 건축가인 리트벨트Gerrit Rietveld가 참여하면서 더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추상적 양식을 구현해나간다. 리트벨트가 디자인한 가구를 보면 기하학적 구성과 삼원색과 같은 몬드리안 회화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림2).6 다음은 데 스틸의 수장이었던 반 두스부르흐Theo van Doesburg의 공간 구상도이다. 리트벨트의 가구와 마찬지로 이 다이어그램 역시 이차원적인 몬드리안의 평면 구성을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여 입체적인 구성으로 만든 시도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그림3). 건축도 예외는 아니다. 데 스틸 건축의 대표적인 작품인 슈뢰더 하우스Schröder House는 외관상의 형태뿐만 아니라 내부의 인테리어까지도 추상 회화를 연상시키는 구성과 배치로 이루어져있다. 데 스틸의 경우 회화의 형태적 언어를 산업 디자인에서, 그리고 건축에서 베끼면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간 셈이다(그림4).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조경가의 서재] 그 새로움에 대하여
새로움의 시대 ‘새로움’의 시대다. 새롭지 않으면 눈도 돌리지 않는다. 주변에선 모두 새로움을 추구하느라 난리다. 새로운 버전의 아이폰이 나오는 날에는 애플 스토어 앞에 밤샘한 이들이 장사진을 친다. 낡은 것, 익숙한 것은 이제 죄악시된다. 단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왜 이리 새로움에 열광하는 것일까 사실 진중권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우연히 그의 서양 미술사 강의 동영상에서 대중 매체에 노출되는 모습과 다른 진지함을 보았다. 그 전에 읽은 몇 편의 글에서 ‘재기’는 충분히 보았지만 ‘지적 진지함’은 보지 못했기에 진지함이 묻어나는 그의 책이 읽고 싶어졌다. 학교 다닐 때 곰브리치Ernst H. J. Gombrich나 루카치György Lukács, 하우저Arnold Hauser 등의 미술사를 끝까지 읽지 못한 숙제를 해결해 보고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과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을 택했다. 고전예술 편은 건너뛰었다. 강의만큼 책이 쉽진 않았지만 미술사 전체를 서술하는 틀과 도판 자료는 어렵고 지루하기만 한 서양 미술사를 한 눈에 보게 해 주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세상과 서양 미술사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으랴마는 예술가들의 앞선 사유의 흐름이 어떤 실마리를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다행히 첫 도판1부터 기대를 한껏 부풀려준다. 수 세기 동안 유지되어 온 고전 예술의 전통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일련의 흐름에 주류 자리를 내준다. 이 시기부터 현재까지 미술사의 흐름은 한마디로 ‘숨막히게 새로움을 추구해 온 시대’라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이 자칭한 ‘아방가르드avant-garde’2라는 단어에는 위험과 희생을 무릅쓰고 미지의 땅을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그의 언어로 서양 미술사를 요약해 본다. 안과 밖 자연이라는 ‘주어진 세계’ 속에 ‘머무는being’ 존재가 아닌, 자연 ‘밖에 서 있는ex-being, existence’ 인간은 자연을 원본 삼아 이를 모상함으로써 스스로 ‘만들어진세계’를 구축한다. 차츰 계몽을 통해 자연이 만만해지고 자신의 ‘만들어진 세계’가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에 이르자 인간에게 자연은 더 이상 이상적인 모범이 아니다. 미술도 ‘자연의 재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먼저 화폭에서 색채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야수주의). 그리곤 남아있는 형태와 공간을 실제로 지각되는 방식으로 그리자 화면 속 형태는 점점 지표성index을 잃어간다(입체주의). 이쯤 되니 내 바깥에 반드시 대상이 없어도 형태와 색채만으로도 회화를 완성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순수 추상). 이 자신감은 거칠 것 없이 더 끝으로, 회화일 수 없는 경계, 환원할 수 없는 근원까지 나아간다(절대주의). 망막에 맺힌 것만 드러내는 일이 지루해지자 이젠 좀 더 내 안의 정신적, 심리적인 것까지 밖으로 드러낸다(표현주의). 정치적으로 좌와 우, 계급 간의 대립이 격심해지자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급진적 미학을 앞세워 오감과 움직임을 포착한 회화와 사진이 등장하며, 기술과 예술의 통합을 꿈꾸는 예술가들은 기계적 건축과 도시를 이상향으로 제시했다(미래주의).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좌절된다. 김용규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교 설계대학원에서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생태 기술 개발과 관련한 각종 연구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로참여했으며, 현재는 생태 기술과 디자인을 결합하는 분야에 관심을 쏟고 있다. 현재 일송환경복원과 Ecoid Corporation, USA 대표이사를맡고 있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 두 번째 이야기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발견 모든 설계 프로젝트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지적 탐구 과정으로 시작한다. 무언가를 조금 더 잘 알게 되면 꼭 그만큼 세상을 더 잘 보게 된다. 서울 중산층으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인생에서 겪은 경험의 폭이 넓을 리 만무하다. 모든 설계 과정은 그래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나는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두려움과 공존할 수밖에 없나 보다. 설계 과정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설계 작품 하나가 끝나면 그 전의 나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세상의 복구 청년 시절 난 그다지 어린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어린이가 불편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어린이집에 대한 논문으로 대학원 과정을 마치긴 했지만 학위 과정이 끝나자 그들에 대한 학구적 애정도 희석되었다. 지금도 종종 뜨끔한 점 중의하나는, 만약 나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나의 부모가 늙고 병들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세상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설계했을 것이란 점이다. 내 주변에 사회적 약자가 늘어가면서 세상의 불친절함에, 세상의 물리적 환경을 디자인하는 설계가들의 무심함에 느닷없이 화가 날 때가 많아졌다. 지금이야 훨씬 좋아졌지만 아이의 유모차와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다녀야 했던 수년 전의 도시 거리는 100m를 전진하기에도 버거울 정도였다. 노면은 울퉁불퉁했고, 각종 시설들이 툭하면 앞길을 가로막았고, 단차와 턱도 즐비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설계의 디테일은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와 더 관계 깊다고 생각했다. 디테일이 사회적 배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서울시의 ‘공공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일에 참가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디자인 새마을운동’이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공공 디자인 가이드라인’은 이 사회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질적기준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취지로만 보자면 설계가의 자율성을 훼손한다기보다 설계가의 손을 벗어나있는 도시의 구석구석에 대한 촘촘한 점검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다. 젊고 신체 건강한 자는 세상의 크고 작은 돌부리들을 그저 뛰어넘어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는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에도 누군가는 걸려 넘어지고, 작은 장애물 하나가 또 다른 누군가의 걸음을 가로막는다. 어리거나 나이 들거나, 몸이나 마음이 불편하거나, 세상의 지배적인 질서가 소외시킨 약한 자에게 세상은 여러모로 친절하지 않다. 평화로운 나라의 백성은 군주가 누군지 관심이 없고,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에 사는 자는 법과 규제에 무심해도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법이니, 가이드라인과 규제가 강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사회가 규제없이 굴러가기에는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도 어린이와 관련하여 몇 개의 논문을 쓴 것이 밑천이 되고 아이를 직접 키우면서 위험한 세상에 대한 엄마의 본능적인 의구심이 더해진 탓에, 어린이 놀이 환경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축적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학생 시절의 관심이 개념적이고 학술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오히려 구체적인 아줌마의 관심일 터이다. 그래도 유아교육 전문가가 아닌지라 어린이 공간은 어린이 전문가와 함께 설계하는 것이 마땅하다. 놀이 환경 설계에 있어서 어린이들을 직접 만나고 선생님들과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나도 한때 어린이였으니 어찌 보면 잘 알지 못했던 세상이라기보다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어린이를 위한 공간을 설계할 때는 그만큼 더 눈높이를 낮춰야 하고, 그만큼 더 유치해져야 하며, 그만큼 더 쪼잔해져야 하고, 그만큼 더 인내심이 필요하다. 어느 해 공원 설계 수업에서 서로 다른 열 명의 역할을 주고 그의 관점으로 공원을 분석하는 과제를 내주었다. 청소년 한 명, 중년 남자 한 명, 애기 키우는 엄마 한 명, 할머니 한 명 등등. 그중 한 명은 어린이의 눈높이인 지상 90~100cm 정도에서 공원 전체를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관목이라고 부르는 식물이 아이의 눈앞에 거대한 수벽으로 펼쳐졌다. 반면 어른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구멍으로 어린이들은 런닝맨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다. 배치도를 전제로 하는 고정된 성인의 시각을 벗어나서 본 세상은 정말 위험한 전투장일 수도, 혹은 무엇이든 가능한 신세계일지도 모른다. 설계가 일단 시작되면 가급적 검증된 관점과 검증된 레퍼토리와 검증된 도형에 의존하고 싶은 욕구와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예전에 누군가가 그랬다. 노인이 고집스러워지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그때까지 쌓아온 삶이 전부 무너지는 느낌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계가에게 자기부정은 생각만큼 멋진 피드백 프로세스가 아니다. 하지만 반성과 성찰이 삭제된 작업은 자신의 잠재성을 스스로 굳혀버리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마치 접착제로 붙여버린 레고 블록처럼!1 나를 돌이켜보는 성찰 과정은 나의 잘못만을 반성하는 일은 아니다. 내 작업 과정에 접착제로 붙어있는 부분들을 찾아 필요한 만큼 해체하고, 검증된 조립 설명서 외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도록 레고 블록을 스스로 해체하는 일, 즉 창조를 위한 파괴 작업이 설계적 반성 혹은 설계가의 성찰의 목표이자 방법일지 모르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당연하게 여기던 질서를 새삼스럽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 대학원 및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미국Stephen Stimson Landscape Architects와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디자인 로직에서 실장으로 일했으며, 국내외 다양한 스케일의 조경 설계를 진행해왔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과 커뮤니티의 변화가 가지는 시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느슨한 설계 집단 스튜디오 테라의 대표로서 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 사이를 넘나드는 중간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귄터 보크트
