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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생각 도구, 감흥 기록 장치
  • 환경과조경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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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장마 뒤 어느 날 소쇄원에 갔다가 찍은 사진에 이미지 작업을 하였다. 그날의 소쇄원은 그동안 내가 알던 차분하고 소담스런 모습과 달랐다. 장마가 지나간 계곡은 꽤나 역동적으로 보였다. 한 장의 현장 사진도 간단한 작업을 통해 그날의 감흥을 담는 소중한 기록 장치가 된다. ⓒ김현민

 

 1 조경 디자인은 순수 예술과는 다르다. 조경 설계 수업 첫 시간이면 교수님께서는 어김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디자인이라는 행위는 실용적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과물에 대한 논리성과 합리성을 수반해야 하고, 대부분의 조경 디자인은 공공이라는 보편적 이용자, 즉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조경 디자인은 순수 예술과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조경을 처음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합리적 디자인과 체계적 설계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하신 이 말씀은 종종 뜻하지 않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2 첫 번째 오해는 설계 과정, 그 중에서도 특히 조사, 분석 과정에서의 지나친 객관화다. 행위의 목적과 대상이 순수 예술과 다를 뿐이지, 사실 조경디자인 역시 설계자 개인의 ‘주관과 감흥’에 의한 창작행위라는 점은 순수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상지가 가지고 있는 여러 잠재력과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장소를 이용할 사람들에게 가장 합리적이고 가치 있는 공간과 기능, 형태를 결정하게 되는 일반적인 디자인의 행위에서 설계자는 가장 중요한 행위 주체이며, 각각의 단계에서 설계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접근하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특히 조사와 분석 과정은 향후 디자인의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게 될 ‘대상지에 대한 설계자의 관점’을 형성해 가는 첫 단계로서 ‘대상지만의 무엇’을 발견하는 단계다. 하지만 종종 이 과정은 대상지에서 받은 설계자만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흥을 배제한 채 대상지의 객관적인 정보만을 수집하고 종합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이라고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조경은 순수 예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학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대상지에 대한 지나친 객관적 자세는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내용만으로 대상지를 바라보게 만들어 대상지만의 잠재력 찾기를 오히려 방해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나친 경우, 잠재력보다는 상대적으로 평가가 쉬운 문제점에 치중한 나머지 대상지와 설계자의 관계를 마치 대단한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학생 작품의 심사를 가면 대상지를 마치 문제점 덩어리인 것처럼 여긴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한 작품은 대개 ‘문제 해결식’의 단편적이고 기능적인 설계로 이어지기 쉽다.


3 조사와 분석 과정은 설계자가 대상지에서 발견하고 느낀 ‘감흥‘을 합리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이 될 때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다. 객관적 시선이 아니라 나 자신만의 주관적 시선으로 대상지를 볼 때, 발견될 수 있는 잠재력의 폭이 확장됨은 물론 차별성 또한 얻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개인의 판단은 그동안 개인이 각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오면서 지식과 경험을 통해 형성된 개인만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같을 수 없고, 그 인식의 폭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더구나 개인의 감정은 선천적인 성향이나 무의식과도 결합되어 그 폭을 더욱 확장시킨다. 예를들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을 두고 많은 평론가들이 실제로 고흐의 눈에는 밤하늘이 저렇게 보였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상지에 대한 각기 다른 시선은 결국 차별적인 디자인으로 연결되는 첫 단추가 되며 대상지에서 느낀 주관적 감흥은 소중한 단서가 된다.


4 실제로 많은 작업들이 대상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흥과 그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나 역시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대상지의 현황도면을 통해서든, 대상지의 현장에서든, 느껴진 작은 느낌들,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흥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그 ‘왜’라는 호기심들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일반적인 조사의 객관적 리스트들은 이 과정 속에서 역으로 대입되고 내가 느낀 감흥과의 영향 관계를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며 그 의미를 보다 합리적으로 정의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하남 미사 보금자리지구 도시기반시설 설계공모의 주요 개념이 된 남겨진 논 지형의 시스템은 현장에서 느낀 알 수 없는 ‘편안함과 친근함’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논으로 남겨져 있는 부분이 매우 작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여름 방학 때마다 놀러 가서 뛰어 놀았던 시골의 논두렁에 대한 기억과 결합되며 남겨진 농지 지형의 구조적 흔적들이 새롭게 발견되었고, 그 의미와 기능과 역할에 대한 호기심은 이것이 그린벨트라는 제도적 한계가 만들어 낸 대상지만의 독특한 지역경관vernacular landscape이자, 과거의 그 정겨웠던 경관을 행태적뿐만 아니라 생태적으로도 복원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 그로부터 계획안의 개념과 설계 전략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5 ‘조경이 순수 예술과는 다르다’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두 번째 오해는 디자인 과정의 지나친 체계화다. 우리가 학교에서 오랫동안 배워왔던 조경 디자인의 체계는 조사survey-분석analysis-디자인design의 단계로 이루어진 이른바 SAD 프로세스다. 이 전통적인 디자인 체계는 각각의 단계가 마치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선형적 절차linear process이며, 마치머리-가슴-배의 곤충 구조처럼 분절된 독립적 단계individualized phase인 것과 같은 오해를 만들곤 한다. 물론처음 설계를 배우는 학생인 경우는 이러한 기본적 체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생각을 그리는 디자인 행위에서 생각은 조사-분석-디자인의 반복적 피드백의 과정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마치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순식간에 일어난 생각, 직관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김현민은 1975년생으로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조경가협회(ASLA)에서 수여하는 우수졸업자상을 받았으며, 미국의 SWA Group에서 Shanghai Gubei Gold Street Plan, Symphony Park Competition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기술사사무소 렛, 비오이엔씨에서 계획, 설계 및 정원 시공에 이르는 폭 넓은 실무를 경험하였고, 국내 여러 대학에서 조경 설계를 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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