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당
1) 개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당은 조경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수경요소로 취급되어 왔다. 특히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면서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게 되고, 주변환경과의 경관적 맥락성을 가지고 조성된다는 이유 때문에 지당은 중요한 시각적 대상이 되어왔다.
기원전 2500여 년경에 조성된 이집트 주택정원의 썬큰폰드를 비롯해서 고대 로마시대의 아드리아누스빌라에 조성된 카노푸스, 인도 타지마할의 중심축선 상에 조성된 직선형 폰드, 스페인 알함브라궁원 깊숙한 곳에 있는 도금양(myrtle)의 중정에 만들어진 폰드, 프랑스 베르사이유궁원의 워터빠뜨레(water parterre), 중국 수저우 쭈오쩡위웬(拙政園)에 조성된 연당, 일본 우지 뵤도인(平等院)의 정토지(淨土池) 등을 보면 정원에서 지당이라는 것이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어찌하여 작정자가 지당이라는 형식의 수경관을 바로 그곳에 조성하였는지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실로 정원에서 지당이라는 수경관은 없어서는 안 될 막중한 비중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삼국시대부터 조경공간에 못을 만들어왔음은 『삼국사기』 등과 같은 고문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 경주의 안압지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수경관조성기법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손색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본의 정원에 조성된 지당의 형식이나 상세를 보면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조성된 수경관형식이 전이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당시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지당 조성 기술이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추고천황(推古天皇) 20년조(612)에 “백제에서 귀화한 노자공(路子工)이 궁실 남쪽 뜨락에 수미산을 꾸미고 오교를 놓았다”는 기록(김용기, 1996:406에서 재인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지당은 상당부분이 그 원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형되었거나 멸실되고 말았으니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불국사의 구품연지는 복원되지 못한 채 묻혀 있고, 궁남지는 변형의 정도가 심하여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향후 우리나라에 조성되었던 지당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를 통해서 과거에 조성되었던 우수한 지당을 발굴, 복원함으로써 옛 모습을 제대로 갖춘 정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2) 지당의 형태
곡지형(曲池形)
삼국시대의 지당가운데에서 곡지형태를 가진 것으로는 경주의 안압지, 구황동원지, 용강동원지가 대표적이다.
안압지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조영된 못으로 시대가 흐르면서 황폐되어 있던 것을 1975년 3월 24일부터 약 1년간에 걸쳐서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지금은 원형을 복원하여 놓은 상태이다. 우리나라 고대 지당 가운데에서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압지는 땅을 파내어 물을 끌어들이고 그 파낸 흙으로 가산(假山)을 만들고 섬을 쌓아 만든 인공지로, 그것의 전체 범위는 동서 200m, 남북 180m로 거의 방형구역 안에 조성되어 있으며, 못의 전체 면적은 15,658㎡이다. 안압지는 전체적으로 ‘ㄱ’자 형을 하고 있고,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직선과 곡선이 다양한 변화를 가지며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호안을 조성하였는데(고경희, 1989:21-22), 못을 중심으로 동쪽과 북쪽 편은 자연스러운 곡선의 구릉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서쪽과 남쪽 편은 건물지로 조성되어 있어서 대조적인 경관을 보이고 있다.
안압지 조성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구황동원지(九黃洞園池)와 용강동원지(龍江洞園池)는 안압지와 같이 굴곡진 호안으로 되어있으며, 지중에 섬을 두고 있어 안압지와 유사한 형식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황동원지는 남북최대길이 46.3m, 동서최대너비 26.1m 규모의 곡지로서 대체적인 평면형태는 동북우가 말각된 장방형에 가깝다. 호안석축 내부의 면적은 1,049㎡(약 317평)로 측정되었다. 못 안에는 대소 2개의 섬이 남북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8:69,78). 용강동원지 역시 굴곡진 호안으로 조성된 곡지로, 동쪽 호안이 38.6m, 서쪽 호안이 65m, 남쪽 호안이 33m로 되어 있다. 못 안에는 2개의 인공섬이 있으며, 아래쪽 섬 동측부에서 교각의 적심석으로 보이는 유구가 노출되어 교량에 의해 중도와 동쪽 호안에 접한 건물이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백지성, 하진호, 2002:40).
부여의 궁남지(宮南池)는 원형의 변형 정도가 심하여 원래의 형태를 알 수가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도면을 보면 이 못 역시 곡지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 35년(634)에 조성되었으니 안압지나 용강동, 구황동원지 등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못보다 그 조성시기가 훨씬 앞선다.
고구려시대에 조성된 정릉사의 진주지 역시 호안이 굴곡진 형태를 가진 곡지형 지당이다. 진주지의 못 안에는 4개의 섬이 있어 신선사상에 근거하여 조성된 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주지에서는 탄화된 연꽃씨가 발견되어서 연지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못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고대에 조성된 지당을 보면 곡지형 못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 당시로서는 이러한 곡지형 못의 조성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축조연대로 볼 때, 이러한 신라, 백제, 고구려시대의 곡지형 못이 일본에 축조된 못의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이러한 곡지형 못이 고려, 조선시대로 가면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편, 지금까지 경주 불국사의 구품연지는 타원형 못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발굴조사도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구품연지 역시 곡지에 가까운 타원형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품연지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조성된 것으로 발굴조사결과 연을 심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정토정원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구품연지라는 명칭이 정토신앙의 구품연대에서 연유한 것이고 그 위치가 범영루 아래에 있어 안양루 올라가는 연화·칠보교와 연관이 있음은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구품연지는 동서장축 39.5m, 남북장축 25.5m, 깊이 2~3m 정도 되는 연지로 연못 주변에는 큰 돌을 쌓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