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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
    태어난 곳은 서울과 산자락 하나를 공유하는 경기도 어디쯤. 보통 뜻하지 못하게 가난을 맞닥뜨리면 더 외곽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라는데, 부모님은 특이하게도 서울 북쪽에 어중간하게 놓인 동네로 기어드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내 최초의 기억은 다세대 주택과 단독 주택이 뒤섞인 동네 한구석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여태 서울의 귀퉁이를 떠돌고 있다. 메가시티 같은 그럴듯한 수식어가 어울리는 시민은 못됐다. ‘서울 촌놈’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을 때, 딱 나를 위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집과 학교 근처만 뱅뱅 맴돌아 경험이 얄팍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번도 도시를 떠나본 적 없는 나는 시골 풍경을 마주하면 한참 눈을 떼지 못한다. 뿌리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느끼기도 한다. 왜 그럴까. 이유를 궁금해하다 보니 어릴 적 기억에 가닿았다. 할머니는 괴상한 마을에 살았다. 꽤 번화한 도시 가까이에 있지만,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에 칭칭 감겨 있어서 촌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버스는 두 시간에 한 번 오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면 차를 타고 이십 여분을 달려야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으면 부엌 바닥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지만, 고구마밭에서 포대 자루로 썰매 타기에 바빴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미닫이식의 중문을 열면 우리 집보다 큰 마당이 보이고, 넉넉하게 비워둔 외양간에서 통통하게 살찐 송아지가 울었다. 마당 밖에는 시야를 닫는 높은 건물이 없었다. 좁은 방과 고불고불한 골목길이 익숙했던 나에게 할머니의 마을은 남부럽지 않은 여행지였다. 크고 높고 넉넉했다. 이상하게도 그 안에 서면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이 모두의 것처럼 느껴졌다. 막 모내기를 마친 논이나 고춧대가 자라고 있는 밭에 분명 주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굽이치는 고랑과 이랑, 힘없는 줄기를 받쳐주는 지지대를 따라 일렬로 선 작물 모두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인데도 자연의 일부 같았다. 아마 논밭의 식물들이 뒤편의 작은 숲과 똑같이 햇빛을 받고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 풍경은 계절의 흐름을, 또 자연 앞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의 존재를 깨닫게 한다. 갖은 노력을 다해도 야속한 장맛비는 이제 막 잎을 틔운 작물의 허리를 꺾고, 자비 없이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뙤약볕은 잎끝을 태운다. 그럴 때면 땅은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또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잎 하나 줄기 하나 최선의 모습으로 관리한 것처럼 보이는 정원보다 한 전시장에 깔린 카펫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도 같았다. 지난 5월 22일, 제17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이 개막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귀국보고전을 열지 않은 대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주요 작품을 만날 수 있었는데, 전시장의 한복판에 낯익은 풍경 하나가 낮게 누워 있다.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의 ‘블랙 메도우Black Meadow: 사라지는 자연과 생명의 이야기’다. 