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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에코스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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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이야기들] 다정한 밀밭
  • 신영재
  • 환경과조경 202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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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외곽의 어느 밀밭.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농부의 고집, 그리고 사라져가는 들풀들을 다시 들판으로 불러들이려는 다정한 제도적 뒷받침 덕에 이 밀밭에도 붉은 점들이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2025년 6월 기록. 47°23′58.54″N, 8°34′44.11″E

 

 

여름이 시작될 무렵, 유럽의 푸른 밀밭 사이로 붉은 점들이 흩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밀 사이로 드문드문 피어난 개양귀비는 들판 위에 찍힌 점묘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아왔고, 클로드 모네도 이 풍경을 여러 차례 캔버스에 옮겼다. 전쟁으로 뒤집힌 유럽의 들판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 붉게 물들인 것도 개양귀비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 꽃을 전사자를 기리는 상징으로 여겼고, 1915년 군의관 존 매크레이(John McCrae)는 그 붉은 물결을 바라보며 ‘플랑드르 들판에서’라는 추모시를 남겼다.

 

개양귀비가 이처럼 농경지와 전쟁터에서 번성하는 이유는 교란된 땅에서 잘 살기 때문이다. 이 식물의 씨앗은 햇빛을 받아야 발아하기 때문에 흙이 뒤집힌 뒤에야 본격적으로 번성한다. 게다가 생산량이 많고 수명도 길어 땅속에서 수십 년 동안 휴면하다가도 흙이 뒤집혀 다시 햇빛을 받으면 싹을 틔우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다. 수천 년 동안 유럽의 농경지에서 반복된 경작과 전쟁으로 인한 교란은 이 꽃이 살아가는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농업 집약화와 제초제 보급은 이러한 풍경을 빠르게 지워버렸다. 밀밭에서 개양귀비를 보는 일은 점점 드물어졌지만, 다행히 1990년대부터 제초제 사용 규제와 농업 보조금 제도가 도입되면서 이 아름다운 초여름 풍경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유월 어느날, 동네를 걷다가 유난히 개양귀비가 만발한 밀밭을 만났다. 주변의 다른 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던 개양귀비가 이곳에서는 유독 많았다.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농부의 고집, 그리고 사라져가는 들풀들을 다시 들판으로 불러들이려는 다정한 제도적 뒷받침 덕에 이 밀밭에도 붉은 점들이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신영재는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ETH) 건축학부 조경학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조경설계사무소 초신성의 소장이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아름답고 쓸쓸한 것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