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1990년대 초, 이 나라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광풍이 몰아닥쳤던 적이 있었다. 세계적 흐름의 하나가 유입되었다고 볼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이제껏 어깨너머로 훔쳐보고, 아쉬워하기만 했던 그림책(?)을 거금을 들여서라도 가질 수 있다는 기쁨이 더 큰 때였다. 더불어 일부 유학파나 조경가라 자부하는 이들의 전유물로 느껴졌던 관념적, 사상적 흐름이 우리의 곁으로 파고들던 때이기도 했다. 특히 이때 미국의 여러 예술경향들이 우리나라에 속속 소개되었고 이런 와중에 조경계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새로운 그림하나가 던져졌다. 당시 건축 뿐만 아니라 조경계에서도 누구나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했고 누구나 그 논의의 중심에 서기를 원했다. 모던을 겪지 않았던 우리에게 포스트모던은 무의미하다는 어느 분의 말씀도 이러한 시류를 이겨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필자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 주변을 서성거리기를 즐겼고, 아프리카의 하이에나처럼 논의의 중심에서 흘러나온 몇 점의 고기조각에 희열을 느끼기도 했었다.
이런 와중에 필자의 눈과 귀에는 Emilio Ambasz, Robert Venturi, Richard Ling, Robert Smithson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과 이론이 익숙해졌고, Peter Walker가 즐겨 썼다는 미니멀리즘 역시 비슷한 시기에 마주할 수 있었다. 무수한 헷갈림과 호기심속에 더욱 충격이었던 것은 Robert Smithson의 “Spiral Zetty"였다. 분홍빛 호수에 긴 나선형의 울퉁불퉁한 길은 그 근원이 땅에서인지 호수속인지를 헷갈리게 하는 대작이었다. 이러한 만남은 호기심에 호기심을 불러 유사 개념인 개념미술, Specific Art, Minimal Art, Performance 등으로까지 그 영역은 확대되어갔다.
본고에서 말하고자 하는 Robert Smithson을 살피기전에 먼저 당시의 미술계의 상황과 대지미술이라 일컬어지는 Earth Work 혹은 Land Art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그 순서이겠다.
대지예술은 1967년 미국에서 처음 시도되었던 운동으로 대지예술가들은 미술계의 소비회로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수집가나 화상들을 위한 작품생산을 거부한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 일었다. 자연으로의 회귀의 연속선상에 위치하여 재현된 전시공간이 화랑 내에서 흙, 돌, 소금 등을 사용하여 작품활동을 한 이들은 그들의 작업장을 탈피하여 자연을 그들의 캔버스와 작업장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태도로 다분히 실험적 경향을 띄게 되었고, 지적이고 논리적 개념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실험성 및 태도로 기존의 영감과 직관에 의한 사고 내지는 완결성을 목적으로 하는 관습적인 태도에서 탈피하여 우리의 일상속으로 들어옴으로써 그간 아방가르드 미술과 일반인들 사이의 벽은 허물어지고 매체와 매체간의 새로운 의사소통의 구실을 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랜드아트의 개척자 중 하나인 마이클 헤이저(Michael Heizer)는 네바다 고원에 거대한 참호를 파고,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나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등은 자연에 직접 작업을 하거나 대륙의 공간을 연상시키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들의 궁극적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변하는 형태와 작업의 모든 과정을 수록한 사진, 준비데생, 글, 필름 등이 포함되어졌다. Nancy Holt에 의해 편집된 “The writing of Robert Smithson"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로버스 스미슨(1928~1973)의 작품 “Spiral Zetty" 역시 이러한 경향 속에서 제작되어진 작품으로써, 직경 48.8m, 총길이 457m이며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Salt Lake)의 소금호수 내에 설치되었다. 로버트 스미슨은 모든 현대 문명 현상이 기존의 자연의 흐름과는 다르게 혼돈상태로 향하여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지구보호에 대한 경각심의 하나로 뻗어가는 생명력과 재생능력을 보여주길 원했다. 또한 이러한 자연 속에서의 전시행위 및 연출은 기존의 미술시장에서의 개인적 작품소유에 대한 틀을 깨는 것으로 그 누구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작품을 “소유”할 수는 없게 되었다. 또한 그는 갤러리, 미술관 등 제도적 기관을 일종의 문화적 감옥이라고 표현하였다.
