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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그래서 노들섬은 어떻게 될까
    글로벌 예술섬. 화려하면서도 모호한 이름을 달고 진행된 노들섬 설계공모의 당선작이 지난 5월 29일 선정됐다. 서울시 보도자료 첫 줄은 당선작 ‘소리 풍경(Soundscape)’을 출품한 디자이너 토머스 헤더윅을 ‘영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묘사한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헤더윅의 당선작은 기존 건축물을 최대한 살려 주변부를 계획했으며 공중부에 다양한 곡선으로 한국의 산 이미지를 형상화한 특별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헤더윅(=다빈치), 곡선, 산, 환상. 이 네 가지 키워드만으로는 사업을 둘러싼 본질적인 의문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무엇을/누구를 위한 글로벌 예술섬인가. 누가 원하는/누구를 위한 랜드마크인가. 가장 안타까운 건 이번 당선작 발표에 사회적 반응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보도자료를 받아쓴 몇몇 짧은 기사 외에는 별다른 해설, 비평, 토론, 반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강 한가운데 유기된 섬에서 유원지와 관광지로, 오페라하우스로, 예술섬으로, 텃밭으로, 예술창작기지로, 다시 글로벌 예술섬으로. 지난 50년간 노들섬에서 주기적으로 들끓었던 도시의 욕망에 이제 모두가 지친 것일까. ‘한강르네상스’나 ‘그레이트 한강’ 같은 슬로건은 이제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기시감과 피로감 때문일까. 한강에 랜드마크‘들’을 만든다며 쏟아내고 있는 서울시의 화려한 구상‘들’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전문가 사회도 조용하다. 요악하자면 무관심이거나 냉소. 노들섬 공모와 당선작에 대한 건축, 조경, 도시계획 분야의 토론이나 비평을 거의 접할 수 없다. 그나마 소셜 미디어에 간혹 올라온 단편적인 반응을 간추려 보면 크게 세 가지 갈래다. 노들섬을 지금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 헤더윅의 설계안이 뉴욕 리틀 아일랜드(본지 2022년 2월호)의 재탕 아니냐는 의구심, 서울시의 랜드마크병에 대한 피로감 호소. 이번 설계공모 출품작들의 게재 여부를 두고 본지 편집부의 의견은 다소 엇갈렸다. 다루지 않는 게 곧 비평이라는 의견과 설계안의 기본 정보라도 제공해야 그나마 추후의 토론을 낳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 후자로 결론 내고 촉박한 마감에 쫓기며 서둘러 지면을 꾸렸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사회적 관심을 모으기 위해 공모전 성과를 적극 홍보해야 할 서울시가 의외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토론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비평 필자를 팔방으로 찾던 중 페이스북에 올라온 건축 전문 번역가 조순익의 글을 발견했다. 급박한 원고 청탁에도 조순익 선생이 흔쾌히 수락해준 덕분에 포스팅 글을 확장한 평문을 지면에 실을 수 있게 됐다. 그의 글은 피로감을 주는 서울시 랜드마크 사업의 의도 자체를 다시 따져 묻는 피로를 행간에 감추고, 오히려 출품작들의 형태에 내재된 의미를 질문하고 탐사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토론의 방향을 제시한다. “헤더윅의 당선작은 서울시의 아이콘주의에 동원된다는 의심을 피해갈 수 없지만, 작품 자체는 단순한 아이콘을 넘어 사회적 자연의 매력을 보여준다”(94쪽)는 그의 관점은, “ ……헤더윅의 안은 자연과의 유비 속에 비교적 자유로운 인공을 녹여낸다. …… 인공이 자연을 모방하는 충동으로 나타난다. …… 이번 공모의 결과는 인간-자연 이분법에 기초한 자연중심주의보다 자연 속에서 공생하려는 인간의 유토피아적 충동, 말하자면 인간의 자유와 자연의 적극적인 어울림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96쪽)라는 의견으로 이어진다.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피드백을 초대한다. 노들섬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영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이미지대로 한강대교 위에 한국의 산을 형상화한 환상적인 경관이 만들어질까. 우리는 그 위를 산책하며 한강의 매력적인 노을을 감상하게 될까. 서울시는 헤더윅 팀과 오는 7월 설계 계약을 체결하고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를 진행한 뒤, 내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해 2025년까지 1차 조성(수변부 팝업 월, 수상 예술 무대, 생태 정원), 2027년까지 2차 조성(공중부=‘한국의 산’, 지상부 보행로와 라이프 가든) 완료를 목표로 사업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간의 반복 경험에 비춰 예상해본다면 수변부 일부를 고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예감. 예감이 아닌 소망인가?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라 독자들에게 피로감을 주겠지만 그래도 한번 더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오래, 계속, 많이 토론해야 한다. 조경가는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정리하고 보관할까. 7월호 특집 ‘조경가의 기록법’에 열 명의 조경가를 초대했다. 소중한 글과 그림으로 기억과 기록의 켤레를 선보여준 조경가 김기천, 김지환, 박승진, 신영재, 안동혁, 이수학, 이홍인, 조용준, 최재혁 그리고 비평가 정평진에게 감사드린다.
  • [풍경감각] 힘을 내요, 보험이
    지난 5월 말 나팔꽃을 심었다. 물에 적신 키친타월에 올려둔 씨앗 세 알은 이틀도 되지 않아 껍질을 채 벗지 못한 머리를 들어 올렸다. SNS 속 친구들의 정원에는 벌써 나팔꽃이 피었던데. 봄 한철인 프리지아와 수선화가 늦게까지 베란다 자리를 비워주지 않아서 여름 꽃 준비가 늦고 말았다. 벌써 반쯤 새싹이 된 씨앗을 보니 놓친 계절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바로 플라스틱 포트로 옮겨주었다. 다시 이틀이 지나자 V자를 그리며(나팔꽃 떡잎은 V자 모양이다) 새싹 두 개가 불쑥 솟아올랐다. 역시 나팔꽃이라서, 그리고 더운 계절이 되어서 빠르구나. 그런데 돋아난 싹이 새잎을 펼치며 자라는 동안 나머지 하나가 감감무소식이었다. 기다리다가, 궁금해하다, 마침내 땅 속을 파헤쳐볼 결심이 섰을 때 막내가 돋아났다. 떡잎 대부분을 잃고 줄기만 남은 모습으로. 뿌리파리의 소행일까. 나팔꽃에는 수선화 화분의 흙을 재활용했는데, 지난 봄 수선화가 뿌리파리를 겪었다는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보드라운 떡잎과 연약한 새 뿌리를 갉으며 얼마나 신났을까. 어쨌든 불상사를 대비해 세 개나 심은 거니까 허름한 녀석은 솎아내고 튼튼한 녀석만 기르면 된다. 식물을 뽑아내는 일은 필요할 때마다 해왔고 어렵지도 않다. 식물에는 사람의 신경계나 뇌와 같은 부분이 없으며, 따라서 통증을 느끼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을 테니까.(각주 1) 그렇지만 올해는 막내를 끝까지 기르기로 했다. 나팔꽃은 잃어버린 떡잎에 아파하지 않는다. 작은 잎 조각으로도 다음을 준비하고 줄기를 뻗을 것이다. 다른 형제보다 느리고 작고 볼품없겠지만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뽑아버리거나 또다시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 나팔꽃 덩굴을 시들게 하는 찬바람은 11월에야 불어온다. 꽃과 열매를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있다고, 막내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다. 나팔꽃에게는 응원도 무의미하겠지만. 참, 막내에게 이름도 붙여주었다. 보험을 들듯 여분으로 심었던 것이니 보험이라 부르기로 했다. 짓궂은가 싶지만 보험이는 모르니까 괜찮다. **각주 정리 1. “식물은 접촉을 느끼지만 통증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리고 동물과 달리 식물의 반응은 주관적이지 않다 …… 식물은 뇌가 없기 때문에 주관적 제약에서 자유롭다.” 대니얼 샤모비츠, 『식물의 감각법』, 도서출판 다른, 2019, p.134
  • [제도가 만든 도시] 도시의 기능
    도시라고 부를 만한 맹아가 나타난 수천 년 전이나,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각주 1)이 도시에 살고 있는 공히 도시의 시대인 현재나, 우리는 도시의 어떤 곳에서는 생산하고 거래하며, 어떤 곳에서는 교류와 유흥을 즐기고, 어떤 곳에서는 쉬면서 사적인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구분되는 서로 다른 활동, 즉 도시의 기능이 도시 내 특정 위치를 점한 모습은 당연히 사회적 결과물이며 임의적이거나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도시 기능의 특정한 공간 배열은 여러 곳에서 유사하게 반복된다.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 앞에는 달달한 냄새를 풍기는 빵집과 사은품을 쌓아둔 핸드폰 가게가 있고, 골목길 어귀 편의점에 꼬맹이와 편맥족(편의점 맥주+족)이 모여드는 저층 주거지의 흔한 풍경이 그런 예다. 도시 스케일에서도 마찬가지다. 구분되는 서로 다른 도시 기능의 배열을 ‘도시 공간 구조’라고 하며, 특정한 패턴이 다수의 도시에서 발견된다.(각주 2) 예를 들어 모든 도시 기능이 옅어지고 있는 구도심, 그에 인접한 기차역·버스터미널 주변으로 병원·상가·재래시장이 모여 있는 상업 지역, 그 밖으로는 1980~1990년대 구도심에서 옮겨온 시청과 금융·세무·법무 사무실 등이 모인 (이제는 오래된) 신시가지의 중심과 그 주변을 둘러싼 아파트 단지, 시가지에서 벗어나 고속도로 나들목 근처에 위치한 산업 단지와 그곳의 젊은 근로자가 사는 원룸촌 등은 한국 많은 지방 중소 도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형적인 도시 기능의 배열이다. 도시에서 특정한 기능의 위치는 다수의 도시 구성원에 의해 긴 시간에 걸쳐 자연스레 결정되기도 하지만, 소수에 의해 매우 의도적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전자의 예로 세계의 오래된 많은 항구 도시는 항만을 바라보는 경사지에 형성된 주거지와 같은 전형적인 도시 경관을 공유한다(그림 2). 사람의 힘으로 바꾸기 어려운 지리·기후적 특성과 특정 도시 기능에 요구되는 사회·공간적 조건을 따르는 집합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후자는 비단 근대 이후 도시계획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세계의 여러 역사 도심에는 그 시대의 관념적 가치와 위정자의 정치적 의도가 투영되어 있고(그림 3), 왕조가 사라진 현대 도시 공간에서도 공간을 매개로 한 정치가여전히 시도된다.(각주 3) 현대 도시계획에서 도시 기능의 위치를 인위적으로 정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물론 공적 이익이다. 산업 단지나 위락 시설로부터 주거와 교육 시설의 환경을 보호하고, 접근성이 높은 지역은 고밀도의 상업 및 업무 시설을 짓도록 하는 등 토지의 ‘합리적 이용’이 그 공적 이익에 해당한다. 공적 이익을 위해 특정 도시 기능이 도시 내 적정 위치에 들어서도록 하기 위한 대표적 제도가 제2종 일반주거지역, 근린상업지역 같은 용도 지역, 즉 조닝(zoning)이다. 한국 국토의 모든 부분은 예외 없이 9개 용도 지역(각주 4)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종류에 따라 어떤 용도의 건물을 지을 수 있는지 혹은 지을 수 없는지, 어떤 규모로 지어야 하는지가 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제 도시 공간의 기능 배열은 용도 지역의 배열과 일치할까? 그림 3. 청의 수도였던 북경(베이징)은 무려 우주의 중심으로서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 우주관을 따라 자금성을 중심에 두고 환이라 불리는 사각형의 위계 구조를 이룬다. 내부는 격자형 블록인 리방(里坊)과 일정한 간격의 내부 도로인 호동(胡同)으로 분할된다. 호동은 사회 통제의 공간 단위이며, 호동에 면한 획지의 너비는 곧 신분과 권력 혹은 부의 가늠자다. 전봉희, 『中國 北京 街家 風景: 2000년 북경 서구렴자호동 현장기록』, 서울:공간, 2003.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2050년경에는 인류의 70%가 도시에서 살 것으로 예상된다. www.worldbank.org 2. 버제스(Burgess), 호이트(Hoyt)를 비롯한 여러 학자는 도시에서 나타나는 CBD와 사회경제적 계층에 따른 주거지 및 소비 공간, 산업 단지, 느슨한 교외 주거지 등이 이루는 특정한 배열을 유형화한 토지 이용 모델(land use model)을 제시했다. 3. 지금은 없어진 여의도광장, 서울 이곳저곳에 추진되고 있는 국가 상징공간이 그 예다. 4. 도시지역 4종(주거, 상업, 공업, 녹지)과 관리지역 3종(보전관리, 생산관리, 계획관리), 농림지역, 자연환경보전지역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 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랩디에이치 하늘을 공경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사람을 섬기는 탁월한 조경 작업