지금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에서는 아티스트 댄 그레이엄Dan Graham과 조경가 귄터 보크트의 협력 프로젝트인 옥상 정원, ‘생울타리와 반사 유리 체험Hedge Two-Way Mirror Walkabout’을 선보이고 있다. 그레이엄은 반사 유리를 이용한 파빌리온pavilion으로 유명한 작가다. 그는 현대 도시의 대표적 소재인 철과 유리를 사용한 미니멀리스트minimalist 스타일의 추상적인 구성을 통해 서구 정원의 통인 파빌리온을 재해석한다. 그의 작품은 건축과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대 미술과 건축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전통적인 파빌리온이 정원의 초점focal point으로 작동하는 반면, 그레이엄의 작품은 주변의 환경을 반사하며, 공간을 나누고, 틀을 짓는 역할을 한다. 귄터 보크트는 스위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경가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다. 알리안츠 아레나Allianz Arena, 노바티스 캠퍼스Novartis Campus Park, 국제축구연맹 본부Home of FIFA, 런던 이스트빌리지East Village와 테이트모던 미술관TateModern Collection 등의 프로젝트는 조경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디자인 프로세스나 기저에 깔린 생각에 대해서는 이해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지난 5월 16일, 뉴욕건축센터Center for Architecture에서 열린 ‘도시의 자연Urban Nature: Between Human and Non-Human’ 콘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한 귄터 보크트를 만났다. 그에게서 이론이 단단하게 뭉쳐진 실무 조경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귄터 보크트는 최근 여러 강연을 통해 프로젝트 자체에 대한 소개보다는 주로 현재 조경이 처한 역사적 맥락과 조경 설계의 환경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2005년부터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학Eidgenössische Technische Hochschule Zürich(ETH Zürich)건축학과 교수직을 맡은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힘든 이유로 이미지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을 꼽았다. 즉 공공 공간이나 도시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경관의 각 요소에 대한 역사나, 그 요소들이 존재하는 이유, 각 요소의 구체적 작동 방법 등 전반적인 도시화의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건축이란 기본적으로 매우 제어된 상황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맥락을 무시하고도 작품이 성립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만, 조경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 보크트의 논지다. 보크트는이미지 이전에 그 아래에 숨겨진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취리히와 스위스의 물리적·문화적 환경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현재 스위스 디자인의 힘을 뒷받침하는 토대를 세가지 요인으로 정리했다. 첫째, 스위스의 자연 환경이다. 알다시피 스위스는 항상 알프스를 무대로 살아왔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들의 조경은 낭만적인 이미지의 구축을 통해 발전해 왔다. 이에 반해 스위스는 혹독하고 위험한 자연 환경을 다루기 위해 언제나 실질적 가치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디자인역사가 전개됐고, 이 때문에 비교적 일찍 모더니스트 디자인의 원리를 받아들여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둘째, 스위스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정치 사회적 역사 과정이다. 스위스는 유럽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유럽연합EU에 속하지 않고 중립국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한 번도 왕정이나 귀족 정치를 거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스위스의 각 마을에는 직접민주주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다. 전통의 무게와 굴레가 제거된 상황에서 스위스는 독자적이고 실리적인 건설과 설계 문화를 개척해 왔다. 셋째, 스위스의 독특한 장인 문화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 과정이다. 학생들은 16세가 되면, 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을 받을지 아니면 도제apprenticeship 수업을 받기 위해 마스터의 견습생으로 들어갈지 결정해야한다. 대부분의 국가와는 달리 스위스는 각 전문 분야를 자격증 제도를 통해 보호하지 않는 반면, 도제 교육을 통해 이른 나이에 직업적으로 성숙한 프로페셔널을 길러냄으로써 높은 설계·시공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형으로 구성된 환경과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시달려온 역사적 상황, 식민 지배와 전쟁으로 인해 말소된 전통 등 한국의 사정은 귄터 보크트가 묘사하는 스위스와 상당 부분 유사하다. 그는 종종 ‘랜드스케이프landscape’와 ‘랜드스케이프 파크landscape park’를 구분해 말하는데, 스위스는 ‘디자인되지 않은 랜드스케이프un-designed landscape’라고 한다. 구체적인 맥락은 다르지만 빠른 산업화를 거치며 대부분의 도시 환경을 실용성 위주로 건설해 온 한국의 경관적 여건도 이와 유사하다. 미국이나 서구 선진국처럼 우리와 국토와 문화적 여건이 다르고, 서서히 성장하고 성숙해온 나라들에 비해 스위스는 직접 참고 할만한 사실이 많다는 뜻이다. 인터뷰를 통해 귄터 보크트의 작품과 스위스 디자인은 어느 순간 이루어진 신화가 아니라 주목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공간 공감] 메리츠 타워
이번 호의 대상은 ‘걱정 인형’으로 잘 알려져 있는 메리츠화재 사옥의 외부 공간이다. 강남역 사거리의 남동쪽에 위치한 메리츠 타워는 내년이면 준공 10년차가 되는 꽤 오래된 건축물이지만, 의외의 외부 공간이 있다는 점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독자들도 사진만 보고서는 외국 프로젝트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곳을 잘 모르는 일차적인 이유는 눈에 잘 띄지 않아서다. 강남대로와 면한 건물 전면에도 약간의 공공 공간이 조성되어 있지만 그곳이 건물 후면 공간의 존재를 암시하지는 않는다. 건물의 측면에서도 접근할 수 있기는 하지만 멀리서 보기에는 막다른 골목처럼 보여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메리츠 타워의 로비에 들어서면 거대한 창의 액자 효과를 통해 비로소 후면 공간을 감상할 수 있다. 다소 까다롭게 그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건물의 후면 진입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강남역 상업 지역의 이면도로에서 이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지만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육중한 담의 크지 않은 문을 통과해야 후면의 외부 공간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기업에 따라 사옥의 외부 공간을 감상하거나 사진을 찍는 도중 경비원의 압박 수비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곳은 비교적 견제 없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안내판에 흡연이나 요란한 이용에 대한 자제가 당부되어 있는 정도다. 이것이 정교한 의도인지는 설계자의 설명을 듣지 않았으니 정확히 알길은 없다. 하지만 민간이 공공에 제공한 공간이되, 아는 사람들만 조용히 사용하는 정도로 설정된 소극적 분위기를 풍긴다. 열려있으나 비밀스러운 정원이 라고 부를 만하다. 공간 자체의 완성도는 만족스럽다. 공사 비용을 걱정하지 않고 쓴 듯한 고가의 재료가 말끔한 디테일로 시공되어 있고, 메인 뷰는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잡다하지는 않다. 나무가 땅을 만나는 상식적 방식에서 벗어나 있어서 (대왕참나무 입장에서) 다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공간을 지배하는 스테인리스 스틸과 유리는 세련되어 보이고 건축물과 담에 의한 후면 공간의 위요감도 만족스럽다. 특히 주 재료인 스테인리스 스틸은 외부 공간을 밝고 생기 있게 만들고 있지만,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게 하는 적절한 선택이다. 캐스케이드cascade 방식의 물 활용은 강남역 이면 도로와의 단차를 극복하고 공간을 생동감 있게 연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적으면 차분하게 보일 텐데 많은 양의 물을 꽤 급한 경사로 쏟아붓다보니 물의 패턴도 역동적으로 보인다. 물의 질감은 건물 내에서도 흥미로운데, 소리가 소거된 상태로 물의 부서짐을 감상할 수 있다. 물에 관한 재미있는 관찰은 외부 공간에서도 이어진다. 캐스케이드 방식의 수경 시설은 후면 공간 전체를 대상으로 큰 물소리를 생산하고 있다. 캐스케이드와 외부 공간을 구획하는 옹벽 사이에 생긴 선큰 공간에는 벤치와 함께 휴게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하였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였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가작: 홍예 빛의 숲
도시 속의 메모리얼 천주교의 도입과 박해의 역사는 비단 한 종교의 문제를 넘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수많은 켜를 관통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 역사의 중심지인 서소문 밖 성지는 천주교 성인들을 기리는 추모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추모해야 마땅하지만 잊힌 모든 한국인을 품고기리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러한 ‘보편적 추모’는 강한 오브제를 세워서는 이루기 어렵다. 최대한 비워내야만 이 땅이 하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며, 그래야만 대형화하는 다른 종교 시설들과 다른, 복잡한 주변 도시 환경 속에서 더욱 가치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 홍예 이를 위해 지침에서 요구한 건축 프로그램은 모두 지하 3개 층에 배치하고 지상부는 지하의 천장 구조가 곧 지면의 지형으로 드러나는 메모리얼로 설계했다. 기본 구조물을 최대한 활용하되, 주어진 프로그램을 담기 위해서는 존치 구조의 보강과 새로운 구조 형식의 설계가 불가피했다. 이에 동서양 건축에 모두 존재하면서 약현 성당과 잃어버린 서소문의 공통언어이기도 한 홍예虹霓, arch를 구조 형식으로 정했다. 기존 슬래브 중 가장 윗부분을 걷어내고 소성당을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에 각각 알맞은 아치 구조를 설계했다. 지붕에는 다양한 간격으로 30×30cm의 사각 천공을 뚫어 빛이 쏟아져 들어오도록 했다. 땅 지하 1층 천장의 아치와 천공은 곧 지상부 메모리얼에서 각각 지형과 하늘을 담는 땅의 패턴으로 보이게 된다. 기념 성당의 상부에 설치된 야외 제대 주변에서는 현재처럼 매주 금요일 오전 야외 미사가 열리게 되며, 수천 명이 몰리는 대규모 미사 시에는 제대 북쪽의 광장이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된다. 식재는 부지의 북쪽과 동쪽의 경계부에만 집중시켜 성당 상부와 광장 주변 지형의 흐름이 옛 처형장이 있던 땅을 온전히 기념하도록하였다. 한편 현재 대상지 경계에 존재하는 단차를 없앰으로써 메모리얼이 모든 이들에게 열리게 한다.
