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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에코스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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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이야기들] 눈의 계곡
  • 신영재
  • 환경과조경 202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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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겨울 빛에 실핏줄 같은 나무 그림자가 길게 눈 위에 벋었고, 그 밑에 흐르는 물이 다가올 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2023년 2월 기록. 38°301’59.24”N, 128°28’03.84”E

 

 

눈을 감고 눈밭을 걷다 보면 어느새 그해 겨울 곰배령이었습니다. 그곳에 쌓인 눈에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돌상 위 하얀 실타래처럼 곱게 감겨 있어 더 하얗게 빛나는 듯합니다. 그날 양양 버스터미널에서 곰배령 입구까지 우리를 태워다 준 택시 기사는 그 근처 마을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골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를 따라 오르는 택시 속에서, 노인은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십수 년은 묵은 이야기 하나를 꺼내 우리에게 전했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곰배령이요. 눈밭엘 뭐 하러 가시나 꽃 보러 가기엔 한참 이른데. 내가 거기 근방에서 나고 자랐어요. 설피, 설피마을. 그때는 지금 같지 않아서 살기가 엄청 힘들었어요. 산에서 부지깽이니 취나물이니 당귀 같은 거 뜯어서 지게에 지고 양양서 팔면 그걸로 쌀 사서 다시 계곡까지 올랐어요. 산에서 곰 만난 적도 있다니까요. 동무들이랑 섶 모으다 고개를 딱 드니 시커먼 곰 한 마리가 잣나무 위에 턱 앉았더라고. 놀라서 지게도 다 내버리고 도망쳤어. 여기는 눈이 징그럽게 와, 아주 그냥 퍼붓듯이 와. 살기 너무 힘드니까 어느 날 어머니 몰래 소를 팔았어. 그 돈으로 서울 가서 돈을 많이 벌어서 설피를 벗어나 보겠다고. 그런데 청량리 가서 그 돈을 모조리 잃었어. 별 수 있나, 다시 설피로 돌아가서 어머니 앞에 석고대죄하고 오 년만 기다려 달라고 했지. 그때는 이 계곡을 정말 벗어나자고. 그러고 택시 기사 하면서 살다 보니 결국 양양에 집을 구했네. 얼레지? 얼러지, 얼러지라고 해요, 우리는. 지금은 이르지. 그래도 날이 맑아서 다행이네. 꽃은 없어도 눈 쌓인 거 구경은 실컷 하시겠어. 곰배령 말고도 꽃 보기 좋은 곳 많아. 여기서 저쪽으로 고개 하나 넘으면 그쪽엔 그냥 수두룩해요. 곰배령은 봄이면 못 들어가게 하니까 우리는 거기로 가. 다음엔 곰배령 말고 거기로 가셔요. 내가 모셔다드릴게.

 

그가 지게를 지고 오르내렸을 길을 짐작하며 우리는 눈 쌓인 계곡을 걸어 올랐습니다. 차가운 겨울 빛에 실핏줄 같은 나무 그림자가 길게 눈 위에 벋었고, 그 밑에 흐르는 물이 다가올 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나무가 뿌리를 꿈틀거리기 시작하면 굴 속 곰은 겨울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뜰 것입니다. 계곡 이곳저곳에 웅크린 얼러지도 언제 꽃대를 올릴지 궁리할 것입니다.

 

신영재는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ETH) 건축학부 조경학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조경설계사무소 초신성의 소장이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아름답고 쓸쓸한 것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