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 [에디토리얼] 새해를 걸으며
    해피 뉴 이어. 이미 두 달 전에 정해 둔 새해 첫 호 이 지면의 제목은 ‘한국 조경 50주년, 『환경과조경』 40주년을 맞으며’였다. “한국 조경이 쉰 살을 맞는다. 2022년, 한국조경학회 설립 50주년과 『환경과조경』 창간 40주년이 겹치는 해다. 8월 말에는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Re:Public Landscape’를 주제로 내걸고 광주에서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World Congress가 열린다. 한국 조경의 지난 50년을 돌아보며 기록하는 일, 다음 50년을 예비하며 설계하는 일 모두가 중요한 2022년이다.” 이렇게 잔뜩 힘들여 한 문단 쓰고 나니 글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연말 강추위에 얼어붙은 거리를 걷다 돌아왔다. 걸으며 새해를 맞는다. 계속 붕 떠 있는 느낌, 토대가 무너진 허공에 서 있는 기분. 어디가 끝인지 모를 답답하고 막막한 코로나 시대의 긴 터널,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통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유도, 계기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감염된 도시의 어수선한 풍경 속을 목적 없이 걷는 취미 아닌 취미를 가지게 됐다. 몸을 일으키면 저절로 걷게 되고 그냥 걷다 보면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한 희망이 생긴다. 노을을 바라보며 무작정 걸으면 복잡하게 뒤엉킨 습한 생각들이 바람에 바싹 마른다. 두 발과 땅이 대화하는 느낌, 나 자신을 세상으로 여는 느낌. 이동이나 답사처럼 특별한 의도를 갖는 걷기와 달리 그냥 느릿느릿 걷다 어슬렁거리며 떠돌다 옆길로 새는, 우연에 내맡긴 걷기는 시간과 공간에 묶인 신체에 자유를 준다. 어쩌면 걷기보다 걷기에 관한 책에 더 재미를 붙인 건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이론형 인간인지라 닥치는 대로 걷기 책을 모으고 빌리고 읽었다.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같은 책에서는 여러 철학자와 문인의 산책에 얽힌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고통의 순간에 걷고 또 걸은 니체, 바람구두를 신고 세상을 누빈 랭보,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 루소, 자본주의의 아케이드를 소요한 베냐민. 그들의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내려가다 보면 움츠린 몸을 일으키고 운동화 끈을 묶지 않을 수 없다. 걷기와 사유가 교차하는 아름다운 책들을 읽다 보면 도시를 느리게 걸으며 섬세한 풍경을 누리는 것 못지않은 즐거움이 생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이나 크리스토프 라무르의 『걷기의 철학』이 경쾌한 산책이라면,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과 『길 잃기 안내서』는 긴 도보 여행이다.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는 거리로 뛰쳐나온 전위적 발걸음을, 토르비에른 에켈룬의 『두 발의 고독: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에서는 공간과 시간을 제 것으로 장악한 자신감을 만날 수 있다. 급기야 지난 가을학기 대학원 ‘환경미학’ 시간에는 교실을 버리고 거리로 나섰다. ‘걷기의 미학, 도시에서 길을 잃다.’ 강의계획서 첫 줄에 허세 가득한 문장을 적었다. 익숙한 도시를 낯선 시선으로 걸으면 일상의 환경에 대한 미학적 문해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수강생들을 설득했다. 시흥갯골생태공원과 배곧생명공원, 하늘공원과 메타세쿼이아길, 경의선숲길, 청계천, 후암동과 해방촌 골목길, 그리고 지도 바깥의 이름 없는 길들을 정처 없이 걸으며 두 발로 지도를 그렸다. 학기말쯤 우리는 하늘과 날씨에 대한 글을 적고 잡초와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에 끌려 정지돈의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을 집어 들었다. “산책은 거창한 의미 이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세련된 숍과 산책로가 없어도 우리는 걸을 수 있다. 돈이 없고 친구가 없고 연인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걷는 것이다. 막차가 끊긴 서울 시내를 걷고, 가끔은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기도 하고, 퇴근 후에 집에 가기 싫어 정처 없이 쏘다니기도 한다.……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오로지 걸을 때만 진정으로 쾌활해진다.” 걷기의 가장 큰 매력은 막막하고 답답할 때도,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도 걸을 수는 있다는 점 아닐까. 걸으며 새해를 연다. 2022년을 여는 이번 호는 ‘제4회 젊은 조경가’의 수상자인 조용준(CA조경 소장) 특집호다. 에세이 ‘언플래트닝 랜드스케이프’에 담은 그의 설계 철학, ‘여섯 가지 이야기’로 편집한 그의 작업, 남기준 편집장의 인터뷰, 진양교와 제임스 코너의 추천 에세이로 구성한 특집 지면에서 조용준의 도전과 실험을 만날 수 있다. 이번 호부터 두 편의 흥미로운 시리즈를 새로 올린다. 박희성(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이 집필을 이어갈 ‘모던스케이프’는 근대기의 그림, 엽서, 지도, 책 등 다양한 매체에서 근대 도시의 풍경을 엿보는 기획물이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는 설계 작업과 설계사무소 경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는 지면인데, 첫 순서는 ‘조경하다 열음’ 편이다. 본지 창간 40주년(2022년 7월호)을 맞아 올해 ‘조경비평상’의 상금이 대폭 풍성해졌음을 꼭 확인하시기 바란다. 조경을 주어로 고민 중인 예비 조경비평가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린다.