가작: Seosomun Memorial Parkv 서소문역사공원
기념 공원 본 계획안의 기념 공원에는 서소문이 가지고 있는 비극적인 순교 역사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구체적인 물체는 없다. 대신 서소문공원 전체를 울창한 숲으로 조성하여 공원에 발을 딛는 순간 도시로부터 떠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공원을 찾는 사람들 각자가 공원을 거닐면서 자신만의 길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공원 내에 어떠한 길도 뚜렷하게 정의하지 않았으며, 길을 향해 열리고 닫히는 나무숲을 지나면서 서서히 올라가는 경사 지면을 걷게 된다. 새롭게 조성된 언덕 정상에 이르면 숲 한 가운데에 크고 명확한 원형의 터Gigantic Lens가 펼쳐지는데 이곳이 서소문역사공원의 중심 공간이다. 높은 나무나 별다른 구조물이 없는 빈 공간으로 하늘을 향해 트여 있으며, 공원의 다른 곳과 달리 기하학적인 형태가 부여된 곳으로 거대한 구의 흔적을 상징한다. 공원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원형의 터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과거의 의미가 흔적으로 남아 숲을 거닐다가 그곳에 도달한 사람에게 경외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도시 속에 넓게 트인 공간이 된다. 원형의 터에서 자유롭게 머물면서 살아있는 기억을 느끼거나 중심에 이동식 제단을 설치해 야외 행사 장소로 사용하면서 서소문의 역사와 깊은 유기적 관계를 형성한다. 지하 주차장 일부를 보존하고 그 위를 녹지로 덮어 새로운 환경을 만들었다. 대지 남쪽에는 서울역과 서소문공원을 이어주는 어반 플라자와 광장으로 향하는 순교 성당을 계획했다. 공원으로의 접근은 여러 방향에서 가능하다. 북쪽과 서쪽에서는 도로와 같은 레벨로 접근이 가능하며, 광장의 남동쪽 모서리에서 시작하는 계단은 원형의 터까지 연결된다. 계단 끝에서 이어지는 남북 방향의 길은 무장애 공간을 고려했고 길의 한쪽 면은 열 주랑을 계획했다. 이는 기차 통행 시 발생하는 소음을 차단하고, 지하 구조를 위한 기술 장비를 보호하며 햇빛과 비를 막아준다.
가작: Groundscape 땅의 풍경
대지의 도시적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다. 서울 도심의 경계이자 프로그램의 상충 지역, 대지를 가로지르는 경의선과 서소문 고가도로, 의주로 등 혼재된 주변 맥락과 공원이라는 일방적 프로그램은 대지가 도시적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고립시켰다. 땅의 형상을 다듬어 동측의 철도 부지를 물리적으로 막고, 주변 맥락과 맞닿은 경계를 따라 사람들이 접근가능한 ‘열린 광장’을 만들었다. 열린 광장은 도시의 여러 맥락 속의 사람에게 오픈스페이스를 제공하는 동시에 이용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준다. 열린 광장은 역사 문화 공원과 순교 기념 광장의 진입 공간이며, 이질적인 두 프로그램의 유입과 흐름 그리고 소통을 만들어주는, 대지의 도시적 역할을 위한 필수 공간이다. 광장을 경계로 내부 땅의 북쪽은 들어 올려 열린 광장의 활력을 유지시켜주는 편의 시설이 위치하고, 남쪽은 땅속으로 움푹 내려가서 순교 기념 공간으로의 자연스러운 유입을 유도한다. 열린 광장의 경사진 땅은 동쪽 경의선과 의주로의 시각 및 청각적 소음을 막는 풍성한 녹지 공간이며, 자연스러운 경사와 식재 밀도조절을 통해 역사 공원과 순교 광장을 연결 혹은 독립적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가능하게 한다. 행장 추정지에 배치한 우물은 순교자를 위한 추모의 공간이자 이용객이 장소성을 느끼게 하는 장치다.
3등작: 가시加時 물성과 초월성
연속적으로 이어져 수평으로 펼쳐진 대지는 자유로운 점유를 기다리는 열린 장소가 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축을 설정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도시적 스케일의 연결을 강제하기보다는 그 장소에 체화된 기억과 반향이 주변과 자연스럽게 연계되도록 의도했다. 대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순교 광장은 8천여 개의 철제가시를 담고 있다. 공간을 가로지르거나 분절하지 않고 쌓아 올린 전체로서의 ‘가시’ 구조물은 이 땅에 적층된 순교자의 영혼들을 상징한다. 광장으로 접근하는 회랑을 거닐며 경험하는 그 날카로운 존재감, 불규칙적으로쌓인 무거운 형상은 이곳이 박해와 처형의 현장이었음을 즉각적인 경험으로 깨닫게 한다. 광장에 도착하여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인지하게 되는 구조물 사이로 비치는 눈부신 빛과 그림자의 교차는 순교를 통하여 영원히 기억되고 부활한 성인들의 정신을 상징한다. 다양한 빛으로 상징화된 순교자의 영혼들은 성당에서 비로소 하나의 공간, 하나의 빛으로 수렴된다. 성당을 나와 빛을 따라 천천히 올라와 만나게 되는 넓고 푸른 공원은 부활의 공간이자 생명으로 가득한 환희의 공간이다. 공원에 심어진 44그루의 포플러는 박해 이후 한 세기 넘도록 이어져온 순교의 정신이다. 무심한 듯 펼쳐진 자연을 거닐며 차분히 기억을 쌓아가는,시간을 초월한 장소로 구현되길 바란다.
3등작: 44 Saints Memorial 44 순교 성인 기념 공원
다음의 3가지 장소성을 이번 프로젝트의 개념으로 제안한다. 그 첫 번째는 ‘기념적 장소’다. 과거 천주교 신자 처형의 역사를 승화하여, 복잡한 서울에서 뚜렷이 드러날 수 있는 단순 명료한 기념 장소를 제시하고자 한다(기억과 계승, 단순성). 두 번째는 ‘역동적 장소’다. 종교적 경건성과 역사적 기념성의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일상을 영위하는 시민의 실질적 휴식 공간으로서, 풍요롭고 역동적인 공공의 문화 체험 장소로 만들어가고자 한다(문화 퍼포먼스와 휴식). 마지막은 ‘개방적 장소’의 개념이다. 이 기념 공원이 역사를 추억하는 물리적 오브제로만 조성되기보다, 그 희생의 가치를 재해석하고 거기서 비롯되는 자유의 정신을 미래로 열어가는 소통의 장소로 만들고자 한다(소통과 전파). 2개의 축을 설정하고 대지를 4개의 크고 작은 광장으로 분할했다. 약현성당에서 중앙일보 사옥을 연결하는 동서 축과 숭례문과 충정로 지역을 잇는 남북의 두 축을 십자로 교차시켜 기념 광장과 현양탑 마당, 리사이 클링 광장, 잔디 광장으로 공간을 나누었다. 이 기념 공원 계획은 개인의 경건한 종교적 경험을 고조시킬 뿐 아니라, 역사적 기억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갖는 다양한 공공의 가치를 획득하고자 한다. 새롭게 제시되는 ‘44 순교 성인 기념 공원’은 복잡한 도심에서 작고도 낮게, 그러나 지반에 깊이 박혀 마치 사리탑과도 같은 순교의 표석으로 드러난다. 성聖과 속俗, 희생과 자유, 과거와 현재, 열림과 닫힘의 대립이 가로 세로로 만나 화해하는 듯한 십자가 형상은 나지막이 대지를 관통하며 온누리에 펼쳐진다.
2등작: Memorial Wall 추모의 벽, 역사의 현장을 기억하다
도시 디자인 개념은 장소의 경계를 구체화하여 추모 공간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이는 잊힌 공원의 역사와 종교적 신념을 위해 싸웠던 순교자들을 현재 우리의 일상에 연결해 준다. 이 장소의 역사는 도시에 속하는 것과 제외되는 것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진화해 왔다. ‘포함된다/제외된다’의 역설적인 상황이 프로젝트에 대한 개념적 접근(안/밖)의 출발점이 된다. 현재 공원의 사방은 모두 도시 조직(대로, 철도, 고가 도로, 대규모 상가)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따라서 대지의 경계를 물리적인 한계선으로 구체화함으로써 현장의 역사를 기념함과 동시에, 역사 공원을 내면의 평화를 찾기 위한 하나의 고립된 장소로 만든다. 이러한 장소에서 ‘부재’는 새로운 형태의 공공 공간을 창조하며, 상업적이거나 피상적인 사건들로부터 분리되어 자연과 역사 모두에 연결된다. 경계 경계는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역사와 관계를 맺으며 명상할 수 있도록 하는 투과성 있는 벽이 된다. 추모의 벽은 주 순환로 역할과 기능적인 서비스 공간의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공원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두 가지 형태의 기념비적 요소를 수용한다.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한 44위의 순교자들은 추모의 벽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각각의 순교자는 지붕을 지지하고 있는 6m의 직사각형 돌기둥으로 표현된다. 추모의 벽은 사람들이 순교자에 대해 기억하고, 동시에 영적인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각각의 기둥에는 특정 순교자를 추모하는 내용을 담은 추상적인 청동 주물 조각이 설치된다. 십자가의 길14 Stations of the Cross은 예수 십자 행로의 열네 자리(십사처十四處)를 공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14개의 성전이 역사 공원 전체 경계에 흩어져 자리 잡고 있다. 장소 역사 공원은 물리적 경계인 ‘추모의 벽’으로 둘러싸여 새로운 형태의 공공 공간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곳은 처형의 현장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시민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접근하고 편안하게 여가를 보낼 수 있는 공원이 될 것이다. 따라서 땅 위로 드러나는 것은 성당의 존재를 알리는 세개의 탑과 순교자를 추모하는 광장뿐이다.
