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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아일랜즈
윤선미·루원쥐안, 말번 봄 페스티벌 동메달 수상작
5월 9일부터 12일까지 영국 우스터셔 말번의 스리 카운티 쇼 그라운드(Three Counties Showground)에서 영국왕립원예협회의 말번 봄 페스티벌(Malvern Spring Festival)이 열렸다. 1986년에 시작한 말번 봄 페스티벌은 친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회복탄력적 가드닝 정보를 제공하며, 정원 분야 및 커뮤니티의 새로운 시도를 기념해왔다.
올해 37회를 맞은 말번 봄 페스티벌은 ‘변화를 위한 정원 가꾸기(gardening for change)’를 주제로 개최되어, 정원 분야의 발전을 기념하고 정원이 식물, 사람, 행복한 삶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다뤘다. 쇼가든, 정원 식물 및 용품 마켓, 정원 컨설팅, 강좌, 워크숍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특히 관엽식물을 집중 조명하고 주제 구역과 몰입형 특별 정원을 통해 미래 정원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쇼가든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가 창의적 정원을 선보였다. 심사를 통해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실버길트메달, 베스트쇼가든, 베스트시공상, RHS 피플스 초이스를 수여하고 있는데, 윤선미·루원쥐안(Lu Wenjuan, 록디자인 대표 및 직원)의 ‘그린 아일랜즈(Green Islands)’가 동메달을 차지했다.
*환경과조경434호(2024년 6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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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추억 속 올림픽공원
가정의 달, 5월이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서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할 수 있는 어린이날,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를 보답하는 어버이날,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각주 1) 스승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스승의 날, 부처의 탄생을 기념하는 부처님 오신 날. 각종 기념의 날이 주마다 있다. 어렸을 땐 공휴일이 많고 수업 말고 야외 활동을 많이 해서 좋은 달이었다. 하지만 이젠 챙겨할 날이 많아졌다(통장이 텅 비는 텅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기념일들이 왜 5월에 이렇게 몰려 있는 걸까.
다양한 가설을 세우며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날씨에서 찾았다. 봄에서 여름으로 향하는 5월, 옷차림도 가벼워지니 야외 활동하기 좋은 날씨의 연속이다. 가족, 친구, 지인들과 밖에서 재미난 추억을 많이 쌓으라고 조상들이 이맘때로 날짜를 잡아보자고 한 것 같다(필자의 뇌피셜(?)이니 믿거나 말거나). 날씨가 좋은 탓에 이번 달은 밖에서 보낸 날이 많았다.
2024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진행을 위해 뚝섬한강공원에 자주 갔다. 한강공원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유심히 보게 됐다. 한강공원하면 떠올리는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은 물론 보드와 자전거를 타는 사람,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 아이와 함께 배드민턴, 캐치볼 등 운동을 즐기는 사람, 런닝 크루 등. 이곳에서의 행위를 나열하는 것만으로 이 지면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이 사람들을 보니 나는 공원에 가면 무얼 하지, 첫 공원은 어디였지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번호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를 편집하며 이 꼬리의 끝에 도달했다.
보조 바퀴를 떼어낸 두발자전거를 연습하기 위해 신명진 박사가 향했던 올림픽공원. 올림픽공원이란 단어를 보자마자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올림픽공원 곳곳에 많은 추억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공원은 서울에 온 뒤 처음 방문한 공원이다. 어린이날이면 올림픽공원 88마당과 평화의 광장을 매년 찾았다. 넓은 잔디광장의 88마당은 당시 어린이날이 아니면 개장하지 않았다(현재는 6월부터 10월까지 개방한다). 주차를 위해 아빠는 차에 남고 엄마, 언니와 함께 잔디광장의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88마당으로 달려갔다. 그늘 밑은 빠르게 솔드 아웃이었지만, 그날은 어딜 앉든 좋았다. 88마당에 가면 꼭 배드민턴을 쳤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배드민턴 채를 잡고 둘씩 짝을 지어 승부욕을 불태웠다. 열심히 움직이고 난 뒤 향하는 곳은 평화의 광장. 당시 유행이었던 롤러스케이트를 타기 위해서였다. 평화의 광장은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고 평지 광장이라 롤러스케이트를 타기엔 안성맞춤이다. 평화의 문에서 시작해 올림픽 운동 조형물인 ‘서울의 만남’을 반환점 삼아 돌고 다시 평화의 문으로 향하면 10~15분가량의 코스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몇 바퀴 돌다 보면 경쟁자를 발견한다. (상대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저 친구만 앞질러 보자며 혼자 고군분투하며 롤러스케이트 실력을 쌓아갔다. 신 박사는 올림픽 프라자를 어린이 체육공원으로 꼽았는데, 나에겐 88마당과 평화의 광장이 어린이 체육공원이었
다.
추억을 뒤적거리다 깊숙이 박혀 있던 기억 하나를 발견했다. 녹음이 짙은 나무를 배경 삼아 졸업 사진을 찍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졸업식 이후로 절대 꺼내 보지 않은 사진이라 더더욱 잊고 있어서 그런지 어디서 찍었는지 모르겠다. 어딘지 알고 싶어 종합안내도를 보는데도 찍은 장소의 형상만 생각나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어떤 구조물에 일렬로 앉아 조별 사진을 찍었던 장면이다. 아마도 문화올림픽을 위해 올림픽공원을 조각공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운 조각(각주 2) 앞에서 찍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한강공원에서 떠올린 질문에 답을 찾는 여정이 추억 여행으로 변질됐지만, 돌이켜보니 올림픽공원을 참 알차게 이용했다. 하지만 요즘 공원을 일 외로는 잘 안 간다. 목적 없이 방문할 수 있는 곳이 공원이라지만, 이유 없이 어딘가를 가기 어려워해 발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다. 동네 공원이 리모델링됐다고 하는데,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본다는 핑계 삼아 퇴근길에 들려보면서, 공원 한구석을 아지트로 활용해봐야겠다. 그럼 다시 공원에 가는 횟수가 늘어나지 않을까.
**각주 정리
1.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노래 가사를 인용했다.