    조경에 대한 진심과 믿음으로 그래도 나름 (조경에) 진심입니다 조경을 한다는 것. 어느 일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아직 조경의 불모지라 불리는 한국에서 조경 그리고 조경 설계를 계속해 나간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일생 전부를 걸 정도의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에 임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조경을 향한 진심을 마음 한편에 품지 않으면 때로는 버티는 것조차 힘에 부칠 때가 있다. 랩디에이치 서울(Lab D+H Seoul)(이하 랩디에이치)은 조경에 진심을 품은 사람들이 모인 디자인 그룹이다. 물론 각자 마음에 품은 진심의 크기와 형태는 제각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상 중에 그리고 프로젝트에 임할 때 틈틈이 같이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가 각자 나름의 모양새로 진심으로 조경을 대하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협력 과정을 통해 조경설계라는 방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동참하고 있다. 진심은 믿음을 동반한다 조경에 진심인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몇 가지 믿음을 바탕으로 프로젝트에 임한다. 조경설계가 환경의 근간을 형성하고 도시의 작동을 돕는 적극적 역할을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조경의 업역이 물리적 공간의 설계와 단순한 구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조경의 사회적·환경적 책무와 문화적 중요성을 믿는다. 조경설계라는 창조적 행위가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오길 바란다. 랩디에이치는 조경에 대한 믿음을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대상지의 고유한 맥락을 고려해 정교하고 결정적인 맞춤형 설계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각 프로젝트는 대체 불가한 독창적인 의미를 가지며, 이용자에게 새로운 공간 경험을 제공하리라 기대한다. 우리가 만든 공간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지역과 사회,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더 나은 생활 환경과 지속가능한 향상된 도시 기능을 제공하기를 바라며 매일 작업에 임한다. 랩디에이치의 랜드그라피(각주 1) 한강에 만든 456개의 앉는 쉼터 2020년 한강변 보행네크워크 설계공모 당선을 시작으로 다양한 성격과 규모의 한강변 프로젝트를 연속으로 진행했다. 일종의 프랜차이즈 시리즈 성격의 ‘한강변 공공 쉼터 만들기’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들 프로젝트는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을 통해 연속된 소규모 대상지 꾸러미에 적절한 창의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한강공원을 이용하는 서울 시민에게 한강의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수많은 접점을 제공해 일상 속 삶의 질을 높이고 나아가 지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외부 공간 기획과 브랜딩으로서의 조경 개업 초창기 진행한 중국 대형 개발 사업은 한국과 달리 프로젝트의 색과 방향성을 정하는 기획 과정이 일반적으로 수반됐다. 그런데 최근 한국 시행사와 진행하는 개발 사업에서도 이러한 기획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외부 공간 브랜딩의 완성도와 개성에 따라 프로젝트의 생명력이 결정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성공 사례의 힘을 함께 목도한 결과로 보인다. 우리도 과업의 기획이 결정된 뒤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설계 전 선행 작업이라 여겨지던 기획 및 브랜딩 과정부터 참여한 적이 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프로젝트들은 이러한 참여 방식을 통해 조경적 관점을 기반으로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요소를 발굴하고 프로젝트의 성격을 규정하는 앞 단계와 준공 후 이용 행태 예측까지를 포괄하는 전체 단계를 조화롭게 아우르려 노력한 결과물들이다. S사 복합상업시설은 새로 만들어질 대형 상업 공간 옥상 조경 프로젝트로 실내 리테일의 보조적 역할로만 규정된 기존 옥상 외부 공간을 하나의 매력적인 목적지로 재설정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고메 포레스트(Gourmet Forest)와 키즈 와일더니스(Kid’s Wilderness)라 명명하고 구성한 두 층의 옥상정원을 실내외와 두 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고유한 장소성과 목적성을 가지는 입체적인 옥상 공간으로 기획 및 디자인했다. 평창 청옥산 지방정원은 만개한 샤스타데이지 군락이 매력적인 평창군 청옥산 정상부 고원 들녘에 새로운 지방정원을 기획·설계하는 프로젝트다. 현재의 고유한 경관의 조건과 매력을 면밀하게 존중하면서 다채로운 매력을 더하는 정원 브랜드와 공간 배치, 프로그램부터 제안했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실시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공공 오픈스페이스의 질은 도시의 품격이다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 그 도시의 품격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팁은 가장 일상적 공간인 공공 오픈스페이스를 방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실현의 완성도가 보장되지 않는 공공 공간을 다룰 때도 세심한 조경설계를 통해 완성도를 높이고 문화적으로 성숙한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도시 속 공공 공간의 인접한 도시 맥락, 주변 경관과의 조화 등 거시적인 부분부터 손스침의 높이, 너비, 각도, 소재 및 마감의 부드러움 정도 등 디테일한 부분에 이르는 모든 사항을 고려하며 디자인한다. 제반 조건과 실익보다는 공공성에 의미를 두고 공공 프로젝트 설계공모 참여나 지자체의 요청 등에 호응해 왔고, 프로젝트에서 공개 공지의 완성도를 본 설계 영역에 못지 않게 신경써왔다. 석남완충녹지 도시바람길 숲 조성사업에서는 완충녹지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도시 바람길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환경적 역할의 숲을 조성했다. 동시에 인접한 구도심의 고질적 문제였던 주차난을 해소하고 지역 주민의 일상 속 필요를 채우는 복합 커뮤니티 장소를 조성해 질 높은 도시 속 공공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이용의 숲을 디자인했다. 성수동 오피스 타워 공개 공지 시리즈는 새로운 공개 공지에 성수동만의 고유한 특별함을 부여하는 프로젝트다. 성수동의 혼란한 변화 속에서 건물 외형의 독창성에만 매달리다 보면 자칫 공공 공간의 질은 뒷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역 주민의 일상을 뒷받침하는 열린 공공 공간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은 건축의 특별함을 배가하는 중요한 무기가 된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각각에 걸맞은 고유한 특별함을 찾아가며 성수동에 위치한 일련의 오피스 타워 공개 공지와 조경 공간의 디자인을 제안했다. 6개월에 한 번은 호미를 들자 현장 연출이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경우, 우리는 가능한 시공 현장을 찾아 도면 위 선들이 현실에 구현되는 과정을 눈으로 지켜본다. 단순히 지켜보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며 현장 상황에 맞게 설계를 조정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식물을 나르고 배열한 뒤 호미를 들고 손에 흙을 잔뜩 묻히며 땅에 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생생한 현장감과 설계안에 대한 반추의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현장과 끊임없이 마주하는 경험.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최저선의 태도다. 포옥 정원은 포천에 위치한 대형 카페의 정원을 만드는 디자인빌드 프로젝트였다. 카페 건물은 간선도로에서 꽤나 내측으로 깊숙이 감춰진 위치에 있었지만, 그만큼 앞산과 지천을 정면으로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좋은 배경이 있었다. 건물 1층의 80% 이상을 필로티 구조로 수평적으로 열어놓았고, 하천변으로는 계단식 테라스를 내렸으며, 중정은 2층 위 옥상층까지 수직적으로 열려 있어 입체적 성격을 띤 여러 정원이 공간에서 주연과 조연 역할을 했다. 공간시공 에이원과 시공에 함께 참여하고 현장 식재를 주관하면서 서로 다른 자연 설정의 정원을 연출하는 경험은 책상 위에서의 설계만큼이나 즐거운 과정이었다. 노태우 대통령 메모리얼 파크는 서쪽 지근거리로 북한 지역이 보이는 파주 동화경모공원 내 위치한 고 노태우 대통령의 묘역이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현장을 방문하여, 현장 사진과 현황 측량도만 계속 들여다보다 자칫 대상지가 위치한 주변의 맥락을 놓치게 되는 경우를 방지하고자 했다. 직접 현장에 가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추모공원의 전경은 아직 진행되지 않은 메모리얼 파크 2단계 설계안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동빙고동 옥상정원은 고급 빌라 개인 정원의 디자인빌드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때론 오래 고민한 도면 위의 배열보다 감각에 의존한 현장에서의 직관적 결정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음을 다시금 느꼈다. 특히 소규모 정원에서 식물을 식재할 경우 직관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수급 불가로 대신 들여 온 식물과 발주서와 너무 다른 크기의 식물을 마주하면 막막함이 앞서지만, 직관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배열하고 심다 보면 이윽고 새로운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된다. 불경기에 표류하는 프로젝트 자재비 인상과 금리 불안정으로 건설 경기가 악화된 지 오래다. 지난 몇 년간 설계한 몇몇 프로젝트도 변화한 건설 시장의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재작년에 설계한 오피스 프로젝트는 투자사의 사정으로 착공에 들어가지 못하고 프로젝트 자체가 대폭 축소되었으며, 작년 말 설계를 마친 또 다른 업무 시설은 공동 투자사의 경영 악화로 착공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공공 프로젝트의 사정도 그리 나은 것은 아니라서 겨우 착공은 들어갔으나 원자재비 급상승 등의 이유로 설계안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시공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남산스퀘어 오피스 대수선 프로젝트는 충무로역(CBD)에 위치한 48년 된 오피스 빌딩을 재구성하는 프로젝트다. 리모델링되는 기존 건물과 수평 증축 신축동 사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아트리움 공간에 두터운 녹색의 실내형 공개 공지를 설계했고, 기존 동 옥상에 명동과 남산을 직접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정원을 제안했다. 착공 직전 프로젝트가 축소되면서 아쉽게도 우리의 제안은 페이퍼 워크로만 남게 됐다. 수송동 도화서길 업무시설 개방형 녹지는 열린송현녹지광장 바로 맞은편 율곡로와 도화서길 가로에 연접하여 서울 중심부 랜드마크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 이곳에 지상층 공공 영역을 확장하는 넓은 폭의 생태적으로 건강한 시민 휴식 공간인 개방형 녹지를 제안했으며, 높은 공공성을 인정받아 작년 8월 서울시 도시건축 창의·혁신디자인 시범사업으로 선정됐다. 하지만 이후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 설계공모 폴더를 백업하며 우리에게 설계공모는 현실에서 꿈꿔오던 흐릿한 상상을 설계안으로 또렷하게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지난 한 공모의 과정을 거치며 또렷해진 설계안은 공모 마감에 맞춰 제출되고 심사를 거친다. 어떤 설계안은 당선되어 물리적 공간에 실체화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대다수는 낙선의 아픔을 겪고, 잠시 세상의 빛을 본 것에 만족한 채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계 공모에 도전한다. 언젠가는 또다시 당선의 영예를 안고 우리의 디자인을 현실 공간에 구현하리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설계공모에 도전을 멈추지 않는 다른 이유도 있다. 공모를 준비하며 벼려지는 디자인 고민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어 우리를 발전시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축적되어 잘 숙성된 고민은 다른 공간을 설계할 때 불쑥불쑥 튀어나올 새로운 아이디어의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대전아트파크 기획디자인 국제지명공모, 얼루비얼 아트 파크, 오픈 스레시홀드(Alluvial Art Park, Open Threshold) 삼면이 도로와 철도로 둘러싸인 한계를 가진 대지의 경계를 ‘다층적 통과’, ‘매개’, ‘중첩하는 면과 공간’으로 설정함으로써 새로운 아트파크와 공원의 외부가 다수의 관계를 맺게 하도록 제안했다. 