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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환경과조경

월간 환경과조경
[우먼스케이프] 니키 드 생팔, 타로 정원 가는 길
  • 환경과조경 2026년 6월호

도시 풍경을 점령한 나나

마침내 타로 정원에 다녀왔다. 한 번쯤 가 봐야지 했던 곳이어서 연재 글을 계기로 실천에 옮겼다. 타로 정원은 미국계 프랑스 예술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1930~2002)이 평생에 걸쳐 조성한 곳으로, 흔히 트럼프 카드라고도 일컫는 타로 카드의 메이저 아르카나 22장을 입체화한 곳이다. 니키 드 생팔이야말로 ‘우먼스케이프’에 가장 걸맞은 인물인 듯하다. 타로 정원 때문만이 아니다. 니키가 창조한 거대한 원색의 여인상 ‘나나Nana’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첫 나나를 완성한 니키는 나나에게 “세상의 모든 권력을” 위임한다는 주문을 넣었다. 그 주문이 사실이 되었을까? 나나가 주체하지 못할 만큼 터져 나오는 여성성을 시위하며 환희의 춤사위를 펼치면 그곳이 어디건 그 일대를 압도하고 점령한다. 그 도시는 곧 나나의 도시가 된다. 우먼스케이프가 되는 것이다. 독일의 뒤스부르크와 하노버가 대표적인 예다. 처음 도시 광장이나 천변 산책로에 나나상을 세웠을 때는 사회의 저항이 컸다. 하지만 나나 상이 너무 크고, 너무 요란하고, 너무 외설적이라 거부하던 언론과 시민들이 나나를 도시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지금은 나나 앞에서 약속을 잡고 그 주변에서 축제를 벌인다.

 

독일 하노버시가 니키 드 생팔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하노버를 유독 좋아했던 니키는 무려 4백여 점의 작품을 그 도시에 기증했다― 그의 작품을 연구하려면 하노버를 다녀오는 편이 손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토스카나에 있는 타로 정원을 찾은 까닭은 그 정원이 밀교라는 분명한 서사를 가진 정원이기 때문이다. 그 서사를 어떻게 풀어냈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도 ‘과연 니키드 생팔의 요란한 조형물을 예술이라 할 수 있나?’라는 스스로의 물음에 답을 구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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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의 ‘나나’ 세 자매 ⒸBärbel Miemietz/Wikimedia CC BY-SA 4.0

 

 

타로 정원 가는 길

다녀오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가는 길이 하루 반나절이었다. 막상 타로 정원에서 보낸 시간은 반나절 남짓,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데 또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니키와 수많은 협력자들이 30년의 세월에 걸쳐 만든 곳, 니키가 제 몸을 갈아 완성했다는 그곳에 다녀오는 데 고작 사흘이 걸렸다고도 할 수 있다.

 

타로 정원은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카팔비오라는 지역에 있다. 로마 공항에서 기차를 세 번 갈아타고 카팔비오역까지 가야 한다. 역까지는 별 문제가 없는데 숙소까지 가는 게 쉽지 않다. 타로 정원은 워낙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고 주변에 올리브 농장과 밀밭 외에는 관광 인프라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정원에서 4㎞ 정도 떨어진 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로마 공항에서 차를 빌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사전에 조사했을 땐 분명 기차 여행이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카팔비오 역에 내려보니 인적이 드문 시골 역이었다. 버스와 택시가 있지만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버스는 하루에 두 어 번 운행하고 택시는 개인이 아르바이트 겸 운영하는 터라 전화로 불러야 한다. 전화한 지 45분만에야 나타난 택시는 나를 엉뚱한 마을에 던져놓고 25유로를 갈취한 뒤 재빨리 사라졌다. 구글맵으로 찾아보니 숙소까지 남은 거리가 8㎞였다. 이동 수단은 달리 없었다. 멘탈이 무너진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난생 처음 히치하이킹을 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조경 회사의 1톤 트럭을 얻어 타고 숙소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이튿날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관광지 카팔비오 언덕으로 향했다. 타로 정원으로 바로 가고 싶 었지만 오후 두시 반에 문을 열기 때문에 오전 시간을 때워야 했다. 지도를 보니 숙소가 있는 마 을과 관광지 카팔비오 언덕, 그리고 타로 정원이 거의 이등변 삼각형을 그렸다. 카팔비오는 중세 의 자취가 남아 있는 꽤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중세 요새의 맞은편 테라스에서 뜻하지 않게 나나 를 만났다. 흰 바탕에 화려한 반짝이 무늬를 입은 ‘검은 나나’가 춤사위를 펼치고 있었다. 나나는 이 외진 중세 언덕의 풍경도 이미 점령한 것이다.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여성이 그 주변을 청소하 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성당 바닥을 빗질하는 것처럼 경건해 보였다. 사진을 찍는데 그 자원봉 사자가 째려본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스러운 아침 의식을 방해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다행히 다른 관광객이 하나둘씩 나타나 긴장이 풀리고 토스카나 언덕의 아침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 카팔비오 요새에서 타로 정원까지는 7~8㎞ 거리다. 숙소가 있는 마을과는 반대 방향으로 언덕을 내려가야 한다. 이탈리아의 완벽한 버스 앱에 물어보니 버스가 있기는 한데 하루 한 번, 저 녁 때 운행하고, 타로 정원에서 약 1.7㎞ 떨어진 지점에 정류장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 구간은 걸어 가야 한다고 알려줬다. 그러느니,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길이 하나밖에 없어 헤맬 걱정은 없었다. 


