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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환경과조경

월간 환경과조경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자연이 자연스럽게 있어줄 때 가장 큰 위로를 받았다
  • 환경과조경 2026년 3월호

춥지 않으면 속죄하는 마음으로 엄마와 동생과 함께 집을 나서곤 했다. 배가 고프지 않을 때까지만 먹자는 약속을 저버린 날들이면 특히, 노곤한 몸을 반강제로 일으켰다. 집 주변에 걸을 만한 곳이 없어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주택가를 빠져나와 집 앞 큰길에서 왼쪽으로 향하면 천변 산책로로 갈 수 있다. 말 그대로 걷거나 뛰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라 산보하기엔 좋지만, 여름밤이면 모기 떼와 벌레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애매한 계절이면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길을 택했다. 목적지의 이름이 어마어마하다. 무려 ‘지식의 꽃밭’.

 

이렇게 부담스러운 작명은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특정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면 진입이 불가할 것 같았다. 아이큐 150 이하는 출입할 수 없다든가, 곳곳에 상식을 시험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든가. 이곳을 새로운 산책 코스로 발굴한 사람이 엄마와 동생이었는데, 이름을 듣고 경악한 날 본 동생이 나중에 도서관이 들어설 땅이라 그런 것 같다며 안심시켰다.

 

처음으로 찾은 지식의 꽃밭은 꽃밭이라기보다 식물이 자유롭게 자라난 들판처럼 보였다. 바닥은 거친 흙이고 3m 높이 담장―이라고 부르기엔 좀 머쓱하고 사실 공사장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 설치한 패널에 가깝다―이서 있다. 야생적이라는 인상은 꽃이 심긴 모습에서 비롯된다. 섬세한 식재 계획에 따라 구역별로 심었다기보다는 무더기로 넓게 심긴 식물 군락이 자유롭게 퍼지며 자라다가 다른 군락과 만나 경계 없이 섞이는 형태다. 식물의 키도 들쭉날쭉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와 유지‧관리 비용을 따지면 현명한 처사다. 길과 식물이 심긴 공간을 구분하는 울타리나 경계석이 따로 없다. 시골 할머니 댁을 오갈 때 본, 논도 아니고 밭도 아니고 공터도 아닌, 우연히 날아온 씨앗에서 자라난 식물들이 번성하던 땅들을 닮았다.

 

키 큰 나무가 단 한 그루도 없기 때문에 그늘이 없다는 게 단점이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에 남은 풍경은 알록달록한 가을 모습이 대부분이다. 황화코스모스, 백일홍, 맨드라미, 해바라기가 가득했고, 요새 보기 힘든 나비와 벌들이 꽤나 날아다녔다. 나와 동생은 그곳에서 꿀을 마시는 벌새 사진을 여러 장 찍었고,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피사체가 벌새와 꼭 닮은 박각시나방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뒤로 우리처럼 벌새라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종종 봤지만, 나와 동생 모두 내향적이라 사실을 정정해주진 못했다. 돗자리에 앉은 부모와 어린아이, 강아지와 함께 달리는 견주, 출처가 불분명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떠는 어르신들을 자주 봤다.

 

사람들은 꽃밭을 하염없이 걷는다. 넓지 않은 데다 길이라곤 꽃밭 사이를 가로지르는 원형의 순환 산책로가 전부라,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처럼 꽃밭을 가운데 둔 긴 행렬이 빙빙 돌며 이어진다. 종교 의식처럼 기이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와 동생과 엄마도 그 대열에 합류한다. 짧아서 다 도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은 길을, 울퉁불퉁하고 군데군데 돌멩이가 섞인 길을, 비슷비슷한 풍경의 연속일 뿐인 길을 걷고 또 걸어 한 시간을 채운다. 그 광경이 고등학생 시절 급식을 다 먹은 뒤 소화를 시켜야 한다며 운동장 둘레를 회전초밥 레일 위의 초밥처럼 빙글빙글 돌던 모습을 닮았다고 생각한 뒤로는, 꽃밭을 걷는 사람들이 좀 절실해보였다. 산책로를 찾아 전전하는 떠돌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식의 꽃밭을 찾을 때마다 열린송현 녹지광장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건물이 들어서면 사라질 시한부 여백의 땅. 2030년 지식의 꽃밭 자리에는 동대문 서울시립도서관이 지어질 예정이다. 도서관이라는 문화 시설이 너무 탐나기에 차마이 꽃밭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못하겠다. 다만 좀 아쉬울 뿐이다. 설계공모 당선작의 조감도를 살펴보니 도서관 건물 옥상에 공원 규모의 녹지가 있지만, 썩 마음에 차진 않는다. 이번 호에 인터뷰한 김선미 기자(동아일보)는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삶이 헝클어져 있어서, 회복의 시간이 필요해서, 정원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자연이 자연스럽게 있어줄 때 가장 큰 위로를 받았다(각주 1)고 한다. 나도 같은 마음이라, 그래서 인위적인 면이 없는 이 꽃밭이 사라지는 게 서운한가 보다. 별 수 없으니 지겨울 정도로 실컷 걷고 또 걸을 작정이다.

 

**각주 정리

1. 김선미, “[광화문에서] 정원의 위로와 회복… 나의 국내정원 답사기”, 「동아일보」 2022년 1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