다양한 연결 전략을 통해 고립된 부지의 조건을 도시에 기여하는 새로운 전이 공간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제시했다. 노들 글로벌 예술섬 조성 국제지명 설계공모, 프롬나드 링(Promenade Ring) 노들섬이 한강공원의 새로운 지구로 작동할 수 있도록 노들섬의 단절된 순환과 고립된 장소, 조각난 섬을 하나의 섬으로 이어주는 프로그램의 순환 고리와 동선 전략을 설정했다. 인공화된 현재 노들섬 하단부의 재자연화를 제안했으며, 다양한 하천 전략과 이를 통한 섬 안팎의 상호 전이를 바탕으로 무수한 경험이 가능하도록 공간 프로그램들을 배치했다. 오목공원 맞춤형 리모델링 지명 설계공모, 둥그런 능선의 재탄생 오목공원의 둥그런 능선을 품은 나지막한 둔덕과 오목한 중앙부 광장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땅의 매무새와 분위기를 담는 공간이다. 이 원형의 능선을 평평하고 굴곡진 고리 형상의 광장으로 재탄생시켜 기존의 다단과 벽 중심 공간에서 무장애의 유려한 땅의 생김새로 조형했다. 말 안장 형상의 쌍곡포물면 광장의 높은 부분은 기존 지형의 높은 지대와 연결되고, 낮은 부분은 공원의 지면과 연결되어 입체적인 보행 경험과 개방감, 위요감을 제공하고 가로 경관에서 공원의 내부로 진출입을 자유롭게 하도록 제안했다. 당진종합체육관 및 반다비국민체육센터 건립사업 설계공모, 다섯 운동장과 여섯 공원 체육센터 외부 공간의 지형적 다양성을 야외 활동의 다채로움으로 승화시켜 하나의 체육공원이 아닌 여섯 개의 특징적 조경 영역인 ‘여섯 공원’으로 구분했다. 개별 공원은 이용 계층 간의 적절한 분리 및 교차를 유도하는 전략으로 두 가지 이상의 야외 활동 프로그램을 혼성시켰으며, 이를 통해 도시 중심에서 이격된 대상지를 방문하는 여러 계층 간의 통합 및 커뮤니티 형성을 촉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양천 목동교 하부 MZ스포츠플라자 조성 설계공모, 커플링 멀티-셰드(Coupling Multi-Sheds) 목동에 거주하는 다양한 세대의 도시·문화적 잠재력과 안양천을 따라 형성되는 자연의 생태적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엮고 연결하는 제안을 했다. 젊은 세대와 다른 세대가 함께 어울리고 동시에 사람과 자연이 어울리도록 다양한 수변 프로그램 공간을 제안했다. 활기와 생기가 넘치는 장소이자 젊은 세대의 새로운 외부 공간 문화를 창출하는 그릇으로 기능하도록 세심하게 매만진 공간 프레임워크를 제시했다. 아웃트로 그래서 이렇게 쭉 간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20년이 늙는다면? 설계사무소를 못하게 된다면? 수많은 멀티버스의 가능성 중 하나를 살짝 들여다보자. 1,400만 605개의 가능성 중 하나. 아마도 그 안에는 조경문화재단 설립을 시작하고 부족한 기부금을 충당하기 위해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스케치를 그리고 광속 라이노 모델링 알바를 하는 파운더 YJ와 그 옆에서 일 좀 적당히 하라며 나무라는 BW, 자신이 모은 5만 권의 책을 돌보며 재단 도서관의 책을 또 주문하고 있는 84년생 사서 JH, 재단 건물 안팎에서 식물을 가꾸고 가든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는 88년생 가드너 BG, 글로벌 답사 프로그램을 짜고 있는 99년생 해설가 JN이 있을 것이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조경의 경계 안에서 느슨한 연대의 형태로 함께 하고 있을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줄인다. 각주 1. 그간 『환경과조경』에 특집 등으로 이미 소개된 프로젝트를 제외한 최근 3~4년간의 근작 위주로 담았다. 랩디에이치(Lab D+H)는 201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설립해 현재 서울과 상하이에 오피스를 두고 있다. 서울 오피스는 동시대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외부 공간 기획 및 리서치부터 실시설계 너머의 시공 및 완공 후 모니터링, 관리 및 운영에 이르기까지 외부 공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 조경적 관점을 바탕으로 외부 공간의 지속적인 생명력을 책임지고 분명한 정체성으로 브랜딩하는 전문가 집단을 지향한다. 인스타그램 @labdh_seoul, 웹 포트폴리오 labdhseoul.kr
  •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알아서 척척척, 신도시 어린이
    에피소드 1. 깨진 무릎 올림픽공원 앞에서 배운 두발 자전거는 일산신도시에서 내 두 발이 되어주었다. 집에서 학원으로 가는 길, 넓게 그려진 그리드가 아닌 하나로 쭉 뻗어나가며 광장과 육교가 사슬처럼 엮여 주요 공간을 잇는 근린 녹지대는 힘차게 굴리는 바퀴 소리와 땅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교차하는, 그리고 어른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어린이들의 공간이었다. 아직은 자전거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상당한 경사의 육교 램프를 타고 내려오는 도전을 즐겼다. 아주 가끔은 미처 정비되지 않아 옛 주택과 노출 콘크리트 시설물이 밀접해 있어 왠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던 일산역 일대도 슬그머니 가보곤 했다. 인터넷이 막 보급되고 있던 때, 바깥 공간이 집보다 즐거웠던 시절, 공원은 어른들의 묵인 아래 ‘위험한 놀이’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실험장이었다. 공원에서 나는 총 세 번에 걸쳐 무릎이 깨졌다. 한 번은 조깅하다가, 두 번은 자전거를 타다가. 그 흔적은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내 오른쪽 다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일산의 대단지와 호수공원 1989년 4월 27일 「동아일보」 1면에 실린 ‘1기 신도시’ 두 군데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부는 최근 폭등하고 있는 서울의 주택가격을 안정시키고 주택공급을 크게 확대하기 위해 경기 성남시 분당동 일대에 5백40만 평 규모, 고양군 일산읍 일대에 4백60만 평 규모의 주택도시 두 곳을 새로 건설, 총 18만 가구의 아파트 및 단독주택을 공급키로 했다. …… 일산 지구는 한수 이북 지역 개발이 그동안 지연돼온 점을 감안, 향후 수도권 개발의 우선순위를 강남에서 강북으로 전환해 수도권 인구를 재배치한다는 정부 의지를 보이기 위해 교육문화 교통시설을 고루 갖춘 한수 이북 지역의 중심도시로 건설키로 했다.”(각주 1) 같은 해 12월 13일 「조선일보」 기사는 “일산신도시 기본계획안을 보면 우선 서울 주변 어느 도시보다 면적에 비해 인구수가 단촐한 반면, 공원 호수 등 녹지 면적이 무척 넓다는 것이 눈에 띈다”며 일산을 “인구 28만 전원도시”로 설명하고 있다.(각주 2) 호수공원뿐 아니라 기타 녹지율에 대한 언급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데, 기존 도시 개발 방식에서 탈피해 산과 공원을 중심으로 한 높은 녹지율을 지닌 자급자족형 신도시라는 점이 일산의 마케팅 포인트가 되지 않았나 싶다.(각주 3) 앞의 기사처럼 일산신도시 개발 사업의 기본 계획은 기존 도시 개발 방식에 비해 매우 높은 녹지율뿐 아니라 녹지의 분산을 제시했다. 주요 생활권은 모두 고층 아파트로 개발됐지만 그 사이에는 공원과 광장이 거미줄처럼 엮어져 녹지 그리드가 형성되었다. 즉 자가용이 없는 사람이라도 비교적 안전하고 편안하게 도시 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당시 서울의 빡빡한 주택난을 피해 일산신도시라는 새로운 주거지로 온 사람들의 결과 면면은 아마도 비슷했을 것이다. 넓은 녹지, 이제 막 새로 커지는 도시에 대한 낭만적 감상을 가진 3040 젊은 부부의 비율이 높지 않았을까. 간접적 증거도 있다. 1990년 24만 명이 조금 넘던 고양시 인구는 5년 후 50만 명을 넘어섰고, 2000년에는 80만 명으로 늘어났다. 10년 만에 3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에 더해 1990년대 초중반에는 고양시 인구의 95% 이상이 유년과 청‧장년층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각주 4)신도시 입주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기였으니, 1990년대 인구 증가의 많은 부분이 일산의 개발과 유관할 것이다. 이곳에 터를 잡았던 ‘신도시 아파트 입주민’들은 새롭게 개발하는 도시가 가진 장단점을 함께 겪으며 어떤 공통된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싶다. 각주 3에 서술한 자급자족에 대한 불만도 있었지만, 일산신도시아파트입주민회가 1998년 창간한 잡지를 보면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다. 1998년 3월 1일 첫 호를 발간하고 9월호까지 출간된 『월간 일산』에 수록된 글을 보면 ‘아파트 관리 기술’부터 ‘신도시의 소비 패턴’ 등 신도시 살이의 장단이 보이는데, 매 호 표지를 호수공원의 모습으로 꾸몄다는 점도 눈에 띈다. 짐작하건대 일산신도시에 대한 공통적인 어떤 이미지란 넓은 호수공원 뒤편으로 깨알처럼 펼쳐진 아파트 단지들이었음이 분명하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분당 성남 일산 고양에 새 도시”, 「동아일보」 1989년 4월 27일, 1면. 2. “일산 인구 28만 전원도시로”, 「조선일보」 1989년 12월 13일, 7면. 3. 물론 그 이후 1990년대 중반에는 자급자족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 불거지며 일산신도시 입주자대표협의회의 주도로 정부와 한국토지공사를 상대로 손해 배상 움직임이 있었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산신도시의 이미지는 베드타운에 가까운데, 이 ‘자급자족 도시’가 계획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4. 윤신희, 김지훈, 이세훈, 『데이터로 본 고양 변천』, 고양시정연구원 데이터센터, 2022.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 [에디토리얼] 가보지 않고 실은 프로젝트 격파하기
    5월호 에디토리얼 원고를 서둘러 쓰고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딱 한 달 뒤 암스테르담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표만 예약한 채 떠난 긴 여행. 두 가지 큰 원칙만 정하고 모든 걸 열어뒀다. 첫 번째 원칙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기. 어느 도시를 다음 행선지로 할지, 내일은 무엇을 할지 미리 정하지 않았다. 두 번째 원칙은 모든 종류의 활자로부터 멀어지기. 여행 중반부에 신문 칼럼 마감이 겹쳐 어쩔 수 없이 노트북을 켰지만, 적어도 책을 한 페이지도 읽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다. 지인의 거처가 있는 베를린에서 예정에 없던 ‘보름 살기’를 하고 다음 도시로 택한 곳은 코펜하겐. 11년 만에 코펜하겐을 다시 방문한 건 『환경과조경』 지면에 담았던 여러 근작을 내 눈과 발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잡지에 해외 신작을 실을 때면 그 작품의 수준이 높고 메시지가 강하더라도 마음이 무겁고 뭔가 개운하지 않다. 책으로 연애를 배운 느낌이랄까. 여행은 작품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채 지면에 편집하는 부담감 혹은 아쉬움을 뒤늦게나마 덜어낼 기회다. 코펜하겐에 도착하자마자 찾아간 곳은 지난해 완공된 ‘오페라 공원’(Cobe 설계). 지난 4월호(432호) 표지에 올렸던 작품이다. 코펜하겐 내항의 탈산업 부지에 만든 이 공원은 왕립 오페라 극장의 정원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도시 중심부에서 낭만적인 자연 경관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뜨거운 햇살 아래 바닷바람 맞으며 공원 구석구석을 걸었다. 교정용 편집본에 빨간색 플러스펜으로 ‘엑설런트 프로젝트’라고 썼던 메모,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다. 오페라 공원에 가기 위해 탄 여객선은 수상 버스 역할을 하는 대중교통 수단이다. 다시 배에 올라 운하 곳곳을 다닐 수 있었는데, 어디서 본 듯 익숙한 다리 옆을 지날 때 내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2016년 2월호(334호) 특집 ‘다리, 연결 그 이상’에 실은 ‘시르켈브로엔(Cirkelbroen)’이었다. 영어로 바꾸면 서클 브리지. 원판 다섯 개를 이어붙인 형태의 이 다리는 아모레퍼시픽 사옥 외부 공간의 설치 조형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작품이다. 코펜하겐의 작지만 강한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시르켈브로엔은 잡지 지면이 담아내지 못하는 기능미와 도시적 매력을 뿜어내며 보행자와 자전거를 불러 모으고 있었다. 배는 곧 ‘시켈슬랑엔(Cykelslangen)’(Dissing+Weitling 설계) 밑을 지났다. 2015년 4월호(324호) 특집 ‘자전거 타고 싶은 도시’와 함께 엮어 실었던 자전거 전용 공중 다리다. 출퇴근시 자전거 이용률을 50%로 높이는 계획의 핵심 프로젝트로 만든 이 다리는 도심과 항구를 도보와 자전거로 연결해준다. 잡지 지면에 넣었던 인상적인 사진들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자전거 탄 풍경’이 뱀 모양 오렌지색 다리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코펜하겐의 자전거는 이미 교통수단 그 이상이다. 『사이클 시크』(북노마드, 2014)의 저자 마카엘 콜빌레-안데르센이 말하듯, 코펜하겐에서는 “치마를 입고 힐을 신고 자전거로 도심을 유유히 누비는 여자, 더블 재킷에 로퍼를 신고 자전거로 출근하는 남자”가 도시의 평범한 풍경이다. 가보지 않고 실은 프로젝트 격파하기(?)는 다음 도시들에서도 계속되었고, 2021년 2월호(394호)에 담았던 로테르담의 ‘보이만스 판뵈닝언 수장고(Depot Boijmans Van Beuningen)’(MVRDV 설계)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이 미술관은 전시장과 수장고 기능을 통합한 파격으로 유명하지만, 대형 거울 화분 형태의 외벽 하나로 온 도시의 풍경을 담아내며 도시의 일상에 즐거움을 선물하고 있었다. 나 같은 여행객뿐 아니라 동네 사람, 미술관 관람객 모두 이곳을 지날 때면 사진을 찍지 않을 도리가 없다. 거울에 비친 도시와 그 속의 자기 발견하기 놀이, 재미있지 않을 수 없다. 편집주간이 한 달이나 자리를 비운 사이, 편집부 식구들은 격동의 5월을 보냈다. 본지가 주관하는 ‘2024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뚝섬한강공원에서 열렸다. 박람회 수상작들을 이번 호 지면에 옮긴다. 6월호의 또 다른 주인공은 도시공원 리노베이션의 새 장을 연 ‘오목공원’이다. “공원은 편하게 앉아 오래 머무르며 품위 있게 쉴 수 있는 도시의 라운지”(박승진, 디자인 스튜디오 loci)라는 설계자의 생각이 어떻게 공간으로 구현되었는지 직접 방문해 눈과 발로 경험해보시길 권한다.