2. 신명진 박사의 자전거 연습기와 올림픽공원을 조각공원으로 활용한 이야기는 110~117쪽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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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앉아 있는 것은 우리가 공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필요한 행위다
공원의 크기를 실감하고 싶다면 걷기를 추천한다. 2024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린 뚝섬한강공원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한강공원이다. 출근 지하철이 한강 위를 가로지를 때마다 내려다보이던 곳이라 그리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 공원이 이렇게나 넓은 줄 몰랐다. 박람회를 운영하다 보면 공원 곳곳을 오가야 하는데, 저 끝으로 와달라는 무전이 오면 등줄기를 따라 땀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하루 걸음 수가 3만 보를 넘기 일쑤. 직원 모두 앉을 곳만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게 됐다.
그래서인지 이번 박람회 현장에서 제일 탐났던 건 정원도, 식물도, 정원 작업 용품도 아닌 의자였다. 말랑말랑해서 손에 감기는 느낌이 좋고, 몸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려도 푹신하고, 가벼워 이리저리 움직이기 쉬우며, 눈이 시리게 쨍한 핑크빛 의자 말이다. 박람회장 메인 무대를 비롯해, 잔디밭, 산책로 주변 곳곳에 놓여 있던 의자의 정체는 서울시 ‘펀 디자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든 ‘폼앤폼(Form&Form)’이었다.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 BKID가 만든 이 의자는 100% 재활용할 수 있는 발포폴리프로필렌(EPP)으로 만들어졌다. 의자의 본질적인 역할인 ‘앉는다’는 행위에 초점을 맞춰 디자인된 것이 특징이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세를 하나의 형태(form)로서 그 자체를 제품 형태에 반영하고 했습니다. 특히 야외에 존재하는 다양한 의자들에 앉아 있는 모습은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한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었습니다. 한편 ‘앉다’라는 단어는 그 행동 자체를 정의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휴식’이라는 개념도 지니고 있는데요. 따라서 휴식을 취하는 다양한 자세들을 관찰하고, 이를 하나의 제품 형태로 나타내고자 한 부분도 있습니다. 의자는 싯(Sit), 린 하이(lean High), 린 로우(Lean Low) 세 가지 높이로 구성했습니다.”(각주 1) 박람회장에 놓였던 의자는 린 하이였는데, 제품을 다 보고 나니 계단 형태의 공간에 놓고 쓰기 좋은 린 로우가 탐났다.
우연처럼 비슷한 글을 이번호 잡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우선 김영민과 김영찬의 ‘앉는 정원’. 설계설명서에서 만난 문장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우리가 제시하고자 하는 정원은 쉼의 정원, 즉 앉는 정원이다. 뚝섬한강공원 잔디밭에서 본래 이루어지던 쉼의 행태와 동행하며, 그중 ‘앉기’에 집중해 쉼 속에서 다양한 앉음이 펼쳐지는 정원이다.” “공원의 쉼 중, 앉는 행위는 쉼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눕기, 앉기, 서기) 중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눕기와 서기 사이에는 다양한 종류의 앉기 방식이 나타난다. 이는 눕기와 서기의 행위가 한정적이기도 하나, 외부 공간에서 앉아 있기에 할 수 있는 행위가 다양하기 때문이다.”(자세한 내용은 36쪽)
쉼의 본질은 무엇일까. 박승진은 쉬는 공간을 설계하기 위해, 공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고심하고 그것은 바로 앉는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걷는 것은 속도와 방향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목적이나 목표가 분명하다. 앉는다는 것은 걸음을 멈춰야만 할 수 있는 원초적 행동이다.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앉아 있는 것은 우리가 공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필요한 행위다.”(18쪽)
박람회를 찾아온 사람 대부분은 어깨에 큰 가방을 메거나 인근 피크닉 용품 대여점에서 빌린 카트에 짐을 가득히 싣고 나타났다. 돗자리파, 텐트파, 테이블 세트파 등 유형이 다양했지만, 그중 가장 자유로워 보인 건 폼앤폼을 들고 원하는 곳에 옮겨 앉은 사람들이었다. 해가 위치를 바꿔 그늘이 사라지거나 버스킹 공연이 시작되어도 살짝 이동하면 그만. 박승진이 선유도공원과 오목공원에서 목격했다는 장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당시 선유도공원이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자가 고정되어 있지 않았는데, 시민들이 의자를 원하는 곳으로 이리저리 옮기며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 벤치가 모두 고정되었지만 잠시나마 시민들이 벤치를 자유롭게 활용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부터 공원에 의자를 왜 붙박이로 해놔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다.”(28쪽)
나도 이제 붙박이 벤치가 없는 공원을 상상한다. “공원은 극장이 아니므로 한쪽만 바라봐야 할 이유가 없다. 혼자도 오고 여럿이 함께 오기도 하기에, 따로 또 같이 앉을 수 있으면 좋다. 무리를 등지고 앉을 수도, 서로를 바라보고 앉을 수도 있어야 한다.”(18쪽)
**각주 정리
1.이정훈,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가 만든 친환경 공공의자, 폼&폼”, 「디자인+」 2024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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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똑똑하게 만드는 휴게 공간, ‘소프트 스마트 퍼걸러’
현대인의 트렌드에 맞춘 시스템과 공간의 결합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현대인의 일상은 더욱 바삐 흘러간다. 잠깐 틈이 나면 피로를 풀고자 나들이라도 나서고 싶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기후 변화로 인해 날씨를 좀처럼 예측할 수 없고, 날이 맑더라도 미세 먼지가 극성을 부리기 일쑤다.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와 요구에 맞춘 새로운 휴게 공간이 필요한 시점이다.
세인환경디자인이 출시한 ‘스마트 퍼걸러’는 스마트폰처럼 여러 시설을 탑재한 하나의 퍼걸러를 통해 똑똑한 방식으로 현대인들이 원하는 휴게 공간을 구현해낸다. 퍼걸러가 갖춘 공기 정화 시스템과 미세 먼지 측정기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쾌적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용자 움직임을 감지해 자동으로 작동하게 함으로써 에너지 효율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전방 3m 내에 사람이 들어오면 외부인 감지 센서가 작동해 양흡입기, LED 살균기, 에어 커튼을 작동시킨다. 사람이 내부에 진입하면 또 다른 센서에 의해 에어컨, 모니터, 무선 충전기, 온열 벤치가 작동된다. 냉난방기는 설정 희망 온도를 기준으로 자동 조절된다.