이 카펫은 비엔날레의 주제인 ‘이주, 디아스포라의 확산, 기후변화의 충격, 사회적·기술적 변화의 속도’를 논의하는 공간적 바탕으로, 먼 훗날 기후변화로 인해 생명이 사라진(Black)초지(Meadow)를 은유한다. 금강 변에서 채취한 갈대꽃과 동남아시아에서 흔히 쓰는 사탕수수 두 종으로 만들어진 카펫은, 사실 빗자루 천여 개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해 만들어졌다. 이미 한참 전에 생명을 잃은 식물로 만든 풍경인데도 블랙메도우는 나를 순식간에 어딘지도 모르는 강가로 데려간다. 숨죽이면 강물 소리가 들려오고 바람이 불면 나도 갈대와 함께 스러져버리고 싶은 풍경 속으로. 슬프게도 블랙메도우는 오롯이 상상에 기대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청소기의 등장으로 갈대 빗자루는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고, 풍성한 갈대밭을 자랑하는 금강하굿둑은 생태계 교란으로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 이런 풍경은 칼로 도려낸 듯 말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함께 얽혀 있는 작은 새와 동물 더불어 식물들까지 함께 데리고 떠나 강 주변의 풍경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오은, ‘아찔’)는 시 구절이 떠올랐다. 어느 날 잠에서 깨니 집도, 땅도 없는 내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풍경이 사라졌다면 어떤 기분일까. 시 속 화자가 보고 있던 “거울 속 할 말이 없는 표정”이 어느새 나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 김모아
  • [PRODUCT] 스마트폰처럼 다양한 기능을 갖춘 ‘스마트 퍼걸러’ 이용자의 움직임을 감지해 쾌적함과 에너지 효율을 높인 휴게 시설물
    세인환경디자인이 출시한 ‘스마트 퍼걸러’는 스마트폰처럼 하나의 제품 안에 여러 시설을 탑재한 휴게 시설물이다. 에어 커튼, UV.LED 살균기, 프리 필터, 헤파 필터, 냉난방기, 디스플레이, 무선 충전기, SOS 벨 등 이용자의 건강과 편의를 증진하는 다양한 기능을 갖췄다. 퍼걸러 반경 3m 안에 사람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필터를 갖춘 흡입기와 LED 살균기, 에어 커튼이 작동된다. 미세먼지를 거르고, 각종 바이러스와 세균을 없앤 깨끗한 공기를 분사하며 이용자의 몸에 붙은 유해한 물질을 제거한다. 내부에서의 움직임 또한 센서가 인식하여 자동으로 에어컨, 모니터, 온열 벤치를 작동시키는데, 에어컨은 실내 온도에 따라 냉방, 난방, 송풍 모드를 스스로 조정한다. 퍼걸러 하단부에 설치된 와류 토출구는 냉난방기에서 나오는 바람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게 막아준다. 실내외 공기 질을 측정해 이용자에게 알려주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내부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온습도, 미세먼지 등에 관한 정보를 인포그래픽으로 알기 쉽게 전달한다. 휴대폰 충전이 필요할 땐 내부에 마련된 책상의 무선 충전기를 이용하면 된다. 퍼걸러 내부에 사람이 없으면 자동으로 모든 기능이 종료되어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TEL. 02-877-8811WEB. www.seindesign.co.kr
  • 팝니다, 숲 ‘숲, 가게’ 전, 도만사에서 5월 30일까지
    1kg에 960만원. 100g에 1,024만원. 500cc에 324만원. 성수동 한적한 골목에 자리한 어느 가게에서 판매하는 상품들의 가격이다. 가격대만 보면 보석이라도 박힌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지만 이곳은 사람이 만든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다. 진열대에 놓인 제품은 명품 가방, 시계, 귀금속 따위가 아닌 어디에나 있는 것들. 잘게 바스러진 돌, 콩알만한 잡초가 난 축축한 흙, 메마른 나무 껍질과 같은 숲의 잔해다. 숲을 셈하다 숲의 값어치를 현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짧은 질문에서 출발한 ‘숲, 가게’는 독특한 역발상이 돋보이는 전시다. 이 가게는 철저히 시장의 셈법을 따라 자연물에 가격을 매겼다. 원리는 간단하다. 상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새로 덧붙여진 가치, 즉 부가 가치를 판매 가격에 포함하는 것. 숲을 이루는 부산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부터 생태계에서의 역할, 심지어 사람에게 소소한 즐거움과 감성을 전달하는 점까지 부가 가치로 매겨 가격을 산정했다. 모든 상품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것이기에 기본 가격이 1원으로 같지만, 여러 항목이 곱해져 최종 가격이 적게는 수백만원, 많게는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상식 밖의 가격에 의문을 갖는 손님들을 위해 전시장에는 친절하게 제품 안내서를 구비해 놓았다. 팸플릿에 적힌 상품별 부가 가치 내역을 읽다 보면 막연하게만 알던 숲의 가치가 차차 이해된다. (후략) * 환경과조경 397호(2021년 5월호) 수록본 일부
