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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절충경관
  • 환경과조경 2018년 3월
잠시 자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3시 34분. 알람을 못 들었는데 눈이 떠졌다. 상하이의 밤은 아직 컴컴하다. 이제 3박째. 첫 이틀 동안 클라이언트 그룹과 설왕설래하며 잡아놓은 방향대로 수정하려 막상 도면을 펴니 생경하게 다가온다. 내일 있을 보고에서 옥상 정원의 계획안을 확정 짓지 못하면 공사 일정에 차질이 생기거나 실시 설계팀이 무너지게 된다. 폴더를 뒤적여 라이노 파일을 찾는다. SHCL001_6F_Rooftop_16.3dm, 16번째 수정본이다. 그간 전반적인 변화가 있는 대규모 변경이 서너 번 있었다. 어제 오후 조경부 부장이 지켜보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태블릿으로 그린 평면을 클라우드로 보내 3차원 모델의 바닥에 깔아보는데, 모퉁이에 그려놓은 입면의 비율이 틀렸음을 깨달으며 식은땀이 나려 했다. 다행히 높이 값을 주어보니 그다지 나쁘진 않다. 어서 재질을 입혀 루미온으로 익스포트. 

 

캐드에서 가장 멍청하면서도 스마트한 명령어는 ‘해치넣기’다. 많은 경우 캐드를 멈추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복잡한 영역에 대한 면적을 쉽게 알려준다. 수십여 번의 해치 끝에 나온 제곱미터 값, 아니 헤베 값을 넣고 엑셀의 수식을 돌린다. 항목별 총량이 나오고 채팅창에 받아 놓은 단가를 다음 열에 넣기 시작한다. 합계를 돌려보기 무섭지만 AutoSum 기능은 이미 매우 높은 첫자리 숫자를 보여주고 있다. 실수는 안 했는지 다시 면적을 구해보지만 고작 수십만 원의 오류를 찾았을 뿐 아직도 3백만 원 이상이 초과된 숫자가 맨 아래에 보인다. 물론 이것은 이윤이 전혀 없는 실행가에 가깝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결국 다시 스케치하기 위해 펜을 잡는다.

 

인천공항에 내리기 두 시간 남짓 남았다는 방송이 나온다. 노파심에 좌석 사이 전원에 랩톱을 다시금 연결해 본다. 불이 켜지지 않는, 배터리가 다 된 랩톱을 탓해도 소용없다. 항공기 좌석의 전압이 너무 낮다. 공원심의위원회에 재심의 요청을 결정한 어제 저녁, 분명하지 않은 변경 사항에 최대한 대응한 수정안을 머릿속에 계속 그려보며 준비한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심의에 상정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12시간 안에 시 담당 부서에 접수해야 하는데, 인천공항에 체류하는 14시간 동안 수정하고 변경해야 하는 80장 분량의 파워포인트와 조서들을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하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전원이 구비된 커피숍을 찾지만, 아직 문도 열지 않은 새벽 5시. 조건부 가결이라도 되어야 올해 예산으로 집행될 텐데…. 작은 기도를 읊조리며 작은 의자에 앉아 11시간을 줄곧 작업해 제출하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는 비행기에 오른다. 


위의 일기 같은 몇몇 에피소드는 지난 몇 년간 설계 과정에서 겪은 일들이다. 설계는 결과물로 평가를 받고 설계팀 크레디트에 첫 번째로 이름이 올라간 사람이 주도해 만들어내는 듯 보이지만, 실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여러 주체가 종합적으로 참여하고 절충해 만드는 합작품이다. 좋은 의미로 참여와 절충이지, 한 프로젝트를 둘러싼 많은 주체의 알력과 복잡다단한 절차가 대본에 없던 캐릭터로 설계라는 드라마에 출연해 수많은 갈등을 일으킨다. 

 

의뢰인 측이 보내는 코멘트가 지난 몇 달의 노력을 일순간에 허사로 만들기도 하고, 설계와 시공 사이의 간극은 늘 멀기만 하다. 허가 절차나 녹지율 같은 행정적 요구 사항이 설계가의 발목을 굳게 잡고 있기에 막판 스퍼트는 없고 다리를 절며 다시 스타트 라인에 서야 하는 것이 설계의 마지막 레이스다. 이 모든 난관은 ‘갑’이라 불리는 의뢰인 또는 건축주가 발생시키지만 계약의 결과로 받는 서비스의 일부이기에 ‘그들’은 보통 관조하고 때로는 인내심이 바닥났음을 알려오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그들 중 일부가 같은 배에 타서 공동의 목적지를 향해 항해하는 반전도 있다. 모든 설계는 갑과 을, 제약과 기회 간의 절충의 역사다. 그 치열한 절충, 타협, 조정, 조율, 대응, ‘밀당(밀고 당기기)’의 결과로 경관에 경계가 그어지고 경관의 최종 모습이 결정된다. 설계가인 ‘그’가 초기에 그려낸 설계안이나 도면이 완공된 모습과 같은 경우는 지구상에 단연코 없다. 수많은 ‘그들’과의 절충의 담금질만이 최종 경관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연재의 제목으로 적절한 것은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 아니라 ‘그들과 설계하는 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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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믹시몰의 1차 스케치안. 일반적인 중국 상업 프로젝트는 IP라 불리는 관심을 사로잡는 대상을 중심 콘셉트로 삼아 설계를 풀어가는데, 상하이 믹시몰의 경우 이런 방식을 탈피한 색다른 아이디어를 요구했다. 새로운 설계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공모 제출안을 업그레이드해나갔다.