1등작: En-City Engraving the Park
서소문 밖 역사 유적지는 죽음의 장소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공간이고, 그중 성스러운 신념을 놓칠 수 없어 순교한 44인의 성인으로 대표되는 신념과 정의의 죽음에 대한 장소다. 죽음의 공간 조성의 목적은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들이 목숨을 담보로 지키려 했던 믿음이 생존하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의 생존은 시대의 절망을 견디는 희망이 된다. 그렇기에 죽음은 희망이고, 그 희망은 다가올 미래의 정의에 대한 이야기다. 그 희망의 싹으로 말미암아 현시에서의 불의와 불신, 그리고 부정이 정의와 신념을 더럽히지 못한다. 이는 결국 현재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으로 지킨 그들의 신념은 일상 속에 함께 할 수 있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 도시에서 그 흔적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정신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공공 공간 속의 일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장소성의 회복이고, 소외된 공간이 기념비적 성격을 갖추고 도시로 복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현재 대상지의 지상은 공원으로, 지하는 화훼 단지 및 공영 주차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공모전은 역사, 문화, 종교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대상지의 장소적 특성을 살려 시민들이 친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역사 공원 조성을 목표로 한다. 또한 순교 성당, 광장 및 기념전시관을 포함하는 순교 기념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요구한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공간과 시간이라는 건축 요소의 대명제 외에 어떤 표현 수단도 적절치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대상지가 요구하는 기념성과 일상성을 단위 공간의 스케일과 비례 그리고 공간을 구획하는 재료의 성질과 그의 적층을 통해 완성하려 노력했다. 기념 공간은 표고 37m 레벨의 지표 위아래 즉, 땅속과 땅위의 관계를 연결해 땅속으로의 수렴과 땅위로의 발산의 매개 요소로서 작동한다. 땅위 7천여 평의 일상적 공원은 산개된 단위 공간의 벽으로 느슨하게 분할되어 시선과 움직임을 단속하기도 하고 유도하기도 하며, 일상적 도시에 휴식의 공간을 제공한다.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설계경기
추모와 일상의경계에서 서소문 근린공원이 역사 공원이자 순교 성지로 탈바꿈할 밑그림이 그려졌다. 서울시 중구(구청장 최창식)는 올해 2월 27일부터 6월 27일까지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설계경기’를 진행했다. 국내 건축사 대상 공개경쟁 방식으로 진행된 이번 설계공모에는 총 296개 팀이 참가 신청을 했으며, 79개 팀이 작품을 제출했다. 심사위원회는 지난 6월 30일 입상작 7점과 입선작 8점을 최종 선정했다. 실시설계권이 주어지는 당선작에는 인터커드(대표 윤승현) 컨소시엄의 ‘En-City’가 선정되었다. 서소문공원은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조선 후기 44명의 성인이 순교한 성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크게 주목받던 곳은 아니다. 따라서 이번 설계공모의 목표는 기존의 근린공원을 역사 공원화하는 동시에 기념 성당과 전시관, 광장 등의 종교 시설을 마련하여 성지라는 장소의 의미를 사회적으로도 공고히 하는 작업이다. 이번 설계공모는 과정과 형식면에서 한두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보인다. 우선 공개심사를 통해 소통에 열린 자세를 취했다는 점이다. 설계공모 운영위원회는 7팀의 최종 결선작을 선정한 후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심사 과정 중 일부를 일반에 공개함으로써 사회적 관심을 유도하고 설계안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국내 공모로 진행된 점도 의미가 있다. 그간 해외 디자이너가 설계해 장소의 맥락이나 역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독특한 형태만 남았다는 논란에 휩싸인 공공 공간이 많았다. 물론 이는 단순히 외국 작가가 설계를 맡는 것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설계자가 대상지를 살펴볼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조차 마련되지 못했다거나, 스타 건축가의 참여가 몰고 올 세간의 관심과 브랜드 효과에만 연연한 주최 측의 탓도 크다. 그에 비해 이번 공모는 최대한 많은 국내 작가들이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서소문 밖’의 역사적 의미와 도시적 조건 설계공모의 대상지가 자리한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조선 시대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외래 문물이 유입되는 경로였다. 이곳에는 17세기부터 칠패시장과 서소문시장이 형성되었으며, 동측은 중국으로 통하던 육상 교통로인 의주로에 접하고 있어 도성 밖의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또한 조선 시대 국가 중죄인들을 처형하던 ‘서소문 밖 형장’이 위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형장의 위치는 지금은 복개된 만초천변과 서소문 밖 네거리사이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홍경래의 난,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등 국사범들이 주로 참형되었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이 이 형장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새남터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순교터였다면 서소문 밖은 평신도들의 순교터였다. 신유박해(1801년, 순조1년) 40위, 기해박해(1839년, 헌종 5년) 41위가 순교했으며, 병인박해(1866년 이후)에도 많은 신자들이 죽임을 당해, 세계 가톨릭 역사에서 중요한 성지로 주목받고 있다(이곳에서만 10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당했고, 이중 44위가 성인이 되었다). 1891년 박해가 끝나자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서소문 성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인근 언덕에 약현성당(1892년, 사적 제252호)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조, 로마네스크, 고딕 혼합식 건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근대 사회로 진입하면서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서소문이 철거(1914)되고, 경의선(1920)이 지나가고, 북쪽의 서소문로를 따라서는 고가차도(1966)가 놓인다. 또한 고층 건물에 둘러싸이면서 이 대지는 점차 도시적 맥락에서 고립된 섬이 되어간다. 이렇게 뚜렷한 장소의 특색이 없는 가운데 1976년 서소문공원이 개원하고, 지하에는 쓰레기 처리장(1999), 공용 주차장, 꽃 도매상이 들어서는 등 이후로도 많은 것들이 덧붙여졌다. 그 결과 현재 서소문공원은 철도의 소음과 쓰레기 처리장의 악취가 뒤섞여 있는 열악한 환경의 공원이 되었다. 이곳이 성지임을 알리는 표지는 순교자를 기리는 현양탑(1984, 1999)이 유일하다. ‘서소문 밖’의 성지화 배경 이렇듯 현재의 서소문공원은 인근의 상인들이나 주민, 노숙자들이 찾는 근린공원으로 역할하고 있지만 성지에 걸맞는 천주교 행사를 수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번 설계공모는 3년 전 서울대교구가 중구청에 제안하면서 시작된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서소문공원의 성지화는 기초 지방자치단체인 구청에서 단독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일로, ‘관광자원화사업’의 형식을 빌어 사업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법적인 요건을 갖추게 된다. 이를 통해 국비와 시비를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고, 서울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서울성곽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록, 600년 성곽도시 서울의 재발견 사업 및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지난 해 선포한 서울의 도보성지 순례길과 연계할 예정이다. 더불어 기념 성당과 전시장 같은 시설을 갖추기 위해 본래 근린공원이었던 설계대상지를 역사 공원(2014.02.06)으로 도시계획시설 변경을 진행하는 등 복잡하고 신중한 과정을 거쳤다. 공공공간에 성당을 짓는 일은, 이곳이 기존 사회 체제의 불합리함에 대항하여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장이었다는 견해에도 불구하고, 특정 종교를 위한 공간이라는 오해와 비난을 피해야 하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당이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성지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조성되어야 한다는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1등작 En-City 인터커드 + 보이드아키텍트 + 레스건축 2등작 Memorial Wall 이소우건축 + PWFERRETTO 3등작 44 Saints Memorial 코마건축 + 이은석 3등작 가시 엔이이디 건축 + 건축농장 가작 Groundscape 원오원아키텍스 가작 서소문역사공원 유원건축 + Sapienza-Università di Roma 가작 홍예 오피스박김 + 동우건축
Secret Orange
시크릿 오렌지는 위요된 공간에서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과 그 지각을 바탕으로 작동한다. 이 정원은 감각을통해 지각을 완성시켜주는 수많은 자극 중에서 시각적 특징을 분리시켜 정원의 오렌지색 차원을 탐험할 수있게 한다.
Routunda
물이 담긴 원형 접시 형태의 로툰다는 새와 곤충의 식량인 꽃가루와 잎사귀를 매일 수집해, 정원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
Méristème
퀘벡의 고유 식물 종 보존에 기여하는 연약한 소우주를 상징하는 이 정원은 식물 세포 시스템을 육안으로보이는 구조체로 재현했다. 도킹하지 않은 선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식물 유산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킨다. 인류 사회의 미래를 보장해줄 식물의 종 다양성의 중요한 역할을 떠올리게 한다.
Line Garden
대상지의 자연 환경 속에 빽빽하게 정렬된 안전용 보안 테이프로 만들어진 이 현대판 미로는 방문자와 지역민들에게 환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Cone Garden
콘가든은 소리를 만드는 오렌지색의 러버콘으로 이루어진 팝업 정원이다. 터치 방식에 따라 악기처럼 다양한 소리를 낸다. 정원의 콘 구조물은 건설 현장의 상징적 개체로,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인공물의 구축, 해체, 재구축을 통해 환경을 제어하는 우리의 욕망을 상징한다. 콘 구조물은 플랜터이자 의자가 되며, 동시에메시지를 전달하는 콘이 된다.
Afterburn
애프터번은 불에 탄 나무, 재가 풍부한 식재 토양, 강돌, 침엽수 묘목 및 선구 초종을 사용해 화재를 겪은자연이 어떻게 스스로 재생하는지, 그리고 상처 입은 경관을 어떻게 치유하는지 엿볼 수 있는 정원이다. 정원 내에서 인간화된 시스템과 자연 환경 시스템 간의 상호 의존성을 읽어낼 수 있도록 했다.