공기질 측정기를 통해 내부 온도, 습도, 미세 먼지 정보가 입력되고, 디스플레이로 해당 데이터를 송출해 이용자가 실시간으로 현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쉼터 이용을 마친 후 이용자가 밖으로 나가면 센서가 내부에 사람이 없는 것을 감지해 자동으로 기기 작동을 종료시킨다. 크고 작은 시스템과 휴게 공간의 결합이 우리의 삶을 한층 더 깨끗하고 편안하게 만들고, 안전을 보정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TEL. 02-877-8811 WEB. www.seindesig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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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땅에 쓰는 시
2024년 봄은 1941년생 여성 조경가, 정영선(조경설계 서안)의 계절이다. 지난 4월 5일, 그가 직조해온 수많은 경관의 설계 도면과 모형, 사진과 영상, 기록과 자료를 한자리에 모은 전시회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24년 9월 22일까지)가 개최됐다. 4월 17일에는 그의 조경 인생과 대표작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감독 정다운)가 전국 주요 극장에서 개봉됐다.
“선유도공원, 양재천, 예술의전당 등 내 인생의 중요한 공간들이 정영선 선생님의 손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운명과도 같았다.” 전작 ‘이타미 준의 바다’(2019)와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2020)를 통해 건축 다큐멘터리스트로 자리매김한 정다운 감독은, “자연의 생명력을 전하고 지키기 위해 줄곧 노력해온 조경가 정영선의 철학”에 큰 감명을 받아 영화를 통해 “자연의 복원과 치유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영화의 주연 역할을 하는 장소는 정영선 조경의 정점인 선유도공원이다. 영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으로 계절을 순환하며 선유도공원의 공간감과 시간성을 포착한다. 영화는 선유도공원을 플랫폼 삼아 계절마다 들고나며 정영선의 다른 작업들, 이를테면 호암미술관 희원, 서울 아산병원, 여의도샛강생태공원, 경춘선숲길,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에 펼쳐진 경관 미학을 재구성한다.
선유도공원은 폐기된 정수장의 구조와 기억을 살린 ‘발견의 디자인’으로 한국 공원 설계의 새 지평을 열었다. 선유도공원에서 우리는 한숨에 다가오는 한강의 풍경과 냄새, 살갗에 와 닿는 서걱한 강바람, 울퉁불퉁한 시멘트 기둥의 생살과 지워지지 않는 물 얼룩의 물성, 옛 시간의 흔적과 새로운 녹색 생명체가 동거하며 빚어내는 경이의 미감을 마주한다. 역동하는 선유도공원의 정동을 담아내면서 영화 ‘땅에 쓰는 시’는 대지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경관의 맥락을 엮는 정영선 특유의 작업 태도에 주목한다.
관객의 시선을 붙드는 또 다른 주연 공간은 정영선의 검박한 들풀 마당이다. 영화는 그에게 위로를 건네는 내밀한 정원이자 야생 풀꽃의 성장을 돌보고 가꾸는 개인 실험실이기도 한 양평 집 마당을 계절별로 관찰한다. 자신의 시그니처 식물 소재인 미나리아재비, 병아리꽃나무, 쑥부쟁이와 대화하는 할머니 조경가의 일상. 이 영화가 아니라면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나는 ‘연결사’라고 보면 돼.” 양평 집 처마 밑 탁자에서 식재 디자인 개념을 파스텔로 스케치하면서 그가 던지는 이 짧은 문장은 자신의 조경론을 요약하는 표현이자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조경가는 연결사”라는 간명한 정의에는 ‘지사(地史)’와의 관계, 시공간적 맥락과의 관계, 주변 경관과의 관계, 도시 조건과의 관계를 연결하는데 남다른 가치를 두는 그의 태도가 압축되어 있다. 연결의 태도는 생각이나 말에 머무르지 않는다. 지형과 식물을 매개로 현실의 경관에 실천된다.
영화 제목으로 쓰인 ‘땅에 쓰는 시’는 관계와 맥락을 읽고 잇는 ‘연결의 조경’의 다른 표현일 테다. 자칫 낭만적으로 해석될 법한 이 표현은 조경가가 젊은 시절 시인을 꿈꾸었다거나 감성적 디자인을 지향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음에 인용하는 정영선의 글 몇 구절에서 우리는 그의 조경이 ‘땅에 쓰는 시’인 까닭을 헤아릴 수 있다. “[경관은] 글자의 선택과 배열, 호흡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시’처럼 세심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환경과조경』 137호, 131쪽).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107쪽).
『환경과조경』은 한국조경가협회와 함께 오는 7월 3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작업을 통해 한국 조경 50년의 성과를 조회하는 심포지엄,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를 연다. 발제문과 토론은 8월호 지면에 담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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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감각] 소란한 스크린
한적할 것 같은 오후 버스에 의외로 사람들이 꽤 있다.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맨 뒷좌석에 올라 앉는다. 곧바로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켜 친구와 만날 장소로 가는 경로를 비교한다. 지하철로 환승해 빨리 도착할 수 있는 루트와 지금 이 버스를 타고 쭉 가는 느린 방법이 있다. 지하철 배차 시간을 확인한다. 열차를 놓치면 오히려 더 늦을 것 같아 버스에 남기로 한다. 친구에게 도착 예정 시간을 알려준다. 이제야 고개를 들고 버스 안을 찬찬히 살핀다.
바닥에는 햇살이 나른히 내려앉고 라디오 DJ의 웃음이 엔진 소리에 섞여 든다. 승객들은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폰을 본다. 알록달록한 게임이 뿅뿅거리고 카카오톡의 노란 말풍선과 인스타그램의 빨간 하트가 오간다. 유튜브 썸네일 속 굵은 글씨들이 손가락을 따라 쭉쭉 미끄러진다. 액정 위로 창밖 풍경이 비친다. 어느새 무성해진 가로수의 녹색 그림자가, 파란 하늘과 하얀 양털 구름이 소란한 스크린 위를 스쳐간다.