 

상하이 믹시몰(The MixC Mall)

프로젝트의 기회가 왔는데, 위치도, 규모도 당시 우리 회사 입장에선 꽤나 좋은 위상의 프로젝트로 보였다. 간단한 화상 인터뷰를 하더니 다 좋은데 중요한 프로젝트이기에 내부 공모전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계속 해보겠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왕 뽑아 든 칼, 휘둘러 보기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열흘 남짓한 시간, 스케치 수준의 간 보기 결과물이 요구됐다. 

 

알고 보니 경쟁 상대는 대상지 건너편의 대형 회사 사옥 캠퍼스와 조각 공원을 말끔히 설계한 아시아권에서 이름 있는 회사. 다행히도 주어진 짧은 시간에 그들보다 더 많은 결과물을 뽑아낸 우리에게 설계권이 부여됐지만, 계약 진행은 늦어져만 가고 그들의 간 보기는 계속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프로젝트는 무려 7년을 표류하며 설계사가 세 번 바뀌고, 담당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수차례 바뀐 악명 높은 프로젝트였다. 우리가 개입한 그 시점에도 누구나 알 법한 대형 사무소의 실시 설계가 이미 완료됐고, 포장 공사가 시작되어 포장재와 시설물이 현장에 쌓여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설계를 바꾸게 된 계기는 이 집단의 모든 리더가 최근에 교체되어 프로젝트의 위상과 디자인 방향이 모두 초기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울 정도로 커다란 ‘예상할 수 없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일반적인 설계 결정 과정에서는 최종 결정권자의 비전과 선호를 잘 이해하고 있는 조경 부서 관리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들은 결정권자에게 최종 승인을 받아내기 위한 충분조건을 충족시키면서도 트렌드를 개척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사를 이끌며 조율해가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들의 코멘트 하나하나에 최종 결정자와 회사의 정신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을수록 프로젝트 진행은 수월해진다. 그런데 리더가 다 바뀐 이 같은 상황에서 그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제곱미터 당 시공비의 제한도 없이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상황에서 이미 정해진 촉박한 쇼핑몰 오픈 일정만은 분명했다. 또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자 부담은 새로운 리더들이 이 프로젝트를 경영진 교체의 상징적 전환점으로 삼아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건물 외관이 90% 넘게 완성된 이상, 이제는 조경으로 차별화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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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로가 전망대, 분수, 음악 산책로, 수변 다리, 물 위를 걷는 다리, 갤러리 길 등으로 변모하며 특별한 경관을 선사한다. ⓒLab D+H


일반적으로 중국 상업 프로젝트의 경우, IP라 불리는 관심을 사로잡는 대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중심 콘셉트로 삼아 설계를 풀어간다.2 예를 들면 중앙 광장에 동물 조형물을 세워놓고 그것을 각인시키는 홍보물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프로젝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실무진들이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이런 방식을 탈피한 색다른 아이디어를 제안해 달라는 것이었다. 간 보기에 그칠 것이라는 의구심은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설계에 대한 기대감도 안은 채 내부 공모에서 제안한 안을 업그레이드해나갔다.

 

설계 대상지는 상하이의 주요 대로 중 하나인 우종로(Wuzhong-road)에 면하는 약 700m 길이의 슈퍼 블록을 모두 점유한다. 인접한 녹지대로 이어지는 길목이라 쇼핑몰 앞 70m 정도의 폭 중 약 40m의 구간에 공공 녹지대를 구축해야만 했다. 기본적으로 쇼핑몰의 주 입구부에는 각종 상업 이벤트를 위해 포장된 광장부가 필요하기 때문에 높은 비율의 녹지 확보가 도전 과제이기도 했다. 이처럼 쉽지 않은 대지 상황에서 주목한 점은 기다란 대지의 길이 그 자체였다. 이렇게 긴 도시 오픈스페이스는 흔하지 않은 기회의 공간이다.

 

방문자가 과연 이 공간을 어떻게 온전히 즐기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10,000개의 경관을 감상하는 길’3이라는 콘셉트로 독특한 도시 경험을 제공하는 특별한 산책로 중심의 조경 개념을 제안했다. 대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길이 때로는 지면으로, 때로는 공중으로 떠가게 해서 녹지율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부지를 흥미롭게 걷게 하는 제안이었다.

