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월간 환경과조경

월간 환경과조경
[우먼스케이프] 메리앤 노스의 풍경 속 두 가지 진실
  • 환경과조경 2026년 2월호

위텐이(Yu Tianyi)는 영국 런던 큐가든 왕립식물원에서 석사 학위를 준비 중인 식물학도였다. 세밀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틈나는 대로 큐가든의 ‘메리앤 노스 갤러리’를 찾았다. 그곳엔 832점의 식물화가 빼곡하게 걸려 있다. 모두 열대 식물을 그린 것이므로 총천연색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다. 위텐이의 시선은 그중 한 그림―624번 그림―에서 멈췄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 속의 작고 파란 열매에 시선이 멎은 것이다. 그림의 제목을 보니 “보르네오 사라왁 마탕숲의 신기한 식물들”이라고 쓰여 있었다. 보르네오의 식생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모르는 열매였다. 위텐이는 그 열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학술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림만으로는 부족하고 실물이나 표본이 필요했다. 큐의 광대한 표본관에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약 700만 점의 표본이 있다. 그 표본과 메리앤의 그림을 일일이 비교했다. 물론 7백만 종과 다 비교한 것은 아니고 ‘사라왁’에서 수집한 식물로 조사 범위를 좁혔다. 그리고 마침내 맞는 표본을 찾아냈다. 1973년에 누군가 수집해 표본실에 저장해 두었으나 아직 확인되지 않은 식물이었다. 그 표본은 메리앤의 그림과 완벽히 일치했다. 이제 증거를 찾았으니 표본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2021년, 위텐이는 논문을 발표해 새로 확인된 종에 메리앤 노스의 이름을 붙였다. 카살리아 노르티아나(Chassalia northiana). 이로써 메리앤 노스의 이름에 따라 명명된 식물이 모두 다섯 종이 되었다.(각주 1)

 

wo2fe01.jpg
메리앤 노스, 1877년 스리랑카에서 ⒸRBG Kew

 

 

메리앤 노스는 누구였나

메리앤 노스(Marianne North)(1830~1890)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 탐험가, 식물연구가였다. 부유한 상류층에서 태어나 풍족하고 걱정 없는 시절을 보냈다. 말 타기, 그림 공부, 음악 공부, 책 읽기, 차 마시기 그리고 정원 여행으로 이루어진 삶이었다. 아버지가 식물을 좋아했으므로 왕립식물원 큐가든도 자주 찾았다. 어느 날 메리앤은 큐가든 원장인 윌리엄 후커(William Hooker) 박사로부터 선홍색의 신기한 꽃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선물로 받았다. 암헤르스티아 노빌리스(Amherstia nobilis)라는 나무인데 그때 마침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고 한다. 1820년대에 버마, 지금의 미얀마에서 도입된 희귀종으로, 몇 십 년 만에 성공적으로 개화한 것이다.

 

메리앤은 그렇게 아름다운 꽃은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그때 열대 지방에 가서 그 식물을 직접 보고 싶다는 염원을 품게 된다. 아버지의 휴가 기간이 충분할 때 함께 가기로 약속했지만, 그는 끝내 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무렵 지극히 사랑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딸에게 “아버지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어머니의 당부가 아니었어도 아버지 프레더릭 노스(Frederick North) 경은 메리앤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정치가였던 그는 의회 휴회 기간이나 의석을 잃은 시기마다 딸과 함께 유럽과 근동 지역을 여행하며 몇 달씩 시간을 보냈다. 유럽 전역을 여행했고, 지중해와 북아프리카까지 함께 갔다. 알프스 등반까지 갔는데, 산길에서 낙상한 아버지는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메리앤에겐 삶의 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홀로 남은 메리앤은 깊은 슬픔에 잠겨 한동안 방향을 잃었다. 영국 사회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사교 모임에 수없이 초대했지만, 메리앤에게 사교 모임은 고역이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의미 없는 한담은 혐오했다. 어느 날 이복 언니가 놀러 와 여러 시간 수다를 떨다 간 후 속상해서 펑펑 울었다고 자서전에 기록까지 남겼다. 그녀가 붙잡은 것은 그림이었다. 특히 유화였다. 메리앤은 마치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위스키에 중독되듯” 유화에 중독됐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미국에서 온 친지가 함께 미국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초대를 한 것이 다. 그때 메리앤이 40세에 미혼, 당시 표현으로 노처녀였다. 아버지가 대대로 내려오는 저택과 적지 않은 재산을 물려주었기에 여행 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런던의 아파트만 남겨두고 저택을 팔았다. 영국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영국은 메리앤에겐 춥고 지루 하고 피곤한 나라였다. 그녀는 아무 망설임 없이 미국행 배에 올랐다.  