Living Breakwaters
리빙 브레이크워터스 스태튼아일랜드Staten Island는 뉴욕 만New York Bight의 초입에 위치하고 있으며, 파도에 의한 피해와 침식에 취약한 편이다. 본 프로젝트에서는 사람들과 수변공간 사이에 서로를 가로 막는 장벽을 설치하기보다는, 물을 포용하고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목걸이 형태의 방파제를 활용해 파도, 범람, 침식 등의 위험 요소를 줄여나가고자 했다. 우리는 물고기, 갑각류, 바닷가재 등이 살 수 있는 소규모 서식지인 일명 ‘리프 스트리트Reef Street’를 설계했고, 더불어 대규모의 방파제 시스템Living Breakwaters을 모델로 제시함으로써 커뮤니티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빌리언 오이스터 프로젝트Billion Oyster Project 및 이와 연계된 광범위한 수변 허브water hub 프로그램을 통해 인근 지역 학교들은 과학, 여가, 교육, 그리고 접근성 등에 있어서 다양한 혜택을 입게 될 것이다. 우리가 택한 접근 방법은 특히 스태튼아일랜드의 남쪽 해안에 적합한 것이지만, 인근에 위치한 수변 공간으로 인해 유사한 위험 요소와 기회를 동시에 갖고 있는 다른 지역에도 충분히 적용될 만한 것이다. 위험 요소의 경감 허리케인이 들이닥치게 되면 스태튼아일랜드는 극단적인 파랑과 폭풍 해일에 노출된다. 스태튼아일랜드자체만 놓고 보자면 허리케인 샌디가 미친 영향은 지역별로 상당히 다른 양상을 나타내는데, 이스트 쇼어East Shore는 노스 쇼어North Shore나 사우스 쇼어SouthShore와 비교했을 때 전혀 다른 양상의 피해를 입었다. 각각의 지역이 지닌 특성에 따라 개별화된 대응 방법이 필요하지만, 모든 경우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은 생태적인 동시에 여가 활동에 기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더 큰 공공의 이익과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회복탄력성 확보 스태튼아일랜드 주민들은 가시성이 매우 높고 프로그램화된 워터 허브를 통해 다시금 해안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네트워크화된 워터 허브는 사회적 결속력을 높여주고, 방향성, 정보, 저장 공간, 그리고 단체 모임 장소 등을 제공하는 장소로 발돋움하게 될 것 이다. 이러한 허브들의 설계는 커뮤니티 디자인 샤렛community design charrette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회의를 통해 프로그램과 요구 조건 등을 파악한 뒤실제 시공에 반영한다. 각각의 장소가 지닌 입지 조건과 커뮤니티의 필요 사항 등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형태의 허브가 건설되는데, 내장형, 부유형, 켄틸레버형, 혹은 고가형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Parsons Brinckerhoff|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Ocean and Coastal Consultants| SeArc Consulting|New York Harbor School|LOT-EK|MTWTF|Paul Greenberg 스케이프(SCAPE / LANDSCAPE ARCHITECTURE)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설계사무소로, 원예, 조경, 도시설계, 그리고 계획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스케이프는 파슨스 브린커호프(Parsons Brinckerhoff, 계획 & 엔지니어링), 스티븐스 공과대학(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의 필립 오튼 박사(Dr. Philip Orton, 해양학& 수치 모델링), Ocean and Coastal Consultants(해안 엔지니어링), 시아크 컨설팅(SeArc Consulting, 해양생물학), 뉴욕 하버 스쿨(New York Harbor School, 교육 & 생태 복원), LOT-EK(건축 & 설계), MTWTF(그래픽 디자인 & 커뮤니케이션)와 협업했으며, 폴 그린버그(Paul Greenberg, 『포 피시(Four Fish)』의 저자)에게 자문을 받았다.
Hunts Point Lifelines
2천2백만 명의 식량 공급 심장부 허리케인 샌디가 영향을 미쳤을 당시 헌츠 포인트Hunts Point는 홍수뿐만 아니라 전력 및 연료 공급 면에서도 취약한 지역임이 드러났다. HUDDepartment of Housing and Urban Development에서 제시한 8가지 홍수 취약 기준storm-vulnerability factors에 따르면 많은 부분에서 개선해야 할 점을 보인다. 또한 이곳은 미국 내에서 가장 빈곤한 지구로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고립, 대기오염, 트럭 통행에 따른 보행자 안전 문제, 그리고 수십 년에 걸쳐 제기된 환경 오염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렇게 헌츠 포인트는 환경적·경제적으로 심각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커뮤니티 주도의 회복탄력성 구축을 위한 공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곳에 위치한 헌츠 포인트 식품 유통센터는 식품 공급 네트워크의 중심지로서 연간 경제 규모가 50억 달러에 달하며, 2만여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따라서 헌츠 포인트에 대한 투자는 지역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재난 상황에서도 식량 공급 안정성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헌츠 포인트 라이프라인즈Hunts Point Lifelines 계획은 4가지 전략(4 Lifelines)을 제시한다. 통합적 홍수 방어 통합적 홍수 방어Integrated Flood Protection 시스템은 홍수조절이 가능한 구조로 생태적인 환경으로 기능한다. 동시에 2천2백만 시민의 식량 공급을 담당하는 중요한 시설을 보호한다. 현재 식품 유통센터의 절반 정도는 범람원에 속하며, 2050년까지 더 많은 지역이 홍수의 영향권에 들어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또한 식품유통센터 바로 옆에 위치한 헌츠 포인트 폐수 처리장은 시에서 관리하는 시설 중 가장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생계와 리더십 생계와 리더십Livelihoods and Leadership은 지역의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구조물과 생태계 회복을 위한 일자리를 통합하여 구축하고 트레이닝하는 발전 프로그램이다. 헌츠 포인트의 커뮤니티 기반 조직들-지속가능한 사우스 브롱크스(Sustainable South Bronx), 더 포인트 CDC(The Point CDC) 등-은 환경운동을 주도하며 녹색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 HR&A Advisors|eDesign Dynamics|McLaren Engineering Group|Level Infrastructure| Barretto Bay Strategies|Philip Habib & Associates|Buro Happold 펜디자인 + 올린(PennDesign + OLIN)은 여러 학문 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 경험과 디자인,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장점인 펜실베니아 대학교 디자인스쿨과 조경 및 도시설계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올린(OLIN)이 주축이 된 조경설계팀이다. 그 외에도 HR&A어드바이저스(HR&A Advisors, 시장 조사와 재무 전략), 이디자인 다이나믹스(eDesign Dynamics, 수문학과 생태학)와 함께 했다. 와튼 비즈니스 스쿨(Wharton Business School)에서 건물, 생태계, 사회 조직,기반 시설 등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관한 자문을 구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Resist, Delay, Store,
우리는 고밀화된 도시 환경에 집중했고, 통합적 사고라는 하나의 원칙으로 안을 발전시켜 나갔다.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의 발생에 댐이 기여했던 방식과 같이 우리가 고안한 방어 시스템은 도시 환경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다양한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 접근법은 통합적이며 역동적인 접근법을 필요로 하는데, 통합성은 시스템이 기능하기 위한 복잡성을 보여주려는 것이며, 역동성은 자연의 흐름을 막아내기보다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이다. 샌디Sandy에 심각한 피해를 받은 지역 중, 저지시티Jersey City의 뉴저지New Jersey 공동체, 호보켄Hoboken, 그리고 위호켄Weehawken은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홍수와 폭풍 해일 모두에 쉽게 영향을 받는 곳이었다. 이렇게 이어진 기다란 해안 지역은 보호해야할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험에 처해 있는 곳이다. 도시를 통합적인 환경으로 생각했을 때, 주택 하나하나에 개별적으로 적용시키는 지엽적인 해결책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해결책은 도시 맥락이 가진 밀도와 복잡성을 수용할 수 있으며,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고, 도시의 기반 시설 및 시민들 전체를 보호할 수 있는 통합적인 접근이었다. 현실적으로 해안지역 전체에 완벽한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순위를 정해,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는곳에 제한된 자원을 집중투자하기로 했다. 또한 그 투자를 통해 새롭게 조성될 환경은 지역 사회 통합을 유도하고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어야 하며, 탄력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의 접근법은 홍수 위험성을 이해하고 수치화 해보려는 시도에서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정치적, 생태적, 그리고 경제적 요소를 조합하여 ‘Resist, Delay, Store, Discharge’라는 통합적 홍수 대응 전략을 통해 완성하였다. 이는 단순히 도시 전체를 보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상업적, 도시적, 그리고 레크리에이션 기능을 갖춘 어메니티가 갖추어지도록 한다. Royal HaskoningDHV|Balmori|HR&A|‘2x4’ OMA는 암스테르담의 두 전문가 집단과 협업하여 이 작품을 만들어냈다. 건축가와 도시설계가가 주축인 OMA는, 물 관리에 대한 전문 지식을 제공한 로열 해스크닝DHV(Royal Haskoning DHV)와 발모리(Balmori)의 조경 및 토지이용 계획가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HR & A의 경제적 관점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설계안을 수정 및 발전시켰다. 팀들 간 커뮤니케이션은 ‘2x4’의 도움을 통해 이루어졌다.
New Meadowlands
미도우랜즈Meadowlands 유역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과 뉴저지New Jersy 모두의 중요한 자산이다. 교통, 생태, 성장을 통합하는 뉴 미도우랜즈New Meadowlands 프로젝트는 시민을 위한 어메니티를 제공하고 재개발 기회를 새롭게 창출하는 동시에 이 지역을 둘러싼 다양한 위험 요소에 대응하기 위해 미도우랜즈를 변형시킨다. 미도우파크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대규모 자연 보호 구역인 미도우파크Meadowpark는 홍수를 방지하는 기능을 할 것이다. 미도우파크는 습지를 회복하고 확장하며 접근성을 향상시킨다. 우리 팀은 미도우파크 전체를 아우르는 둔덕과 습지로 이루어진 복잡한 시스템을 제안한다. 이 시스템은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고 빗물을 저장해 인근 마을의 하수관이 넘치는 사태를 줄인다. 미도우파크는 멋진 경관과 여가 시설을 제공함으로써 인근의 개발 가치를 더한다. 미도우밴드 미 도 우 파 크 의 경 계 부 를 정 의 하 는 미도우밴드Meadowband는 홍수를 방지하고 인근 도시와 습지를 연결하며 도시에 성장 기회를 제공한다. 미도우밴드는 도로와 간선 급행버스 노선, 일련의 공공 공간, 레크리에이션 구역, 미도우파크 진입부 등으로 구성된다. 미도우밴드는 지역 주민과 방문객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시민의 어메니티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교통, 생태, 개발과 같은 서로 다른 시스템을 결합하고 다양한 규모의 지역을 연결한다. 공원과 미도우밴드는 기존의 개발 지역을 홍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 연방 정부에서 이 지역에 투자하는 만큼, 이 지역은 땅을 좀 더 집약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단층 건물, 단독 건물, 오픈스페이스, 주차장 등이 들어선 교외 지역의 토지 이용을 좀더 도시적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단층 창고 구역은 다층 건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기준을 상향 설정하고, 미도우밴드를 둘러싼 지역에는 다층 주택이 들어설 수 있도록 조정한다. 용도구역의 재설정을 통해 이 유역의 브랜드와 아이덴티티는 시간이 흐르면서 강화되고 땅의 가치는 높아질 것이다.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3개의 파일럿 구역을 설정했다. 북쪽 경계로는 리틀페리Little Ferry, 무나치Moonachie, 칼스타트Carlstadt, 테터보로Teterboro, 사우스해컨섹South Hackensack 지구를 포함하며, 동쪽 경계는 시코커스Secaucus와 저지시티Jersey City의 일부를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남쪽 경계는 사우스키어니South Kearny와 저지시티의 서쪽 수변으로 구성됐다. MIT CAU|ZUS|DE URBANISTEN|75B|Deltares|Volker InfraDesign MIT CAU + ZUS + DE URBANISTEN 팀은 MIT에서는 알렉산더 드훅(Alexander D’ooge), 앨런 버거(Alan Berger), 사라 윌리엄스(Sarah Williams), 제임스 웨스콧(James Wescoat) 교수가, ZUS에서는 크리스틴 코어맨(Kristian Koreman), 엘마 반 복셀(Elma vanBoxel)이, DE URBANISTEN에서는 플로리안 보어(Florian Boer)와 더크 반 페이페(Dirk van Peijpe)가 참여했다. 그래픽 작업은 75B가, 생태 공학 지식은 Deltares, 인프라 정보는 Volker InfraDesign이 도움을 주었다.