 

IP와 같은 상징물이 중심이 되면 시각적 자극과 인상만을 남기는 데 비해 다채롭게 걷는 행위를 통해 온 감각의 자극과 인상을 줄 수 있음을 강조한 개념인데, 클라이언트의 반응이 미지수였다. 의뢰인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독특한 콘셉트를 요구하고서 정작 조금이라도 관례에서 벗어난 제안을 하면 의구심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명백한 모순 같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설계자에게 새로우면서도 실현 가능한 안을 뽑아내기 위해 취할 수밖에 없는 태도다. 

 

이 모순을 풀 열쇠는 적절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현실적인 사례 제시다. 마침 이번 아이디어의 좋은 레퍼런스로는 맨해튼 허드슨 야드에 지어지고 있던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의 작품 ‘베셀The Vessel’이 있었다.4 도시를 경험하는 조망점을 다양하게 하는 것만으로 도시의 경험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몇 가지 이미지가 1번 안의 출발점을 끊어주었고, 그 전략을 담은 첫 스케치 발표를 본 실무자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안을 더 개선할 수 있는 의견을 교환하며 몇 번의 스케치를 반복한 끝에 개념 설계안이 발전됐다. 보행교를 제안하는 방식이야 그리 새롭지 않았지만 보행로가 전망대, 분수, 음악 산책로, 수변 다리, 물 위를 걷는 다리, 갤러리 길 등으로 변모하며 대상지를 훑어가는 제안이 그들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1차 발표 뒤 마케팅팀의 피드백이 분위기를 틀어 버렸다. 그들이 문제 삼은 쟁점은 폭이 100m나 되는 광장일지라도 그 중간에 떠 있는 보행교가 있으면 건물 전면부를 가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의견이 사실임은 인정하지만 가려지는 범위나 정도가 그리 크지는 않다는 것을 여러 차례 증명해보고자 노력했음에도, 완강한 타 부서들의 반대에 부딪혀 설계 방향을 조절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상업 프로젝트에서 공들여 결정한 건물의 파사드는 온전히 노출되어야 한다는 게 공공연한 공식이자 ‘그들’의 절대 원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권유받은 설계 방향은 설계자로서 가장 피하고 싶던 IP 중심의 접근이었다. 

 

피하고 싶던 이유는 IP로 제안받은 대상이 프로젝트의 중국어명 ‘만상성万象城’의 두 번째 글자의 동음이의어인 동물, 즉 코끼리였기 때문이다.5 그러나 ‘을’인 우리 팀에겐 선택권이 없었고, 조경 부서도 우리의 안을 지지하지만 너무나 결정적인 건물 전면의 노출 문제이기에 손을 쓸 수 없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승인될 수 있는 설계안을 뽑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설계팀만이 아니라 운영팀과 마케팅팀 모두의 승인을 얻고 건축팀의 지원을 받아야 임원진 리뷰에 도달할 수 있기에, 프로젝트의 중요도에 비례해 넘쳐나는 그들의 여러 의견을 수용하는 절충의 절차를 밟아야만 한다고 담당자는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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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콘셉트인 코끼리의 실루엣이나 코를 형상화한 요소가 상업적 분위기를 진하게 연출하도록 했다.

 

코끼리. 대부분의 설계가가 가장 싫어하는 설계라 할 수 있는 직설적 설계 앞에 마음이 무거웠다. 일단 코끼리를 다루게 된 이상 지나치게 추상화하여 코끼리의 상象이 희미해지면 안 되는 것이 상업 프로젝트의 IP이기에, 코끼리 이미지를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우회적인 설계 어휘를 쓰기 위해 요구 조건과 결과물 사이의 거센 절충과 타협의 과정을 거쳤다. 중국 프로젝트를 하며 코끼리를 다루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당시 2주간의 작업 과정은 치열한 내적 갈등과 난해한조형의 시간이었다.

 

결과물의 제목은 ‘10,000개의 코끼리’. 조경 실무자들과 여러 대화 끝에 코끼리의 실루엣이나 코를 형상화한 요소가 상업적 분위기를 진하게 연출하는 결과물을 만들었다. 우리 팀에게는 만족과 불만족의 경계 밖에 있는 설계 콘셉트였기에 스스로는 여전히 가치 판단을 유보한 채 의뢰인 집단인 ‘그들’의 결정을 온전히 존중한 안이었다. 스스로도 뜨거움을 담지 못한 결과물이라 그런지 이에 대한 반응 또한 그다지 뜨겁지 못했다. 클라이언트의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미지근함의 이유였는데, 우리 팀의 입장에서는 힘 빠지는 상황이지만 동시에 직설적 설계를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이 믿는 마케팅 트렌드를 위한 희생과도 같았던 실험의 시간이 지나고 첫 번째 안과 두 번째 안의 프레임워크를 절충해 최종안을 진행할 방향에 대한 피드백이 전달되었다. 절충안의 방향은 IP를 피하면서도 과도한 설계를 지양하고, (정의하기 어렵지만) 고급스럽고 (정의하기 더 어렵지만) 격조 있고 우아한 설계 스타일을 만들라는 지침이었다. 