그 여행을 시작으로 메리앤 노스의 세계 이동이 시작되어 15년 동안 미국에서 자메이카로, 자메이카에서 브라질로, 보르네오, 자바, 인도, 실론, 스리랑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그리고 세이셸 군도까지 이어졌다. 5대륙 11개국을 혼자 여행한 것이다. 가는 곳마다 메리앤은 가장 먼저 화구를 꺼냈다. 매일 스케치하고 유화를 그렸다. 그는 혼자 움직였지만 결코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은 아니었다. 


메리앤이 여행한 국가 대부분이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다. 가는 곳마다 메리앤보다 추천장이 먼 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고, 배에서 내리면 누군가 마중을 나와 일급 호텔이나 고위 관료의 저택으로 모셔갔다. 총독, 식민지 관리, 군인, 선교사, 식물학자로 연결되는 촘촘한 네트워크가 메리앤을 맞았고 그들을 통해 숙소뿐 아니라 안전과 접근 권한도 보장되었다. 밀림으로 깊숙이 들어갈 때가 많았는데 그때도 보호 인력, 안내 인력을 늘 제공받았다. 한 곳에 평균 일 년 이상 머물렀으므로 넓은 정원이 있는 집을 임대하고 현지인 하인을 고용했다. 그리고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만 전념했다. 


wo2fe03.jpeg
메리앤 노스 갤러리

 

메리앤 노스의 그림에 담긴 다윈의 비전 

메리앤 노스의 그림은 여러 측면에서 남다르다. 우선 식물화를 유화로 그린 것이 수채화로 그리 는 기존 식물화 기법과 달랐다. 그리고 분류학적 관심에 기반을 둔 식물 재현의 엄격한 관례에서 도 벗어났다. 보통 식물화는 아무 배경 없이 한 식물의 특징만 정교하게 재현하는 방식을 쓴다. 그러나 메리앤 노스는 식물을 본래의 서식 환경과 함께 그렸다. 그래서 한 식물이 다른 식물과 얽히 고설킨 장면이 허다하다. 배경으로 산도 보이고 강도 보이고 때로는 도시와 인물도 함께 그려 넣었기에 식물화인지 풍경화인지 경계가 모호했다. 미술사에선 식물화로 여겨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식물학에선 식물화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커다란 혁신이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정교하게 그린 식물 뒤에 날카로운 과학적 분석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 다. 누구보다도 다윈이 먼저 알아보았다. 자신의 이론이 그림이 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이후―그때 메리앤은 29세였다― 사람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 각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메리앤 노스는 다윈의 책을 읽고 깊이 영향 받았을 뿐 아니라 가족 배 경을 통해 다윈과 개인적으로도 아는 사이였다. 적응과 생존이라는 다윈의 이론에 대한 메리앤의 관심은 그의 자서전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메리앤은 식물의 성장 방식과 환경적 특성 사이에 상 관관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고, 각 식물이 자라는 환경의 특성, 식물이 맞서야 하는 역경, 다른 식 물과의 경쟁, 식물이 생존을 위해 개발한 다양하고 놀라운 전략을 화폭에 담아냈다. 획기적이었다. 


1877년 메리앤은 떠난 지 거의 십 년 만에 일시 귀국했다. 그동안 완성한 작품을 정리해서 전 시회를 열었다.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더 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에서 찬사를 받았다. 전시 회를 마치고 그림을 안전하게 보관한 다음 메리앤은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 목적지는 인도였다. 


인도에서 2년을 보내고 1879년 다시 귀국해 두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그때 「팔몰 가제트(Pall Mall Gazette)」에 메리앤의 그림이 큐가든의 왕립식물원에 영구히 보존되는 게 맞다는 논지의 기사가 실 렸다. 그 기사를 읽은 메리앤은 곧 행동에 들어갔다. 당시 큐가든을 책임지고 있던 조지프 후커(Joseph Hooker) 경에게 편지를 보냈다. ‘메리앤 노스 갤러리’ 프로젝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림 을 모두 큐가든에 기증할 뿐 아니라 그 많은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선 별도의 전시 공간이 필요할 것이므로 갤러리 신축 비용도 메리앤이 모두 맡겠다고 제안했다. 조지프 후커 경은 전적으로 동의 했고 곧 큐가든에 적절한 공간을 찾고 건축가를 물색했다. 


