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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에코스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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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스케이프]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 나비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 환경과조경 2026년 1월호

꽃밭에서 흰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가 날아다니는 장면을 보면 이 예쁜 나비들이 한때 애벌레나 번데기였음을 상상하기 어렵다. 나비의 변태는 자연의 수많은 기적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이지 않을까.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었다가 껍질을 벗고 예쁜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순간을 직접 목격한 뒤 그 매혹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 여인이 있었다. 1647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Maria Sibylla Merian)(1647~1717) 이야기다. 13세에 누에가 나비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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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 되던 해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의 초상화 ⒸPublic Domain

 

 

그런데 누에나비와 나방은 꽃밭에서 본 나비만큼 예쁘지 않았다. 실망한 마리아는 저 예쁜 나비 들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아는 벌레를 잡아서 다락방에서 기르며 관찰을 시작했다. 그러다 매우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된다. 벌레마다 선호하는 먹이 식물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식물과 벌레와 나비로 이루어진 마리아만의 생태계, 그만의 신비로운 세상이 열렸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친구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나비 연구에 매달렸다고 한다. 이 작고 하찮은 피조물에서 마리아는 매일매일 기적을 만났다.

 

마리아는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서너 살 때부터 화가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그의 그림 솜씨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일가를 이룰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재능을 오로지 나비 생태계를 기록하는 데 바친다. 그렇게 마리아가 직접 관찰하고 그린 수백 장의 세밀화가 탄생하게 된다. 이 세밀화는 과학 연구 기록물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평생 세 권의 책을 냈다. 마리아의 학문적 유산이다. 겨우 세 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책은 일종의 도감이다. 그림을 한 장 한 장 그려 그걸 다시 동판으로 떠서 인쇄한 뒤에 색을 입혀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수고스러운 작업이었다. 그림 한 장이 탄생하기까지 면밀한 관찰, 스케치 작업을 선행해야 했으므로 세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평생이 걸린 것이다.

 

마리아의 첫 번째 책은 꽃을 그려 모은 화집(畫集)이자 화집(花集)이었다. 꽃 정물화가 유행했던 시절이라 화가 교육 과정에 꽃과 식물 세밀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꽃 그림을 모아 묶어서 책으로 낸 데는 따로 실용적인 용도가 있었다.

 

만 19세에 마리아는 젊은 화가와 결혼해 남편의 고향인 뉘른베르크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남편이 화가로서의 역량이 그리 뛰어나지 못해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가계에 보태기 위해 마리아는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일종의 미술 학원을 열었다. 그리고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뉘른베르크의 상류층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 따님들에게 그림과 자수를 가르치고 싶으니 보내 달라고 청했다.  이때 마리아 친정의 명성이 큰 도움이 됐다. 부모들이 “아, 메리안 가문의 따님이군요”라고 반기며 딸을 마리아의 미술 학원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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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모음 초기에 그린 꽃 그림 화집에 수록됐다. ⒸPublic Domain

 

가족적 배경 

마리아의 아버지 마테우스 메리안(1593~1650)은 당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판화가이자 출판업자였다. 누구나 알게 모르게 그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의 공방에서는 도시 풍경화, 지도, 성서 삽화가 대량으로 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팔려 나갔다. 아버지 메리안이 그리 고 판화로 찍어낸 유럽 도시 지도와 뷰를 지금도 여행 서적에서 볼 수 있다. 마리아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54세의 고령이었고, 마리아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어린 마리아는 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못했다. 다만 아버지가 남긴 예술적 유산과 가문의 명성은 마리아의 삶을 형성하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더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계부 야콥 마렐이었다. 어린 마리아의 뛰어난 미술적 재능을 파악해 자신의 화실에 서 다른 교육생들과 함께 훈련을 받게 했다. 계부 마렐은 바로 꽃 정물화의 대가였다. 마리아는 그 로부터 수채화 기법, 동판화 기법,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물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재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뉘른베르크 상류층 가정 누구나 아버지 메리안의 출판사가 제작한 지도나 역사책 한 권 쯤은 소유하고 있었기에 여식들을 서슴지 않고 마리아에게 보냈다. 마리아는 미술을 가르치기 위해 교재가 필요하다고 여겼고, 꽃 그림을 그려서 동판으로 찍어내 교재를 만들어 팔았다. 물론 작은 곤충들을 함께 그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화집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 예술가로서의 명성과 경제적 독립성을 안겨주었다. 마리아의 미술 학원은 제법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벌레를 잡아다 바친 것이다. 화실을 경영하면서도 마리아의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 32세가 되던 해, 둘째 딸이 태어났고 마리아의 두 번째 책도 완성이 되었다. 