 

그들의 급작스러운 방향 선회가 어떤 연유인지 알아보니, 당시 구정 연휴를 이용해 일본의 성공적 프로젝트들을 답사하고 돌아온 상급자들이 최신 사례에 영향을 받아 설정한 방향이며 최고 결정자의 본래 경향도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본 특유의 미니멀한 언어를 사용하고 절제된 형태에서 면밀한 디테일의 완성도를 요구하는 ‘스타일’이 요구 조건이었던 것이다. 

 

설계가가 (직설적 설계 다음으로) 두 번째로 지양하고자 하는 설계가 아마도 ‘스타일’에 맞추는 설계일테다. 다시 한번 깊은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일본과 중국의 시공 완성도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이 크기에 설계사 입장에서는 무리수가 매우 큰 방향 설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중국 상업 조경의 스타일이 아닌 조경 공간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믿으면서 일본의 단순함을 중국의 콘텍스트에 녹이는 방향의 안을 발전시켜 나갔다. 실시 설계로 넘어가야 하는 시점이 가까워지면서 더 높은 지위의 결정권자와 긴밀한 소통을 하며 설계안을 완성해 나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설계자인 우리 팀부터 조경부 실무자, 조경부장, 다른 부서장, 지역 책임자에 이르는 여러 관련자의 공통된 목표가 중국 북부 지역 총책임자의 승인을 얻는 것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느낌이 분명해진 순간에는 수많은 사람이 한 개인의 기호를 맞추는 게 설계인가라는 회의감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한 개인의 승인을 받는다는 것이 비단 그 책임자의 개인적 선호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며, 그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설정한 가장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흥행을 낳는 비전에 가장 가까운 설계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 합일점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이 클라이언트 회사는 2017년 중국 대륙에서 상업시설 중 부동산 실적 1위를 기록한 가장 거대한 ‘그들’이었고, 이 같은 관료 체계가 무수한 우회를 발생시켰지만 그러한 우회는 그들 집단 모두의 합의를 얻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어쩌면 더 큰 성공이 보장된 설계안을 위한 의미 있는 여정임을 서서히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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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m 폭의 상업 광장. 수많은 포장 디자인의 결과물이다.

 

오픈을 석 달 반쯤 남기고 드디어 계획안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의 승인을 받아냈다. 전체 그림이 선명해지자 디테일을 구체화하는 단계가 시작됐는데, 큰 그림 안에서 설계 결정 절차는 짧고 단순화되어 이 지역 디자인 디렉터와 직접 소통하게 되었다. 그만큼 더 짧은 피드백 시간 안에 ‘그들’이 믿는 성공적인 디자인의 디테일을 달성해야 했고, 오픈 한 달 전까지 지속적으로 변경된 건물 프로그램 변화에 맞추어 수정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이처럼 빠른 결정이 요청되는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결론에 도달하는 방법은 옵션 두세 가지 정도를 제안하는 방식이다. 설계자에게는 두 배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발표와 그에 대한 피드백을 받은 후 또 다른 대안을 준비할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애초에 대조적인 두 가지 이상의 대안을 들고 가는 게 도움이 되기에 처음부터 여러 옵션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 프로젝트는 시공비 제한 없이 그들의 새로운 리더를 만족시킬 높은 표준의 흥행성 달성만이 목표였기에, 한 요소당 평균 8개 이상의 대안 설계를 진행해 디자인 디렉터와 마케팅팀의 지속적인 리뷰를 거쳤다.6

 

대안 개수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았기에 디자인의 대안을 개발하는 순수 설계 시간만큼이나 여러 디자인 대안을 리뷰하며 결정하는 의사소통 과정에 긴 시간이 소요됐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의견을 통해 배우게 되는 현실적 정보가 많았음은 물론 때로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직접 반영해 설계가 발전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광기 넘치는 동거가 오픈 한 달 전까지 이어졌다. 

 

끊임없는 설계 수정, 재료 선택, 샘플 리뷰를 빈틈없이 요구하며 우리를 괴롭히던 그들은 어느덧 우리라는 이름으로 한 팀이 되어 있었다.7 현장 사무실의 한쪽 벽에 시뻘건 글씨로 적혀 있던 오픈 일까지의 카운트다운을 마치고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완료됐고, 불가능할 것만 같던 모든 일정을 그들과의 설계를 통해 가능으로 이끌어낸 인생 최대의 난작難作으로 기록됐다.8

 

지붕감각(Roof Sentiment)

2015년 4월,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당선팀에 축하 메시지를 보냈는데, 당선작의 조경을 의뢰하는 반가운 답장이 왔다. 설계를 구체화하기 시작한 초반이었는데, ‘지붕감각’ 파빌리온의 주인공인 특별한 지붕을 원안의 형태와 소재로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스터디가 진행되고 있었다. 정확한 예산이 파악되어야 조경의 규모와 복잡도도 가늠할 수 있기에, 건축 소장들과 함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중국인 친구인 우리 사무실 파트너에게 갈대발 업체 수소문을 부탁해 보았다. 파트너는 산둥 지방의 거대한 갈대밭을 배경으로 3대째 갈대발을 생산하는 업체를 운 좋게 한 번에 섭외해냈다. 건축팀의 몫인 갈대발 지붕의 순조로운 진행을 기대하며 그 아래의 땅을 살펴나갔다.

