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월간 환경과조경

월간 환경과조경
[기웃거리는 편집자] 균열을 내는 도끼
  • 환경과조경 2026년 3월호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었던 유명한 문장이다. 이 문장 속 ‘한 권의 책’이란 단어를 ‘한마디의 말’로 바꿔도 의미가 통한다. 한마디의 말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관점을 깨는 도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나의 관점에 균열을 내는 문장을 마주했다. 그 문장의 주인은 바로 장항준 감독이다. 그와 일면식은 없지만, 가 끔 예능에 출연하는 모습을 통해 재치있는 달변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 유튜브 채널에서 장항준은 자신의 영화가 망하는 것과 아내인 김은희 작가의 작품이 망하는 것 중 하나를 고르는 난처한 밸런스게임에 이렇게 답했다. “이성적으로 김은희 작가의 업적에 흠이 나는 걸 원하지 않지만, 심적으로는 나를 믿어준 배우와 투자자, 같이 동고동락한 스태프를 생각하면 내 영화가 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마냥 가벼운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영화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영화 ‘왕과 사는 남자’(2026)가 궁금했다. 정확히는 따뜻한 심성을 가진 이가 만든 영화에 호기심에 생겼다고 할까. 이 영화는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의 비극적인 서사를 바탕으로 폐위된 왕과 동고동락하는 민초들의 삶을 다룬다. 역사적 기록에 등장하는 활줄로 단종의 명줄을 끊었다는 어느 심부름꾼과 단종의 장례식을 유일하게 치러준 엄흥도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다.

 

다만 서사의 비극성에 집중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적 유대를 통해 성장하는 왕과 백성을 조용히 비춘다. 역사에서 잊힌 단종을 소환하지만 마냥 나약한 존재로 그리지 않았다. 심신이 피폐해진 어린 왕은 유배지 백성과 교감을 통해 한 명의 어른으로 성장한다. 나아가 위험에 처한 마을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반란을 도모하며 강인한 의지가 있는 왕의 면모도 보여준다. 비록 거사는 실패했지만, 자신을 보호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최후를 자처한다.

 

유배지 주민들도 단종과의 교류를 통해 편견을 극복한다. 백성들은 처음엔 그를 자신들을 무시하 는 양반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자신들을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에 감화되며 그를 가족처럼 대한다. 특히 촌장 엄흥도는 본인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그를 보호한다. 심지어 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홀로 거두었다. 이를 통해 인간의 도리와 윤리 의식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는 따뜻한 해석과 상상을 통해 잊힌 역사의 기억과 인물을 새롭게 복원했다. 

 

이번 호는 국가상징구역 마스터플랜 설계공모(46쪽)를 다뤘다. 국가상징구역은 조선시대의 관점으로 보면 왕, 신하, 백성을 위한 새로운 터전이다. 공모의 목표는 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과거를 계승하되 미래 비전을 도모하며, 강력한 상징 공간을 통해 새로운 행정수도의 밑그림을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대통령 세종집무실과 국회세종의사당은 별도의 설계공모를 통해 새로 지어질 예정이다. 그래서 구체적 윤곽이 그려지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소요될 것이다. 성공적으로 완성된다면 대한민국의 새로운 비전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화려함을 앞세우는 알맹이 없는 랜드마크나 진부한 한국성에 매몰된 고루한 접근법, 과도한 미래 지향으로 방향성을 잃은 황량한 공간을 보고 싶지는 않다.

 

또한 대규모 공공기관 이전 수준 정도가 아니라 우리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 새로운 공간에 표현될 K가 단순히 한국이란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다만 그저 묵묵히 치열하고,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서 기능했으면 좋겠다. 마치 묵음의 K처럼. 발음되지 않지만, 결코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들. 그들을 넉넉한 품으로 수용하는 공간을 만든다면 어떨까. 마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처럼 낡은 관점에 좋은 균열을 만드는 새로운 상상력과 해석을 더한 공간을 보고 싶다. 국가상징구역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미래 한국을 위한 좋은 균열을 만드는 도끼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