애벌레의 놀라운 변태와 특별한 식단 

마리아가 발표한 두 번째 책의 제목은 “애벌레의 놀라운 변태와 특별한 식단”이다. 누에로 시작한 나비 관찰 20년 만에 드디어 그간의 성과를 책으로 묶어 낼 수 있었다. 두 권으로 구성됐으며, 제 1권은 1679년, 제2권은 1683년에 출판됐다. 각 권은 50개의 동판화를 담고 있었고, 총 186종의 유럽 나비와 나방의 생활사를 기록했다. 


이 책은 여러 측면에서 혁신적이었다. 첫째, 각 곤충을 알, 애벌레, 번데기, 성충의 모든 단계에 서 그렸다는 점이다. 당시 대부분의 곤충 도감은 아름다운 성충만을 그렸다. 하지만 마리아는 책 제목 속 ‘애벌레의 놀라운 변태’라는 표현이 시사하듯, 변태 과정 전체에 초점을 맞췄다.  둘째, 각 곤충을 그 먹이 식물과 함께 그렸다. 최초의 생태학적 접근이었다. 곤충을 고립된 표본이 아니라 생태계의 일부로 이해하고 그렇게 표현했다는 사실은 가히 획기적이었다. 셋째, 모든 관찰이 직접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자연사 연구가 주로 고대 권 위자들의 책에 의존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마리아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리니우스를 인용하는 대신, 자신이 직접 관찰한 것을 기록했다. 


이 책은 학술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럽의 자연학자들은 내용의 세밀함과 정확함, 아 름다움에 진정으로 찬사를 보냈다. 원본은 독일어로 썼으나 후일 라틴어와 네덜란드어로 번역되 어 더 넓은 독자층에게 읽혔다. 이로써 곤충의 자연발생설에 반박하는 실증적 증거를 제공한 셈 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벌레가 더러운 웅덩이에서 태어난다고 믿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곤충마다 먹이 식물이 따로 있다는 사실 외에도 곤충들이 알을 낳고 그 알에서 애벌레가 나온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후일 마리아는 두 딸을 데리고 남편을 떠나 네덜란드로 이주한다. 남편과의 불화는 예정된 것 이나 다름없었다. 집안에 늘 벌레와 번데기, 나방이 그득하고 툭하면 밤을 새워 그림을 그리는 아내의 삶은 어느 남편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내의 무서울 정도의 지적 능력도 버거웠다. 


마리아가 네덜란드로 이주한 것은 네덜란드에 계부를 통한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리아가 속했던 개신교 라바디스트 종파의 공동체가 있어 우선 그곳에 몸을 의탁하기 위함이었다. 그 무렵 마리아는 40대에 접어들었고 딸들도 성장해 있었다. 두 딸에게 그림을 가르친 것은 말할 나위 없다. 두 딸 역시 재능이 뛰어났다. 후일에는 나비 연구도 많이 거들어 세 모녀가 함께 암스테르담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게 된다. 마리아는 이렇듯 획기적인 일을 많이 했다. 


종교 개혁의 파도 속에서: 사회종교적 배경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7세기 독일의 복잡한 종교적 상황을 함께 살펴 야 한다. 마리아가 태어난 1647년은 30년 전쟁(1618~1648)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다. 이 참혹한 전쟁으로 독일은 거의 폐허가 되었다. 마리아의 고향 프랑크푸르트는 전쟁이 직접적으로 벌어진 장소는 아니어서 피해는 덜했으나, 유럽 전역에서 난민들이 몰려와 살았다. 어수선했지만 개방된 도시였다.

 

메리안 가문은 개신교 중에서도 칼뱅파에 속했다. 하지만 마리아의 종교적 여정은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17세기 후반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에서는 종교 개혁 운동이 활발했고 그 결과로 여러 종파가 생겼다. 그중에 프랑스 출신의 종교 개혁가 장 드 라바디(Jean de Labadi, 1610~1674)가 설립 한 라바디스트라는 종파가 있었다. 이들은 초기 기독교의 순수한 공동체의 이상을 회복하고자 했 다. 재산 공유, 노동의 평등, 남녀평등을 강조했고 개인의 영적 체험을 중시했다. 특히 여성들의 권 익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었다. 


마리아가 이 공동체에 이끌린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고, 지적으로는 자신의 연구와 예술 활동을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집안의 명성이 있다고는 하나 사실상 뿔뿔이 흩어진 콩가루 집안이었기에 공동체는 마리아와 딸들에게 든든한 배경을 이루어 주었고 무엇보다도 병든 어머니를 안전하게 모실 수 있었다. 


새로운 시작: 암스테르담 

마리아는 라바디스트 공동체에서 5년을 보내며 중요한 인맥을 형성했다. 후원자 중 한 명이 당시 남미 수리남의 총독으로 임명됐다. 이 연결 고리는 훗날 마리아의 수리남 여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691년, 마리아는 공동체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아무래도 공동체 생활에 제약이 있어 마음껏 연구할 수 없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딸들의 장래도 생각해야 했다. 암스테르담 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도시였다. 동인도 회사와 서인도 회사의 본부가 있었고, 전 세계 의 물산이 모이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더 중요한 것은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는 점이다. 