그러던 중 메리앤은 다윈의 초대를 받게 된다. 당시 다윈은 칠순의 노인이었다. “내가 그대를 방 문해야 마땅하지만, 계단을 오를 수 없으니 왕래해주시면 감사하겠다”라는 전언을 받고 단숨에 달려갔다. 그때 다윈은 메리앤에게 말했다. “호주에 가세요. 호주의 식생은 다른 어떤 나라와도 전 혀 다르니, 직접 보고 그려보기 전에는 세계의 식생을 다 묘사했다고 할 수 없어요.” 그 말을 들은 메리앤은 마치 왕명을 받은 듯 즉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메리앤은 호주에서 202일을 보내면서 총 80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어 뉴질랜드, 남아프리카를 거쳐 잠시 귀국했다가 당시 거의 아무도 찾지 않았던 세이셸 군도까지 갔다. 온 세상을 다 보고 온 세상의 식물을 다 그려야 한다는 다윈의 바람에 부응하려던 것이었을까? 그러는 사이 건강이 나빠졌다. 세이셸 군도에서 미국을 거쳐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염병을 얻어 롱아일랜드에 격리되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귀국했다. 


wo2fe05.jpg
호주 서부의 밀림 다윈의 권고로 찾아간 곳이다

 

마지막 여정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잠시 회복한 뒤 이번엔 칠레로 떠난다. 그사이 갤러리가 완성되어 전시할 그림을 정리하던 중 칠레 원산의 아라우카리아 아라우카나(Araucaria araucana)라는 나무를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메리앤은 다시 망설임 없이 행장을 꾸려 칠레로 떠 났다. 영국에 그 나무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1795년에 칠레에서 영국으로 도입해 번식에 성공, 전 유럽으로 퍼져 공원이나 식물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나무였다. 더운 나라에서 왔지만 고산 지대에서 서식하던 나무여서 유럽 기후에 문제없이 적응했다. 다만 원산지가 칠레라는 것 외에 자연 서식처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메리앤은 본래 어떤 환경에서 이 나무가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림으로 그려 남겨야 했다. 


칠레에서는 석 달가량 머물렀다. 안데스 산맥과 나후엘부타(Nahuelbuta) 산맥에 서식하는 나무라 서 찾아가는 길이 험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이미 산맥 개간이 시작된 지 오래여서 나무가 있 기는 한데 오히려 유럽 공원에서 보았던 나무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농장과 목축지를 얻기 위 해 대대적인 벌목이 진행되어 훼손된 숲을 목격했고, 그걸 그대로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은 19세기 삼림 훼손의 초기 증거로 매우 소중하다. 참고로 칠레 정부는 2008년에 이르러 이 나무를 위기종으로 지정했으며 벌채 금지령을 내리고 국립공원으로 보호하기 시작했다. 


다 이루었다 

이번엔 귀국길을 서둘렀다. 갤러리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 이었다. 귀국해서 2년 정도는 컬렉션 준비에 전념했다. 그림 천여 점 중 832점을 선발하고 지역별로 구분해 일련번호를 매기는 작업까지 마쳤다. 목표한 바를 다 이룬 것이다. 그 뒤로 1890년에 세상을 떠나 기까지 4년 남짓 남은 시간은 자서전 집필과 정원 가꾸기로 보냈다. 메리앤은 이렇게 자신의 삶을 정성스럽게 마무리하고 만 60세에 눈을 감았다. 


‘우먼스케이프’를 쓰며 유명 인사들의 삶을 추적하는 동안 늘 느 끼는 것이 있었다. 어디에도 그저 아름답고 조화로운 삶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번 글의 주인공 메리앤 노스는 갈등 없는 삶을 살았던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니 개인적 갈등보다는 오히려 인류 문명이 지닌 거대한 모순과 만나게 됐다. 메리앤 노스가 그린 아름답고 화려한 열대의 풍경과 식물 속에서 우리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식민제국주의와 과학적, 문화적 업적 사이의 모순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화폭에 담은 과학이라 할 수 있는 830여 점의 그림이 지금껏 보 존되어 식물학뿐 아니라 생태학, 지리학에서 도시 문화 연구까지 여 러 분야의 연구를 위한 다양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식민 정책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다윈의 혁명적 이론 도 식민지의 네트워크 없이는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학문적, 과학기술적 성과가 있었으니 식민제국주의의 범죄는 눈감아 줘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각 민족의 고유 문화와 자주성, 인권도 똑같이 중요하다. 공과를 상쇄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인류의 길은 늘 이렇게 모순 속에서 전진과 후퇴를 거듭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각주 정리

1. 니포포이아 노르티아이에(Kniphofia northiae , 남아프리카), 네펜테스 노르티아나(Nepenthes northiana , 보르네오), 크리눔 노르티아눔(Crinum northianum , 보르네오), 카살리아 노르티아나 (Chassalia northiana , 보르네오, 2021년 명명), 노르티아 세이켈라나(Northia seychellana , 세이셸)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