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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환경과조경

월간 환경과조경
[조경가 백종현] 균형과 감각
  • 환경과조경 2026년 1월호

삶과 자연의 새로운 균형

말보다 행동을 중요시하며, 심오한 철학보다는 감각적인 직관과 구체화한 실행의 힘을 믿는 편이다. 조경가로서의 나를 설명하는 말은 바로 ‘삶과 자연의 새로운 균형’이다.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어렸을 적 직업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수없이 다니며 자리를 잡았던 지역이 모두 지방의 소도시였다. 조경 설계 스튜디오로 지쳐 있던 유학 시절 어느 새벽에 산과 뜰, 개울과 바닷가에서 즐겁게 놀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가 왜 조경을 하고 있지?’라는 물음표를 ‘나는 조경을 정말 좋아해!’ 라는 느낌표로 바꾼 계기가 되었다. 삶에서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대학원 졸업 후 그린 모듈 시스템을 연구 개발하는 이코이드(Ecoid)를 창업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하버드대학교 건드홀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접했던 이론 중 하나는 생물학자 재닌 베니어스(Janine Benyus)의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였다. 이 이론은 인류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을 모방하고 배우는 접근법을 제안한다. 자연은 38억 년 동안 지구상에서 무엇이 효과적이고, 적절하며 지속가능한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베니어스는 자연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을 제안한다. 첫째, 모델로서의 자연은 자연의 특정 형태, 구조 또는 기능을 모방하여 인간의 디자인 및 공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영감을 얻는다. 둘째, 척도로서의 자연은 인간의 혁신이 얼마나 지속가능한지 판단하는 생태학적 기준으로 자연을 활용한다. 셋째, 스승으로서의 자연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 자연을 지혜의 원천으로 존중하고 배우려는 철학적 접근 방식이다. 덕분에 자연에 대한 어렴풋한 인식이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바뀌게 됐다.

 

바이오미미크리와 함께 매기 맥냅(Maggie Macnab)이 집필한 『디자인 바이 네이처(Design by Nature)』 일부 구절을 종종 떠올린다. 나무의 형태에 대한 글에서 나무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모든 조건이 완벽한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 즉 완전한 평형 상태를 추구한다고 했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그 상태는 결코 지속될 수 없는 한순간에 불과하며, 그렇기 때문에 나무는 매 순간 완전한 평형 상태를 끊임없이 찾으며 가지를 뻗어나간다는 것이었다. 배가 고프면 배를 채우고, 졸리면 잠을 자고, 때로는 즐거움을, 때로는 배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과 다를 것이 전혀 없다. 흔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대로면 좋은 상태를 ‘행복’이라 일컫는다. 이는 완전한 평형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지속가능한 것이 아닌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행복이라는 순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가지를 뻗어나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연과 사람의 행복한 관계 또한 지속적일 수 없기에 우리는 자연과 늘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갈 수밖에 없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는 과정은 모두 도시에서 일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줄곧 서울에서 살았고 유학 후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도시는 내 삶의 터전이며, 도시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의 삶과 더불어 도시의 활력과 재미를 사랑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앞으로 도시의 변화와 발전을 생각하면서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의 삶, 도시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자연 사이에서의 새로운 관계 또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이는 임승빈 교수(서울대학교)가 자연과 사람은 서로를 지탱하는 존재이며, 건강하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만 지속가능한 미래가 가능하다고 언급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러한 태도와 관점은 내가 하는 일에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작동한다. 새로운 균형은 고정된 완결형이 아닌 언제나 변화하는 현재진행형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매 순간 새로운 가지를 뻗어나가듯 오늘도 그것을 끊임없이 찾아나가는 중이다.

 

 

자연 감각, 조경 영향, 조경 확장 

삶과 자연의 새로운 균형이 조경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내가 추구하는 비전에 가깝다. 특히 조경가로서 자연 감각, 조경 영향, 조경 확장이라는 세 가지를 핵심 설계 철학으로 삼고 있다. 


자연 감각은 합리적이며 세심하며, 감각적인 자연을 만들어가는 것. 즉 자연의 감각으로부터 발현되어 이 세상에서 자연이 가지는 의미 있는 측면과 가치를 발견하고 탐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자연감각은 2017년 최재혁, 김대희와 함께 시작한 조경 디자인 그룹의 이름이기도 하다. 2025년 현재 자연감각은 HEA, 오픈니스 스튜디오, 건국조경, 식물감각 네 개의 회사가 공유하는 브랜드십으로 발전했다. 설계, 시공, 디자인 빌드, 식재 유통 및 연출, 유지·관리 등 각각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상호 간 프로젝트 공유와 긴밀한 협업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독립된 회사로서의 활동을 존중하고 응원하되 때에 따라 연합하며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자연감각의 브랜드십을 공유하며 “우리는 합리적이며, 세심하며, 감각적인 자연을 만든다”라는 지향점을 실천하고 있다. 


조경 영향은 조경 행위를 통해 도시와 지역 사회, 자연환경에서 발생 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고 조경 공간이 가지는 환경적, 사회적, 경제 적인 가치와 영향을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HEA를 포함한 자연감각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지역과 성격의 프로젝트로부터 다양한 스케일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며 조경 공간의 가치와 영향을 탐구하고 경험했다.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조경 공간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말하고 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조경의 가치와 영향력을 입증하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가 등장하는 걸 보며 앞으로 조경이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조경 확장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조경 디자인의 영역을 확장하여 조경 설계, 조경 디자인의 개념을 기획, 설계, 시공, 유지·관리 뿐 아니라 재료, 시설, 운영을 포괄하고 나아가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개 발, 재생, 복원 행위까지 넓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조경가의 역할을 새 롭게 정의하며 조경가의 무대를 확장하는 것이다. 조경 디자인 또는 조경 설계라는 일을 하고 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조경가라는 직업의 한계가 느껴지고 조경가의 제한적 역할에 아쉬움이 컸다. 디자인은 주어 진 환경에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닌 한계와 경계를 넘나들며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기에 지금의 나를 포함한 조경가, 조경 디자이너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정말 많게 느껴진다. 조경이라는 분야는 역사적으로 세상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건축, 토목 등 여러 분야를 조율하고 좋은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지휘자의 역할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을 어느 한 사람의 훌륭한 조경가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연대와 연합,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역할을 성장, 확장하려는 실천이 건강하게 누적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백종현은 HEA의 공동 설립자이자 대표다.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도시를, 하버드 GSD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조경 설계뿐 아니라 디자인, 시스템 및 비즈니스 모델 개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경험을 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공간 가치의 창출과 조경을 통한 지속가능한 사회적 가치의 실현을 추구한다. 조경 디자인 그룹 ‘자연감각’의 공동 설립자이며, 현재 자연감각은 HEA, 오픈니스 스튜디오, 건국조경, 식물감각 네 개의 회사가 공유하는 브랜드십으로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