  • [기웃거리는 편집자] 월간테라
    회사 앞에서 대표님을 만났을 때 자동으로 굽는 나의 허리와, 집에 온 아빠를 향해 누워서 손을 흔드는 나를 한데 떠올리다 생각했다. 한 사람 안에는 다양한 자아가 있기 마련이라고.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페르소나가 만들어진다면 그중 하나는 ‘쓰는 자아’가 아닐까. 글을 쓰다 스스로가 낯설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내게 쓰는 자아는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격이다. 한 쪽짜리 글을 쓰는 데도 온종일을 징징댈 정도로 엄살이 심하고, 시도때도 없이 진지해져서 부담스럽다. 하지만 직업이 이렇다 보니 종종 꺼내 살살 달랠 수밖에. 물론 도움을 받기도 한다. 때때로 애매한 생각을 또렷하게 갈무리해주고, 쓰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나의 어떤 면면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면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주르륵 늘어놓은 글자들을 눈으로 짚다보면, 글 너머 누군가의 내밀한 생각과 복잡한 사정을 알게 되니까. 수면 위로 잠시 떠올랐다 사라질 뻔한 생각을 박제한 게 글이라고 한다면 읽는 행위가 꽤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거창한 이유로 남의 글 읽기를 좋아하고 필요하다고 여긴다. 특히 ‘내 것이 아닌’ 이야기, 나로선 쓸 수 없는 글 앞에서는 기꺼이 독자가 되곤 한다. 조경을 콘텐츠로써 다루기 때문일까. 조경 잡지를 만들고 있지만 가끔 (어쩌면 자주) ‘진짜’ 조경에서는 멀찍이 떨어진 기분이 든다. 문학 편집자와 소설가 사이의 간극 정도, 어쩌면 더 클지도. 어쨌든 이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의지 반, 호기심 반으로 종종 ‘월간테라’에 기웃거린다. 스튜디오 테라 홈페이지1에 달마다 업로드되는 에세이로, 조경설계 연구실을 거쳐 실무에 뛰어든 이들의 단상을 엿볼 수 있다. 조경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사람, 살짝 빗겨서 다른 일을 하는 사람, 멀찍이 떨어져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사람 등 필자 유형은 다양하다. 자발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약간의 강제성이 있어서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필자에게 “월간테라를 쓰세요”라는 하달이 떨어진다고), 대부분의 필자는 글 도입부터 쓰는 일의 부담감을 호소한다. 뭐, 사정은 딱하다만(?) 보는 사람은 유익하다. 쓰이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상황, 문장이기에 더 흥미롭게 와닿는 표현을 읽는 재미가 있다. 여러 가지의 설계 프로그램을 수족처럼 다뤄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농담이라던지, 학교에서 배운 조경과 실무 사이의 서늘한 간극처럼. “(포토샵은) 윈도우에 그림판을 탑재한 빌 게이츠를 멋쩍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조경 작업에서 생산되는 스틸컷의 마침표를 찍어준다. 경쟁 프로그램이 없으며, 현실에서 이루지 못할 꿈을 마지막으로 보여준다. 다만 한 번 이 판에 빠지면, 무엇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없어진다. 팽이를 돌려도 알 수가 없다. 시간은 쫓아오고 마감은 남지 않았다면 집착하지 말고, 포토샵을 켜라. … (루미온은) 너무나 직관적이고, 쉽다. 마스터가 되기까지 24시간이면 충분하다. 결과물을 뽑아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타 프로그램 대비 압도적이다. 가히 효율성의 끝판왕이다. 다만 결과물이 지구 반대편 우루과이 사람과 같을 뿐….”