 

석 달 안에, 그리고 극히 제한된 예산 안에서 시공과 설치를 끝내야 하는 상황이라 모든 결정이 실시 설계 수준이어야 했다. 다시 말해, 정확한 제품 정보와 품이 동반되어야 했다. 한국의 가격 정보와 실상에 대한 지식과 상식이 전무한 때였다. 이번엔 한국에서 실무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가깝게 지내는 시공 전문가를 소개해 주었다. 이렇게 세 명은 다 같이 만난 적도 없었지만 인터넷 3인 통화로 수차례 초기 검토를 진행했고, 마침내 몇 주 뒤 현장인 MMCA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나 팀 ‘동산바치’란 이름으로 의기투합해 ‘지붕감각’ 조경의 시공까지 함께하게 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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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감각은 갈대발로 만든 10m 높이의 수직적 주름 형태로 만든 지붕 아래에서 서울의 한옥과 궁궐의 전통 지붕 아래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공간적 감각을 극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파빌리온이다.

 

당선작인 SoA의 ‘지붕감각’은 대상지 MMCA가 위치한 오래된 서울의 한옥과 궁궐의 전통 지붕 아래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지붕으로부터의 공간적 감각을 극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파빌리온이다. 이 극적 경험은 ‘과장된 지붕’이 만들어내는 무게감과 깊이에서 오는데, 단청으로 채색된 무거운 목조의 전통 정자나 누각이 아니라 자연 소재인 손으로 엮은 갈대발의 지붕을 10m 높이의 수직적 주름 형태로 만들었다. 즉 현대 다층 건축물의 평 슬래브 사이에서 느끼는 지붕에 대한 제한적 경험이 갈대발 사이로 확장되는 경험을 제공하는 프로젝트다. 건축의 아래층을 구축하는 조경의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건축물의 가장 원초적이고 순전한 요소인 지붕과 조경이 뿌리내리는 대지라는 두 요소 간의 관계, 즉 건축과 조경의 관계를 맺고 조율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조경과 가장 직접적 영향을 주고받는 부분은 큰 지붕을 지지하는 구조체와 그 구조체의 기초가 땅과 만나는 부분의 처리 방식이었다. 한 묶음의 구조체는 네 개의 원형 강관이 중간에서 교차되어 묶인 다발 기둥으로, 위로는 갈대발 걸이 역할의 보를 받쳐주고 아래로는 기초와 접합되는 형상이다. 부족한 예산 때문에 원형 강관의 마감 처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극적이고 자연을 닮은 지붕 아래에 차갑고 시퍼런 느낌의 철재 다발 기둥이 보행자 레벨에서 그대로 노출될 상황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개의 둔덕을 기둥 하부에 만들고 그 위에 적절한 높이의 식물을 밀식해 기둥의 삭막함과 지면과의 날 선 만남을 완화하는 개념을 기초로 한 초안을 만들었다. 개략 내역을 뽑아봤는데, 그제야 주어진 예산이 제안된 지형 요소를 최소화하고 나머지의 예산을 표면 처리에만 사용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설계의 초점을 우회하여 어떻게 바닥 면을 처리하면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최대한 아름다운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스터디했다. 다발 기둥 기초부의 조경 둔덕은 나머지 예산이 허락하는 만큼의 크기로 조성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갈대발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과의 만남, 방문자가 밟았을 때의 느낌이나 소리, 갈대발의 재질감과의 조화, 단가 등을 고민한 끝에 내린 1차 바닥 재료는 쇄석이었다. 인왕산을 향하는 경관축을 따라 주름을 잡아놓은 지붕의 결 방향과 평행하게 두 가지 색의 쇄석을 이용해 바닥에 선형 패턴을 만들고, 그 패턴의 경계가 전시 기간 동안 방문자들의 발자국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로 섞이는 일종의 참여적 퍼포먼스로 만들어 가는 안을 제안했다. 긍정적인 건축팀의 반응과 달리 궁극의 클라이언트인 미술관 측의 견해는 달랐다. ‘그들’은 쇄석이 마감재로 쓰이면 방문하는 아동들이 쇄석을 가지고 놀다가 집어던지기 마련이고, 미술관의 전면이 유리 소재이기에 파손의 우려가 크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관리 중심적 의견을 냈다.10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운영자인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다른 소재를 찾아 나섰다. 표면 소재의 후보군인 고무칩은 안전하게 다양한 질감을 연출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폐타이어를 재활용한 저렴한 제품의 생산처를 찾을 수 없어 단가가 높은 제품을 써야만 했다. 또 다른 표면 소재인 폐유리를 마모 처리한 반투명 인공 자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조달이 어려울 뿐 아니라 쇄석과 같은 안전 문제를 야기할 소재였다. 