예쁜 계절이 와 있었구나. 친구에게 산책을 하자고 톡을 해야지. 다시 휴대폰을 꺼내든다. 노란 말풍선을 보낸 뒤, 습관처럼 인스타그램 피드를 살피고 트위터에 답 멘션을 달고 새로 올라온 웹툰을 본다. 아차, 내릴 정류장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음성이 들린다. 내 휴대폰 위로 어떤 풍경이 스쳐갔을까. 궁금하지만 나를 향해 달려들던 풍경들은 등 뒤로 질주해버린 다음이다. 하차벨을 누르자 빨간 불이 들어온다. 버스가 멈춰 선다. 계단을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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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조경을 흔히 식물을 다루는 장르로 한정하지만, 실은 돌, 물, 철, 유리 같은 유형의 소재부터 빛, 소리, 바람 같은 무형의 소재가 경관을 구성한다. 마운딩, 데크, 루버, 포장 등 소재와 결합된 설계 세부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소재의 작은 차이는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들어낸다. 재료 그 자체가 때로는 실험적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하는 자극제, 풀리지 않는 문제의 독특한 설계 해법이 되기도 한다. 소재는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공간의 콘셉트와 내용이 되기도 하고, 색다른 구조와 분위기를 만들어 조경의 완성도에 영향을 미친다.
좋은 설계는 도면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조경가는 자신의 창조성을 어떤 재료로 표현하고, 어떤 방식으로 공간에 구현하고 있을까. 차별화된 공간의 한 끗을 만드는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소재를 선택한 이유, 재료를 다루는 방식, 그 소재만이 주는 감각, 설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재료 가공 방법, 새롭게 발견한 소재 설계 방식 등 소재와 관련한 경험과 고민을 통해 소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작은 길라잡이를 제공하고자 한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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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의 부활 _ 장혁준
보이지 않는 바람들 _ 조용준
조경의 웜톤 _ 최영준
물의 모양 드러내기 _ 이호영
경관의 깊이와 질감을 만드는 돌 _ 이형석
철의 선명한 음색 _ 강한솔
공간에 깊이를 더하는 미스트 _ 김용희
나무를 다루는 손 _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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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표면의 부활
포장은 결과물을 지칭한다. 과정의 단어라기보다는 결과의 단어다. 그러므로 설계를 하면서 포장을 따로 떼어내 사고하지 않는다. 후행적으로 납작한 표면의 단단한 일부를 포장이라고 규정할 뿐이다. 이미 단단해진 결과물을 논할 땐 도구적 관점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기능이 무엇인지, 가격은 저렴한지, 공사 속도는 빠른지, 충분히 튼튼한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유연한 논의가 아닌 딱딱한 정답이 기대되는 질문을 하기엔 포장에 내재된 기능이 아쉽다.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포장이 단단해지기 전으로 돌아가 과정의 단어인 말랑말랑한 ‘표면’을 이야기해보자. 설계 과정에서 표면을 대하는 태도(사실 설계 태도와 다르지 않다)와 물화된 의지의 단편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류는 인간을 재발견하면서 대성당의 시대를 종결했다. 나아가 데카르트가 영혼의 세계에서 물질의 세계를 분리해내자 주술의 신앙이 아닌 합리적 이성이 세상을 다스리는 근대가 시작됐다. 근대는 구텐베르크로부터 시작된 인쇄술을 날개 삼아 폭발적으로 정보를 교환했고 마침내 계몽의 시대가 도래했다. 근대는 실로 괄목할 만한 과학적 발견을 이뤄냈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은 더 이상 의학의 참고서가 아니라 관찰과 이해의 대상이 됐다. 산과 바다는 두려운 미지가 아니라 정복의 대상이 됐다. 인류는 지구와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진보의 미래를 꿈꾸었다. 근대가 선사한 이성이라는 빛은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근대의 마지막은 전쟁과 독재였다. 인류라는 함선의 등대 같았던 빛은 실로 화염이었다.
옛날이야기를 한 이유는 지구를 뒤덮었던 화염의 불씨가 우리의 일상 공간과 더 나아가 표면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성, 정확히 말해 도구화된 이성은 공간 영역에서도 과학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제일의 가치로 설정했고,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지역, 신화, 개인, 역사, 전통, 장식, 감정, 자연과 같은 것들을 거세시켰다. 그리하여 도시는 자동차를 연료로 하는 기계가 됐고 주거는 아파트라는 화폐가 됐다. 그리고 우리가 딛고 있는 표면은 한 변이 200mm인 정사각의 투수형 콘크리트 블록으로 수렴하고 있다.
사실 콘크리트 블록은 잘못이 없다. 싸고 제작이 쉬우며(그러나 다른 규격을 쓰긴 어렵다. 물량이 많지 않은 이상 새로운 규격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시공이 쉽고 빠르다. 게다가 물 순환에 도움을 주지 않는가. 나쁜 게 하나도 없다. 단지 두려운 것은 이 합리성 뒤에 숨은 폭력이다. 감성을 미천한 것으로 취급해온 근대의 불씨가 표면에도 남아 있다. 콘크리트 블록은 정답이 되어가고 있다. 인구의 60% 이상이 아파트에 살면서 똑같은 표면을 걷는다. 공간은 행동을 지시한다. 남들과 다른 것을 참지 못하는 지금 한국 문화에 대해 표면의 도플갱어들도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이 다스리는 사회에서 대중문화는 필연적으로 비참해진다고 했다. 내일의 표면은 오늘보다 슬퍼져야만 하는 것일까.
연약한 개인이자 공간 문화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전투원으로서 내일의 표면을 상상하며 소소한 저항을 시도하고 있다. 합리적 설계안과 재료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 그다지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원탁 위에 함께 올려두자, 스테인드글라스가 강화 유리로 진화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우리 주변엔 쓸데없어 보이지만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 많다.