Living with the Bay
미래의 기상이변과 해수면 상승의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롱아일랜드Long Island 주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까? 다음번 태풍이 샌디Sandy처럼 지역에 엄청난 타격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지역에서 수질과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만에서의 삶bay life’을 더 안전하고 건강하고 재미있게 만들며 만으로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나소 카운티Nassau County 남쪽 해안을 위한 종합적 회복탄력적 계획인 ‘리빙 위드 더 베이Living with the Bay’를 구상하면서 고심했던 질문들이다. 이 지역은 물에 관련된 여러 위협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묘책’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방파제가 롱아일랜드 주민을 폭풍 해일로부터 보호할 수 있지만, 지역 커뮤니티를 일상적으로 침수시키는 북동풍과 폭우로부터 지역 주민의 안전을 충분히 지켜주지 못한다. 해안으로부터 철수하거나 후퇴한다면 홍수 피해를 덜 받을 수 있지만, 그러한 해결책은 남쪽 해안에서는 좋은 대책이 아니다. 뉴욕 시의 교외 지역인 롱아일랜드는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고향이며 멋진 삶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쪽으로는 대서양, 북쪽으로는 선라이즈 고속도로Sunrise Highway, 서쪽으로는 뉴욕 시, 동쪽으로는 수폴크 카운티Suffolk County와 경계를 접하는 나소 카운티의 남쪽 해안에 초점을 맞춰 ‘버퍼드 베이buffered bay’를 해결책으로 제안한다. 해안 기슭을 위한 전략: 퇴적물 이동 해수면 상승과 함께 점점 가라앉고 있는 습지대는 지반이 상승할 때 비로소 가라앉기를 멈출 것이다. 이를위해 지역의 퇴적 시스템을 회복하는 다각도 접근을 제안한다. 이 전략은 퇴적물이 버퍼드 베이 시스템 주변을 이동하며 습지대에 퇴적될 수 있도록 적당량의 퇴적물을 이용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습지를 위한 전략: 생태적 경계 지난 70년 간, 도시 개발로 인해 남쪽 해안 만의 습지대가 상당 부분 사라졌다. 해안 커뮤니티가 폭풍 해일로 받는 피해를 완충하던 연안 습지가 사라짐에 따라나소 만 커뮤니티는 폭풍 해일에 더 취약해졌다. 우리는 서쪽, 중앙, 동쪽 만에 파도 작용을 줄이고 만의 생태계를 향상시키며 여가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습지 섬을 조성해 생태적 경계Eco-Edge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습지대 안쪽으로는 이 전략의 두 번째 요소인 고리형 제방이 도시화된 경계 부분을 방어한다. Interboro Partners|Apex|Bosch Slabbers|Center for Urban Pedagogy|David Rusk|Deltares| H+N+S Landschapsarchitecten|IMG Rebel|NJIT Infrastructure Planning Program| Palmbout Urban Landscapes|Project Projects|RFA Investments|TU Delft 인터보로 팀(Interboro Team)은 네덜란드의 토지이용 계획, 환경 및해안 엔지니어링, 도시 물 엔지니어링 팀과 미국의 도시설계, 참여 계획, 커뮤니티 개발, 엔지니어링, 경제 분석과 재정 엔지니어링 팀으로구성됐다. 네덜란드 팀은 전 세계 해안 지역에 최적화된 계획을 세운경험이 풍부한 디자인 전문가로 구성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중요한 홍수 완화와 관리 전략을 구상하고 디자인해 왔다. 건축, 도시설계, 도시계획, 해안 엔지니어링, 커뮤니티 경제 개발, 거버넌스, 교육, 그래픽디자인, 재정-경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미국 팀은 각 분야에서 인정받는 리더들이며, 커뮤니티와 함께 회복탄력적 시스템을 구축한 실적이 풍부하다.
BIG U
BIG U는 웨스트 57번가West 57th Street로부터 남쪽으로는 배터리 파크Battery Park, 북쪽으로는 이스트 42번가East 42nd Street에 이르는 대문자 U 모양의 지역을 아우른다. 대상지는 건물의 밀도가 높은 역동적인 지역이면서도 자연 재해에 취약한 저지대 도시 지역이다. BIG 팀은 ‘사회적 기반 시설social infrastructure’과 ‘유희적 지속가능성hedonistic sustainability’에 콘셉트의 뿌리를 두고 접근했다. 공공 기반 시설과 사회적 프로그램의 이종교배를 통해 새로운 도시 생활을 도입한다. BIG U는 홍수로부터 도시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공공 영역을 넓히기 위해, 인접해 있지만 독립적인 세 지역에 대한 상호 협력적 계획을 세웠다. 세 구역compartment은 기능에 따라 구획된 수변 공간이다. 각 구획은 물리적으로 분리된 홍수 방지 구역인 동시에, 사회적 통합과 커뮤니티 계획을 위한 장을 표방한다. 이 세 구역을 위한 전략은 관련 커뮤니티와 지역, 지방, 주, 연방 차원의 많은 이해당사자들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디자인되었다. 또한 각 계획안은 유연하고단계적이며 도시의 부둣가를 따라 현재 진행 중인 개발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1구역: L.E.S. 노스 - 이스트 리버 파크 1구역을 위한 전략은 동쪽으로 FDR 드라이브FDR Drive와 접하는 대규모 주거 지역을 포함한 범람원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기획됐다. FDR 드라이브 너머 물과 접하는 경계에 이스트 리버 파크East River Park가 자리하고 있다. 이 넓은 공원에 보호 둔덕을 조성하여 홍수로 부터 주거 지역을 보호하고, 새 보도교를 조성하여 고립된 공원을 인근 커뮤니티와 연결할 것이다. 피터 쿠퍼 빌리지Peter Cooper Village의 FDR 드라이브밑으로는 파빌리온이 일렬로 놓인다. 육지 쪽에는 현재 부족한 상업 시설이나 다른 편의 시설을 마련할 수 있다. 강 쪽은 인접한 공원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여가공간으로 계획될 수 있다. 콘에드Con-Ed 공장 주위는 신설 고가 횡단 보도와 통합 제방이 수변 공간의 구역들을 연결할 것이다. 이스트 리버 파크에는 기존 지선도로의 자리에 둔덕을 조성할 계획인데, 이 둔덕은 현존하는 운동 경기장들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고, 공원 뒤편 지형을 안정감 있게 만들면서 새로운 경관을 제공한다. 공원에는 바다의 염분에 내성이 있는 다양한 나무와 식물들이 식재되어 공원의 회복탄력성을 향상시킬 것이다. 2구역: 투 브리지스 - 차이나타운 투 브리지스Two Bridges에는 주거 지역과 수변 공간 사이의 공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므로 복합 홍수 방지전략을 세웠다. 높이를 제한한 차수 시설은 수변을 향한 경관을 제공하면서 반복되는 홍수에 맞서 이 지역을 보호한다. 차수 시설은 발전기 등을 이용한 시스템적 방법으로 보완된다. 몽고메리 스트리트Montgomery Street 남쪽, 피어 36Pier36 위생국 시설 앞으로 폴더 형태로 접혀 올라갈 수 있는 차수 시설이 FDR 드라이브 밑에 부착될 것이다. 공공 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계획된 이 차수 시설은 어두침침한 이 구역을 환하고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디자인되었다. 접어 올릴 수 있는 차수 시설 덕분에 스미스 하우스Smith Houses 반대편으로 벤치, 스케이트공원, 태극권 훈련장, 수영장 등의 시설이 마련되며, 이 공간은 이후 지면으로부터 4피트 높이의 유리로 둘러싸인다. BIG Bjarke Ingels Group| One Architecture| Starr Whitehouse| Buro Happold| Level Infrastructure| James Lima Planning + Development| Green Shield Ecology| AEA Consulting| Project Projects| School of Constructed Environments at Parsonsthe New School for Design BIG 팀(BIG Team)의 리더인 BIG은 뉴욕, 코펜하겐, 베이징에 사무실을 두고 건축, 도시계획, 리서치, 개발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설계사무소다. BIG은 비용과 자원을 절약하면서도 프로그램과 기술적으로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공공 공간과 형태를 창조하며 도시 개발로 야기되는 문제에 대응해왔다. BIG 팀에는 One Architecture(물& 도시계획)와 Starr Whitehouse(조경), Buro Happold(엔지니어링 & 지속가능성), Level Infrastructure(인프라스트럭처 엔지니어링), James Lima Planning + Development(재정 & 경제), GreenShield Ecology(생태), AEA Consulting(예술 & 문화 계획), ProjectProjects(그래픽 디자인), School of Constructed Environments atParsons the New School이 참여했다.