  • [풍경 감각] 늦은 밤, 지하철 4호선 노선도 앞에서
    이번 역은 길음, 길음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길음역이 마음에 들어. 짧아서 불만인 게 많았거든. 봐, 나는 키가 작고, 손가락도 짧아. 근데 이 역에서는 딴청을 부릴 수 있지. 키? 길음. 손가락? 길음. 무엇을 물어도 ‘나는 길음이야’ 한다고. 꽃비 날리는 봄도, 손 살랑 흔들고 돌아서는 가을도. 짧아서 아쉬운 것 모두가 여기서는 길음이야.” “뭐야, 취했어?” “어쩐지 이상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마장역에서는 네가 그냥 ‘마장’하고 맞장구를 쳐줬으면 해. 가능역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까? 방학은 언제나 방학이니 좋겠다. 미아에 가면 경찰서 의자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내가 있을 것 같아. 수유에는 노란 산수유 꽃이 피면 좋겠다. 길동은 고길동과 홍길동 중 누구일까. 고길동은 둘리랑 쌍문동에 살 테니까 역시 홍길동이려나. 그리고 있지, 사당행. 4호선 하행 열차처럼.” “…….”
  • [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 북서부 풍경] 경계에서 벡터로
    ‘도시-지역을 위한 지도책(Atlas For a City-Region)’은 브렉시트 이후 유럽연합EU의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의 북아일랜드 사이 국경 지대의 미래를 상상해보는 프로젝트다. 이 국경 지대는 EU와 영국 사이의 유일한 육상 국경이다.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GSD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Critical Landscapes Design Lab)가 진행한 이 연구는 영국 북아일랜드의 데리(Derry) 시와 스트라반(Strabane) 지방 자치구 의회, 그리고 아일랜드 공화국의 도니골(Donegal) 자치 의회가 공동 후원했다. 이 지도책은 아일랜드 섬의 북서 지방 풍경이 브렉시트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현실로 인해 어떻게 변화할지 상상해본 결과물이다. 하버드 GSD의 조경학과 수업과 국경 양쪽의 현지 조사에 기반을 둔 이 연구는 어떻게 풍경이 초국경지역을 형성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국경은 선이 아닌 풍경이다. 미래는 마을 사이의 연결망이나 조각보 같은 땅의 무늬처럼 풍경을 만들어내는 관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브렉시트의 파급 효과, 기후 변화의 장기적 영향, 그리고 인구 변화는 이 국경 풍경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적절한 계획과 디자인이 절실하다. 미래에 대한 상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도책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일랜드 북서부에 초超국경지역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 지역을 어떻게 지도로 그릴 것인가? 그리고 향후 200년 동안 그 지역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을 세 편의 글로 다루고자 한다. 휴대 가능한 전시로 디자인된 이 지도책은 초국경지역의 증거를 제시하고, 지도로 보여주며, 어떻게 경관이 북서부 지역의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는 데 유용한지 보여준다. 배경 2016년 6월 23일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는 국민 투표를 했을 때부터,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 초국경지역은 브렉시트의 위기와 기회에 직면했다. 영국이 EU 탈퇴를 결정한 이유 중 하나는 국경 통제의 자유였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국경은 영국과 EU 사이의 유일한 육상 국경으로 브렉시트 협상 지연의 원인이었다. 이 국경은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 수립 이후 언제나 아일랜드와 영국 정치에서 논란의 대상이었다. 많은 이가 브렉시트로 인한 영국과 EU 사이의 국경 폐쇄가 과거 트러블 시기(각주 1)로 돌아갈 것을 우려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던 이 시기는 1998년 양 지역 사이의 국경을 개방하기로 한 ‘굿 프라이 데이 협정’으로 끝났다. 분쟁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에 브렉시트 국민 투표에서 북아일랜드 주민의 다수, 특히 북아일랜드 서부 지역 주민은 EU에 잔류하기를 선택했다. 오늘날 국경은 눈에 잘 보이지 않으며 오직 작은 방지턱이나 도로 표면의 질감 변화만이 국경의 존재를 드러낸다. 초국경지역의 주민은 공공 서비스, 식품, 사회 기반 시설, 일상생활, 공간 패턴을 국경을 넘어 공유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풍경은 종종 ‘영국-아일랜드’로, 때로는 ‘천주교-개신교’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 풍경 속에는 영국인, 아일랜드인, 얼스터-스코틀랜드인뿐만 아니라, 바이킹, 노르만, 비잔틴, 그리고 최근 중국, 인도, 파키스탄, 필리핀, 폴란드, 수단, 시리아에서 온 노동자, 학생, 난민의 정체성도 표현되고 있다. 땅의 무늬를 통해서 우리는 다양한 정체성, 토지 이용, 그리고 사람들의 포부와 소망의 기록을 읽고 그 위에 새로운 형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초원의 경계에 자라는 생울타리는 무시하기 쉽다. 그 오래된 덤불과 배수로가 사회적, 경제적 복지와 개발과 딱히 관련 있어 보이진 않을 테니까. 사실 그 생울타리는 아일랜드 시골 풍경에서 가장 중요한 생태적 통로일 뿐만 아니라 토지 재산의 경계를 구분하고 정의하는 중요한 장치다. 얼스터-스코틀랜드 시 정체성의 상징이며 최근 200~300년 사이에 도입된 상대적으로 새로운 풍경 요소다. 초원의 크기와 생울타리 관리 정도는 그 주인의 종교가 무엇인지 시사한다. 필자는 현지에서 정돈된 생울타리는 대체로 기독교인의 것이며 천주교 신자들의 것은 대체로 덜 정돈되어 있다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그 지역의 향후 개발이 무엇이든 그 형태는 바로 생울타리로 정의된 땅 속에 있을 것이다. 한편 아일랜드 공화국의 인구는 증가하고 있으며 더블린이나 코르크, 리머릭, 골웨이 같은 도시들은 이미 포화 상태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 사이 국경 지대에 150만 명이 사는 도시를 제안하는 것은 공상이라 할 수 없다. 현재 700명의 인구가 전부인 킬리아 마을은 북아일랜드의 데리-런던데리 시, 아일랜드 공화국의 레터케니 시 사이의 고지대에 있다. 50년 이내로 킬리아 마을은 지역의 새로운 수도가 될지도 모른다.(각주 2) 브렉시트와 인구 변화로 인한 풍경의 변화도 분명하지만 기후 변화는 더 큰 위협이다. 이 지역은 50년 이내에 강수량이 줄고 지중해성 기후가 될 것이다. 북서부 지방에서 감자 재배는 어려워질 것이고, 대신 오렌지와 감귤류가 새로운 작물이 될 것이다. 기후 변화를 고려했을 때, 새로운 방식의 일과 삶의 형태를 상상해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국경을 선이 아닌 풍경으로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이러한 장기적 과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다.(각주 3) *환경과조경434호(2024년 6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역주. 1960년대 후반부터 1998년까지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의 북아일랜드 간의 분쟁. 북아일랜드가 영국에 남아있기를 바랐던 영국 통합론주의자와 합병을 지지하는 북아일랜드인, 그리고 영국을 떠나 통일 아일랜드 공화국을 바랐던 아일랜드 독립주의자와 공화당원 간의 갈등으로 약 3,500명이 죽었다. 이 중 민간인이 52%였다. Malcolm Sutton, “Sutton Index of Deaths– Status Summary”, Conflict Archive on the Internet,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4 August 2015, Retrieved 31 August 2012. 2. 더 많은 아일랜드 인구 통계는 다음을 참고. www.cso.ie/en/releasesandpublications/ep/p-plfp/populationandlabour forceprojections2017-2051/populationprojectionsresults/ (2020년 4월 1일 접속) 3. Gareth Doherty and Pol Fité Matamoros, “From Line to Landscape: The Irish Northwest Border Region”, Architectural Design 263, pp.100~105. 게럿 도허티(Gareth Doherty)는 하버드 GSD 조경학과 교수이며, 아직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조경의 내러티브와 그 실체를 탐구하고 풀어낸다. 그는 경관 현지 조사(landscape fieldwork)라고 부르는 현장 중심 연구 방법을 통해 복합 경관에서 사람과 환경을 핵심 요소로 다룬다. 본 연재의 번역을 맡은 강준호는 하버드GSD를 졸업한 뒤 도허티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Critical Landscapes Design Lab)에서 연구원으로 일했고, 현재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 게럿 도허티
  • [어제의 대화, 오늘의 재구성] 이지회 예술이 될 수 있는 것들
    전시 개막 행사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처음 봤다. 아는 얼굴도 많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이 보여서 들떴다. 특히 조경의 경계 혹은 바깥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목격했을 때는 더욱. 대부분 정장이나 단정한 느낌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눈길을 끄는 차림새가 있었다. 어둑한 회색빛의 점프 수트, 개성을 담은 패션이라기엔 그 재질과 형태가 기능에 충실해 보였다. 허리춤의 D자형 고리에 장갑이 매달려 있는 걸 포착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 춤에서 짤랑짤랑 흔들리는 무언가의 정체가 궁금해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그래, 원래 끝에 끝까지 작업하기 마련이지. 이번 전시를 위해 조성했다던 정원 작업에 참여한 사람인가?’ 그런데 웬걸 행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연단에 섰다. 이지회 학예연구사였다. 입고 있는 건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을 기념해 만든 ‘정영선 가드닝수트’, 허리춤에 찬 장갑도 굿즈의 일부였다. 내 궁금증을 자극한 허리춤에서 짤랑거리던 것의 정체도 굿즈인 키링이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머릿속에 짙게 남은 단어는 ‘피칭(pitching)’이었다. 조경을 전공한 내게 익숙하지 않은 표현이기도 했고, 이지회의 삶이 그의 표현처럼 피칭의 연속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가치 있는 것을 발굴하고 이를 조명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칭에 매력을 느끼도록 이목을 끄는 것 역시 중요하다. 개막 행사 때의 차림새 역시 그 자리를 찾은 관람객을 설득하는 피칭의 일종이었으리라. 예술은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발견해내는 것이기도 하다. 어제는 뭐했나요? 도록의 영문 교정을 봤어요.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이하 정영선 전) 전시 도록 출고를 위한 막판 작업을 진행 중이거든요. 도록이 출간되는군요. 어떤 형식의 도록인지 살짝 스포일러 해주세요. 단순한 자료집 형태는 아니에요. 전시 기간이 끝나면 그 안의 콘텐츠가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이후에도 많은 연구자와 관련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계속 찾아볼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어 꽤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요. 정영선 선생님이 그간 쓴 글도 모았고, 도록을 위한 대담회를 새로 열었어요. 