암스테르담에서 마리아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진귀한 식물과 곤충의 표 본들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었는데 거기서 수리남에서 온 나비의 아름다움을 보고 완전히 매 료됐다. 하지만 실망도 컸다. 모든 표본은 죽은 상태였고 곤충의 생활사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 다. 어떤 식물을 먹고 사는지, 어떻게 변태하는지, 얼마나 오래 사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암스테르담은 출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마리아는 여기서 자신의 이전 작업을 재출간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계획할 수 있었다. 여성 화가로서, 곤충 연구자로서 점차 명성을 얻어갔고 딸들 도 화가로 성장해 어머니의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이제 마리아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직접 수리남에 가서 살아 있는 곤충들을 관찰하고 싶었다.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여행을 준비했다. 맏딸이 혼인하여 남편과 함께 수리남에 다녀온 것도 도움이 됐다. 그래도 병든 노모를 두고 갈 수 는 없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둘째 딸 도로테아를 대동해 드디어 수리남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때 마리아는 5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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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이 유난히 즐기는 식단 소리쟁이(Rumex spp) 벌레 다섯 종, 나방 세 마리, 번데기 다섯 등 곤충 밀도가 높은 식물이다. 첫 번째 책을 위해 그린 그림 원본으로 현재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소장 번호 BM_SL,5276.22

 

전설이 된 여행: 수리남 

당시 여자 둘이 떠나는 열대 지역 여행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유럽 여성들이 식민지로 가는 경우 는 주로 선교사의 아내 또는 식민지 관료의 가족 신분으로였다. 학문적 목적으로 홀로 여행하는 여성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고 더구나 당시 52세는 고령에 속했다. 모두 예의를 갖춰 마리아 모녀를 대했지만, 뒤에서는 정신 나간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남아메리카 북동부 해안에 있는 수리남은 열대 우림이 대부분이었고 해안을 따라 유럽인들이 설립한 설탕과 카카오 농장이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과 수리남 원주민들이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했다. 자연의 풍요로움과 인간의 잔혹함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마리아는 수도 파라마리보의 집을 빌려 거주지 겸 작업실로 삼아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농 장을 방문하고, 숲속을 헤매다가 원주민 안내자를 고용해 더 깊은 정글로 향했다. 목표는 명확했 다. 수리남의 곤충들을 그들의 먹이 식물과 함께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작업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열대의 습한 더위는 유럽인이 견디기 어려웠다. 모기와 다른 해 충들이 끊임없이 괴롭혔다. 수채화 물감은 높은 습도 때문에 마르지 않았고, 종이는 곰팡이가 슬 기 쉬웠다. 게다가 정글에는 독사와 맹수의 위험이 도처에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포기하지 않 고 체계적으로 작업했다. 흥미로운 애벌레를 발견하면 집으로 가져와 먹이 식물과 함께 키웠다. 매일 관찰하며 스케치하고 관찰 일지를 썼다. 번데기가 되는 과정과 우화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릴 때도 있었다. 마리아가 그린 그림들은 작은 생태계의 초상화였다. 나비는 꽃 위에서 날고, 애벌레는 잎을 먹고, 번데기는 가지에 매달린 채로, 때로는 천적인 거미나 새까지 함께 그렸다. 


뛰어난 관찰 능력만으로 파악되지 않는 부족한 지식은 현지 원주민들과 아프리카 노예들로부터 얻었다. 이들은 숲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식물이 약용인지, 어떤 벌레가 독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마리아는 이 지식을 존중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유럽 학자들이 무시 했던 현지 지식을 과학적 작업에 포함한 선구적인 태도였고 원주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마리 아를 다른 농장주들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계획은 5년간 체류하는 것이었지만, 마리아는 말라리아에 걸려 2년 만에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1701년 9월, 수많은 스케치와 표본을 가지고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이후에도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리아가 가져온 자료는 어마어마했다. 2년간의 관찰 기록, 수백 점의 수 채화, 그리고 곤충 표본들이었다. 수리남 여행은 마리아의 건강을 앗아갔지만, 학문적으로는 그 를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곤충학자 반열에 올려놓았다. 3년의 준비 과정 뒤에 마리아의 세 번째 책 『수리남 곤충의 변태』가 탄생했다. 이 책은 마리아의 대표작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과학사의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은 1717년 1월 13일, 69세의 나이로 암스테르담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 늘날 마리아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된다. 독일은 500마르크 지폐에 마리아의 초상을 실었었다. 많은 나비와 식물종이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마리아의 전기만 수십 편이 쓰였을 뿐 아니라 마리아를 소재로 쓴 소설이 일곱 편이다. 어느 왕녀도 이렇게 후세에 기억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마리아의 그림들은 여전히 우리를 매혹한다.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세밀함과 아름다움은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