REBUILD BY DESIGN
물과 공존하는도시를 향한‘신중한’ 도전 2012년 10월 대서양에서 발생한 샌디Sandy는 카리브해 지역에서부터 미국을 거쳐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북미 대륙 동부의 광범위한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발생시킨 초대형 허리케인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야기했으며,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650억 달러의 복구 비용이 들어간 샌디는 세계 제1의 도시라는 뉴욕을 비롯한 미 북동부 대도시권의 재해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사회적으로 그 심각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직접적인 침수 피해는 물론 대중교통, 전기, 가스 공급의 중단, 주식 시장 폐쇄 등 기본적인 도시 기능이 장시간 완전히 마비되는 상황을 맞은 이 지역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만큼 기간 시설의 정비 수준이 지역의 세계적 위상에 미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즉각적인 피해 복구와 재건의 시급함 속에서도 장기적이지만 근본적인 해법을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로서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 사회의 성숙함과 저력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수변 공간은 인류가 처음 도시를 세운 원초적 지리 조건이기도 하지만, 현대 도시에서도 여전히 그 매력과 중요성을 잃지 않고 있다. 특히 샌디의 피해 지역인 미 북동부 해안 지역은 해수면 상승과 기상 이변에 의한 재해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도시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이 같은 배경에서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 설계공모는 단순한 허리케인 재건사업이 아니라, 물과 도시의 삶이 공존하기 위한 혁신적인 해법을 도출하고자 하는 미국 사회의, 그리고 현대 도시의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혁신적 해법은 무엇보다 혁신적인 공모로부터 출발한다. ‘리빌드 바이 디자인’은 이미 정해진 사이트와 프로그램을 주고 참가자들 각자가 만든 제안 중에 가장 나은 안을 뽑는, 그런 일반적인 설계공모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공모 과정을 통해 참여자들은 스스로 사이트와 이슈를 찾아 그 중요성을 증명해야 한다. 달리 말해 ‘리빌드 바이 디자인’은 프로젝트 자체를 만드는 설계공모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모의 주최 측은 구경꾼이 아니라 공모 참가자와 함께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넓은 의미의 공모 참여자로서, 각 단계별로 최고 수준의 전문가와 관련된 권한을 가진 정부 기관이 함께 한다. ‘리빌드 바이 디자인’이 그 결과를 내기도 전에 CNN이 선정한 2013년 최고의 아이디어에 이름을 올린 것도 바로 그러한 ‘과정’ 자체의 혁신을 인정받고 있음을 말해 준다. 또한 ‘리빌드 바이 디자인’이 재건 프로젝트를 통해 기상 재해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수해 위협을 완벽하게 차단하겠다고 공언했다면, 그것은 오만한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빌드 바이 디자인’은 현실적이고도 겸손한 지혜를 보여주었다. 앞으로의 기상 이변이 현대 도시 문명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전제하고, 그로 인한 재난 상황으로부터 도시의 회복 능력, 즉 ‘회복탄력성resiliency’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미국의 ‘국가 재난 복구 프레임The National Disaster Recovery Framework’에서 정의하는 ‘회복탄력성’이란위험 요소 경감 및 토지이용 계획 전략, 중요 기간 시설 및 환경·문화 자원의 보호, 건조 환경을 재구축하고 경제·사회·자연환경을 되살리기 위한 지속 가능한 실행을 말한다. 이러한 포괄적 개념의 회복탄력성은 설계공모의 전 과정을 관통하며 모든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기본 가치를 이루고 있다. 새로운 형식의 다단계 설계공모 ‘리빌드 바이 디자인’의 가장 큰 특징은 총 4단계로 이루어진 ‘복잡한’ 공모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1단계에서 참여 전문가의 구성 및 역량과 간략한 제안서를 바탕으로 5~10개 팀을 선정하며, 리서치와 프로젝트 발굴에 집중하는 2단계를 통해 각 팀별로 하나의 프로젝트를 결정한다. 3단계를 통해각 팀의 프로젝트를 발전시켜 복수의 최종 프로젝트를 확정하며 4단계는 계획의 실행 단계이다. 이 글에서 소개할 6개의 최종안은 3단계의 결과물에 해당한다. 물론 단순히 여러 단계를 거쳐 최종안을 결정한 것이 ‘리빌드 바이 디자인’이 이룬 혁신은 아니다. 참가팀들이 각기 독립적인 안을 발전시켜 경쟁하는 일반적인 설계공모가 최종 결과물만을 우리에게 던진다면, ‘리빌드 바이 디자인’은 결과물뿐만 아니라 공모의 전 과정에서 이루어진 모든 논의와 경험을 공공의 지식, 공공의 성취로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 같은 공모 과정의 가장 큰 가치는 무엇보다 각 팀들이 단순한 경쟁 구도1에서 벗어나 각자가 수행한 지역에 대한 분석과 그로부터 도출한 중요한 아이디어를 다른 모든 이들과 공유함으로써 지역 전체를 위한 더 나은 해법을 찾아내려는 공통의 목적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즉 공모 과정에서 생산된 모든 지적 결과물은 어느 팀에 제한적으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으로 활용된다는 의미다. 특히 2단계인 리서치 과정은 지역 전문가 및 지역 사회와 더불어 지역의 조건을 충실히 이해하고 디자인 대상지와 이슈를 발굴하는 것이 핵심 목표이지만, 동시에 기후 변화와 기상 재해라는 세계 공통의 문제에 대한 연구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역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공공의 지식’을 축적한다는 ‘미국적’ 스케일에 쓴웃음이 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지함이 있다. 리서치 결과물이 어느 시점에서 완결된 책자 형태의 보고서가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과 아이디어를 더해갈 수 있도록 웹사이트(www.rebuildbydesign.org)라는 열린 형식을 취한다는 설명에 수긍이 가는 이유다. 또한 최종적인 제안의 현실적 토대가 되는 리서치 과정에서 뉴욕대학교 공공지식연구소 등 관계 기관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설계공모 팀의 지역에 대한 이해를 돕는 등, 리서치의 내실을 채우고 있으며, 그 결과를 공개함으로써 객관적 검증의 기회도 거치게 된다. 이렇게 해서 2단계 리서치는 어떤 것이 중요하게 고려할 취약점인지, 그리고 그 해결을 위한 기본 방향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참가팀 모두가 공유하는 출발점을 제공한다. 동시에 지역 사회의 지역에 대한 객관적 이해도를 높여 설계공모를 통해 도출된 해법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부차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2단계와 3단계에 참여하는 공모 팀들은 각 단계별로 연구와 작업에 대한 대가로 각각 10만 달러를 받게 된다. 물론 이 금액이 참여 인력과 미국의 통상적 용역비를 고려할 때 충분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공모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전문가로서의 활동과 도출된 지적 결과물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리빌드 바이 디자인’ 과정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이 상당 부분 록펠러 재단의 기부로 충당된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BIG U BIG Team Living with the Bay Interboro Partners New Meadowlands MIT CAU + ZUS + URBANISTEN Resist, Delay, Store, Discharge OMA Hunts Point Lifelines PennDesign + OLIN Living Breakwaters SCAPE / LANDSCAPE ARCHITECTURE
[칼럼] 재해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방법
저녁이 되면서 내리던 비는 더욱 거세졌다. 폭우 속에서 처량하게 순서를 기다리던 비행기들은 모두 결항됐다. 우리는 곧 허물어질 듯 한 여관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섰고, 날씨는 더거칠어져 있었다.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덜컹거리는 창문, 펄럭이는 맥주 회사 달력, 무엇보다 지린내가 절어 있었다. 여기에 묵었던 사람들의 오줌은 훨씬 더 독한 모양이었다. 머리만 대면 바로 잠을 자는 내 동행은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창문 밖 어둠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온 몸이 긴장되어 자리를 펴고 눕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갑자기 어느 깊은 외딴 구석에 격리되고 절연되고 갇힌 것이다. 풍요롭고 안락하게만 느끼던 휴가지의 공간이 갑자기 사라지고, 잠들면 어두운 수렁에 빠질 것 같은 두려운 휴전 상태로 던져졌다. 장엄한 아포칼립스apocalypse의 스펙터클에 갇혀 날이 밝기를, 비바람이 잦아지기를 조용히 기다릴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태풍으로 수천억 원의 재산 피해와 수백 명의 인명 피해, 그리고 수천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우리 사회는 매년 이와 비슷한 재해를 겪었고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보니 매년 겪는 일쯤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어떻게 매번 똑같은 일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지 의아해하기도 했다. 건축 저널리스트로 일을 막 시작할 때 이 일을 겪다보니 건축가들이 제안한 재해에 대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작업을 찾아보기도 했다.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 등 자원의 과소비로 인한 자연의 위협이 커지고 있지만, 국내 건축계는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확인했을 뿐이다. 2011년 3월 11일,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대재앙의 실체에 직면했다.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쓰나미는 후쿠시마 원전의 붕괴로 이어졌고, 아직도 진행 중인 이 재난은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내적 문제와 한계를 가장 묵시록적으로 드러냈다. 이 재앙은 일본 사회는 물론 국제 사회에 원자력에 대한 반성을 일으켰다. 일례로, 이와사부로 코소는 “지금껏 ‘인류의 진보’로 여겨지던 ‘장치’의 한 가지 도달점–에너지 공급의 효율화와 생산의 고도화, 정보·과학기술, 그것들과 복합적으로 얽힌 관료 기구와 시민사회–이 재해를 계기로 자기 붕괴”한 표시라고 이 재난을 진단했다. 건축가인 토요 이토도 “쓰나미 피해와 원전 사고라는 두가지 재해 모두가 인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사람과 공동체가 건축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그리고 집을 잃은 센다이 시 미야기노로 가서 참사를 함께 이겨낼 공동체를 위한 건축 ‘모두의 집Home for All’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게루 반은 이재민을 위한 임시 거주 공간 프로그램을 꽤 오랫동안 지속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정확한 상황을 공개하고 대처하기보다는 은폐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일본 건축계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새롭게 변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환경과조경』 이번 호에 소개되는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도 매우 흥미로운 설계공모다. 