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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잇기] 학생들과 함께 읽은 동네 이야기
  • 환경과조경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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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북촌에 있던 창덕여자고등학교의 모습. 현재는 헌법재판소가 있다. ⓒ공간잇기, 주희돈


아저씨, 사진 찾으러 왔어요

세 평 남짓한 작은 한옥 사진관에 여고생들의 왁자한 목소리가 가득하다. “경자야 너는 잘 나왔는데 나는 못나게 나온 것 같아.” “영애야 무슨 소리니. 네가 훨씬 예쁘게 나왔는 걸. 아저씨가 너만 잘 찍어 주셨나 보다.” “얘는 참. 우리 이 옆에 떡볶이 먹으러 갈까? 숙희랑 명진이도 그리로 온다고 했어.” 사진관 주인이었던 주희돈 할아버지 귓가에는 학생들이 사진을 찾아가며 까르르 웃던 소리가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맴도는 듯하다.

 

196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종로구 재동에 있던 명광사는 창덕여자고등학교 맞은편에 자리한 사진관이었다. 입학식, 졸업식, 체육 대회 등 굵직한 행사 사진뿐 아니라 각종 증명사진과 추억이 담긴 사진의 인화를 도맡았다. 안국역 사거리에서 가회동으로 올라가는 방향에 있던 창덕여고 자리에는 현재 헌법재판소가 있다. 함경북도 길주가 고향인 주희돈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서울로 혈혈단신 피난온 뒤 계동에 60여 년간 살고 있다. 고향을 떠나 고단했던 젊은 시절, 사진 기술을 가진 인생의 단짝 정옥선 할머니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재동에 명광사를 차려 동네 사람들과 서로 의지하며 정겹게 한 세월을 살았다.

 

대박이다. 헌법재판소가 창덕여고였다구요?” “할아버지 그럼 명광사 한옥 건물은 지금 어디 있어요?” 계동 중앙고등학교 1학년 선재와 혜조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운 듯 큰 소리로 질문한다. “있긴 어디 있어. 지금은 다 없어지고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 아이들은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준비해온 질문과 동네 지도를 바탕으로 할아버지가 겪었던 동네 이야기를 하나씩 수집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동네 어귀의 우물터

우리 동네 어귀의 오랜 우물터에 얽힌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조사해 오세요.” 20여 년 전 한국에서 획일화된 교육을 받다 중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가서 받은 첫 역사 수업의 과제였다. 유명한 문화유산도, 미국의 눈부신 개발상을 담은 멋진 건물도 아닌, 그저 동네 어귀에 오랫동안 자리해온 우물터였다. 비석도 없고 관리도 잘 되어 있지 않았으며, 물을 깃는 원형의 넓은 구멍은 널빤지로 단단히 못질 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사용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된 우물임을 알 수 있는, 볼품없고 허름한 곳이었다. 역사 공부는 당연히 암기식으로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것이라고 배웠던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서 과제를 제대로 이해 못 한 건 아닌지 의심하며 과제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하던 기억이 또렷하다. 한 주 뒤, 같은 반 열두 명의 친구들의 과제 발표는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떠오를 만큼 신선한 충격이었다. ...(중략)

 

환경과조경 385(2020년 5월호수록본 일부

 

서준원은 열다섯 살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뉴욕에서 약 10년간 생활했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 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 다양한 생활 공간에 대해 공부했고, 한국인의 주거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SOM 뉴욕 지사, HLW 한국 지사, GS건설, 한옥문화원,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등에서 약 16년간 실내외 공간을 아우르는 디자이너이자 공간 연구자로 활동했다. 한국인의 참다운 주거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공간 연구를 위해 곳곳을 누비며 공간 속 시간의 켜를 발굴하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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