(최진호, “도구”) “설계의 이론적 의미는 대상지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파악하여 실용적이면서 미적인 공간을 형태화하는 과정이지만, 실무를 겪으며 느낀 설계는 여러 가지 제약 조건 속에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 타 분야의 계산 실수로 갑자기 반으로 줄어든 예산에 맞춰 수많은 고민의 결과물들을 들어내야 하기도 하고, 공사 입찰 직전 하달된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디자인을 근본부터 흔들어야 하기도 한다. 때로는 ‘생태면적률 40% 이상’과 같은 무심히 정해졌을 지침의 수치만으로 허탈감을 맛보기도 한다.”(이세희, “2020년을 마감하며”) 사실 모두가 안다. 글 같은 건 안 읽어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라는 걸. 글쓰기는 좀체 쉬워지지 않고, 대가 없는 공력이 너무 많이 든다. 소설가 한강도 이런 말을 했더랬지. “저에게 지금도 숙제는 그거에요.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이 뭔지? 그러므로도 아니고, 그리고도 아니고. 글을 쓰기 어렵게 만드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런데 글을 써야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2 비슷한 물음을 곱씹게 된다. 쓰는 일에 무슨 유익함이 있을까. 어떤 동력이 되어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답은 결국 각자의 쓰는 자아들만이 어렴풋하게 알겠지. **각주 정리 1.www.studiosterra.com 2.안선정, “소설가 한강, ‘글을 쓴다는 것’의 원동력, 결국글을 읽는 것”, 「독서신문」 2016년 12월 25일.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제대로 말 걸고 싶으니까
    종이책을 만드는 편집자지만 요즘은 작업 영역이 지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새로운 달이 시작될 무렵 잘 마름질된 잡지가 손에 쥐어지면 또 다른 소소한 편집이 시작된다. 도구는 포토샵과 학창 시절 익힌 얄팍한 디자인 기술. 서투른 솜씨로 인스타그램을 채울 콘텐츠를 다듬기 시작한다. “디자인 전문 월간지의 편집”이 “기획, 조사, 취재, 인터뷰, 작품 섭외, 필자 섭외, 교정과 교열, 사진 촬영, 편집 디자인, 마케팅이 한 번에 뒤섞여 돌아가는 도전적인 작업”(이번 호 ‘에디토리얼’)이라면, 잡지의 내용을 각종 SNS에 올릴 콘텐츠로 매만지는 일은 마케팅 정도로 분류될 것이다. 기껏해야 손바닥만 한 공간을 채우는 일인데 생각만큼 쉽지 않다. 책 편집과는 한참 다르고, 얕보고 뛰어들었다가 한나절을 몽땅 빼앗긴 적도 있다. 인터넷 속 세상은 한계를 알 수 없는 넓은 세계라는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기 위해 내가 쓸 수 있는 공간은 턱없이 작게 느껴진다. 짧은 시간에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니, 되도록 매력적이고 호기심을 동하게 하는 사진을 골라 올린다. 이 과정에서 ‘매력적’이라는 형용사를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한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인증샷’을 남기고 싶은 사진이 좋을지, 조경 전공자의 구미를 당길만한 독특한 디테일을 담는 것이 좋을지. “요즘 시대가 자연을 소비하기만 하잖아요. 특히 인스타그램 같은 이미지 매체를 통해 자연이 그냥 사진 찍기 좋은 배경 이미지로만 소비되죠.”(배정한, “조경가 김아연 인터뷰: 생태학적 상상력과 풍경의 디자인”, 2019년 5월호) 지금처럼 봄바람이 불던 날 나눈 대화에서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던 김아연 교수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머뭇거리다가 프로젝트를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경 사진을 대표 이미지로 설정한다. 경쟁에서 탈락한 사진은 화살표를 누르면 넘겨볼 수 있도록 함께 올린다. 아주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도록. 글귀가 주인공이 되어야 할 때도 있는데, 확장된 선택지 앞에서 더 긴 고뇌에 빠진다. 짧지만 강렬한 보물 같은 문장은 기왕이면 독자들이 스스로 찾게 하고픈 욕심이 생기고, 길고 유려한 문장을 꼽았다가 너무 구구절절한 것 같아 망설인다. 2020년 리뉴얼과 함께 사라진 꼭지 ‘이달의 텍스트’를 꾸릴 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가까스로 사용할 구절을 정한 후에도 디자인이라는 한 가지 고비가 더 남아 있다. 