중세의 요새를 대충 돌아보고 하산을 시작했다. 카팔비오 마을이 끝나는 어귀에 장이 서 있었다. 거기서 치즈 한 조각, 빵 한 덩어리, 토마토 몇 개와 배 한 개를 사서 배낭에 넣고 수십 년 전 소 풍을 떠날 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신작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좌우로 올리브 농장과 밀밭이 번갈아 나타났다 사라졌다. 보행로도 없고 어디에도 다리쉬임을 할 만한 곳이 없었다. 한국 같으면 상점이며 주점이 여럿 나타났을 텐데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보통 걸음으로 간다면 두 시간이면 족하겠지만 워낙 걸음이 느린 데다 길가에 핀 야생화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대화를 나눌 동행도 없이 혼자 길을 떠났기에 생각은 자연스럽게 니키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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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 벽화’, 1961년, 하노버 슈프렝겔 미술관 소장 ⒸNiki Charitable Art Foundation/VG Bild-Kunst, Bonn 2021

 

파괴와 창조의 동시성: 사격 벽화 티르 

니키 드 생팔을 처음 본 것은 아주 오래 전, 1990년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TV 다큐멘터리에서 어 느 멋진 파리 여성이 벽에 부착된 흰 캔버스를 향해 엽총을 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니키의 쇼킹 한 사격 벽화 ‘티르(Tirs)’가 탄생하는 중이었다. 그 엽기적인 장면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 억이 난다. 다큐를 본 건 1990년대 말이었지만 니키의 사격 회화 연작 자체는 1960년대 초반에 탄생했다. 당시 서구 사회에는 아직 가부장적 권위가 존재했고 알제리 전쟁 등 사회적 폭력도 그 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니키는 그런 사회의 부조리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총을 겨눴다고 후일 회 고했다. 상처받은 영혼의 자기 폭력이었을 것이다. 평론가들은 “내면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했던 혁신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피흘리는 그림”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캔버스에 여러 사물을 부착해 부조를 만든 뒤 순백으로 칠하고, 붉은 물감과 토마토 등으로 채운 자 루를 매달아 놓고 이를 쏘아 맞추면 붉은 물감―때로는 토마토의 과즙―이 줄줄 흘러 즉석 회화를 연출 한다. 얼핏 보면 매우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퍼포먼스인 것 같지만, 실은 파괴와 동시에 새로운 것 이 창조되었다.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때려부수는 데서 그치는 파괴형 퍼포먼스와는 그 궤도가 확 연히 다르다. 이 사격 벽화로 니키는 일약 유명해졌고 파리 예술계에 공식적으로 입문하게 된다. 니키가 엽총을 쏜 것은 분명 분노와 공격심의 발로였다. 한때 『보그』 등 유명 패션 잡지의 표지 모델이었던 이 아름다운 여성의 내면에 어쩌다 이렇게 큰 분노가 쌓였을까? 


니키 드 생팔 

니키의 생애는 예술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20대 중반을 기점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아버 지는 오래된 프랑스 드 생팔 가문의 백작이었고 어머니는 미국 상류 사회의 숙녀였다. 니키가 태 어난 곳은 프랑스였으나 미국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이 시기에 보수적인 가문 규범과 아버지로부 터 받은 성폭력이 트라우마로 누적된다. 18세에 유사한 성장 배경을 가진 동갑내기 해리 매튜스 와 전격 결혼한 뒤 유럽으로 도피했고 거기서 딸을 출산한다. 그 사이 23세가 된 니키는 어느 날 신경쇠약 발작을 일으킨다. 자살 시도 끝에 정신병원에 입원, 열 차례의 전기 충격 치료를 받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니키의 결혼 생활은 그토록 탈출하고자 했던 부모들의 부르주아적 삶의 복사 판이었다. 후일 고백한 것이지만 무의식 깊숙한 곳에 감췄던 기억―11세부터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했던 일― 이 표면으로 떠올랐던 것 같다. 