민현식 건축가(건축사사무소 기오헌), 김종규 건축가(M.A.R.U.), 이진형 조경가(조경설계 서안)가 함께 나눈 대화가 실립니다. 정영선 선생님의 다양한 색과 측면을 볼 수 있도록 구성했어요. 보통은 전시 개최만으로 학예연구사(이하 학예사 또는 큐레이터)의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후작업도 전시 준비만큼이나 중요한 것 같아요. 전시 기획부터 개최까지 어떠한 흐름으로 진행되는지 학예사의 일상이 궁금합니다. 독립큐레이터로 일하던 때에는 비교적 자유로웠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 입사 후에는 기관의 루틴을 따르게 됐어요. 전시 기획은 큐레이터의 발의로부터 시작돼요. 국현의 경우에는 일 년에 네 번 정기 회의를 열어 큐레이터의 전시 프로젝트 발의를 듣고 개최 여부를 검토해요. 정영선 전도 그렇게 시작됐죠. 피크닉에서 열린 ‘정원 만들기’(2021) 전시를 통해 정영선 선생님을 알게 됐는데, 나라면 그를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상상해본 적이 있었거든요. 상상을 구체화한 내용을 발의했죠. 어떤 성격의 전시냐에 따라 준비 방식이 다른데 아무래도 자료를 모으는 게 제일 먼저에요. 자료가 있어야 내용을 어떻게 묶을지 구조를 짤 수 있거든요. 어느 정도 틀이 잡히면 정리된 내용을 바탕으로 서사를 짜죠. 규모와 예산을 조정하고 일정을 계획하고 각종 행정적인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 역시 학예사의 역할이에요. 정영선 선생님이 조경가는 ‘연결사’라고 말했는데, 큐레이터도 비슷한 면이 있어요. 미술관에는 전시 디자인, 작품 보존, 전시 운영, 장비 설치, 교육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있어요. 이 전문가들이 하나의 서사, 완결된 전시 형태를 만들 수 있게 긴밀하게 조율하고 이끄는 게 큐레이터의 역할이에요. ‘정원 만들기’ 전시가 이번 전시의 기획 계기라고 볼 수 있겠어요. 그때 정영선 선생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접하고 있었고, 제가 모르고 있던 것뿐이더라고요.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한국관(2014)에서 뷰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삼성미술관 플라토의 ‘매스스터디스 건축하기 전/후’를 맡아 진행하며 조민석 건축가(매스스터디스) 작품을 다뤘거든요. 그때 매스스터디스 작품 크레딧에서 STL(조경설계 서안 영문 이름의 약자)과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이름을 자주 봤었어요. 건축을 전공했지만 조경은 잘 몰랐기에 ‘이 회사가 조경을 진행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죠. 알고 보니 조경설계 서안이 정영선 선생님이 이끄는 사무소였고, 디자인 스튜디오 loci는 정영선 선생님과 자주 협업하는 박승진 소장님의 조경설계사무소 이름이더라고요. ‘정원 만들기’ 전시를 본 시점이 코로나19 팬데믹을 막 통과하고 있던 2021년이었어요. 정원과 가드닝을 주제로 한 전시가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만약 내가 국현에서 전시를 진행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 수 있을까 가볍게 상상해봤고, 정영선이라는 인물의 일생 자체를 조명할 만하다고 생각했죠. 2013년 이후 국현 서울관은 매년 원로 작가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어요. 대체로 남성 작가를 다뤄왔기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새로운 서사를 발굴할 만한 여성 작가를 적극적으로 찾게 되었어요. 그때 떠오른 게 정영선 선생님이었어요.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많은 프로젝트를 설계했기에 많은 사람에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죠. 코로나19 이후 플랜테리어가 유행하고 있었고 정원을 가까이하는 문화가 일반 대중은 물론 미술 애호가의 일상 깊숙이 들어왔다는 점도 중요 피칭 포인트로 작동했습니다. 이력을 보며 건축 관련 전시를 꽤 많이 진행했기에 배경이 궁금했어요. 건축을 전공했군요. 네. 좀 복잡합니다. 영국 런던의 골드스미스대학교에서 예술 비평을 공부했고,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건축 석사를 받았어요. 건축도 조경도 건조 환경(built environment)이라 부르잖아요. 정영선 전을 기획하면서 얄팍하게 알고 있었고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조경의 언어들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전공 모두를 살린 일을 하고 있는 셈이네요. 갑자기 전공을 바꾸는 게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워낙 다양한 데 관심이 많아요. 어렸을 적부터 예술가를 꿈꿨어요. 예술가가 될 거라는 데 어떤 의심도 없었고, 서울예고를 다니며 서양화를 공부했어요. 2003년 이화여자대학교에 입학했어요. 시대적으로 작은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는 시기였는데 기대했던 것만큼 큰 혁신이 느껴지지 않아 갈급함을 느끼고 있었죠. 그러던 중 『로베르네 집』(장은아, 시공사, 2003)을 읽게 됐어요. 프랑스의 불법 점거 아틀리에에서 살고 있는 예술가의 삶을 그린 책이었는데, 보수적인 집에서 자란 저에게 ‘자유’ 그 자체로 다가왔죠. 어쩌면 그때부터 피칭하는 삶이 시작된 것 같네요. 부모님에게 프랑스로 제가 떠나야 하는 이유를 피칭했거든요. 국제화 시대고 영어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이유로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떠났습니다. 프랑스에 도착한 뒤에는 각종 전시를 보고 갤러리를 찾아다니는 데 빠져 지냈어요. 유럽 사람들이 예술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목격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산업 체계에 감탄했어요. 그 모습을 보니 한국에 절대 돌아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화여대를 자퇴하고 그렇게 골드스미스에 입학하게 됐어요. 그런데 막상 입학해 공부하다 보니 또 다른 문제점이 보이더라고요. 예술품을 부유층이 향유하는 문화로 지탱되는 예술의 산업 구조가 어린 마음에 위선적으로 느껴졌어요. 반면 디자인은 예술 그 자체보다는 솔직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용자라는 명확한 클라이언트가 있는 산업이고, 실질적으로 사람의 삶에 변화를 빠르게 줄 수 있는 분야잖아요. 그렇게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의CCCP(Critical, Curatorial, and Conceptual Practices in Architecture) 프로그램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건축 비평, 출판, 큐레이팅, 전시, 글쓰기 및 리서치를 공부하는 곳인데, 1년에 열 명 남짓한 졸업생을 배출하는 소수 정예의 학과에요. 제가 세 번째 졸업생이죠.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바꾸게 된 이유가 있나요. 2015년 즈음 한국에서 예술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모습을 확인했어요. 해외에는 공공 펀드가 드물어요. 그래서 큐레이터의 업무 중 하나가 전시 자금을 확보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당시 한국에서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공공 사업이 많이 열렸고, 오히려 외국 작가들이 이를 쫓아 한국으로 들어가고 있었어요. 그걸 보고 “이제 아시아에 미래가 있다!” 하면서 돌아온 거죠(웃음). 정영선 전을 빼곡하게 채운 수많은 자료에 놀랐어요. 잡지를 편집하다 보면 생각보다 도면, 사진 등 자료를 모으는 데 애를 먹을 때가 많거든요. 자료 수집 과정이 궁금해졌습니다. 쉽진 않았어요. 모든 전시는 자료에서 시작돼요. 결과적으로는 전시는 관람객에게 볼 것을 제공해야 하고, 말뿐인 전시는 증거가 없는 허황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어요. 정영선 선생님이 활동해온 역사가 워낙 길다보니 2000년 이전의 자료는 아날로그 형태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본격적인 자료 수집을 위해 서안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 지하실에서 살았어요. 자료 정리가 안 된 상태는 아니었는데, 프로젝트 별로 하나의 박스에 모든 자료가 담겨 있는 상황이었어요. 물난리가 몇 번 난 터라 자료에 곰팡이가 핀 경우도 많았고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싸우며 모든 자료를 한 장 한 장 다 펼쳐보고, 그 자료를 목록화해 엑셀 마스터 시트로 만들었죠. 업데이트를 끊임없이 계속했는데, 탭의 수만 해도 어마 어마했어요. 시트를 완성한 후에야 가치가 있다고 확신이 드는 자료를 추리는 단계에 들어갔죠. 다양한 지역의 프로젝트를 다룰 수 있도록 안배하고 공공적 성격과 상업적 성격의 프로젝트의 균형을 맞추는 데도 집중했어요. 특히 우리가 방문할 수 없는 사적인 공간을 다룰 경우, 충분히 예술성이 있는 장소인지를 끊임없이 검토했어요. 자료의 질 역시 중요한 고려사항이었습니다. 이 작업을 반복하며 프로젝트 목록을 계속 업데이트했고, 80개 정도의 프로젝트를 추릴 수 있었습니다. 골라낸 프로젝트에 서사를 부여해 묶기 시작하니 또 구멍들이 생기더라고요. 빈 곳을 메우는 작업에 돌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약 80개 기관에 공문을 보냈어요. 정영선 선생님과 협업한 모든 건축사무소에도 협조를 구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할 수 없는 자료가 있어 아쉽기도 했어요. 어떤 프로젝트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사진가에게 다른 프로젝트의 사진을 갖고 있는지 묻는 등 알음알음 모은 자료가 많습니다.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연대기적 서사를 지양하고 작업의 주제와 성격에 따라 일곱 가지 묶음을 구성했어요. 이러한 방식이 “정영선이 강조하는 ‘지사地史적 맥락’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설명이 인상 깊었습니다. 2023년 12월 초에 모은 자료와 대략적으로 그린 전시 기획을 바탕으로 조경 분야의 전문가를 모시고 라운드테이블 형식의 자문 회의를 열었었어요. 조경을 전공하지도 않았거니와 조경이라는 분야를 국현에서 처음 다루다 보니 염려되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건축을 전공하고 시각예술을 다루는 큐레이터의 입장에서 바라본 조경이 실제 조경가가 생각하는 조경과 괴리가 있으면 안 되니 일찍 매를 맞자라는 마음가짐이었죠. 사실 전시 기획 초기 단계에서는 이런 전시 구성이 좋은 호응을 얻진 못했어요. 저는 비슷한 주제와 성격의 프로젝트가 응집되어 그 특징과 서사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시간 순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정영선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인생과 맞물려 흘러가는 작품의 서사가 있었던 거죠. 큐레이터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전시가 조명하려는 인물 그 자체잖아요. 그래서 어떤 구성이 더 맞는지 거듭 검토했죠. 효과적인 피칭 방식을 고민하기도 했어요. “정영선 선생님은 아날로그 형태의 자료에 더 익숙하니 전시를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물리적 자료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한 분의 조언이 도움이 됐죠. 그동안은 미술관도 ESG 운영을 강조하다 보니 디지털 자료로 전시 기획 설명을 해드리곤 했거든요. 정영선 선생님을 위해 전시 소주제를 담은 글을 크게 인쇄해서 뽑아갔어요. 가장 큰 효과를 낸 건 모형이었어요. 전시 공간의 10분의 1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보여드렸죠. 모형을 만들어 보니 조각들의 모음으로 느껴졌던 전시가 한눈에 읽히더라고요. 정영선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날 피칭이 끝난 후 전화를 주셨어요. 고마운 사람이라며 그간 오해해서 미안하고 내 인생을 이렇게 잘 이야기해주는 전시가 없다는 말씀을 전하셨죠.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는 일이 쉽지 않는데 마음이 일렁이더라고요. 보통 개인전을 진행하다 보면 작가분과 일종의 애증(?)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데, 정영선 선생님에게는 존경심만 남았습니다. 정영선 선생님은 “조경은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 삼는 종합과학예술”이라고 정의했어요. 과학과 예술의 접목만으로도 복잡한데 이를 통해 생명을 이야기해야 하다니 늘 설명하기 어려운 학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칫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본래의 뜻이 흐려질 수 있고요. 그만큼 전시의 방향을 잡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국현 내부에서도 왜 조경을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어요. 현대미술이 다양한 장르를 아우를 수 있는 건 ‘개념’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잘 그린 기술적인 그림을 찬양하던 시대에서 마르셀 뒤샹의 등장을 기점으로 작품에 담긴 생각을 중요시하게 됐잖아요.