메시지가 아무리 좋더라도 보기에 예쁘지 않으면 다른 콘텐츠에 쓸려나가기 일쑤다. 갖은 노력 끝에 정돈된 피드를 보고 있으면, 『잡스 1. 에디터』의 인터뷰 한 구절이 떠오른다. 누구든지 플랫폼에 글과 이미지를 올려 전파할 수 있는 “누구나 에디터가 될 수 시대”.1 ‘○○○님이 회원님의 게시물을 좋아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알림이 울리기 시작하면, 독자와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 즐겁다가도 조금 씁쓸해진다. 싸이월드 시대에는 ‘퍼가요~♡’라도 남았는데, 좋아요 버튼은 너무 많은 것을 생략해버린다. 고백하자면 한때 인스타그램의 댓글창에서 여러 의견이 오가는 모습을 꿈꾼 적이 있다. 플랫폼의 속성을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한 헛된 기대였다. 정신을 차리고 요새는 잡지 콘텐츠를 재가공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정문정 작가의 말처럼 “냉면은 놋그릇에 담고 설렁탕은 뚝배기에 담아야 먹음직”2스러운 법이니까. 『잡스 1. 에디터』의 에세이 꼭지를 통해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2018)을 펴낸 정문정이 본래 잡지를 만들던 에디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잡지 에디터에서 브랜드 저널리즘의 에디터로, 유튜브와 페이스북용 콘텐츠를 만드는 디지털 콘텐츠의 총괄 에디터로, 비슷한 듯 전혀 다른 일을 하며 겪은 일화들이 나를 자꾸만 불안감에 빠트렸다. 포기하지 않고 읽어가다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에디터로서 내가 익힌 기술 중에는 세계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토대로 타인을 설득하는 최적의 방식과 시기를 찾아내는 일도 있었다. 제대로 말 걸고 싶으니까. 에디터는 백 번 듣고 한 번 말한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 넘치는 세상에서 꿋꿋하게.”3 잡지가 다른 인쇄 매체와 구분되는 지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진 날짜에 반드시 찾아간다는 약속일 테다. 보통 정기 구독이 끝나는 시점은 연말, 아직 일곱 번이나 대화의 기회가 남아 있다. **각주 정리 1. 『잡스 1. 에디터』, 레퍼런스 바이 비, 2019, p.28. 잡스는 매호 하나의 브랜드를 다루는 잡지 『매거진 B』가 새롭게 선보이는 단행본 시리즈다. 브랜드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직업인과 나눈 대화를 인터뷰집 형식으로 전달한다. 2. 같은 책, 정문정, “에디터는 백 번 듣고 한 번 말한다”, p.176. 3. 같은 책, 정문정, “에디터는 백 번 듣고 한 번 말한다”, p.179.
  • [PRODUCT] 나무에 둘러싸인 아늑한 쉼터 ‘우드세움’ 친환경 규화제를 사용해 원목의 보존 수명 향상
    남양주시 청솔공원 수변에 독특한 형태의 원목 구조물이 들어섰다. ‘우드세움Woodseum’은 친환경 건축 자재 전문 기업 케이디우드테크가 출시한 휴게 시설물로, 움막의 형태에서 착안한 원통형 디자인이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지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드세움의 가장 큰 특징은 목재 시설물임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유지 관리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목재 시설물은 일반적으로 매년 오일 스테인으로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케이디우드테크의 목재는 친환경 성분의 오르가노우드 규화제가 도포되어 보존 성능이 최대 40년에 달한다. 인체에 무해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한다는 장점도 있다. 특수 처리된 목재는 햇빛과 빗물이 닿아도 부패하지 않고 더 단단해지며, 점차 회색빛으로 변하면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콘크리트 혹은 플라스틱 같은 인공 자재보다 열섬 현상의 영향을 적게 받고 나아가 이산화탄소 흡수에도 기여한다. 구조물 바닥에 모래를 깔아 아이들을 위한 모래 놀이 아지트로 만들거나, 내부에 의자를 비치해 그늘 쉼터로도 쓸 수 있다. 강가 혹은 습지에서는 조류 관찰대로도 사용 가능하다.
