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사나흘 내리지 않아 산뜻한 여름날. 집 근처 들판을 걷다 무리 지어 핀 흰 꽃을 발견한다. 게으른 바람에 일렁이는 하얀 점들. 다가가 자세히 보니 꽃이 아니라 달팽이다. 줄기 끝마다 열매처럼 달린 것이 한둘이 아니라 수백 마리는 족히 되는 듯하다. 달아나는 습기를 붙잡으려 웅크리던 달팽이들이 어떤 일로 햇살과 바람을 쐬는 걸까.
스위스 취리히의 여름은 한국에 비해 비가 적다. 7, 8월의 평균 강수량이 서울의 반에 못 미치는데, 비가 오지 않는 더운 날이 지속되면 피부로 숨을 쉬는 달팽이는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축축한 낙엽도, 몸을 숨길 바위 그늘도 귀한 이 들판에서 달팽이는 풀잎과 바람의 도움을 받는다. 이 들판에서 가장 흔한 것들이다.
구름보다 낮은 곳에서는 땅에서 방출되는 열기로 인해 지면에서 멀어질수록 온도가 낮아진다. 게다가 바람은 조금이나마 더위를 덜어간다. 그래서 건조한 여름날, 이곳의 달팽이들은 지면의 열기를 피해 풀잎을 타고 오른다. 적당한 높이에 오르면 숨 쉴 작은 구멍 하나만 남겨둔 채 점액질로 껍데기 입구를 막고 몸을 고정한다. 그렇게 대부분의 달팽이가 높은 곳을 찾아 오르면 마치 줄기 끝에 흰 꽃이 무리 지어 핀 듯한 장면이 펼쳐진다. 이런 상태로 길게는 몇 주를 보내다 비가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에서 깨 풀잎 위를 미끄러지며 기어다닌다. 비와 햇살의 불협화음에 적응한 작은 것들이 만드는 여름의 풍경이다.
신영재는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ETH) 건축학부 조경학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조경설계사무소 초신성의 소장이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아름답고 쓸쓸한 것에 관심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