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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경계를 모른다
페이스갤러리, 마야 린 개인전
  • 환경과조경 2023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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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린, ‘자연은 경계를 모른다’ 전시 전경, 2023

 

너른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느슨한 V자 모양의 틈. 단단한 쇠붙이를 툭 찍어 생긴 상흔처럼 벌어진 자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짝이는 검은 화강석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닥에서 시작해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설 정도까지 서서히 높아지다가 다시 지면으로 하강하는 검은 벽에는 베트남 전쟁 희생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흰색으로 새긴 이름을 보며 개인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이곳은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다.

1982년 설계공모를 통해 만든 이 기념비의 계획안은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높은 기념물이 들어선 주변의 내셔널 몰과 달리 단순한 형태에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념비는 영웅적 디자인을 기대한 대중들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당선자가 유명한 건축가가 아닌, 당시 나이 23세, 중국계 미국 여성이자 예일대학교 건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마야 린(Maya Lin)이었다.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었고 영향력 강한 정치가가 목소리를 더했지만, 기념비를 처음 계획한 얀 스트럭스(Jan C. Scruggs)가 강력히 밀고 나간 덕분에 설계안을 지켜낼 수 있었다. 논란이 불거지는 과정에서 마야 린이 남긴 말은 줄곧 애국의 선전물로 여겨졌던 기념비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상실이라는 뼈아픈 현실을 인식하게 될지라도, 상실감을 극복하는 것은 어차피 각 개인의 몫이다. 죽음은 결국 개인의 사적인 문제이며, 따라서 이 기념물의 내부 공간은 개인의 명상과 심판을 위해 마련된 조용한 장소다.”

 

환경과조경 420(2023년 4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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