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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저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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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참여

주민참여? 물론 중요하지. 디자이너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항을 반영할 수 있고, 이용자들의 만족도도 높일 수 있고, 더욱 민주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점, 모두 동의해. 그런데 주민참여가 설계와 큰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어.

솔직히 말해서 주민참여 설계의 사례들, 좀 촌스럽지 않아? 타일 만들기, 벽화 그리기, 텃밭 가꾸기. 항상 식상한 아이템의 반복이잖아. 만약 주민들의 불만이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 주민참여라면 내가 어제 인터넷 쇼핑몰에 불만섞인 글을 써놓고 환불 요구한 것도 주민참여겠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안을 관철시켜서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는 경우는 들어봤어도, 주민참여를 통해서 걸작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어. 그리고 그토록 신선했던 설계안들이 주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그저 그런 작품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수두룩하다고. 그래서 말인데 친구야. 네가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꿈꾼다면 주민참여에는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저항 1 –하이라인

최근 디자인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공원을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하이라인High Line을 선택할 것이다. 설계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공원의 디자이너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조경가 제임스 코너James Corner라는 사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이 공원을 기획하고 만든 당사자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그림1).

맨해튼 웨스트 첼시 지구를 관통하고 있는 고가 철도 하이라인은 1980년을 끝으로 운영되지 않고 방치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뉴욕 시는 이 버려진 고가 철도를 철거할 계획을 발표한다. 어릴 적부터 이 동네에서 자란 청년 로버트Robert Hammond는 우연히 신문에서 철거 계획을 보고 의문을 품는다. ‘이 멋진 구조물을 꼭 철거해야만 할까’ 여러 건축 및 문화재 보호 단체, 그리고 시당국에 문의를 해본 결과 아무도 이 구조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이라인 철거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소식을 듣고 로버트는 난생 처음으로 주민 공청회에 참석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이라인의 철거에 의구심을 품은 또 다른 청년 조슈아Joshua David를 만나게 된다. 로버트는 조슈아에게 말을 건다. “저기요, 우리 무언가를 함께 시작하지 않을래요” 하이라인 친구들Friends of the Highline은 이렇게 두 명으로 시작되었다(그림2).1

두 청년은 하이라인을 철거하려는 시당국의 계획에 맞서 여러 가지 활동을 시작한다.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고, 대상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디자인 대안도 제시하고, 법적 대응 절차도 강구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로버트와 조슈아는 사진가 스턴필드Joel Sternfeld와 연락해 대상지의 현황 사진을 찍기 위해 하이라인 구조물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맨해튼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야생의 정원을 목격한다. 그때 그들은 하이라인이 모두를 위한 공원으로 다시 탄생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그림3).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하이라인의 모습을 공개한 사진 전시회는 엄청난 대중들의 호응을 얻고 하이라인은 지역 사회의 가장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다. 5년 뒤 하이라인 친구들은 지역 주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한다. 마침내 2004년 새로운 뉴욕 시장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와 시당국은 하이라인을 공원으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2009년 하이라인의 첫 구간이 개장한다. 로버트와 조슈아가 하이라인 친구들을 만든 지 정확히 10년만의 일이다. 현재 하이라인 친구들은 뉴욕 공원국과 함께 공원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고 향후의 공원 이용 계획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하이라인을 제임스 코너의 작품으로 알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코너는 철거될 구조물을 보존하자고 주장한 적도 없고, 이를 공원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하지도 않았다. 주민들을 설득하고 시당국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하이라인을 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모든 기획과 실천은 로버트와 조슈아가 생각하고 발로 뛰어가며 이루어낸 성과다. 그렇다면 하이라인은 누가 만든 것인가? 제임스 코너라는 세계적 디자이너인가, 아니면 두 명의 동네 청년인가? 우리는 좁은 의미에서 코너가 제안한 공간적 구상과 도면들을 설계라고 부른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이라인의 설계는 로버트가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구조물의 철거 계획에 저항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코너는 하이라인을 공원으로 만들기까지의 많은 과정 중 일부분만을 담당한 협력자일 뿐이다.

로버트와 조슈아는 하이라인의 가장 중요한 의의를 물어보았을 때, 철거될 위기의 근대 유산을 보존했다거나, 지역에 뉴욕을 대표하는 새로운 명소를 만들었다거나, 현대 건축과 조경에 중요한 이정표를 마련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두 청년은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었던 그들이 이러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킴으로써 누군가 또 다른 하이라인을 자신의 지역에 만들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점이 하이라인의 가장 큰 의의라고 말한다.


저항 2 - 포르타 볼타와 파킹데이

로버트와 조슈아는 하이라인을 통해서 저항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다면 저항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의 잘못된 결정이 아무런 근거가 없을 수도 있고, 나의 이웃이 그 잘못된 결정을 그대로 따르는 이유는 무관심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저항이 하이라인처럼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프로젝트로 발전되는 경우는 매우 예외적이다. 대부분의 경우 저항의 목소리는 대립되는 논리나 무관심 속에 묻혀버린다. 그럴 경우 실천이 중요하다. 설계는 실천적 저항의 가장 중요한 도구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포르타 볼타Porta Volta라는 동네에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공지가 있었다. 어느 날 서커스 단원들이 이곳에서 서커스 연습을 시작했고 동네 아이들에게 공짜 서커스는 인기 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 공지는 주민들이 모이는 동네의 명소가 되었다. 얼마 뒤 공지는 한 재단에 팔려 주차장으로 개발되기로 결정된다. 주민들은 그 계획안에 맞서 이 부지를 작은 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시에 제출한다.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시는 개발이 착수되기 전까지 남은 한 달 동안 주민들이 자유롭게 부지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어준다. 작은 지역 설계 회사와 함께 주민들은 쉼터, 아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 텃밭, 정원으로 이루어진 공원을 만들어 나간다. 이 빈터는 화려하진 않지만 주민들이 늘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가꾸어나가는 공공 장소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약속대로 한 달 뒤에 이 공원은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철거된다(그림4, 5).2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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