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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너무 바삐 이별하느라 못한 말이 있어요
  • 환경과조경 2022년 6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엄마는 상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욕심부릴 엄두도 못 낸 대학교는 엄마보다 다섯 살 어린, 집안의 장손이 대신 갔다.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지만, 다들 그렇다는 사실이 충분한 위로가 될리 없었다. 못다 이룬 학업에 대한 꿈은 자식만큼은 질릴 정도로 공부를 하게 만들겠다는 열망이 되었고, 나는 또래 친구들보다 바쁘게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다녀와 복습하고, 학원을 다녀오고, 예습하고, 잠시 TV를 보고, 학습지를 풀고, 책을 읽으면 밤이 됐다. 그래서 불행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고, 그 덕에 뜻밖의 취미를 갖게 됐다는 이야기다.

 

당시 유행하던 영어 학습지는 테이프를 들어야만 풀 수 있었다. 마이마이는 내가 처음으로 갖게된 휴대 전자 기기였다. 그때 라디오의 존재를 알게 됐다. TV는 허락받아야 볼 수 있었지만, 라디오는 몰래 들어도 티가 안 났다. 친구들이 흥얼거리는 대중가요도,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행어도 전부 라디오로 알게 됐다. 공테이프를 사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잽싸게 녹음을 했는데, 타이밍을 잘못 맞추면 DJ의 목소리가 같이 섞여 들어갔다. 처음에는 망쳤다고 괴로워했지만,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테이프를 재생하니 노래에 얽힌 사연이 함께 떠올라 오히려 즐거웠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집중이 더 잘된다는 핑계로 심야 라디오를 들었다. 하늘이 회보라빛에 가까운 새벽, 그즈음 흘러나오는 방송은 낮과 달리 차분하고 축축했다. 가끔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서러워졌다. 라디오는 조금 이상하고 그래서 재밌는 우체국 같았다. 수많은 이가 보낸 사연을 가득 쌓아 두고, 누군가에게 대신 말을 전하고, 위로나 조언의 말을 건네기도 하고, 덧붙여 노랫말을 답장처럼 들려주는 곳. 신기하게도 그 사연에는 주인이 없어 보였다. 누구누구 씨 하고 이름을 불러도, 그게 모두의 이름 같아서 DJ가 들려준 말과 노래들을 내것으로 삼곤 했다. 약속된 시간이 되면 주파수를 맞추는 작업이, 나와 같은 많은 사람을 만나러 갈 준비를 하는 일 같았다. 그래서 깊은 밤에도 외롭지 않았다.

 

나무요일 뉴스레터를 보낼 때 라디오 DJ가 된 기분에 젖곤 했다. 특히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한 문장을 쓸 때는, 더 그랬다. 뉴스레터 발행 목표를 두 가지로 설명하자면, 첫째는 정성껏 만든 잡지 콘텐츠를 널리 알리는 것이었고, 둘째는 독자들의 삶에 좀 더 가벼운 형태로 깊숙이 침투하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을 지나 조금 나른하다 느낄 때쯤 울리는 새로운 편지가 도착했다는 노크 소리. 알림을 듣고 ‘일에 집중도 잘 안되고 졸린데 한 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열어보는 데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일상의 루틴으로 각인되는 편지가 되기를 꿈꿨다. 봉투 뜯는 게 귀찮아 내버려 둔 잡지를 뉴스레터를 보고 펼쳐봤다, 기대한 바와 다르겠지만 잡지 콘텐츠는 종이 잡지로 보는 게 더 편하고 뉴스레터용 콘텐츠만 읽고 끈다 등 소소한 피드백을 받을 때면, 오랫동안 기다린 답장을 받은 것 같아 기뻤다. 내용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즐거운 와중에도 고민을 계속했다. 뉴스레터가 잡지 콘텐츠를 널리 알리는 데 효과적인지, 오히려 『환경과조경』의 모든 채널을 섭렵하고 있는 독자에게 피로감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 자신이 없다. 때마침 온라인 서비스 개편과 함께 나무요일 뉴스레터는 잠시 휴식기를 갖는다. 채 10이라는 숫자도 채우지 못하고 5호에서 안녕을 말하게 되어 아쉽지만, 딱 반절 왔으니 나머지 반을 더 나은 모습으로 채우겠다고 약속드린다.

 

라디오와 닮았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시청한 TV 프로그램이 ‘이소라의 프로포즈’와 ‘윤도현의 러브레터’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프로그램은 느릿하게 주고받는 편지 같았다. 초 단위로 달리는 댓글과 달리 일주일 내내 사연을 읽고, 그 사연을 생각하고, 사연자에게 보낼 음악을 고심하는 가쁘지 않은 소통. 이소라의 프로포즈 첫 회에서 소개한 엽서 한 장을 잠시 이별하게 된 뉴스레터 구독자에게 보내는 인사말로 대신한다. “당신, 지금 뭘하고 계세요? 제가 없는 가을은 쓸쓸하지 않나요? 슬프지 않나요? 전에, 제가 달리는 차 속에서 당신께 불러드린 노래 기억하나요? 너무 바삐 이별하느라 못한 말이 있어요. 사랑해요. 일산에서, 이소라.”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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