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수업을 들을수록 책이 늘었다. 조경은 나무를 심는 게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하며 수강한 1학년 기초 설계 스튜디오. 교수님은 대상지를 분석하고 좋은 개념과 콘셉트를 제시하는 것이 나무를 고르는 일보다 먼저라고 했다. 대상지 분석? 좋은 개념? 콘셉트? 이것들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선배들에게 도움을 구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줄기처럼 촉감만 스쳐 갈 뿐 좀처럼 움켜잡을 수 없었다. 책 속에서 단단한 것을 건져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알쏭달쏭한 단어를 만날 때마다 책을 사 모았다.
조경설계를 그만두면서 이 책들을 버렸다. 자취방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책을 볼 때마다 조경가를 꿈꾸었던 지난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 모으니 손수레로 두 짐이 되었고 빠르게 치우고 싶어 고물상에 팔기로 했다. 그런데 한 짐을 내려 두고 집으로 돌아오니 나머지 책이 사라져 있었다. 폐지를 모으는 이웃 할머니가 그새 챙겨간 것이다. 내 책을 뒤적이고 있는 할머니에게 마음대로 가져가시면 어떡하냐고 돌려 달라고 했다. “버리려고 내놓은 거 주워 간 게 잘못이냐?” 할머니는 역정을 냈지만 꿋꿋이 책을 되찾아 와 고물상에 팔았다.
가끔씩 오래 전의 책장을 떠올린다. 어떤 책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을 찾았는지 기억을 되짚는다. 가물가물하다. 왜 동네 할머니와 다투면서까지 책을 되찾아 왔는지 생각해본다. 그냥 두었다면 그 무거운 짐을 챙겨 귀찮은 걸음을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을 텐데. 이해하기 어렵다. 책을 색깔과 크기로 나누어 꽂아 두었던 책꽂이와 해가 갈수록 색이 옅어지던 책등, 테두리가 노랗게 변색된 내지, 그리고 지저분하게 붙여 놓은 포스트잇만큼은 선명하다. 손가락을 적시는 물줄기의 촉감처럼 여전히 남아있는 풍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