  • 『위대한 유산』 웨믹의 두 정원
    정원의 의미를 논할 때 자아의 확장, 내면의 반영이라는 말이 흔히 쓰인다. 대개 정원은 치유와 성장 등 긍정적인 가치와 연결된다. 반면 잘 가꾸어지지 않은 정원을 불안정한 내면과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1861) 1에 나오는 미스 해비셤의 새티스 하우스 정원이 대표적이다. 그녀의 삶은 신랑이 사라져버린 결혼식 당일 멈췄다. 해비셤은 수십 년 동안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고, 저택의 모든 것은 천천히 부식되어 간다. 정원도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하기 그지없다. 이곳을 떠올리고 책을 펼쳤지만 20여년 만에 다시 읽다보니 예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인물인 웨믹과 그의 정원이 더 흥미롭게다가온다. 주인공 핍이 익명의 후원자의 도움으로 런던에서 신사가 되는 교육을 받게 되었을 때, 이 일을 대행하는 재거스 변호사의 사무실 직원이 웨믹이다. 부수적 인물이지만 지금 보니 소설에서 가장 멀쩡한 사람이 아닌가. 디킨스 연구자들은 그를 『위대한 유산』에서 가장 근대적인 인물로 평하는데, 근대를 넘어 오늘날 대도시 직장인도 그를 부러워할 것 같다. 사무실은 걸어갈 만한 거리에 있고 야근도 없으며 정시 퇴근 후에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린다. 조금씩 땅을 사 모아 자기만의 성채를 짓고 정원을 가꾼다. 그는 이곳에서 아버지를 돌보고 친구를 환대하고 연인과 시간을 보낸다. 퇴근 후에도 집에서 일을 하는 재거스와 달리 웨믹은 훌륭한 ‘워라밸’을 유지한다. 소설 중간중간 나오는 묘사를 통해 일과 사생활을 분리하는 웨믹의 균형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일단 그는 멀티 페르소나, 이른바 ‘부캐(부 캐릭터)’가 있는 인물이다. 재거스 사무실의 차갑고 단호한 웨믹 씨와, 월워스 집의 다정다감한 존 웨믹은 “겉모습만 닮은 또 다른 쌍둥이”처럼 다르다. 어느 쪽이 ‘본캐’일까.2 …(중략) **각주 정리 1. 영문학계에서는 원제의 great를 ‘막대한’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번역서에서는 이를 핍의 내적 성장을 반영한 ‘위대한’으로 번역한다. 완역본으로는 민음사본(이인규 역, 『위대한 유산』, 2009)과 열린책들본(류경희 역, 『위대한 유산』, 2009)이 있다. 2. 실제의 주체성을 나타나는 ‘얼굴’과 우리가 상황에 따라 연기하고자 하는 ‘가면’에 대해서는 『사람, 장소, 환대』(김현경, 문학과지성사, 2015)의 3장을 참조하라. 신사가 되고자 하는 핍의 성장 과정 또한 이 책에서 논의되는 성원권 투쟁과 관련지어 해석해 볼 수 있다. *환경과조경396호(2021년 4월호)수록본 일부 황주영은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그러는 동안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
  • 사운즈 포레스트 더현대서울 실내 정원 디자인알레 설계
    지난 2월 여의도에 문을 연 더현대서울은 자연친화적인 공간 구성이 돋보이는 복합 쇼핑몰이다. 1층부터 꼭대기까지 건물 중앙을 비우는 보이드(void)구조로 설계되어 탁 트인 개방감을 선사한다. 쇼핑 공간을 가장자리로 배치해 중앙에 인공 폭포와 대규모 실내 정원을 위한 공간이 마련됐고, 쾌적한 실내 환경과 식물 생육에 필요한 채광을 위해 건물 천장은 유리로 마감됐다. 디자인알레는 그리너리 VMDgreenery VMD로서 백화점 전 층을 대상으로 다양한 식재 공간을 디자인했다. 1층부터 꼭대기까지 다채롭게 변화하는 녹지 공간을 선보이고자 했다. 최대 3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인공 폭포가 있는 워터폴(waterfall)가든에는 교목을 심고, 보이드 공간에서 잘 보이는 3층의 카페에는 다양한 질감의 식물을 배치했다. 5층에는 햇빛이 내리는 숲 속 분위기의 정원을 연출했으며, 6층엔 유실수와 다채로운 플랜터로 장식한 양묘장 콘셉트의 휴식 공간을 조성했다. 조경 계획과 더불어 더현대서울만의 상징 플랜터를 디자인했다. 유기적인 곡선이 특징인 백색의 플랜터를 배치해 인테리어와의 조화를 꾀했다. …(중략) *환경과조경396호(2021년 4월호)수록본 일부
  • 끊임없는 소통, 조경에 관심을 갖게 하는 방법 마포프레스티지자이 조합장 김종채 인터뷰