대체로 작가들은 표현의 자유와 함께 자신들 스스로 제도권의 장치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제도권의 장치들이 예술가를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작가가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미술관과 화랑 문화에 복종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 이것은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문화적 감옥을 지지하는 섭리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더 이상 당시의 모더니즘론에 응하지 않은 채, 자연에 대한 이해와 선사시대로 눈을 돌려 그곳의 지식을 섭렵한다. 이런 과정속에 그가 얻는 것은 “있는 자연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연 풍경식 회화의 경관이 아니라 퇴적지, 폐광, 사막, 오염된 강 등 인간의 손길이 닿았던 곳을 찾아다니며 아스팔트, 진흙 등을 이용하여 대상지와 선택 재료가 상호작용할 때의 특성과 속도를 관찰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스파이럴 제티의 경우 그 설치과정이나 그 이후에 일어난 자연적 현상 등은 그대로 노출됨으로써 자연환경과 작품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관계들을-특히 소금의 결정같은- 기록함으로써 다른 해석과 관계설정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가 이러한 작업과정을 통해 그려내고자 한 것은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자연 “실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 병 훈 Lee, Byung Hoon 유림조경기술사사무소 실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알함브라 궁전
지상의 낙원, 혹은 감각의 향연 카를로스 궁전을 지나 어두운 실내 홀로 들어서자 작열하던 태양 빛의 더운 공기는 사라지고 시원한 청량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 ‘대사의 방’을 들어서자 멀리 알바이신 마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흰색 톤이 주조를 이루는 마을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경치를 빌려오는 차경의 수법은 이곳에서 그 빛을 발한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그라나다의 장님이라는 속담이 쉽게 수긍이 간다. ‘대사의 방’에서는 화려한 벽면 장식과 작은 분수가 우리를 압도했다. 많은 관광객들이 머물고 있었지만 보글보글 올라오는 분수의 물소리가 공간의 모든 소음을 흡수해 버렸다. 다시 실내 홀들을 지나 ‘아라야네스 정원’에 들어섰다. 단순하고 절제된 공간이었다. 정원의 연못은 거울처럼 주위의 건축물들과 하늘의 풍경을 잡아내는 스크린과 같았다. 겉으로는 닫힌 정원이지만 하늘을 비추어냄으로서 외부세계와의 소통을 이루어내는 듯하였다. 정원은 무척 감각적이면서도 신과 우주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다시 홀을 지나 사자의 정원을 만날 수 있었다. 실내 공간과 정원 공간, 즉 어두운 홀과 밝은 중정은 대비되고 교차되며 긴장감을 연출한다. 정원 중앙에는 12마리의 사자상들이 물을 내뿜고 있으며, 그 물은 다시 4개의 물길을 따라 흐르고 있다. 정원 외곽에는 124개의 대리석 기둥이 열 지어 서 있어, 정원을 바라보는 시선의 틀을 끊임없이 변화하게 만들었다. 벽면에 섬세한 장식이 이어지는 이 기둥들은 이슬람 지역의 가로에 늘어선 야자수를 연상하도록 만들어졌다 한다. 사자의 정원은 가장 대표적인 이슬람 정원의 원형에 가깝다. 페르시아 양탄자에 새겨져 있는 정원들을 보면 중앙에 분수가 있고 4개의 수로가 정원의 골격을 잡아 주고 있다. 4개의 수로는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기혼, 피손의 문명의 발상지인 4개의 강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상징한다. 낙원이라는 뜻의 paradise는 ‘담을 두른 정원’이라는 뜻의 페르시아어의 pairidaeza가 그리스어를 통해 전해진 말이다. 코란에서 파라다이스는 지상에서 맛보는 낙원은 온갖 감각적 즐거움이 넘쳐 나는 곳이다. 지상의 낙원을 상징한 페르시아 정원에서는 꽃향기가 가득하고, 시원한 그늘이 있고, 마음껏 과일을 따 먹을 수 있는 나무들이 있다. 이곳에서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물이 정원의 중심이 된다. 분수나 가로수는 페르시아 사막 지방에서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로서 이슬람이 그 원조이다. 이슬람 문명은 정원을 하나의 예술의 형태로 끌어올렸으며, 이슬람 문화가 유럽문화권에 전해 준 가장 큰 선물은 ‘정원’일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 외부로 나와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또 다른 낙원인 헤레날리페가 자리 잡고 있다. 알함브라 궁전보다 앞서 지어진 헤레날리페는 여름 별궁으로 식당이나 주거용 방이 없다. 단지 머물고 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알함브라는 ‘붉은 성’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반면, 헤레날리페는 ‘가장 고귀한 정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한 때 이태리인이 이곳을 소유하는 바람에 일부가 이태리식으로 개조되어 원형이 조금 변형되기는 하였지만. 알함브라의 정원과는 또 다른 느낌의 다채로운 정원들이 펼쳐져 있다. 긴 장방형 수로로 꾸며진 중정은 한편의 물과 꽃의 유희를 보는 듯하다.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의 영롱한 소리들이 공간에 퍼지고, 다양한 초화류는 형형색색 공간을 장식하고 있다. 이곳을 지나면 알함브라 궁전이 마주 보이는 전망대를 만나게 되고, 다시 이어지는 작지만 간결한 정원인 사이프러스 정원에 다다르게 된다. 영원한 삶을 상징하는 사이프러스 나무들로 꾸며진 이 정원은 잠시 머물며 정원의 의미를 적합한 곳이다. 그라나다의 왕들은 어두운 사이프러스 숲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과 그 빛을 받으며 부서지는 가는 물줄기를 보면 영원불멸은 소망했을 것이다. 루이 마시농은 헤레날리페의 망루에 있으면 꿈꾸게 된다 했다. 슬프지는 않지만 멜랑코리한 꿈을. 그 꿈들은 실타래처럼 얽히게 된다. 마치 실타래처럼 연결된 정원의 물길처럼. 알함브라에서 헤레날리페에 이르는 지역은 다양한 모습의 정원들이 구석구석 숨겨져 있다. 마치 정원에 관한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것처럼 여러 가지 빛깔이다. 때로는 밝고 경쾌하게, 때로는 고요하고 적막하게. 물의 유희도 다채로움의 극을 보는 듯하다. 이슬람 건축과 장식 그리고 정원은 그라나다의 풍광과 어우러져 잠시도 한 공간도 눈을 떼지 못하도록 우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곳에 머무는 순간순간은 지루함을 거두어도 될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두 자매의 방’의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써 있다. “나는 정원이다. 매일 아침 새로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타난다. 나의 옷을 세심하게 관찰하라. 당신은 장식에 대한 어떤 말보다도 더 깊은 감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아름답지만 애절한 구석이 있다. 이 곳에서 머무르는 동안은 영원함과 소멸, 기쁨과 슬픔의 이미지들이 교차되어 진다. 아마도 그 까닭은 알함브라 궁전이 담고 있는 애절한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 경 진 Zoh, Kyung-Jin 서울시립대학교 건축도시조경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