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게 현대미술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조경도 다른 시각예술 장르처럼 자신의 의도를 실제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로 다룰 수 있다고 판단했어요. 과학, 예술, 생명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기보다 조경 작품에 담긴 의도를 잘 보여주는 방향을 택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요. 예술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생각의 외연을 확장하게 만드는 겁니다. 조경은 클라이언트가 있는 디자인 서비스지만, 저자성을 갖고 사람들과 충분한 소통을 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우리의 삶과 굉장히 밀접해 사람들의 삶을 굉장히 많이 바꾸고 있어요. 정영선 선생님의 광화문광장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이 그곳에 모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광화문광장은 보행로와 도로의 높이를 거의 비슷하게 만들면서 ‘비움의 미’를 담았어요. 어찌 보면 간결한 디자인 언어인데 그 여파가 대단하고요. 전시 기획 역시 일종의 공간 설계가 아닌가 싶어요. 조경의 정의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결국 그 결과물은 장소로 드러나죠. ‘공간’이 아닌 ‘장소’이기에 도면이나 사진, 작게 축소한 모형만으로는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어요.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나요. 건축 전시를 진행하며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질문이네요. 건축 전시라는 게 실제 건축은 다른 장소에 있지만 그것을 전시장에 재현하는 일이죠. 그래서 재현이라는 행위 자체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실제 건축을 경험하는 것과는 무엇이 달라야 하는지 늘 고민합니다. 전시 행위 자체도 건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다른 예술 분야처럼 건축의 핵심도 결국 아이디어에 있으니, 이 아이디어를 전시라는 매체로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골몰합니다. 조경 전시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여러 프로젝트의 이미지, 텍스트, 기술적인 드로잉을 모은 묶음들이 실제 공간을 경험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조경가의 의도와 생각을 보여줄 수도 있는 거죠. 방지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바닥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서안 사무소에서 가져온 자료를 추리기 위해 미술관 수장고 바닥에 쫙 깔아놓은 적이 있어요. 그 양이 워낙 방대하니 정말 넓게 펼쳐져 있었거든요. 그 장면을 본 전시 공간 디자인을 맡은 김용주 기획관이 “이 자체가 전시다”라 말한 게 바닥장 아이디어의 출발이었어요. 정영선 선생님이 조경을 시작할 때 땅을 읽는 행위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떠올랐죠. 전시물을 바닥에 놓는다면, 풀 한 포기를 직접 심고 몸을 수그리며 땅을 겸손하게 대하는 태도를 관람객에게서도 이끌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닥장을 사용하고자 한 전시 디자이너의 안은 협소한 전시 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묘책이었어요. 자료를 충분히 담을 수 있고 육안으로 자료를 확인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바닥장의 크기와 깊이를 조정한 것으로 압니다. 보행로와 휠체어 사용자의 동선, 바닥에 앉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위한 테이블장의 위치 등을 고려해 바닥장을 설치한 거죠. 정영선 선생님이 아모레퍼시픽 사옥에서 활용한 방지를 보면서 전통 정원에서 가져온 요소를 이토록 현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구나 생각했는데, 화이트 큐브인 이 전시장에도 방지를 닮은 바닥장이 참 잘 어울리더라고요. 긍정적인 반응만 있던 건 아니었어요. 자료를 발로 밟는다는 사실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정영선 선생님의 작업 특징은 자연주의 정원인데 그리드 형태의 바닥장이 딱딱하게 느껴진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의견을 일부 수용해 본래 같은 크기로 계획했던 식물 사진들을 이용해 변주를 주었어요. 벽면에 크기가 각기 다른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그리드의 경직성이 누그러지는 효과가 나더라고요. ‘워치 앤 칠’ 시리즈를 흥미롭게 봤어요. 세계 최초 구독형 아트 스트리밍 플랫폼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미디어 매체의 변화가 전시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미래의 미술관과 전시는 어떤 형태로 바뀌어나갈 거라고 생각하나요. 어쩌면 공간을 체험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VR일 텐데 이번 전시에서 쓰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어떤 매체를 사용하느냐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뤄야 하는 작업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식이 VR이라면 쓰지 않을 필요가 없겠죠. 아직까지는 VR에 대한 확신도, 어떤 판단도 없는 상태에요. VR 자체가 워낙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요. ‘워치 앤 칠’은 국현의 소장품 위주로 구성한 전시였고, 목적이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교류가 소원해진 상황을 타파할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기존에 VR 작품이 있어 전시를 해두었고, 모든 사람이 VR 기기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 휴대폰처럼 좀 더 접근성이 좋은 매체를 이용해 플랫폼을 사용할 수 있게 했죠. 사실 저는 온라인 플랫폼 자체도 건축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요. 디지털 공간을 인포메이션 아키텍처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온라인 플랫폼은 여러 정보가 오가고, 사람들이 교류를 하는 장소이며, 상호 작용이 오가는 경험이 이루어진다는 점도 건축과 닮았어요. 누군가는 제 발자취를 보면 여러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전시, 건축, 조경이 하나의 맥락에 놓여 있다고 느낍니다. 전시의 일환으로 전시마당과 종친부마당에 정원을 조성했죠. 정원과 조경을 동의어로 읽을 수 없기에 했던 고민이 있을 것 같아요. 국현 서울관에서 하는 원로 작가 개인전에서는 항상 커미션 작업을 선보여요. 동시대적 이슈를 담은 새로운 작업을 부탁하곤 하죠. 작년 말에 진행한 자문 라운드 테이블에서 한 조경가가 의미 있는 의견을 던졌어요. 정영선 전이 할머니 전시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였죠. 정영선 선생님은 미래지향적인 사람이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동시대적 이슈를 조경으로 말해왔거든요. 그래서 이를테면 MZ세대 관람객들이 와서 작품을 보다가 알고 보니 할머니의 작업이었네 하고 놀라기를 바랐습니다. 전시 첫 번째 파트 제목이 ‘지속가능한 역사 쓰기’인데 일부러 고집한 이름이에요. 지속가능하다는 말이 우리 세대에게는 익숙한 언어지만, 생각보다 20세기를 살아온 세대에겐 낯선 표현일 수 있죠. 그렇지만 이 파트가 반드시 첫 번째 순서가 되기를 바랐어요. 정영선 선생님 세대와 미래 세대를 잇는 교각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정원도 일종의 연결 다리에요. 실제 다른 장소에 있는 정영선 선생님의 조경 작품과 전시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전시장에서 본 정영선 선생님의 아이디어, 구상, 청사진을 비롯한 여러 기록과 실제 정원 사이에서 유기적 작용이 일어날 거라 기대했어요. 전시장을 둘러보기 전 만났던 정원과 전시를 둘러보고 만난 정원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 게 분명하거든요. 그래서 다른 장소는 몰라도 전시마당에는 꼭 정영선 선생님의 새 정원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또 ‘정원의 재발견’이라는 파트를 꽤 고심해서 구성했습니다. 정영선 선생님의 많은 작품 중 희원이 큰 분기점이에요. 이전에는 대부분 국가주도 사업을 통해 도시 경관을 만들며 땅의 맥락을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면, 희원은 전통 정원의 요소를 마음껏 실험해본 정영선 선생님의 숙원 사업이었죠. 희원을 필두로 정원이 조경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을 한 게 아닌가 싶어요. 전시마당이 워낙 음지라 잔디를 심어도 자꾸 죽었는데, 이제 늘 푸릇푸릇할 것 같아 기대가 돼요. 전시마당의 정원이 전시와 상호 작용을 하는 곳이라면, 종친부마당 정원은 그 장소 자체가 가진 의미가 많은 공간이에요. 넓은 잔디밭 너머로는 인왕산의 풍경이, 종친부, 옛 기무사, 현대건축물까지 여러 시간성이 교차하죠. 인근 도서관에서 이곳이 내려다보이기도 하고요. 어떤 요구도 없이 정영선 선생님에게 완벽하게 맡겼는데, 차경, 땅의 맥락의 연결, 자생종 등 전시에서 정영선 선생님이 한 이야기가 그대로 담긴 채 눈앞에 구현되어 있었죠. 아카이브 형태의 전시뿐 아니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되어 굉장히 뿌듯합니다. 건축을 화이트 큐브 안으로 옮겨오는 것과 조경을 화이트 큐브 안으로 옮겨오는 작업에 차이가 있던가요. 차이점을 이야기하려면 좀 더 조경 전시를 많이 진행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저는 건축 도면을 보는 데 굉장히 익숙한 사람인데, 이번 전시를 통해 도면 바깥을 살피는 시각을 열게 됐어요. 제주 오설록 이니스프리의 경우, 이전에는 건물 하나하나의 요소를 봤었는데 정영선 전을 진행하면서는 전체 부지, 건물과 녹차밭의 관계, 길과의 연결성을 보게 되더라고요. 조경 도면이나 드로잉이 지닌 미술 콘텐츠로서의 가치는 어떤지 알고 싶어요. 식생의 기호가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조경가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도면들인데, 저는 참 예쁘게 느껴서 전시장에서 이 도면들을 꼭 넘겨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기술적인 도면에서도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청사진들은 풍경화처럼 보였어요. 휘닉스파크 도면이 기억나는데, 트레이싱지에 색색의 파스텔로 그린 도면들이 겹겹이 쌓이며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미술 작품으로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진 걸로 보였습니다. 설계 개념을 보여주기 위해 크레파스로 거칠게 그린 두내원 스케치는 그저 예술 작품 같았어요. 스스로 정의하는 학예연구사라는 직업이 궁금합니다. 자신만의 큐레이팅 방식, 추구하는 정체성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큰 방향성이나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 같진 않아요.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고 어떤 기회를 만날 때 최상의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고민을 깊게 하는 편입니다. 국현에서 일한 지 8년째에 접어들었는데, 기관이 해야 하는 일이 분명히 있고 가져야 하는 무게감이 있다는 걸 깨닫고 있어요. “이 시점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지는 편이에요. 또 협업에 대해 열린 마음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워낙 여러 사람과 함께 일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여러 전문가가 서로 연결되어 각 전문 분야가 오롯이 잘 드러날 때 전시가 가장 빛을 낸다고 생각해요. 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 혼자의 생각에 고립되지 않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고 거듭 테스트하려고 노력해요. 관객이라는 새로운 타자에게 울림을 주려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확보해야 하니 그 객관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추구한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워치 앤 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9개 도시의 큐레이터와 협업을 했었어요. 그때 논의했던 게 탈중앙화 전시 기획 방식이었습니다. 저자권(authorship)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유연하게 연결하면 그 시너지 효과가 어마어마해요. 더 나이가 들더라도 고집부리지 않고 여러 소리에 귀 기울이는 기획자가 되고 싶어요. 