    “조합원의 의견을 반영해 바뀐 공간이 다섯 곳이나 있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담겨 있는 의미를 생각하면 단지 내 어느 곳보다 가치 있는 공간들이다.”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 보이는 김종채 조합장의 만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는 2019년 9월 염리3구역의 재개발을 이끌 새로운 조합장으로 선출됐다. 염리3구역에 들어설 마포프레스티지자이(이하 마프자)의 공사 기간이 반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게다가 기존 조합장이 해임된 후 오랫동안 사업이 정체됐던 만큼 풀어야 할 과제도 산더미였다. 김 조합장은 눈앞에 있는 문제를 해치우듯 처리하는 대신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해결하고자 했다. “가장 우선순위에 둔 문제점은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해결했나”, “독특한 외부 공간을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등 여러 질문에 돌아온 답변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소통’이다. 끊임없이 수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그에 답하며 일구어낸 것은 무엇일까? 바람 선선한 날, 준공을 앞둔 마프자 잔디광장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소통으로 일군 단단한 관계 김종채 조합장의 목표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함을 느낄 수 있고, 완성도가 높은 주거 단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커뮤니티 공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주거 환경이 편리해지고 있지만, 이웃과의 단절과 공동체의 파편화는 심화되고 있다. 마프자는 이웃 간 소통하고 함께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먼저 분열된 조합원을 하나로 도모하고, 그간 느슨해진 시공사와의 관계를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조합원 간 갈등이 발생한 이유는 조합 잉여금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잉여금을 환급받기를 원했고, 다른 누군가는 잉여금을 더 좋은 주거 환경을 만드는 데 사용하기를 바랐다. 원하는 이들에게 잉여금을 돌려주기 위해 재원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주먹구구식으로 수립된 예산을 검토해 세밀하게 재편성하고 상가 및 임대 아파트 매각,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공사 계약 해지 등을 통해 환급금을 마련했다. 긴 시간이 걸렸지만 그 결과 조합이 한층 단단해졌다. 시공사인 GS건설과도 꾸준한 대화를 통해 서로 원하는 바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협조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조합원 그리고 시공사와의 관계가 변하며 많은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공사는 특화안 기획에 더욱 열의를 보였고, 조합원들은 자발적으로 다양한 주거 단지를 답사하고 떠오른 아이디어를 ‘단톡방’과 온라인 카페를 통해 전달했다.” 이에 탄력을 받아 조합원 중 디자인 전문가를 모아 ‘마감재협상자문단’을 구성해 더 설득력 있고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모두의 눈으로 찾은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 마프자는 오르막에 놓여 동간 단차가 크고 동쪽에 긴 옹벽을 두고 있다. 김 조합장과 조합원들은 자칫 단점이 될 수 있는 대지의 특징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엿보았다. “옹벽은 좋은 작품을 돋보이게 할 캔버스가 될 수도 있고, 단지 서쪽의 자투리땅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여의도의 전경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전망이 좋다. 이를 활용해 우리 단지만의 정체성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한 결과, 보강토 옹벽 일부가 자연석과 작은 수목이 어우러진 하나의 경관으로 바뀌었다. 잔디마당에서 바라보이는 곳에는 여름철 청량함을 즐길 수 있는 쉼터이자 볼거리인 벽천이 마련됐다. …(중략) *환경과조경396호(2021년 4월호)수록본 일부
    • 김모아
