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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정원] 일본의 명원26 메이지 시대의 정원(1)
  • 에코스케이프 2016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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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채에서 바라다본 정원의 전경(멀리 보이는 산은 히가시야마)

 

 

개관

메이지 시대明治時代는 메이지유신 이후 메이지 천황이 통치하던 시기로 186813일 왕정복고 대호령王政復古大號令에 의해 메이지 정부가 수립된 이래 메이지 천황이 죽는 1912730일까지 44년의 시간적 범위를 가진다.1 이 시기에 메이지정부는 근대화 정책과 중앙집권화 정책을 폈고 부국강병 및 식산흥업 정책殖産興業政策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메이지 정부는 영주적 토지 소유제를 폐지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유상 분배했으며 지조개정地租改正을 통해 국가 재정을 충실히 다져 나갔다. 또한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해외에 견물사절단과 유학생을 대대적으로 파견했다. 아울러 서양 기술자들을 초빙해 서양의 근대화된 제도와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습득하는 데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일본의 근대화를 앞당길 수 있었다.

 

건축분야에서도 서구의 진보적 건축문화를 도입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심지어 유럽의 건축기술 도입을 위해 관청 관계의 건물을 석조나 벽돌조의 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권고할 정도였다. 정원 역시 이러한 서양 건축에 어울리는 서양식 정원이 유행하는 경향을 띠었다. 그러나 서양문화의 급진적인 도입은 일본의 전통문화를 밀어내는 풍조를 촉발해 일본의 전통문화가 경시되는 시대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건축계와 조경계의 선지식들은 이러한 양풍화洋風化 속에서도 일본의 전통건축과 전통정원을 지키고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했다. 건축과 정원의 조영에서도 일본성을 지키고자 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렇게 일본의 전통성을 지키고자 노력한 작정가들 가운데에서도 메이지 시대부터 타이쇼大正 시대에 걸쳐서 활약한 우에지植治

2 오가와 지헤에小川治兵衛는 특히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지헤에는 만엔万延 원년(1860), 교토부京都府 오토쿠니군乙訓郡 코우타리 마을神足村3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도 시대부터 일본정원 작정의 정통성을 지켜온 교토 오가와 가문의 데릴사위婿養{로 들어가 메이지 12년에 오가와 가문의 7대목으로 지명되었다. 우에지植治는 오가와 가문의 옥호屋戶인데, 지헤에를 통칭하는 말로 쓰였다. 지헤에에 대한 가문의 신뢰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작풍은 일본의 전통문화를 내팽개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당시의 정·재계 유력자와 문화인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그는 배후의 경관을 차경해서 정원의 배경으로 삼고, 지천池泉()과 계류를 중심으로 정원을 만들었다. 밝고 개방적인 넓은 뜰과 소담한 경관이 보이는 다실, 경쾌한 물의 흐름, 원지형의 부드러운 기복을 그대로 살리는 등 에도 시대의 정원과는 또 다른 신선한 감각을 정원에 도입했다. 특히 그는 교토의 동산지구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별장인 무린안無鄰庵을 조성한 경력이 이 지역에 별장을 가진 유력자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우에지 지헤에에게 정원을 맡긴 대표적인 인물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산현유붕), 스미토모 하루 미도리住友春翆(주우춘취), 노무라 호토쿠안野村得庵(야춘득암)4 등이 있다. 그의 활약이 관동지방에 영향을 미치면서 근대 정원의 문도 열렸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헤에는 일본정원사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무린안 정원, 헤이안진구平安神宮 정원, 다이류산조對龍山莊 정원, 스미토모가住友家 정원, 마루야마코엔円山公園, 헤키운조碧雲莊 정원, 큐후루카와테이엔旧古河庭園이 있다西桂(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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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린안(無鄰庵) 배치도(출처: 안내 팸플릿)

 

무린안 정원

무린안無鄰庵은 메이지明治유신의 일등공신元勳(원훈)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가 교토에 만든 별저의 정원이다. 아리토모는 생전에 도쿄, 오오이소大磯(대기), 오다와라小田原(소전원) 교토 등지에 별장을 경영했던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도쿄의 친잔쇼春山荘(춘산장)와 무린안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岡野敏之(1994). 무린안 정원은 그 당시 최고의 작정가인 오가와 지헤에小川治兵衛가 아리토모의 설계에 따라 작정했다. 정원 요소요소에 지헤에가 당시 사용했던 작법이 고스란히 발견되는 것을 보면 아리토모의 의도와 지헤에의 작정 기법이 동반돼 만들어진 정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5 지헤에는 아리토모를 만나면서 시서화詩書畵와 골동품을 보는 눈이 떠지고 풍류를 즐기는 아취雅趣를 갖게 됐다岡野敏之(1994). 이것을 보면 아리토모는 정치가인 동시에 예술가적 성향을 지닌 풍류객이었음이 분명하다.

 

메이지 24(1891) 5월 총리대신을 사임한 아리토모는 교토 니조 키야초二条木屋町의 스미토모가住友家의 별저를 사들여 교토로 거처를 옮긴다. 이 별저는 부지 안에 타카세강高瀬川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리토모는 이곳 별저에 무린안無鄰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일찍이 케이오慶応 3(1867) 30세의 나이로 결혼한 아리토모는 조슈 요시다長州吉田의 청수산淸水山 기슭에 별저를 설계하고 무린안이라고 호를 붙인 적이 있었다. 아리토모는 무린안이라는 옥호를 교토의 별저에 다시 사용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리토모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 27(1894) 아리토모는 다시 육군에 복귀해서 제1군 지령관指令官으로 만주에 출정한다. 그가 출정한 사이에 현재의 무린안이 들어선 자리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이 땅은 당시 시가 소유했던 시유지였다. 공사는 아리토모와 동향 사람同鄕人인사업가 하라슈 자부로久原庄三郞가 맡아서 진행했다. 자부로는 훗날 아리토모에게 당시의 유명한 작정가 오가와 지헤에小川治兵衛를 소개하게 된다. 그때의 인연이 지금의 무린안 정원을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을 보면 아리토모와 지헤에는 만나야만 하는 운명을 지녔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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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고산에서 끌어온 수미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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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린안을 구성하는 양관과 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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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채 내부에서 바라다 본 다실

 

 

홍광표는 동국대학교 조경학과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경기도 문화재위원,경상북도 문화재위원을 지냈으며사찰 조경에 심취하여 다양한 연구와 설계를 진행해 왔다현재는 한국전통 정원의 해외 조성에 뜻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저서로 한국의 전통조경한국의 전통수경관정원답사수첩』 등을 펴냈고, “한국 사찰에 현현된 극락정토”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또 한국조경학회 부회장 및 편집위원장한국전통조경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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