 

갈대발의 직조가 대부분 진행되고 기둥의 구조 또한 확정되던 즈음, 현장에서 갈대발의 실제 질감을 느낀 모든 팀원은 더욱 자연적인 소재로 눈을 돌렸고, 멀칭재로 쓰이는 수피로 만든 바크가 좋은 대안으로 떠올랐다. 안전에도 문제가 없고 비용면에서도 저렴하고 재질의 성격도 갈대발과 매우 유사한 1석 3조의 소재였다. 게다가 부족한 예산 때문에 밀도 있는 식재가 어려운 식재 마운드에 노출될 식물 사이의 토양도 자연스럽게 가려주고 평평한 바닥과 융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새벽 습기를 머금거나 관수를 하고 나서 물기에 살짝 젖은 적송 바크는 소나무 숲 속의 향기를 지붕 아래에 채워주며 감각의 확장을 가져다주는 화룡점정의 소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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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기를 살짝 머금은 적송 바크는 소나무 숲 속의 향기를 지붕 아래에 채워주며 감각의 확장을 가져다주는 화룡점정의 소재다.

 

안전에 대한 다소 지나친 그들의 염려를 해결하기 위해 차선으로 채택한 소재가 오히려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프로젝트의 이름에 걸맞은 감각을 일깨우는 경험의 단계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소재가 된 것이다. 적송 바크는 이 공간에 적절한 습도와 향기 그리고 걸음걸음마다 숲 속을 걷는 보행감을 선사해주며, 서울 한가운데에서 발만 들여놓으면 자연 속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자연으로의 통로이자 마법 같은 미기후의 공간인 ‘지붕감각’의 조경을 완성했다.

 

앞의 상하이 프로젝트와 정반대로 예산 규모는 한정적이다 못해 전체 팀이 손해를 보아야 할 정도의 비관적 상황이었다. 또 운영과 관리 주체인 미술관은 협조적이기보다는 안전 문제와 기존 포장의 보호에 더욱 신경을 쏟았지만, 그들의 우려에 절충한 결정이 최종적으로는 예상외의 결과와 함께 의뢰인의 우려도 불식시키는 선택이 되었다.

 

창천문화공원

한 건축사무소와의 오랜 협업 끝에 마침내 처음으로 공공 프로젝트 공모전의 당선 소식을 들었다. 대상지는 8090시대 대학 문화의 1번지였던 신촌을 다시 청년 문화의 중심지로 조성하려는 ‘신촌 도시재생사업’의 거점 지역 중 하나인 창천공원. 이 공원을 청년 문화 전진 기지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였다. 인접한 백화점의 주차 타워와 중심 거리에서 이격된 위치 때문에 늘 그늘이 드리워지는 이 공원을 젊은이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신촌 지역을 다시 홍대만큼의 중량감을 갖도록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고, 청년 문화 콘텐츠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청년 문화 발전소를 조성하는 것이 해당 구청의 요구였다.

 

우리 팀의 제안은 공원 중심에 길게 건물을 배치하되, 1층의 공원부는 파빌리온과 같은 최대한 개방된 구조로 열어주는 것. 주변 건물과 비슷한 규모의 적절한 상부층을 두어 실내의 청년 활동을 지원하는 건물이 되도록 하며, 공원을 휘감는 조경의 중추 골격이 건물과 맞물려 긴밀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도시와의 교호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건물이 공원의 중앙부를 가로지르기에 공원 전체를 청년 문화의 콘텐츠가 생성, 연습, 소비되어 즐길 수 있는 장으로 만들기 위한 중심이자 배경이 되도록 배치한 결과물이라 자평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모전 당선 직후의 심사 결과 종합 회의에서 건물의 위치가 커다란 논란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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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문화공원 수정안. 수직적 상징성과 수관 하부의 활용도가 높은 메타세쿼이아로 구성된 작은 숲을 제안해 그늘 쉼터를 제공하고, 남측에 위치한 높은 건물에 대응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토지 이용이 공원으로 지정된 땅이고 개선 공사를 위해서는 상위 부처인 시 단위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현재의 계획안은 공원처럼 보이지 않기에 심의 통과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담당 부서의 의견이었다. 조경 관련 심사위원 중 일부가 공원 내 건물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한다는 것도 문제였다. 사업이 준비되고 과업 지시서가 작성되는 과정에서 이 모든 것이 예측되고 반영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들었지만, 이미 공모전이 완료된 상황에서 이 같은 행정적 한계는 설계사와 지자체 모두가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자 ‘그들이 이미’ 답을 내어놓은 룰이었다.