  • [풍경 감각] 그린란드 상어의 바다
    그린란드 상어가 보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수명이 수백 년이나 되는 그린란드 상어는 대부분 어렸을 때 시력을 잃는다. 기생충이 눈을 파먹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아도 뛰어난 청각과 후각이 있어 먹잇감을 문제없이 사냥하고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바다를 유영하는 그린란드 상어에게 풍경은 없는 존재일까. 아니면 어렸을 적 보았던 바닷속을 몇 백 년 동안 곱씹으며 자신만의 풍경을 만들고 있을까. 길 한복판에서 끊어지거나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점자 블록을 본다. 밝은 색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는 것, 올록볼록하지 않은 것도 있다. 안내견이나 동행인이 없으면 길을 잃기 쉬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머나먼 북극해 깊은 곳의 그린란드 상어를 떠올린다. 경험해보지 않아 상상하지 못하는 풍경, 상상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마음을 생각한다. 검고 차가운 밤하늘이 북극해 같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조현진은 조경학을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다. 2017년과 2018년 서울정원박람회, 국립수목원 연구 간행물 『고택과 어우러진 삶이 담긴 정원』, 정동극장 공연 ‘궁:장녹수전’ 등의 일러스트를 작업했고, 식물학 그림책 『식물 문답』을 출판했다. 홍릉 근처 작은 방에서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린다.
  • 긴자 소니 파크 여백의 공원, 도시공원을 재정의하다
    1966년 긴자에 지은 지상 8층과 지하 5층의 소니 빌딩은 소니 제품을 전시하는 곳이자 판매하는 쇼룸이었다. 2013년 소니는 기존 건물을 허물고 새 빌딩을 세우기로 했다. ‘긴자 소니 파크Ginza Sony Park(이하 소니 파크) 프로젝트’의 출발이었다. 일반적으로는 헌건물을 해체하고 바로 새 건물을 세우지만, 소니는 건물을 허물고 빈 공간에 잠시 공원을 짓기로 한다. 2016년 건물을 해체하고 2018년 공원을 열었다. 건물이 사라진 긴자 스키야하시 교차로에는 면적 707m2의 지상 공원과 지하 4층 규모의 로우어 파크Lower Park가 생겼다. 지상에는 세계 각지의 특별한 식물이 모여 있다. 지하 1층에는 음식점이 들어섰고, 카페가 있는 지하 3층은 인근의 니시 긴자 주차장 지하 2층과 직접 연결된다. 지하 4층에는 크래프트 맥주 가게가 있고, 지하 2층은 이벤트나 전시가 열리는 공간으로 쓰인다. 2018년 인터넷에서 우연히 접한 소니 파크,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도심 속 사적 공간인 소니 빌딩을 올림픽 개최 시기에 맞추어 도쿄 시민을 위한 공공 공간으로 임시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사례였다. 처음 소니 파크를 방문한 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니 빌딩 일부를 소재로 한 한정판 기념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 뒤에도 꾸준히 찾아가 소니 워크맨 40주년 기념행사 ‘워크맨 인 더 파크Walkman In The Park’를 소니 워크맨을 10년 넘게 애용한 세대로서 추억에 잠겨 둘러보고, 크리스마스에는 아이와 함께 ‘에르메스 징글 게임’을 관람하기도 했다. 소니 파크는 나와 가족에게 도심 속 놀이터 같은 공간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2020년 이후에는 직접 찾아가지 못했지만 다양한 채널을 통해 소니 파크에서 벌어지는 인터랙티브 전시와 이벤트를 확인했고 그 속에서 ‘소니다움’, 즉 예측 불가능한 혁신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긴자라는 보수적이면서도 럭셔리한 콘텍스트 안에서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혁신적 허브로 발돋움해 다양한 커뮤니티 역할을 하는 소니 파크의 활기찬 모습이 큰 감명을 남겼다. 하지만 소니 파크는 기간 한정 공간이다. 2022년, 이곳은 새 빌딩을 들이기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본래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에 맞춰서 2020년까지 소니 파크를 개방할 계획이었지만 1년 연장해 2021년 9월까지 공원을 운영했다. 2024년 완성될 뉴 소니 빌딩은 어퍼 파크Upper Park, 파크(지상 공원), 로우어 파크로 구성된다. 새로운 빌딩 역시 거리에 공공 공간을 제공하는 공원이라는 소니 파크의 콘셉트를 계승한다. 소니답고 독특하고 장난기 있는 공간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프로젝트 1단계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그간 소니 파크가 도시건축적 관점과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뉴 소니 빌딩은 어떤 모습으로 고객과 시민에게 다가갈지 궁금해졌다. 