직물을 모방한 화강암
집합 주택인 에테르노 청담의 표면은 카펫이다. 운 좋게 서울 초호화 집합 주택 프로젝트 몇 가지를 연달아 하게 됐다. 그 중 두 번째 프로젝트가 에테르노 청담이다.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가 건축에 참여했고 아이유와 송중기가 분양 받았다고 해 세간에 오르내렸던 곳이다. 물론 수백 억의 분양가가 더 큰 화제가 됐지만. 설계를 시작하고 기존 도서들을 확인해 보니 생태 면적 확보를 위해 지상 모든 표면이 투수형 콘크리트 블록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걸 걷어내지 않는다면 화제성에 걸맞은 표면을 선사하기 어려워 보였다. 표면을 제외하고 생태면적률을 높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검토했다. 먼저 건축과 토목 분야에 간절한 호소문으로 협조를 구해 각자 영역에서 마른 수건을 짜내 최대한의 점수를 선물 받았다. 그리고 분양자들에게 사전 고지를 하고 분양된 각 세대의 테라스와 옥상 녹지까지 포함한 모든 종류의 녹지를 법이 요청하는 면적으로 삽입해 겨우 자유로운 표면을 만들어 냈다. 상상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초호화 주택의 조경에 대해 조금 솔직히 말해 보자면, 사치품이다. 학계와 산업의 최전선에서 외치고 있는 도시의 역할, 나아가 전 지구적 기후위기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이 명품백 구매의 이유가 되긴 어렵다. 물 순환과 탄소 순환을 위해 수억 원을 들여 정원을 조성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이용률이 높지도 않고 특별한 기능이 있지도 않으니 말이다. 명품백은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싶어 사는 것이다.
아름답고 누구나 쉽게 가지지 못하는 물건을 당신에게 선사한다는 게 여기에선 더 중요하다. 타 분야에 협조를 구할 때 이런 식으로 말했다. 걸어 다닐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한 번을 걷더라도 그 한 번의 경험이 우리 집 정원의 인상을 좌우할 수 있지 않을까. 근대는 개인적 취향이 깃든 사치품을 필연적으로 사멸한다 했지만 과거의 낭만적인 사치품이 지금의 예술품이 되지 않았는가. 사치품은 잘못이 없다. 가능성을 닫아버린 우리의 오만함을 되돌아볼 시간이다.
사실 처음부터 화려한 카펫을 깔고 싶었다. 카펫은 중동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실내 온기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으나 권력과 무역의 발달에 힘입어 예술적 가치를 얻게 됐다. 레드카펫은 도구가 아닌 상징이다. 카펫에 내재된 아우라를 장소화하고 싶었다. 넓은 외부에 진짜 카펫을 깔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직물이 갖는 패턴과 섬세한 디테일을 두 종류의 석재로 번안했다. 큰 면적에서 읽히는 패턴을 짜고 직물을 자세히 볼 때 눈에 들어오는 실 한 올의 유려함까지 번안하기 위해 5cm 폭의 얇은 돌을 패턴 사이에 교차시켰다. 남은 과제는 어떤 실을 사용해야 하는가다. 국내에서 흔히 쓰이는 화강암은 대부분 회색톤이다. 어디에나 무난하게 어울리고 때도 덜 타며 비교적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다. 건축 외장으로 사용된 흰색 세니아 스톤을 보니 내 직관은 초록색 카펫을 떠올렸고 석재상에 초록빛이 나는 화강암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2주가 지났을까, 저 멀리 북유럽에서 건너와 은은한 초록빛을 발사하는 화강암 샘플이 사무실로 도착했고 곧이어 현장에도 깔렸다. 에테르노 청담의 카펫은 그렇게 석화되어 물건에서 장소가 됐다.
땅을 발견한 콘크리트
대전 신세계 백화점 아트 앤드 사이언스Art and Science 옥상 표면은 깊고 무한한 땅이다. 모든 백화점 옥상 공원이 모든 시민에게 열려있으나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지상과 옥상을 24시간 연결하는 엘리베이터가 이곳이 공공 공간임을 웅변하고 있기때문이다. 이곳은 모두에게 열린 ‘옥상 정원’이다. 그렇기에 설계 핵심은 옥상 같지 않은 땅을 만드는 것이었다. 축구장 두 개가 넉넉히 들어가는 넓이의 옥상에 고저차 3m가 넘는 역동적 지형을 만들었다. 근원적으로 땅은 깊지만 표면은 얇다. 깊은 땅은 얕은 표면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표면은 우리를 매개한다. 다시 표현하면 얕음으로써 깊음을 취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땅의 형태를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단단히 굳힐 수 있는 콘크리트를 표면 재료로 선정했다. 시간이 더해지기 전 콘크리트는 점성이 높은 유체이기에 거푸집만 있다면 어떠한 형태든 만들어 낸다. 이곳의 거푸집은 비정형의 땅이고, 이 형태를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기에 콘크리트가 적절한 재료였다. 100mm 두께의 콘크리트를 단단함이 필요한 표면 위에 부었다. 콘크리트가 경화되어 밝게 빛나면서 땅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콘크리트는 근대의 상징과도 같다. 철근 콘크리트가 근대적 공간 문화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기계적 재료에 인간성의 향기를 입히기 위해 마감에 수공예 감성을 더했다. 콘크리트가 다 굳기 전에 일정 방향으로 빗자루질을 해 불규칙한 줄무늬 패턴을 입혔다. 옥상에 올라간 땅은 아무리 깊어도 3m가 넘지 않는다. 만약 진짜 깊음이 있다면 표면은 자칫 도구로 전략할 것이다. 표면은 없는 깊이를 있도록 하며 모두에게 다른 깊이를 상상하게 한다. 추동의 힘을 가진 예술이 진리보다 값지듯 얕음은 때론 깊음보다 가치 있다.
빛나는 콘크리트가 수직적 깊이를 드러낸다면 흰 바다의 물고기 떼처럼 흘러가는 검정 띠는 수평적 무한함을 강조한다. 검정 띠는 검은색 안료를 섞은 골재 노출 콘크리트다. 눈을 사로잡기 위해 흰 표면과 대조적인 색을 섞고 마감도 바탕 표면과 다른 골재 노출 방식을 선택했다. 검정 띠는 울퉁불퉁한 지형과 휘몰아치는 선형 위에 얹혀 있기에 그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곳에서 표면의 끝은 가려진다. 표면은 가려짐으로써 무한함을 상상하게 한다.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와의 그림 대결에서 캔버스의 반을 차지하는 커튼을 그려 제욱시스로 하여금 걷어내는 행위를 하게 했다. 아름다움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했던가. 제욱시스는 호기심을 품은 자신에게 패배를 선언했다. 모름의 깊이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고 행동하게 한다. 여기 빛나는 콘크리트 표면은 알 수 없는 땅의 깊이를 생각하게 하고 가려진 저곳으로 발걸음을 떼게 만드는 커튼이다.