  • [기웃거리는 편집자]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얼마 전 덕수궁에 다녀왔어. 살구꽃이 환하고 나뭇가지에서 쭈글쭈글한 새 잎이 나고 있었어. 한국은 지금 이런 날씨야. 꽃 핀 나무를 좇다가 석조전으로 들어갔어.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거든.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 직접 종이를 자르고 엮는 건 아니고, 그 안에 들어갈 내용을 채우는 거야. 어떤 이야기가 들어가면 좋을지 고민하고, 적당한 사진을 구하고 글을 다듬곤 해. 건물 바깥에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푸른 장소를 만드는 일에 관한 잡지야. 뭔지 잘 모르겠으면 집 앞 공원에 가봐. 참, 거긴 지금 튤립이 한창이겠다. 종이는 참 신기해.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고 무엇이든 담을 수 있으니까.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일제 식민지기 문인과 화가들의 교류를 보여주는 전시야. 문학과 미술, 절묘한 조합이지 않니. 너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니 알잖아. 글과 그림이 얼마나 다른지. 또 얼마나 닮았는지. 어려운 시대적 배경이 예술가들의 연대를 더욱 돈독히 했다면 그들을 연결한 실질적 매개체는 종이야. 방송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종이는 바라는 것을 마음껏 표현하는 도구이자 글과 그림이 공존할 수 있는 바탕이었어. 신문의 연재 란에서 소설가와 삽화가가 만났고, 시인과 화가가 의기투합해 잡지를 창간했어. 편집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화가는 동료의 글이 담긴 책의 전반적인 꾸밈새를 디자인했고, 편지는 멀리 떨어진 친구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지. 출간된 지 100여 년이 흘러서 누렇게 바랬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책들을 한참 구경했어. 문득 너랑 만들던 그림책이 떠올랐어. 우린 시대에 비관해 예술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심심한 어린애들일뿐이었지만 종이를 만질 땐 꽤 진지했잖아. A4 용지 서너 장을 반으로 자르고 잘 가다듬어 왼쪽 가장자리를 스테이플러로 찰칵 집으면 제법 모양새를 갖춘 책이 됐지. 나는 스테이플러 심이 많은 게 싫어서 두세 번, 너는 꼼꼼해서 네댓 번. 나름 책이라고 표지에 제목도 쓰고 다음 장엔 목차도 넣고. 연필로 그린 캐릭터 아래 대사를 쓰거나 이야기에 맞춰 나중에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지. 한 액자 앞에서 잠깐 멈춰 있었어. 교과서에서 봤던 백석 기억나? 그 잘생긴 시인 말이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처음으로 『여성』에 발표될 때의 지면이 벽에 걸려 있었어. 『여성』은 1936년 4월 백석이 그의 벗 정현웅 화가와 만든 잡지야.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시 아래 정현웅의 삽화가 나란히 놓였어. 백석의 시에 큰 감흥이 없었는데 그림과 함께 보니 어느새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속에 있는 듯했어. 김환기 화가가 김광섭 시인에게 보낸 편지도 있었는데, 덕분에 난해하게만 보였던 김환기의 그림 에 숨겨진 의미를 짐작했어. 김환기는 김광섭의 시를 무척 좋아한 나머지 이런 편지를 쓰게 돼. “멍멍한 시간, 할 일이 없어 혼자서 맥주를 마시며 1월 31일에 쓰신 이산怡山 선생(시인 김광섭) 글월을 읽었어요. 왜 출판사가 나타나지 않을까. 빨리 이 봄에 시집을 내이고 해요. 그리고 한 권 보내주세요. 원색석판화를 넣어 호화판 시집을 제가 다시 꾸며 보겠어요. … 한 권에 3만원짜리 시집을 내야겠어요. 되도록 비싸서 안 팔리는 책을 내고 싶어요. 이런 것이 미운 세상에 복수가 될까. 요새 제 그림은 청록홍(靑錄紅). 점밖에 없어요. … 이 점들이 내 눈과 마음엔 모두가 보옥(寶玉)으로 보여요. 붓을 들면 언제나 서러운 생각이 쏟아져 오는데 왜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참 모르겠어요. 창밖에 빗소리가 커집니다.”(1996년 김환기의 편지 일부) 김환기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광섭의 시에서 비롯된 거래. 그 시를 들려주고 싶어. 어쩌면 이걸 위해 덕수궁에 간 건지도 몰라. “저렇게 많은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김광섭, ‘저녁에’) 나는 잘 지내. 시인도 화가도 아니지만 책을 읽고 만들면서. 때때로 심심한 편지를 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