정신 병동에서 시작한 그림이 탈출구가 되었다. 퇴원 후 둘째를 낳고 익숙한 삶을 다시 이어갔 다. 그러나 이미 알아버린 작업에 대한 열정과 아내, 어머니라는 신분은 공존하기 어려웠다. 여러 해 망설이다가 니키는 결국 가족의 굴레를 벗어나 온전히 예술에 바친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내 렸다. 이혼하고 남편에게 아이들의 양육권을 넘기면서 일상생활을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가족 관계는 평생 유지했다. 사격 벽화는 이혼 직후에 탄생했다. 공동생활의 굴레를 이탈한 사건이 니키 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던 공격성과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여성 정체성의 재구성: 기괴함에서 환희로 

2년 여 동안 수많은 사격 벽화가 탄생했다. 흥분한 파리의 예술계에서는 더 많은 사격 벽화를 원 했지만 니키는 이미 새로운 것에 열중해 있었다. 니키의 프로필 사진을 보면 가장 인상적인 부분 이 시원한 이마다.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그 넓은 이마 뒤에 큰 상상력과 창의적 사고가 감춰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상상력은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나왔다. 1965년 나나가 세 상에 처음 선을 보였다. 둥글게 부푼 배,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작은 머리를 가진 나나는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성적 상징을 부풀린 것처럼 보인다. 여성성을 감추고 부 정하고 혐오할 것인가 아니면 긍정하고 찬미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니키는 후자를 선택했다. 아마도 고대 아즈텍 문명의 여신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다. 고대 여신의 현대판인 이 나나들은 춤을 추거나 물구나무를 서는 등 생동감 넘치고 환희에 찬 자세를 취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나나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나나를 만들기 전 니키는 털실, 천, 종이 반죽 등으로 망가진 인형 같은 여성상을 만들었다. 호 러 영화에나 나올 법한 형상들이었다. 그중 1964년에 만든 아상블라주―잡동사니를 모아 만든 입체 콜라 주― ‘여성들의 제단’이 인상적이다. 세 폭으로 이루어진 제단의 붉은 바탕에 제물처럼 바쳐지는 여 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장 중심에는 흰 옷을 입은 신부가 서 있는데, 가슴 부분이 열려 있고 그 안에는 봉헌물처럼 장식된 심장이 들어 있다. 출산하는 여성의 모습과 괴물 형상이 합쳐져 섬뜩해지는 작품이다. 전통적인 여성 역할과 그들이 겪는 고통을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게 그려낸 것이다. 


바로 이듬해 기적처럼 환희의 여성상 나나가 탄생한다. 깊게 상처받은 영혼이 거치는 과정―자기 혐오, 자기 학대, 자기 파괴―에 머물지 않고 환희의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엄청난 에너지와 정 신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혹시 타로 정원이 바로 그런 여정,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고 환희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인가? 그런데 왜 하필 타로일까? 타로에 대해서 많이 들어 보기는 했지만 별 관심이 없던 나는 그저 시간 많은 사람들의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니키가 그토록 만들고 싶던 정원이었다고 하니 뭔가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는 별 준비 없이 ‘타로 정원에 직접 가서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자’라는 카드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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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 정원 설계도, 채석 석판화, 1991년, 하노버 슈프렝겔 미술관 소장 ⒸNiki Charitable Art Foundation/VG Bild-Kunst, Bonn 2021

 

마침내 타로 정원 

거의 네 시간을 걸어 타로 정원에 도착했을 때는 발이 너무 아파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이런 걸 두고 미련하다고 하던가? 쉬엄쉬엄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벤치가 곳곳에 놓여 있어 우선 앉아서 다리쉬임을 했다. 입구에서 배치도를 하나 받았는데, 다른 정원의 배치도와 달랐다. 니키의 손 그림으로 꼬불꼬불 개미 동굴을 그려 놓은 것 같은데, I에서 XXI번까지 번호만 매겨져 있고 범례도, 설명도 없었다. 다만 오른쪽 하단에 의미심장한 구절이 써있었다. “광대(the Fool)는 어디에 있을까?” 얼른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메이저 아르카나 카드 0번에 해당하는 것이 광대 카드라고 나왔다. 배치도를 보니 0번은 제일 꼭대기에 있었다.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타로 정원에서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된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