사라짐을 애도하는 점판암
온천 호텔 유원재의 리셉션을 담고 있는 환영의 못 표면은 돌너와 지붕이다. 유원재는 한국식 온천 문화 활성화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사명감을 안고 탄생했다. 충청북도 충주 수안보는 한국 최초 천연 온천수가 자연적으로 솟아올랐던 지역으로 먼 옛날부터 왕의 온천으로 불렸으며, 1980~1990년대에는 매년 5백만 명 이상 찾은 관광지였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던 탓일까. 지금의 수안보는 유령 도시라는 수식어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니 유원재는 아스라이 잊힌 한국 온천 문화에 대한 애도이자 부활의 장소다.
온천 도시에 있는 온천 호텔이니 방문객이 물을 반길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건축이 리셉션을 별동처럼 뽑아주니 그 주위를 얕은 물로 채웠다. 물과 반영 효과가 중요하니 물에 잠긴 수조 표면은 튀지 않도록 검은색의 평평한 석재를 깔거나 쇄석을 포설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엔 물을 투과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질감을 가진 점판암을 겹쳐 깔았다. 한반도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옥천 습곡대라는 습곡-단층대가 가로지르고 있다. 이 습곡대가 충북 지역에도 분포하는데, 이곳에서 퇴적암이 강한 압력으로 변성되어 점판암이 만들어진다. 과거 이 지역에 짚이나 기와를 구하기 힘든 산지에 사는 사람들이 산에서 구한 점판암을 기와처럼 널어 용의 비늘 같은 지붕을 만들곤 했다. 제작술과 운반술의 한계가 인간의 아이디어와 만나 탄생한 풍경인 이 지붕을 돌너와 지붕이라 하며 돌너와 지붕을 가진 집을 돌너와 집이라 한다. 이 용의 비닐은 과거엔 정주 환경을 구축하는 도구로서 가장 높은 곳에서 존재를 보이지도 않은 채 우릴 지켜주었으나 지금은 아름다움으로 남았다. 과거가 현대에 용의 비늘을 선물했다. 허나 이를 개선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에 의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애도의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말이다.
가장 위에서 물을 막았던 점판암은 이제 유원재의 가장 아래에서 물을 담는다. 50mm 얕은 물은 온천 문화 부활의 성소인 건축 그리고 사람을 표면에 반영해 풍경화를 그린다. 그리고 얕음으로 인해 점판암에 빛을 선사하는데, 빛을 받아 존재하게 된 점판암은 물이 그린 풍경화 위에 자신의 모습을 덧칠한다. 그리하여 표면은 건축을 감싸 안았다. 돌너와 지붕은 이제 가장 낮은 곳에서 새로운 온천 문화를 지키는 용의 비닐로 부활했다. 장소가 사라진 문화를 애도하고 부활을 마중하듯 표면은 사라진 구축술을 체화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정말 이것이 저것을 죽였을까. 2019년 노트르담 대성당에 화재가 발생해 첨탑과 목조 지붕이 붕괴됐다. 슬퍼했던 이들이 흘렸던 눈물은 관 속에서 시체를 꺼내 안은 기만이었을까. 배우지 못한 자들로의 성서로서 성당은 죽었을지 모르나 영혼은 예술로서 부활해 수백 년간 빛을 내뿜었다. 그러므로 부활은 복제가 아닌 새로운 세상으로의 날개 짓이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님은 육신이 아닌 정신으로 20세기를 넘게 살고 있다. 표면은 부활을 꿈꾼다.
장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도시조경설계연구실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짓기 욕망에 충실하고자 조경을 하고 있다. 이야기와 형태의 합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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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보이지 않는 바람들
누구나 설계 과정에서 바람에 대해 한번쯤 고민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은유적 경관을 위한 소재로, 때로는 미세먼지, 미기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람은 보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예측이 어렵다. 바람의 특성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하지만, 잘 파악한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018년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바람 때문에 난감했던 경험이 있다. 상가 일대에 위치한 면적 120m2의 작은 대상지는 요란한 간판들과 관리되지 않는 녹지와 포장 상태 때문에 편안하게 쉴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중앙에 자리 잡은 느티나무 정자목 앞에는 눈꽃 조형물이 달린 조명 구조물이 계절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주변의 어지러운 풍경을 가리기 위해 눈꽃 조형물을 철거하고 노란색 아크릴 소재의 블라인드 스크린을 달았다. 그런데 이 스크린이 바람이 세질 때마다 심하게 흔들려 대상지가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계속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한번은 자리를 비운 사이 강한 바람으로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다. 대상지를 관찰하며 바람의 세기에 따라 움직임의 정도를 파악하게 됐고, 이를 기록하면서 바람에도 다양한 명칭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골칫거리가 관심거리로 바뀌게 되었다.
바람을 표현하는 매체들
바람은 대기의 흐름이다. 대기의 흐름에 반응하는 매개체만 있다면 바람을 시각화할 수 있다. 그래서 매개체는 바람에 움직일 만큼 충분히 가벼워야 한다. KT 디지코 가든에 설치한 윈드 웨이브에는 3×5cm 알루미늄 소재의 작은 패널이 달려 있다. 패널의 무게는 매우 가벼웠고, 패널 상단에는 패널을 고정하면서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를 설치했다. 3,000개 패널들이 움직이면서 바람의 흐름을 연출하는데, 다이내믹한 경관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패널의 전체 흐름이 느껴질 수 있는 꽤 넓은 면적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설계자의 의도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구조물이라 공사비 예산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초기 제안에서는 필로티 하부의 꽤 넓은 면적을 스크린으로 가리면서 내부에 시크릿가든을 제안했다. 높이 8m, 폭원 30m 정도였는데, 현재 조성된 규모와 비교할 때 4배 정도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결국 공사비 여건을 반영하여 환기구 주변으로 규모를 축소해 설치했다.