소니의 대표이사이자 소니 파크 프로젝트를 이끈 나가노 다이스케Nagano Daisuke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나가노 다이스케(Nagano Daisuke)는 소니 기업의 대표이자 치프 브랜딩 오피서(CBO)다. HQ 브랜드전략부 브랜드인큐베이션그룹에서는 제네럴매니저를 담당하고 있다. 긴자 소니 파크 프로젝트 인솔자로서 2013년부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2018년 8월부터 2021년 9월까지 긴자 소니 파크 시즌 1을 이끌었다. 2024년에 공개 예정인 다음 시즌을 준비하며 소니 그룹의 새로운 브랜딩 실험을 주도하고 있다. 이원제는 도심 속 다양한 공간과 상호 작용하는 데 관심이 많다. 공간을 구성하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휴먼웨어를 라이프스타일 관점에서 읽고 해석해 ‘도심에서 풍요로운 삶의 질이란 무엇인 가’를 찾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상명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교수이며, SPC그룹과 UDS 코리아 자문교수를 역임했다. 중앙일보 폴인에서 ‘밀레니얼의 도시’(2018) 콘퍼런스를 총괄·기획했고, 저서 및 번역서로는 『인간을 위한 도시 만들기』(2014), 『도시를 바꾸는 공간기획』(2021) 등이 있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조경하다 열음 삶의 그릇을 빚는 젊은 조경가의 매니지먼트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바꾸는 전문가 대학 입학 때부터 지금까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조경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었다. 비슷한 시기에 조경 공부를 시작한 이들 중 조경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경을 떠난 사람도 적지 않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전공자로서 그동안 해온 고민의 공통분모는 조경일 것이다. 그 속에서 길을 찾은 사람 혹은 찾고 있는 사람은 아직 조경 제도권에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나 또한 수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아직 조경이라는 궤도 위를 달리고 있다. 그렇다고 답을 찾은 것은 아니다. 다양한 인연과 기회를 통해 떠올리게 된 새로운 화두가 동력이 되어주고 있을 따름이다. 조경 설계 도면만 그리는 사람이 조경가일까, 이 질문은 내게 기연機緣과도 같다. 답을 찾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헤맨다 해도 좋을만큼. ‘조경하다 열음’(이하 열음)을 꾸린 지 5년째다. 대학에서는 설계 중심 커리큘럼으로 조경을 배웠다. 졸업 후엔 조경설계사무소를 다니며 10년간 경력을 쌓았지만, 교육 과정이 조경의 영역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실무를 하다 보니 사회에는 조경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다는 걸 체감했다. 하지만 제도와 구조적 문제로 손을 뻗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물론 의견을 제시하거나 활동 참여가 제한되는 건 아니다. 어느 분야나 회사에 속하지 않은 한 명의 자연인으로서 접근한다면 말이다. 지역의 자원이나 문제를 발굴하더라도 조경업의 측면 그리고 회사에 소속된 직원으로서는 공모에 참여하거나 설계 도면을 납품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설계를 위해 대상지를 조사하면 할수록 갑갑했다. 도면을 완성하는 일 외에도 조경학과에서 배운 역량으로 솔루션을 내놓을 수 있는 일이 많은데 눈을 감아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판을 만들기로. 조경가의 역할은 주어진 대상지에 대한 디자인을 완성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장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래서 디자인을 넘어 여기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했다.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바꾸는 전문가, 열음이 지향하는 조경가의 모습이다. 생활밀착형 조경 코로나19로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공원 녹지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생활 공간 속으로 자연을 가져올 수 있도록 도시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꾸준히 나온다. 도시를 쾌적하게 하는 대형 공원과 녹지와 더불어 일상 속 생활밀착형 공간의 쾌적성을 높여주는 일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공간에는 선과 숫자 중심의 기존 엔지니어 방식을 넘어 커뮤니티 디자인을 통한 솔루션 제시가 요구된다. 석수골 마을정원 조성(2018), 서울국제정원박람회 동네정원 코디네이터(2019, 2021)는 시민의 욕구를 듣고 때로는 디자이너, 때로는 전략가가 되어 현장을 바탕으로 해법을 찾아본 경험이다. 