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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그려도 그려벌레는 정말 그립기만 해
  • 환경과조경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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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검은 땅에 흰 숲. 검은 땅에 흰 숲은 중의적 의미다. 검은 땅이 과거의 얘기라면 흰 숲은 현재와 미래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것은 부지가 가진 상반된, 역사적 전의를 함께 표현하는 의미도 담는다.

 

 

그려벌레, 다른 말로 설계충(設計蟲). 종이에 감광(感光)된 그려벌레의 궤적은 생각의 수레바퀴가 지나간 흔적이자 시간의 단면이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끝나기까지 이 단속적(斷續的) 반투명 막을 통과하면서 생각은 우회하거나 비틀어졌고, 궤적 또한 수레바퀴가 굴러간 대로 남지 않았다. 자신의 몸으로 기어왔던 벌레가 생각도 바퀴도 궤적도 모두 부정해버리는 굴절된 상을 거울 보드키 들여다보고 있을 때 “설마 그러랴? 어디 촉진(觸診)……하고 손이 갈 때 지문(指紋)이 지문을 가로막으며 선뜩하는 차단뿐이다”라 했던 시인의 전언(傳言)은 말 그대로 선뜩하다.

 

2014 0327

함께 있는 건축가 윤이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설계공모’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사무실에서 일하는 정과 사무실 팀장이 붙기로 하고, 인터커드의 윤 소장에게 함께 설계공모를 하지 못하게 됐다고 전화를 넣었다. 섭섭함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순간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2014 0405

사월 초하루, 서소문공원. 현양탑, 윤관장군동상, 분수, 지압 보도와 운동 시설, 재활용 처리장과 지하 주차장, 꽃시장 그리고 노숙자와 왼갖 나무들. 서울역, 경의선 철로, 건널목, 서소문 고가도로, 주상 복합 건물, 약현성당, 염천교, 제화점, 남대문, 호암아트홀이 주변에 있었다. 그러나 서소문은 없었다. 소덕문이라 불렸

고, 시체가 나가던 시구문이기도 했다. 문밖은 조선시대 때 형장이면서 성 밖 시장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네 번의 박해로 형장은 성지가 됐다. 지금의 서울은 오백 년 도읍의 구조 안에서 내재적인 필요에 의해 점진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요인에 의한 폭력적 계획으로 변형되었고, 이 폭력적 계획을 내면화하면서 ‘서소문밖’의 무질서한 풍경과 같은 도시를 만들어냈다.

이곳에선 시각적 혼란과 역사적 혼란이 동시에 일어난다. 형장이 과거 한양의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순교성지는 전복된, 도시의 구조와 아무런 상관없이 들어온 사건이다. 이 관계. 그러니까 성지가 도시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사건 속에서 생겨났다면, 도시 맥락 속에서 그것을 놓아야 하나, 사건 속에 놓아야 하나. 장소 자체는 어쨌든 도시의 맥락과 구조 속에 놓이게 되는데. 이곳이 다른 곳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어지럽다. ...(중략)...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 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했고, 2003년부터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www.ateliernamoo.xyz

 

환경과조경 346(2017년 2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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