 

다수의 심의위원에게 ‘공원의 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 예상된 청년문화센터 건물의 존재감을 줄이기 위한 대안들을 만들며 가장 난관이 될 공원 심의를 통과하기 위한 절충안 수립에 들어갔는데, 사실 완전히 새로운 계획안에 가까웠다. 여러 다른 위치를 검토했지만, 현존하는 경로당 건물과 비슷한 규모와 위치의 건물을 지어 새 건물의 존재감을 줄이는 방향이 가장 설득력 있는 대안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결정은 조경에게는 기회이자 동시에 도전이었다. 현 위치인 공원 서측은 공원의 안쪽에 해당하기에, 건물이 그곳에 위치하면 건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공원 활성화의 촉매 효과가 공원의 중심이나 바깥인 동편에 비해 낮기 때문이다. 대상지 동쪽으로 편중된 도시 문화의 무게중심을 서쪽으로 끌어오는 과제가 상당 부분 조경으로 넘어오게 되는 대목이었다.

 

이러한 무게중심의 변화에 대응하여 도시의 에너지를 더욱 공원 안쪽인 서측으로 끌어올 수 있는, 조경 중심의 강력한 구심점 구축을 대상지 남측 삼각 모서리 공간에 제안했다. 이곳은 1m가량의 등고 차이를 이용할 수 있고, 명물 거리로 열린 대지 동측과 상업 가로인 북측 가로에 비해 독립된 공간이었다. 우리 팀은 이곳에 수직적 상징성과 수관 하부의 활용도가 높은 메타세쿼이아로 구성된 작은 숲을 제안했다. 

 

백화점이 드리운 그림자 대신 공원의 나무가 드리우는 생명력 있는 그늘 쉼터를 만들어 주고, 규모 면에서도 남측에 위치한 높은 건물에 대응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무엇보다 도심 한가운데에서 나무 아래 쉼터라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청년문화센터와 함께 이 공원으로 시민들을 이끄는 양대 구심점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건물 외관은 명소를 만들겠다는 구청의 의지가 담겨 한층 더 상징적인(iconic) 외피를 갖게 되었고, 메타세쿼이아 숲과 함께 그들이 구상한새로운 공원의 얼굴이 만들어져가고 있었다.

 

첫 번째 절충안이 공원과 건물, 조경과 건축의 사이좋은 공생과 충분한 화제성을 만들 수 있는 안이라고 판단했지만, 1차 공원 심의위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여전히 복잡한 대학가의 비워두어야 할 오픈스페이스를 건축물로 채우는 생각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버리지 않았다. 조경하는 사람으로서는 반가운 의견이면서도, 점유율도 낮고 공원과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이 충실한 현재의 건축 설계가 그들에게 여전히 공원의 악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공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가치가 우선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도 공식 심의 결과문에서 공원 내 건물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는 철회되어 전면적 수정은 피할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남측의 도시숲이 공원의 유연성을 저해하니 좀더 열린 공원으로 조성하라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유연성은 오픈스페이스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가장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주제 중 하나인데, 이를 문제시한 그들의 의견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고 지하고를 높게 유지하고 그 하부를 유연하게 쓰도록 한 의도가 그들에게 읽히지 않았는지 답답했다. 아무리 지하고가 높은 수목을 여유 있게 배치한 숲이라도 그 공간이 크게 탄력적인 공간으로 쓰이기 어렵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없었고, 결국 수용해야만 했다.

 

두 번째 최종 절충안은 숲이 있던 자리에 청년 문화를 표출할 수 있는 원형 무대 광장인 ‘신촌포럼’을 만들어 그들이 강조한 공원의 개방성과 유연성을 증진하는 안으로 정리되었다. 예산 집행을 위해 심의 통과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기에 그들의 의견에 순종하듯 그대로 따르고 서둘러 마련한 절충안으로 수정하여 통과를 받아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스스로에게 그리고 여러 명의 그들에게 묻고 싶다. 공원 내부의 건축물이 디자인과 상관없이 반드시 공원을 해치는 악인가? 그리고 공원 내의 작은 숲 공간이 공원의 유연한 이용을 막는 것인가? 우리 모두는 이 공원에서 진정한 공공의 가치를 끌어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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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문화공원 최종안. 숲이 있던 자리에 청년 문화를 표출할 수 있는 원형 무대 광장인 ‘신촌포럼’을 만들어 그들이 강조한 공원의 개방성과 유연성을 증진했다.

