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아파트가 고향인 청년들, 재건축된다는 소식에 마음 아파하는 청년들이다. 고향이라는 ‘애틋한’ 말이 아파트라는 ‘딱딱한’ 단어와 연결된다니, 많은 사람들이 낯설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아파트의 모습을 기록하고 사람들의 사연을 수집해 책을 낼 정도로 고향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과천주공아파트 101동 102호』, 『고덕주공, 마지막 시간들』이란 책을 낸 아파트 키드들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단지의 재건축 움직임이 일어나던 2013년, 이인규 씨는 ‘고향이 사라지게 생겼다’는 위기감에 둔촌주공단지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사진과 사연을 수집해 잡지 형태로 발간하는 독립 출판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발행했고, 2014년 서울역사박물관 ‘아파트 인생’ 전의 한 코너에서 전시도 하게 되었다. 단지 상가에 ‘마을에 숨어’라는 문화 공간을 열었고, 최근 발행된 4호는 둔촌에 거주하고 있는 열두 가구를 방문해 촬영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담아 냈다.
이 작업은 둔촌의 재건축을 앞두고 ‘추억이 담긴 고향이 사라지면 다시 돌아올 수 없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작업을 하다 보니 둔촌은 물론 잠실, 개포, 반포, 고덕, 과천 등지에서 자라온 ‘아파트 키드’들에게서 공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둔촌 작업 덕분에 잠실에는 ‘안녕, 잠실주공5단지’ 페이스북 페이지가 개설되었고, 고덕에는 책 『고덕주공, 마지막 시간들』, 과천에서도 책 『과천주공아파트 101동 102호』가 발간되었다.
그는 “고향을 구성하는 것은 공간 그 자체라기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관계인 것 같다”고 말한다. 과천에서도 ‘동네’와 ‘고향’이라는 말이 단순히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에는 사람 사이의 관계망과 그들이 공유하는 상징이 내포되어 있다. 공동체는 상징적 구성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공동체는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들만의 영역을 형성하는데, 그 과정에서 상징이 두드러지고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로 작동한다. 곳곳의 아파트 키드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 각 관계망을 묶을 수 있는 하나의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과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징은 과천에서 자란 청년들에게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과천에서 가장 좋았던 점으로 청년들은 도시의 자연 환경을 꼽는다. 대공원 산책, 큰 가로수, 관악산이나 청계산에 대한 경험 때문에 “아 풀 냄새, 이게 과천이지”라고 하거나, “서울에서 남태령을 넘어올 때 창문을 열고 과천 공기를 맡는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할 정도다.
또 과천의 청년들은 “내가 놀던 아파트 단지가 그대로” 남아있거나, “내 나와바리이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대로 있어서”라고 말할 정도로 도시의 지속성을 장점으로 꼽는다. 과천의 주공단지 두 곳이 초고층 아파트로 재건축되었을 때, 청년들은 과천 같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잘 짜인 도시계획으로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에 펼쳐진 나지막한 경관이 변하는 것을 낯설어 했다. 현재는 단지 다섯 곳이 동시에 재건축을 진행하고 있어서 5천 가구가 한꺼번에 이주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역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정주성이라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수도권에서는 임대료나 직장, 교육 때문에 지역을 자주 옮기는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지역 정체성을 갖기 어려워지며 심리적 부유 상태의 누적이 안정감에 악영향을 끼친다. 재건축은 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관계를 파열시킨다.
수도권에서 한자리에 오래 산다는 건 자기 집이 있거나 돈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하지만 과천에 강한 지역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은 비싼 전월세를 부담하거나 집을 줄여서라도 과천에 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적 여건만이 아니라 지역 정체성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볼수밖에 없다.
아파트 단지는 만들어진 환경built environment이지만, 이 아파트 키드들은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 왔고 그곳에 의미를 담아 왔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아파트가 고향이다. 또 이들은 장소의 고유한 경관이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맺어 온 관계를 지키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재건축을 위해 이주한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다. 함께 공유하던 지역 정체성이 갑자기 흩어져 버린다면 쓸쓸하고 허무할 수밖에 없다.
사실 재건축은 부모 세대에게는 시세 차익으로 새집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과천의 한 청년이 “여기에 계속 살고 싶은데, 왜 재건축, 재건축하시는 거예요?”라고 묻자,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얘, 너 신혼집 마련해 주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재건축을 둘러싼 이 딜레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집값이라는 고리가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다. 다음 세대의 신혼집을 마련해 주려면 집값이 더 올라야 하는 건가? 모두가 망하는 결과로 치달을 이 고리를 끊는 일이 절실하다. 이 모순된 사회 구조는 도시를 소유하는 공간으로 보고 그 공간을 자본 증식의 수단으로 여기는 관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숫자로 삶의 의미를 지워버린다. “사회의 뿌리가 사람이고, 사람의 뿌리가 청년 시절에 자라나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회의 비극”이라는 쇠귀 신영복 선생의 말씀, 재건축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송준규는 도시 공동체를 연구하는 인류학도이자 과천에서 활동하는 청년 활동가다. 논문 “부모됨·이웃됨·시민됨: 과천시 풀뿌리 시민운동의 형성과 도전”으로 인류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형성하는 문화적·사회적·경제적 관계망이 국가와 부딪치는 지점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