또 매개체의 소재가 바람의 세기에 어느 정도 저항성을 가져야 한다. 너무 가볍거나 파손이 쉬운 소재는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 적합지 않다. 2009년 반포한강공원을 조성하면서, 반포대교 교량 하부의 경관을 개선하기 위해 교각을 따라 곡선형 철판을 설치했다. 그런데 한강의 강한 바람으로 인해 철판이 결국 구겨져 못쓰게 됐다. 꽤 두꺼웠다고 생각했는데 한강의 거센 바람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작년 반포한강공원 내 물방울 놀이터를 조성할 때 침수와 바람 부분을 특히 많이 고민했다. 놀이 공간 중심에는 높이 3m의 7개 마법 지팡이(각주 1)가 있는데, 상부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철판에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풍향계처럼 돌아가는 7개 철판은 미스트와 함께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로 연출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었다. 새겨진 글자를 읽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무게가 있는 철판으로 디자인했다. 다행히 작년 겨울철 한강의 강한 바람에도 잘 버텼지만 생각만큼 많은 회전이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어두운 밤에도 바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조명의 빛이 매개체가 되면 가능하다. KT 디지코 가든의 주차장 출입구 상부 하늘정원에는 초지 언덕 풍경의 그라스류를 식재했고, 그 사이사이에 갈대 조명들을 설치했다. 200개의 갈대 조명이 일정한 간격의 그리드 패턴으로 놓여 있어서 멀리서 보면 빛의 표면으로 읽힌다. 갈대 조명 빛의 세기를 조절할 수 있는데, 이를 이용해 바람이 부는 듯한 빛의 물결을 연출했다. 흔들리는 그라스와 함께 빛의 움직임으로 바람을 시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원 설계안에서는 바람을 측정하는 장치를 5개 정도 언덕 주변에 설치해 주변 바람 세기에 따라 조명이 반응해 빛의 세기가 조절되도록 설계했다. 하지만 시공 과정에서 다른 공정 비용 증가로 인해 바람 측정 장치와 시스템 비용이 축소되어 설계안이 변경됐다. 하지만 이 장치와 시스템에 큰 비용이 소요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환경에 반응하는 특별한 야간 경관을 연출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바람이 야기하는 문제들
겨울철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과 도심 내 미기후 조절, 봄철마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나 미세먼지 등 기후 이슈는 도시계획부터 규모가 작은 외부 공간 설계까지 최근 들어 조경가가 빈번히 접하는 문제다. 해결책으로 방풍림, 바람길 숲, 미세먼지 차단숲 등이 자주 언급된다. 새로운 광화문광장의 서측 편에는 그늘을 만들고 미세먼지를 저감하기 위한 다층 구조의 수목을 식재했다. 그런데 한 연구에서 광장의 수목들이 그늘을 만들어 표면 온도를 저감하기는 하지만 바람의 흐름을 막아 광장의 쾌적감을 오히려 떨어뜨린다는 결과가 발표됐다.
쾌적한 이용 환경을 고려해 현재 광장에 식재된 수목의 배치와는 다른 배식이 제안됐다. 이 논문 결과는 서울시와 설계사를 곤혹스럽게 했다. 나 역시 김유진 교수(강릉원주대학교) 연구팀과 광장 이전과 이후의 온도, 습도, 바람을 측정하고 시뮬레이션하며 연구를 진행했고, 결과는 앞선 연구와 달리 수목 식재 공간 및 식재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쾌적감이 전반적으로 좋아지는 결과값이 도출됐다. 그런데 두 연구에서 의미 있게 볼 것은 일부 구간의 조밀하게 식재된 수목에 의해 바람이 정체되면서 시민들이 느끼는 쾌적감이 상대적으로 낮은 구간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 사례로 볼 때 앞으로 도심에 숲들이 생겨나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다.
최근 DL이앤씨가 새만금 간척지에 국립새만금수목원을 짓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일 년 전 기본 및 실시설계를 진행하면서 대상지 중심에 위치한 주제 전시원 수목들의 생육을 고려해 북서풍의 찬바람을 막기 위한 거대한 마운딩과 방풍림을 계획했다. 대상지 북서측에 배치한 높이 11m의 언덕은 시뮬레이션 결과 주제 전시 지역(해양성 기후를 테마로 다양한 수종이 식재된 중심 전시 공간)으로 부는 북서풍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덕분에 수목의 건조와 냉해 피해가 최소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풍림 조성 시에 북사면 세 개의 단을 따라 방풍책을 설치했다. 새만금 지역에서 방풍책의 유무에 따른 방풍림의 성장 속도와 수목 생육 상태를 연구한 내용을 고려해 설계한 것이다. 바람으로 인한 문제를 지형과 숲을 활용해 해결하는 방식은 여전히 가장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체계적이고 근거에 기반한 설계 접근이 필요하고, 좀 더 구체적인 방식이 개발되어야 한다. 우리가 바람과 관련된 환경 문제를 다룰 때 ‘숲’이라는 일반적 해결책만 안이하게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풍백(각주 2)을 꿈꾸며 그린 계획들
모든 공항의 활주로에는 각기 다른 숫자가 새겨져 있다. 이 숫자는 방위각을 나타내는데, 바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하늘로 떠오르는 양력을 얻을 수 있고, 착륙하면서 속도를 줄일 때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 재미난 사실에서 영감 받은 콘셉트로 계획안을 만들어 오성공원 설계공모에 출품했다. 이 공모는 인천공항에 인접한 오성산이 공항 조성으로 인해 잘려나간 부지에 근린공원을 만드는 사업이다. 방위각 33 활주로와 평행한 열린 경관축과 서해와 공항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방위각 01 축이 공원의 골격이 된다. 인천공항의 상징성을 담은 콘셉트와 계획안은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아쉽게 2등을 해 페이퍼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로 남게 됐다.