주 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2012년 10월 허리케인 샌디가 강타한 뉴욕의 해변 지역을 미래의 재해에서 보호하고 거주민들에게 안전하고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기위해 시작되었다. 이를 구현하는 제안들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지역민이 참여해 만들어가고 있는데, 현재 OMA와 BIG 팀 등 건축가, 조경가, 엔지니어, 도시학자, 사회학자, 정치가 등이 한 팀으로 구성된 여섯 개의 협력적 팀을 최종 선정해 그들이 함께 이 지역의 새로운 청사진을 그려가고 있다. 장기적 안목에서 재해를 예방하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라는 공감대가 정부와 시민사회에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재해 대처 능력이다. 참으로 답답하게 이번 세월호 참사로 우리는, 우리 사회의 법과 질서의 붕괴, 민주주의의 타락, 그리고 사회적 재앙을 처절하게 목도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망가뜨린 생태계를 복원하는데도 우리 건축, 도시, 조경 전문가들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 4대강의 환경 문제가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그 심각성이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뒷짐을 지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그 환경 속에서 우리의 건축을 고민해야 하지만, ‘안일한 유토피아’ 담론의 종결자인 4대강 사업이나 원자력발전에 대해 새롭게 검토하자는 건축계의 적극적인 목소리와 구체적인 제안은 아직 요원하다.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Andrew Cuomo의 말로 마무리를 대신한다. “지구상의 많은 지역은 분명 대자연의 소유다. 어느 순간, 대자연으로부터, 당신이 이곳에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느낄 때가 올 것이다.” 박성태는 중앙일보 출판국에서 잡지 에디터로 일했다. 그 후 『인서울매거진』과 『공간』의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 『건축신문』, ‘건축학교’, ‘프로젝트 1’, ‘통의동집’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에디토리얼] 회복탄력성
우리는 누구나 온갖 역경과 시련을 겪으며 살아간다. 자잘한 일상사에서도 수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다. 인간관계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갈등이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신체의 기능에 큰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가족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맞이하기도 한다. 갑작스런 지진이나 태풍이 한 개인의 일생과 사회의 역사 전체를 앗아가기도 한다. 그 극심한 고통과 좌절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은 순간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삶의 역경과 시련을 이겨낼 잠재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최근의 심리학은 그러한 힘을 ‘리질리언스resilience’라 부른다. ‘회복탄력성’으로 번역되고 있는 리질리언스는 “원래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힘”을 뜻한다.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꿋꿋하게 다시 튀어 오르는 능력, 불행과 역경을 이기고 다시 일어서서 더 성장하게 하는 인간 내면의 신비한 힘을 설명하는 개념이 회복탄력성이다. 그런데 회복탄력성을 누구나 똑같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무공처럼 강하게 되튀어 오르는 사람도 있지만 유리공처럼 바닥에 떨어지는 즉시 산산조각나는 사람도 있다. 『회복탄력성』(위즈덤하우스, 2011)의 저자인 연세대학교 김주환 교수는 회복탄력성을 “마음의 근력”에 비유한다. “몸이 힘을 발휘하려면 강한 근육이 필요한 것처럼, 마음이 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마음의 근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마음의 근육이 견뎌낼 수 있는 무게를 훈련을 통해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 구부러질지언정 결코 부러지지 않는 회복탄력성을 길러나가는 사람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가능성이 높다. 회복탄력성은 심리학과 교육학을 넘어 최근에는 경제학이나 안보 분야에서도 주목받을 만큼 널리 유행하고 있지만, 실은 생태학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전통적인 생태학은 생태계를 안정적이고 결정적이며 위계가 분명한 닫힌 시스템이라고 인식했지만, 현대 생태학은 생태계의 복잡성, 동적 변화, 지속적인 교란disturbance에 초점을 둔다. 즉 생태계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낭만의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는 교란에 의해 계속 망가지고 회복되며 적응해가는 열린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잠시의 집중 호우에 맥없이 초토화되곤 하는 우리 도시의 산과 강, 순간의 강풍에 형체도 없이 해체되는 우리의 자연 환경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태학자 홀링Crawford Stanley Holling은 회복탄력성을 “시스템의 지속성을 유지하고 변화와 교란을 흡수하고 상태 변수 사이에 동일한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의 정도”라고 정의한 바있다. 바꿔 말하자면, 회복탄력성이 높은 자연이나 환경의 시스템은 지진, 가뭄, 홍수, 태풍, 화재 등과 같은 예상치 못한 교란을 겪더라도 지속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적 회복탄력성이 마음의 근력이라면, 생태학적 회복탄력성은 자연과 도시 환경의 근육인 셈이다. 이번 호에 싣는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은 계획과 설계를 통해 재난 지역의 회복탄력성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지향한, 큰 의미를 지닌 프로젝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2012년의 허리케인 샌디는 현대 도시 경제와 문화의 심장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을 강타함으로써 현대 문명이 자연의 재해에 얼마나 취약한지 적나라하게 알려주었다. 본문에서 유영수 소장이 예리하게 진단하고 있듯이, “‘리빌드 바이 디자인’이 재건 프로젝트를 통해 기상 재해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수해 위협을 완벽하게 차단하겠다고 공언했다면, 그것은 오만한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빌드 바이 디자인’은 현실적이고도 겸손한 지혜를 보여주었다. 앞으로의 기상 이변이 현대 도시 문명의 통강한 근육이 필요한 것처럼, 마음이 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마음의 근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마음의 근육이 견뎌낼 수 있는 무게를 훈련을 통해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 구부러질지언정 결코 부러지지 않는 회복탄력성을 길러나가는 사람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가능성이 높다. 회복탄력성은 심리학과 교육학을 넘어 최근에는 경제학이나 안보 분야에서도 주목받을 만큼 널리 유행하고 있지만, 실은 생태학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전통적인 생태학은 생태계를 안정적이고 결정적이며 위계가 분명한 닫힌 시스템이라고 인식했지만, 현대 생태학은 생태계의 복잡성, 동적 변화, 지속적인 교란disturbance에 초점을 둔다. 즉 생태계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낭만의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는 교란에 의해 계속 망가지고 회복되며 적응해가는 열린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잠시의 집중 호우에 맥없이 초토화되곤 하는 우리 도시의 산과 강, 순간의 강풍에 형체도 없이 해체되는 우리의 자연 환경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태학자 홀링Crawford Stanley Holling은 회복탄력성을 “시스템의 지속성을 유지하고 변화와 교란을 흡수하고 상태 변수 사이에 동일한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의 정도”라고 정의한 바있다. 바꿔 말하자면, 회복탄력성이 높은 자연이나환경의 시스템은 지진, 가뭄, 홍수, 태풍, 화재 등과 같은 예상치 못한 교란을 겪더라도 지속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적 회복탄력성이 마음의 근력이라면, 생태학적 회복탄력성은 자연과 도시 환경의 근육인 셈이다. 이번 호에 싣는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은 계획과 설계를 통해 재난 지역의 회복탄력성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지향한, 큰 의미를 지닌 프로젝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2012년의 허리케인 샌디는 현대 도시 경제와 문화의 심장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을 강타함으로써 현대 문명이 자연의 재해에 얼마나 취약한지 적나라하게 알려주었다. 본문에서 유영수 소장이 예리하게 진단하고 있듯이, “‘리빌드 바이 디자인’이 재건 프로젝트를 통해 기상 재해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수해 위협을 완벽하게 차단하겠다고 공언했다면, 그것은 오만한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빌드 바이 디자인’은 현실적이고도 겸손한 지혜를 보여주었다. 앞으로의 기상 이변이 현대 도시 문명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전제하고, 그로 인한 재난상황으로부터 도시의 회복 능력, 즉 ‘회복탄력성’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 점은 이 프로젝트가 동시대 조경, 도시설계, 도시계획 분야에 던지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보다 회복탄력적인 지역을 만들기 위해 함께 작업하자Working together to build a more resilient region”라는 모토를 공유하며 설계적 지혜를 모은 여섯 팀의 당선작을 꼼꼼히 살펴보는 일도 흥미롭지만, ‘리빌드 바이 디자인’ 설계공모의 프로세스 자체가 회복탄력적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4단계에 걸친 다단계 공모 과정, 학제간 전문가 집단의 협력, 공공 기관의 리서치 지원, 지역 사회의 참여, 기업 재단의 후원 등이 정교하게 결합된 공모 프로세스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욕망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교란되기 마련인 대형 프로젝트의 운명을 회복탄력적으로 지탱시켜 준다. 비평가 줄리아 처니악Julia Czerniak은 『라지 파크』(도서출판 조경, 2010)에서 성공적인 대형 공원의 조건으로 ‘가독성’과 ‘회복탄력성’을 꼽은 바 있다. 다운스뷰 파크나 프레시 킬스와 같은 2000년대 초반의 프로젝트를 통해 현대 조경의 쟁점 중 하나로 부각되기 시작한 회복탄력성은 이제 ‘리빌드 바이 디자인’을 통해 본격적인 설계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압축적인 근대화와 경제 성장이 낳은 일상적위험이 상존하는 우리 사회―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대표적인 ‘위험사회’―의 현실은, 조경가의 전문성이 존중되지 않고 비정상적일 만큼 많은 정치적·사회적 간섭과 교란을 겪는 우리의 설계 환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는 회복탄력적 설계를 요청한다. 자연과 도시 환경의 회복탄력성을 기를 수 있는 설계적 지식을, 회복탄력적 설계를 가능하게 하는 실천적 지혜를 탐구할 시점이다. 방대한 양의 자료를 헤치며 ‘리빌드 바이 디자인’을 리뷰해주신 유영수 소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빼놓을 수 없다. 봄날이 갈 무렵 합류한 조한결 기자에 이어, 조경학을 전공한 양다빈 기자가 한여름을 열며 편집부의 새 식구가 되었다. 젊은 그들의 열정과 능력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 『환경과조경』은 물론 한국 조경의 근력 또한 튼튼해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