전시를 기획하면서 참고한 책이나 자료 등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정영선이 궁금한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자료로 소개해주세요. 우선 정영선 전 전시 도록을 소개해드리고 싶네요(웃음). 도록에 ‘더 읽을 거리’라는 파트를 만들어 전시를 준비하며 참고했던 모든 텍스트 목록을 다 정리해놓았습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수면 아래에 있던 서사를 끌어내 오늘날의 시점으로 다시 썼다고 볼 수 있거든요. 또 무작위로 흩어져 있던 자료를 하나로 모으기도 했고요. 전시가 끝났다고 이것들이 다시 물 아래로 가라앉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전시는 시작일 뿐이고 이후에 더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해요. 이 도록이 다양한 후발 연구의 플랫폼이 되기를 바랍니다. 코넬리아 오벌랜더Cornelia Oberlander라는 캐나다 조경가가 있는데, 놀이터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캐나다의 모던 아키텍처와 함께 성장했고, 많은 공공 프로젝트를 진행했죠. 정영선 선생님보다 연세는 많지만 여성이라는 점도 그렇고 비슷한 점이 좀 보였어요. 그의 작품 중 놀이터에 주목한 책인 『Cornelia Hahn Oberlander on Pedagogical Playgrounds』(Concordia University Press, 2023)를 도록 제작 과정에서 참고하기도 했어요. 이지회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연구사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2024),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 ‘워치 앤 칠’과 연계 국제 순회전(2021~2023) 등을 기획했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새로운 유라시아 프로젝트’(2015~2017) 큐레이터, 2014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한국관의 부큐레이터로 활동했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HLD 디자인을 통한 주창과 혁신
    사상 공유 구역 HLD 조경이란 안녕하세요. 사상 공유 구역 HLD는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열네 명의 사람이 모여서 벌이는 사회 실험이자 본격 조경 서바이벌입니다. 『환경과조경』 원고 마감 4일 전, 참가자 전원은 조경과 관련된 사전 테스트에 참여했습니다. · 조경설계의 꽃은 식재 설계다. · 사회에서 조경가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심각한 문제다. ·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된다면 조금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도 수주해야 한다. · 공원 BF 인증 의무화는 이동 약자를 위한 당연한 조치이므로 지금보다 더 철저하게 해야 한다. · 번아웃을 호소하는 사람은 사실 엄살인 경우가 많다. (등 총 72문항) 테스트는 네 개 차원에 대한 참가자의 점수를 측정하며 각각 역할, 관점, 재능, 변화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테스트 뒤 익명 채팅을 통해 선택만으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을 좀 더 들어보았습니다. 역할: 넓파 vs. 깊파 ‘역할’ 차원은 조경이라는 분야의 역할에 대한 범위를 측정합니다. ‘조경가는 식물 전문가’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계획적, 도시적 역할의 넓은 조경을 지향할수록 ‘넓파’, 자연과 인간을 매개하는 공간으로서 조경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정원 중심의 깊은 조경을 지향할수록 ‘깊파’로 분류됩니다. “학교에서 넓게 배웠는데 나와 보니 좁다.” “제가 ‘조경가’로 불리는 게 맞나 싶고, 마찬가지로 HLD가 정확히 조경 회사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조경가가 식물을 몰라도 되는 건 아니지만 식물 전문가 취급 받는 것에 경계심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사실 식물이나 생태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도 문제에요. 정원이나 생태를 다루는 분들이 자주 지적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음……. 나는 넓고 깊다.” 관점: 과학파 vs. 예술파 ‘관점’ 차원은 조경이 하는 일의 성격에 대한 전반적 태도를 측정합니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에 따른 산물이라고 생각할수록 ‘과학파’,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수록 ‘예술파’로 분류됩니다. “조경이 예술에 가깝다고 느끼는 이유: 디자인할 때는 철저하게 계산하고 많은 숫자에 기초해서 만들지만 결과물은 유기적인 예술품 같아서.” “순수 예술과는 분명히 다른 면이 있지만 그래도 어느 쪽이냐 하면 표현이 차지하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설계했는가를 항상 논리적으로 답할 수 있지 않음.” “실시도면을 그릴 때 1mm 단위까지 신경 쓰는 거 보면 인공 위성 만드는 과학자나 공학자 같은데, 비율이나 비례,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엄청 신경 쓰는 거 보면 예술가 같음. 조형미나 비례는 감이나 느낌에 의지할 때도 있기 때문.”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이라고 하면 좀 더 말이 될 것 같아요.” “못생긴 게 싫긴 함.” “예술은 메시지를 던지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고, 과학은 설정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목적을 둔다는 점이 차이라고 봐요. 특히 공공 프로젝트인 경우 과학적 설계안이 설득력 있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더 다양한 유형의 ‘예술적’ 공공 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A 플랜이 좋은 공간이 좋은 건가, 공간이 결과적으로 좋아야 하는 건가 이야기해보고 싶다. B 오호. B 대치유수지 공원 생각나요. C 교수님이 플랜이 좋은 공간이 실제로도 좋은 공간이라고 가르쳐주셨어요. 그땐 그렇구나 했는데,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다 생각해요. D 스마트폰을 만들 때 논리를 아주 무시하고 설계할 수 없듯이 결국 사람이 쓰는 것이라면 인체 자체나 감각적인 부분을 뒷받침해주는 논리가 필요하다는 부분에서 온전히 한쪽만으로는 설명 불가하다고 봅니다. B 유수지 가면 늘 진짜 좋은데 플랜만 봤다면 꽤 유치해보일 수도 있겠다는 얘기가 돌았었음. D 이걸 답하려면 좋은 공간의 정의부터 나와야 해요. A 좋은 공간이란? C 공간을 채운 요소의 퀄리티가 좋아서, 아님 단순히 공간의 분위기가 좋아서, 좋은 공간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는 듯해요. C 좋은 (외부) 공간의 경우 다시 오고 싶고, 다른 계절이나 환경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싶은가로 가늠하기도 합니다. E 좋은 공간은 아주 많은 것에 관여를 받죠. 적당한 사람, 좋은 날씨와 빛 그림자 등. 좋은 공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건 아주 지극히 개인적일 거라 생각이 듭니다만. 조경설계를 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공간은 바로! B 바로 바로! E 어떻게 생긴 그릇이냐인데. 도시냐 시골이냐 자연 옆이냐 건물 주변이냐에 따라 아주 다양한 의견이 나오겠지만, 큰 틀에서 봤을 때요. I 플랜이 좋은 것은, 공간이 평면상에서 이해하기 쉽다? 아니면 설계자의 독특한 개성이 있다? E 짜임새 있는 공간 구조. 즉 평면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D 근데 좋은 공간이라는 게 엄청 불편하고 식재 하나 없어도 메모리얼처럼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공간인 걸 인지하고, 그걸 잘하면 좋은 공간이 되기도 하잖아요? E 공간을 설계할 때 몇 명이 이용하느냐 누가 이용하느냐 어떤 문화적 주제가 필요하냐 등 다양한 조건에 부합해야 하는데, 그것을 3D 기반으로 설계하기는 어렵죠. 설계는 평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D 그래서 물리적 공간 요소랑 플랜으로 대응되는 공간 주제 전 달력은 필수불가분이죠. E 본질이 평면이기에 평면이 좋아야 모든 설계는 납득이 됩니다. F 좋은 플랜이라고 꼭 공간이 좋진 않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반대로 좋은 공간은 플랜도 어느 정도 좋을 거라는 생각. D 본질이 평면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ㅋㅋㅋ A 저는 단순하게 물이 흐르는데 옆에 수초도 있고 나무도 있고 그늘도 있는데 오리도 있고 이런 곳이 너무 좋다 이러고 있었음 → 생태적으로 나름 건강한 곳. F 공간이 좋다는 건, 조성된 목적의 제 기능을 하는 것? 외부 공간에 집중해서 말하는 거라면 아무래도 외부라는 강점을 잘 살려서 계절, 날씨, 시간대에 따라 갈 때마다 변화하는 곳이 매력적인 거 같아요. G 좋은 (설계된) 공간이란 자연환경을 포함한 대상지의 특성이나 환경을 풍부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인 거 같아요. A 대상지의 역사 같은 것을 잘 살리면 좋은 설계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고유한 것은 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토리를 좋아해서? B 재미있는 주제. D 저는 설계자가 준 기능보다 경험하는 사람이 무슨 이유가 되었건 직관적으로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있는 공간이 좋은 공간인 것 같아요. C 공간 조성의 목적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단순함이 미덕인 공간이라면 목적을 달성했느냐에 따라 좋은 공간으로 인식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A 어린이 놀이터에서는 특히 더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D 조경이 본래 땅을 제외하곤 이야기할 수 없는데,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전 사람들이 이 땅을 어떻게 썼는지 또는 바라봤는지에 대한 축적된 고민을 학습할 수 있어서 정도인 것 같은데요. B 역사 길 만들기, 남아 있지 않은 역사를 물리적으로 억지로 이어붙이는 작업 같아 공간 경험자에게는 그다지 감흥이 없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어요. C 표현의 영역이라고 답한 것에 연장이긴 한데 부지의 히스토리는 표현의 모티브, 인스퍼레이션으로 기댈 수 있는 것 중 하나라고 봐요. A 옛것이 있을 때 뭔가 시간이 더 깊게 느껴져서 잠시 흥미로운 점은 있는 것 같아요. 너무 다 새것으로만 만들었을 때보다 뭔가 더 여러 가지를 상상하게 된달까? 재능: 타고난 자 vs. 노력파 ‘재능’ 차원은 설계/계획에 대한 교육 및 타고난 능력을 측정합니다. 타고난 감각이 있거나 어린 시절부터 설계적으로 보고 배울 것이 풍부한 환경에서 자란 경우 ‘타고난 자’, 후천적인 노력이 좀 더 중요했던 경우 ‘노력파’로 분류됩니다. A HLD는 내가 아는 다른 설계사와 어떤 점이 다른지? C 집요함? H intensive work hours B 술을 강권(?)하지 않는다는 것이 단순하지만 여러 측면을 보여주는 듯. A 오 요새 술 강권하는 회사도 있나요? I 분업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 like… 실시/계획 팀 나누기 / CG 하는 사람은 CG 특화시키기 / 캐드의 신 만들기 이런 것. A 분업화 원해요? I 저는 다양성과 밸런스를 추구합니다. C 미 투. 이건 확실히 효율적이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팀원 개개인에게 좋은 방향은 아닌듯 합니다. 스페셜티 영역을 가진 제너럴리스트. I 조용하다? I 똑똑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에 5점 주신 분은 얼마나 자주 듣는지 궁금해요. H 자기 자신한테 똑똑하다고 칭찬해주는 것도 포함!?? I 매일 아침 나는 똑똑하다 삼창하면 인정. H 나 오늘 참 잘했어~ 변화: 개혁파 vs. 보수파 ‘변화’ 차원은 설계 일반의 관습에 대한 태도를 측정합니다. 지금 당장 달라져야 한다에 동의할수록 ‘개혁파’,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수록 ‘보수파’로 분류됩니다. “BF 인증, 좀 더 공부해보고 싶은 영역입니다. 장애학을 공부하는 건축가와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인증제 때문에 힘들다 하면서도, 별개로 장애 당사자의 경험을 공간 설계자로서 얼마나 공부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도 하더라고요.” “BF 인증 기준 만들 때 설계자들이 손 놓고 있었다는 건 맞는 말인 듯. 반성할 부분이 분명 있어요.” “지금의 프로젝트 입찰 방식은 실력 있는 조경가를 선정하는 데 문제가 많다. 어떻게 바꿔야하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 설문과 익명 채팅 등의 형식은 웨이브(wavve) 오리지널 예능 프로그램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를 참고했다. 유 노 HLD HLD 회사 이름의 시작은 이호영, 이해인의 영문 이니셜에서 따왔다. SWA의 S가 히데오 사사키Hideo Sasaki이고 W가 피터 워커Peter Walker라는 사실을 SWA를 볼때마다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HLD가 창업자 두 명에 대한 것보다는 그냥 고유명사로 불리기를 바라면서 지은 이름이다. 