봄이면 중국으로부터 불어오는 미세먼지로 서울 도심에서 파란 하늘을 보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을 둔 부모들은 외부 활동을 하기에 앞서 미세먼지를 체크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2019년 서울형 저이용 도시공간 혁신 아이디어 공모전에 참여하면서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공원 일대에 더스트캡처(Dust Capture)를 제안해 대상을 받았다. 거미 생태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미세먼지 채집망은 적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클린 타워 기둥들에 의해 지탱된다. 아이디어 공모였기 때문에 현실성보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바람이라는 소재는 외부 공간을 다루는 조경가에게는 피해가기 어려운 설계 요소다. 적은 설계비와 한정된 시간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두고 불필요한 고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또한 불확실한 변수이기에 설계자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조경설계가 완결된 작품을 만들기보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지속하는 시스템과 관계를 만드는 작업이라면, 바람을 상상하는 일은 충분히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각주 정리
1. 여름철 더위를 식혀줄 목적으로 설치된 미스트 폴이다. 놀이 공간 특성을 고려해 마치 한강 설화 같은 이야기를 지어 한강 마법 지팡이로 명명했다
2. 바람을 다스리는 환웅의 신하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를 이끌고, 워커힐 더글라스정원 기본 및 실시설계, 이스탄불 하천 회복 프로젝트, 종로구 통합청사 설계공모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개인 자격으로 즉흥적인 기획, 전시하지 않는 그래픽 작업 등을 즐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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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조경의 웜톤
우리 발밑에는 데크가 많다
동네 뒷산을 오르는 길도 데크, 캠핑장에서 텐트를 치는 바닥판도 데크, 잠시 쉬러 가는 옥상과 테라스에도 데크가 있다. 데크는 우리 발밑에 널려 있다. 항만 분야에서 갑판을 칭하는 용어에서 유래된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실외의 특정한 높이에 만들어진 평평한 판을 뜻하지만, ‘목재’ 데크를 대신하는 말이라 할 정도로 목재 소재의 데크가 대중화됐다. 목재 널판의 연속된 마감이 주는 자연스러운 갈색 결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말이 된 지 오래다. 데크는 때로 수직으로 서 있다. 건물 외벽을 마감하기도 하고, 목재로 된 펜스는 데크가 서 있는 꼴이다. 루버 또한 목재로 된 부재의 연속된 마감이 주는 나뭇결의 질감이 기본이다. 차이점은 띄어진 널판 사이 간격에서 강조되는 평행선의 질서가 세련된 정연함을 강화해주고, 그 벌어진 간극에 드리우는 명과 암의 균형이 깊이감을 부여한다.
따뜻하고 가벼운
비바람과 사계절의 매서움을 견뎌야 하는 외부 공간에 무언가를 만들 때, 목재 면은 조경의 유일한 ‘엉뜨(엉덩이를 따뜻하게 해주는 기능)’ 옵션과도 같다. 열전도율이 낮은 목재는 여름엔 평상처럼 시원하고, 겨울엔 피부를 접촉할 만한 유일한 조경 소재다. 난간 등의 손스침과 벤치의 상판이 목재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부에 닿기 전부터 목재 데크의 온화한 나무색 톤이 시각으로 다가오고 만지면 더욱 편안한 감각을 준다. 데크는 가볍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적으로 무겁지 않다. 옥상에서 데크를 자주 만나는 이유가 비중과 경도가 큰 하드우드가 석재나 콘크리트 등 여타 조경 재료에 비하면 훨씬 가볍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에서 따뜻하고 가벼운 데크는 조경 팔레트에서 웜톤의 큰 축이 된다. 상하이 쇼핑몰 옥상부에 덮어야 할 시설이 있어 중부를 높인 데크 면과 기준면을 잇는 도구이자 편안한 라운지 의자가 되기를 의도했던 옥상 정원의 한 가구는 편안함에 신남이 더해져 미끄럼틀로 더 잘 쓰였다. 가구 단면의 유선형이 한몫했지만, 넓게 드러난 목재 면이 주는 온화한 감각이 기여한 바가 더 컸다.
살짝 비트니 살짝 설렜어
널(판), 장선, 멍에는 데크를 구성하는 구조적 삼요소다. 장선과 멍에를 엮은 데크 하부의 가지처럼 뻗어 있는 격자형 구조를 하지라고도 한다. 최하단에 멍에가 기초 구조를 잡고, 그 위에 장선이 멍에와 직교 방향으로 깔리고, 직교 방향으로 널판이 깔린다. 장선은 널 바로 아래에서 데크 면을 고정시키는데, 널판 표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힌 결합나사못, 소위 피스 자국들은 그 아래 장선의 자취를 드러낸다. 일반적인 데크 면은 하지 구조 질서의 한 방향으로 평행하게 뻗어가는 ‘데크 깔기’라는 방식으로 깔리며, 널판이 펼쳐져야 하는 구조를 최적화하고 비용과 공기를 모두 고려할 때 합리적이다. 데크 길과 같은 좁은 영역에서는 한 방향의 반복과 수평 확장이 문제가 없지만, 넓은 영역에서 단 방향의 반복은 단조로운 공간이 되기 십상이다. 체커보드 패턴이나 헤링본 같은 무늬 배치의 고려도 필요하다. 무한한 반복성을 수평적 확장의 도구로 활용한 장소가 일본 나오시마 예술 섬 베네세 하우스(Benesse House) 앞 수변 데크다. 수평선을 향해 곧게 뻗은 널의 평행선은 데크 면을 해수면과 동등한 위치로 느끼게 한다.
데크 깔기의 각도를 중간에 한두 번만 살짝 비틀어 주거나 서로 다른 두 각도의 시작을 교차시키면 살짝 설레는 지점에 도달한다. 작은 개인 프로젝트에서 널 방향을 지그재그로 비트는 디테일을 제안했다가 데크 기술자에게 노여움을 잔뜩 샀다. 한 번의 작은 회전으로 만족해야 했던 기억도 있던 반면, 적극적인 회전과 조합으로 기대 이상의 감각적 효과를 만든 적도있다. 데크 면의 질서가 만드는 결의 무늬로 조합할 수 있는 패턴과 중첩은 예상 못 할 새로운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최영준은 조경설계를 가르치고 조경 디자인의 성능을 연구하는 교수지만, 정체성의 중심에는 외부 공간을 그리고 만들어가는 조경가가 자리한다. 매년 다시금 찾아가고 싶은 장소를 하나씩 만들어 이웃과 공유하는 기쁨을 위해 설계하고 짓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