 

앞에서 ‘그들’이라는 3인칭 복수 대명사를 설계자가 아닌 다른 모든 주체를 지칭하는 데 의도적으로 많이 썼다. 의뢰인, 디벨로퍼 집단, 건축가, 행정 주체, 심의위원, 또는 다른 조경가들. 이들 모두는 갑이든 을이든, 우리 편이든 상대편이든, 모두 다 그들이었다. 그들과의 얽히고설킨 설계 이야기를 적고 보니 그들을 이해하고 절충을 이뤄내지 못했다면 새로운 경관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새삼 느끼며, 주변에 있던 모든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도 누군가에겐 그들 중 하나라는 점을 잊지 않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영감을 주는 그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 연재의 마무리다. 십수 년 동안 땅덩이를 놓고 고민해온 소사를 ◯◯경관이라는 제목에 끼워 맞추어 집적, 축조, 절충이란 단단한 발음의 어휘로 묶어보았다. 정리하고 싶었던 이야기, 끝없이 영감을 주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과 밀고 당기던 이야기를 담았다. 다음에 이렇게 돌아볼 기회가 있을 때는 주변의 이웃들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든 이야기를 담을 수 있기를 바라보며 연재를 마친다(연재 끝).

 

 

**각주

1. (제목)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모든 설계의 끝자락에 절충과 타협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미리 한발 물러선 설계를 하는 것이 현명한가? 설계가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의 대답은 “아니요”다. 절대 아니다. 결국 절충은 너무나 여러 가지 형식과 이름으로(원가 검토, VE, 각종 심의 등) 거쳐야 하기에 피할 수 없는 절차다. 그런데 설계가가 처음부터 예산, 규제 항목, 취향 등과 같은 제한 요소에 지나치게 구애받은 채 설계를 하면 좋은 설계를 도출하기 어렵다고 본다. 처음부터 죽을 쑤어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구첩반상을 차려갈 각오로 하다 보면 나중에 한두 가지 찬이 빠지는 경우가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고, 그러다가 정 죽을 쑤어야 하면 언제든 물을 부으면 되는 것이다.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김치 한 가지에 흰 죽만 내놓는 수동적이고 이미 절충된 경관의 재생산이다. 조경 설계가 내놓을 수 있는 여러 재료를 이용한 깊은 맛의 잔칫상을 만들어 가보고, 때로는 조경이 더 능동적으로 건설 환경에 참여하며 우리 영토 밖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의미 있다고 믿는다. 

2. 영어로 ‘지적재산권’을 의미하는 ‘Intellectual Property’의 약자인 이 단어는 중국적 맥락에서 변용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원래는 영화, 게임, 출판계에서 일종의 상징물이나 캐릭터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여러 제품이나 시리즈물로 재생산할 수 있는 재료가 되는 상업적 콘텐츠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가, 부동산 개발 분야에서는 한 프로젝트를 다른 프로젝트와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오브젝트를 의미하는 어휘가 되었다. 이 오브젝트는 하나의 개발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용도이기에 지적 자원을 넘어 정체성을 규정하는 상징물이라 볼 수 있다.

3. ‘The MixC’의 중국어 이름은 ‘만상성’으로, 만이 의미하는 무수함을 담으려 했다.

4. http://www.heatherwick.com/project/vessel/

5. 같은 디벨로퍼가 개발한 같은 이름의 쇼핑몰이 2주 차이로 선전에도 오픈 했는데, 이곳에는 코끼리 형상의 조형물이 프로젝트 중앙에 설치되었다.

6. 포장의 대안은 셀 수 없고, 선큰 광장은 14가지, 중앙 입구부 드롭-오프(drop-off)는 20가지, 6층 옥상 정원은 16가지의 대안 설계가 진행되었다.

7. 설계 일을 시작하고 가장 뿌듯했던 말을 그들의 선봉대에 섰던 클라이언트에게서 들었다. “이렇게 같이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가 직접 설계를 해보고 싶다. 그리고 하게 되면 당신 회사에서 같이 하고 싶다. 이건 진심이다.”

8. 이 프로젝트와 함께 부임한 조경부장의 첫 성과 보고 마지막 페이지는 내 여권의 중국 비자 페이지였다. 2017년 미국에서 상하이로 간 횟수는 9번, 체류일의 합은 두 달이 조금 넘는다.

9. 이렇게 만난 인연이 이어져 ‘2017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의 설계와 시공도 완료했다. 현재는 설계와 시공을 함께하는 집단으로 활동 중이다.

10. 실제로 조경부가 완공된 당일, 한 초등학생이 안전 펜스 사이로 몰래 들어왔다. 기초 보강재로 쓰인 쇄석이 노출된 부분을 뒤적여 돌을 찾더니 미술관 건물로 던지는 상황을 목격할 수 있었다.

 

 

최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설계 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그룹(SWA Group)에서 다양한 성격의 설계 및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미국조경가협회상(ALSA Honer Award), 아키프리 인터내셔널(Archiprix International) 본상, 뉴욕 신진건축가공모 대상, 제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에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설계사무소 Laboratory D+H를 공동 설립하고 L.A., 센젠, 상하이에 이어 서울 오피스를 꾸려 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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