하이 랜드스케이프 디자인(High) (또는 High-end) Landscape Design, 하버드 랜드스케이프 디자인(Harvard Landscape Design)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고밀도 지단백질(High Density Lipoprotein)을 뜻하는 HDL로 오기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괜찮다. 미션 스테이트먼트(mission statement) 창립 몇 달 이내에 홈페이지에 소개 글이 필요해 부랴부랴 우리 회사의 생각을 적었던 것이 아래의 글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영어를 직역한 글 같아 어색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하지만 다행히 글솜씨 문제를 빼고는 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HLD의 태도를 잘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HLD는 이호영과 이해인이 설립한 창의적 디자인 회사다. HLD의 디자인은 다양한 공간적 문제와 사회적 도전 과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핵심적 개입’을 제공한다. 핵심적 개입이란 물리적 측면 또는 운영 전략상 대상지의 잠재력을 발현할 연결고리를 찾아냄으로써 긍정적인 변화를 가능케 하는 설계적 장치를 의미한다. ‘이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우리의 설계는 시작된다. 우리는 피상적인 외관 개선이나 장식, 스타일 입히기를 지양한다. HLD의 핵심적 개입은 전통적인 조경설계의 범위를 넘어, 다양한 분야의 분석을 활용한다. 조경가의 전문적 지식과 기술,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정, 그리고 대상지의 맥락에 대한 존중을 통해 촉각적 표현부터 지역적 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아이디어를 구현한다. HLD는 모든 스케일의 프로젝트에서 환경적,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근본적 접근을 추구한다.” 슬로건: advocacy & innovation by design 면접을 볼 때, ‘크리티컬 인터벤션(critical intervention)’에 크게 공감했다는 지원자를 많이 만났다. 하지만 실제로는 2017~2018년 즈음 로고를 새로 디자인하며 만든 ‘디자인을 통한 주창과 혁신(advocacy & innovation by design)’이라는 슬로건이 좀 더 명백하게 HLD의 목표와 개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이 슬로건에 대해 이야기한 지원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은 조금 의외다. (advocacy)는 주창이라고 번역한다. 특정 사회적 목표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어떤 아이디어나 정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고 추진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쓴 말이라서, 주장이나 옹호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혁신(innovation)도 변화나 발전, 개선보다 더 새로운 방식을 통해 더 큰 파급 효과를 주기 위해 고른 단어다. 업태: 조경설계, 학술 연구 + 사업자등록 상 업태는 조경설계와 학술 연구이긴 하지만, 2019년 인스타그램 계정을 열고 ‘creative design practices of nearly all kinds거의 모든 종류의 창의적 디자인 작업’라는 설명을 붙이면서, 단순히 명함에 플래닝(planning)이 들어가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역할을 협의의 조경 분야에 가두어 놓지 않겠다는 점을 더 분명하게 드러냈다. 특장점 HLD의 홍보 브로셔에는 네 가지를 HLD의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1) 질문 재정의하기(reframing the question). 단순히 주어진 공간을 좋게 디자인하는 것을 넘어 주어진 질문을 재정의하고 사회적 가치를 더 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2) 디테일에 신경을 쓴 독특하고 새로운 디자인(uniquely new design with attention to details).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디자인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며 이를 뒷받침할 디테일에 애쓴다. 3) 세계 최고 수준의 퀄리티를 위한 최첨단 프로세스(cutting-edge process for world class quality). 세계적 수준의 결과물을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협력, 신기술 도입을 통해 최선을 다한다. 4) 사고의 도구로서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as a thinking tool). 커뮤니케이션을 사고의 도구로 활용해 좋은 디자인 결정을 돕기 위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HLD 문화 HLD의 지향점이 무엇이냐 하는 측면에서는 분명 두 대표의 생각이 진하게 묻어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HLD의 개성을 구성하는 것은 역시 다양한 구성원과 이들이 만들어온 문화다. 글 이해인 대표 HLD는 어떤 점이 다른가 디자이너로부터 HLD는 신입 디자이너 또는 인턴이 프로젝트 초기 단계부터 단순히 지시를 받고 주어진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능동적 자세로 프로젝트에 임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전략 도출에서 설계안 작성까지의 과정에서 초기에 수행한 조사 분석과 이를 통해 도출한 생각을 계속 활용한다. 이러한 바텀 업bottom up 방식을 통해 디자이너의 다양한 관점과 지식을 활용하고 개인이 좀 더 주인의식을 가지고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한다. 이는 설계 능력을 한층 성장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HLD에 입사하면 받는 직책이 디자이너 인 이유다. 공정 경쟁 가끔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리더가 모든 설계안을 결정짓지 않고 다양한 생각을 끌어내기 위해 내부 디자인 공모를 진행한다. 모두가 하나의 프로젝트에 쓰일지 안 쓰일지 모르는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은 회사로서는 큰 투자다. 보통 짧게는 두어 시간, 길게는 반나절 정도 시간을 주고 전 직원이 글, 3D 모델, 모형, 스케치 등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뭐라도 만든다. 발표 시간은 달랑 1분, 질의 응답 시간도 1분만 주어진다. 투표로 당선작을 선정하면 정말 그 안을 기반으로 설계안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상품을 준다. 이기면 좋고, 안 이겨도 나쁘지 않다. 모형 만들기 HLD 설계가 단숨에 그려지는 몇 개의 선으로 결정되는 일은 드물다. 단숨에 많은 것을 확정짓지 않고 다지고 또 다진다. 평면 또는 3D 모델(라이노) 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1대100, 1대 50, 1대1 스케일의 모형을 만들어 함께 검토하고 문제점을 찾아 개선해 나간다. 효율적으로만 일하려고 한다면 맞지 않는 방식이겠지만, 실시설계 진행 중에도 필요한 검증은 한다. 시간과의 싸움으로 피로할 수 있으나, 최선이자 최고의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 중에 하나임이 분명하다. 공감대 형성 어쩌면 이러한 설계 과정과 결론 도출은 발주처를 설득하기 위해서라기보다 HLD 구성원들이 함께 공감하고 그 공감대를 기반으로 설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바탕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구성원들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이 합을 이루어 주창하고 혁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HLD를 특별하게 만드는 철학 아닐까. 글 김주환 소장 집요함의 형태 내가 생각하는 HLD의 디자인 철학은 집요함이다. 어떤 공간에 대해 가장 효과적이고 적합한 설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고, 끊임없이 설득하는 과정을 보며, 좋은 디자인에 대한 집요함이 HLD를 여기까지 이끌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리조트 프로젝트의 보고를 불과 며칠 앞두고 아무래도 발표 자료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며 소장님이 모형 제작을 부탁했다. 뷰를 보여주는 조감도와 다이어그램만으로는 클라이언트가 지형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료만 잘 마무리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에 인력도 부족한데 이게 현명한 일일까 의구심이 든 게 사실이지만, 결국 모형은 미팅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모형을 만든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지형 설계와 동선 연결, 공간감 등이 이미지를 통한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 수도 있고, 디자이너가 스스로 주장하는 바에 얼마나 확신을 갖고 있는지를 증명해 보이기도 한다. HLD는 뷰, 다이어그램, 모형, 스케치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가장 이상적이고 적합한 설계를 이해시키고 관철하려 노력하는 집단이다. 고된 것 같더라도 좋은 설계와 좋은 공간을 실현하기 위해 집요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HLD다. 만약 노력하는 자신을 향해 주변이 던진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돼?’ 라는 말에 좌절해 본 사람이라면 이곳으로 와 합류하길. 글 김윤하 팀장 평화를 빕니다 새로운 프로젝트는 대부분 무계획 답사와 킥오프 미팅으로 빠르게 전개된다. 회의가 시작되면 각자 답사를 통해 느낀 점을 이야기하는데, 어떤 관점으로 프로젝트에 다가가야 의미 있는 설계가 나올 것인지에 대해 ‘아무 말 토론’이 펼쳐진다. 토론에서는 섬세한 대상지의 역사와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꽃과 풀과 새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대상지와 인근의 산업이나 경제적 특장점에 대한 논의도 있으며,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 같지만 나름 통찰력 있는 연관 주제에 대한 ‘외침’도 있고, 언제 공부한 건지 체계적인 공간 해부를 통해 이미 도출해버린 로드맵도 있다. 회의는 종종 산으로 간다. 다가오는 인구 절벽과 AI와 에너지 위기와 이상 고온 시대 속 조경의 의미를 지나 국내 조경 저변에 대한 냉소적인 평가와 함께 지속가능한 따릉이 출근에 대한 찬사를 거친 다음에야 한 단락 마무리 짓기 일쑤다. 물론 결론은커녕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한 채 쉼표도 없어 읽기조차 어지러운 회의록만 남기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무 말 토론의 결과물이 생산적일 거라고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도, HLD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이 과정을 겪어낸다. 좋은 설계에 욕심이 많기에 그렇다. 대상지가 가지고 있는 맥락을 모르고 답을 내릴 수 없다. 예쁜 공간만 만드는 게 아니라 다가오는 도시의 변화를 수용하는 공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 사회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수반한 지속가능하고 생태적인 시스템으로 변화를 이끄는 메시지를 전달하길 바란다.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을 넘어서서, 공간의 역사, 사회, 맥락과 자생 수종 분석 등 지금 당장 꼭 필요해 보이지 않는 주제에 대한 연구와 토론과 같은 ‘군불’을 늘 지피는 것이 HLD의 설계에 필요한 이유다. 그러니 HLD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기면 어김없이 즐겁게 새로운 군불을 땐다. 사실 이 과정에서 남들이 이걸 쓸모 있다 없다, 또는 효율적이다 아니다라 평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조경에 대한 좁은 인식이 바뀌어서 우리가 하는 가치 있는 일이 조금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HLD에서 일하는 것은 마냥 평온하지만은 않다.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치매 예방에는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다. 글 이정빈 실장 HLD는 이호영과 이해인이 설립한 창의적 디자인 회사로, 다양한 스케일의 조경설계 및 계획, 학술 연구와 도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 이호영·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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