열음은 주민들을 만나 소통하고 공간 조사, 설계, 시공뿐만 아니라 교육과 컨설팅까지 아우르는 현장 중심의 ‘생활밀착형 조경’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조경하다 열음의 대표 조경가 윤호준은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학부에서 조경을 전공하고 설계사무소에서 10년간 경력을 쌓은 뒤 제도권을 넘어 새로운 판을 만들자는 포부로 2017년 조민영과 함께 사무실을 열었다. 주민과 소통하고 공간의 조사, 설계, 시공뿐만 아니라 교육과 컨설팅까지 아우르는 생활밀착형 조경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자연의 모습을 도시에 재현하는 편집자로서 사무실보다 현장에서 답을 찾고, 직관보다 경험, 발주처보다 주민의 이야기에 귀를 더 기울인다. 예비 조경가를 발굴·육성하는 매니지먼트 회사로 조경설계사무소를 키우고자 한다.
    • 윤호준
  • [모던스케이프] 도시 균열의 시작, 전차 노선이 만든 미완의 풍경
    교통에 의한 도시 경관의 균열은 19세기 말 서울에 부설된 전차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제 전차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온 도시 경관에 전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느낀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고종은 경운궁을 중심으로 제국의 격에 맞는 근대 도시로 전환을 시도했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도성 한양에 궁궐과 단묘壇廟, 성곽을 축성하여 새로운 국가의 출발을 알렸던 것처럼,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의 표상을 도시 경관에 실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혁명에 의한 체제 전복으로 탄생한 국가가 아니었고, 중국에 대한 사대를 극복하려 하면서도 그들로부터 전승 받은 제도를 따르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대한제국은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근대 도시로의 변혁을 이루어야 했기에, 전통적인 지배 구조로서의 황도皇都와 무역 등 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근대 도시의 이중적 구조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기준으로 재편된다. 경운궁 동쪽에 건설된 환구단과 황궁우가 황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면, 전차는 근대 도시로의 실천을 보여주는 시설이다. 서대문정거장(지금의 서대문역 일대)에서 시작해 황토현(지금의 광화문사거리)~종로~흥인지문을 지나 홍릉(천장 전 명성황후의 묫자리, 현재 안암동 고려대학교 부근)까지 가는 홍릉선이 먼저 개통되었다. 선로를 부설하여 전선을 놓고 발전기를 돌려 전차가 다니도록 개통한 것이 1899년 5월 4일이다. 우리보다 근대화를 먼저 시작한 일본에 견주어도 결코 늦은 것이 아니었다.1 홍릉선 외에 종로에서 용산까지 이어지는 용산선(1899년 12월 20일), 서대문정거장과 남대문정거장을 연결한 의주로선(1900년 7월 6일), 그리고 마포까지 연결된 마포선(1907년)까지 네 개의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 각주1.교토에서는 1895년 1월 31일, 도쿄에서는 1903년 8월 22일에 개통했다. 참고문헌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서울책방, 2019, pp.28~35. 신경진, “[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4> 황제의 도시 베이징 (하)”, 「중앙일보」 2011년 2월 9일. 그림 출처 그림 1. American Street Railway, “The Electric Railway in Corea”, Street Railway Review vol. IX, 1899, p.534. 그림 2. commons.wikimedia.org/wiki/File:Travelogues;_(1908)_(17).jpg 그림 3.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서울책방, 2019, p.16. 그림 4. 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39921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 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들을 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2021년을 되돌아보며
    옆 방 동료와 화상으로 회의를 하고 온라인으로 설계 스튜디오 리뷰를 하고 마스크로 얼굴을 덮은 채 공원을 산책하는 초현실적 상황이 이제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편하고 익숙하기까지 하다. 감염 도시의 역설적 풍경이 어느새 친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번 겨울이 코로나 시대의 마지막 계절이기를 소망하면서 2021년 한 해의 『환경과조경』을 다시 펼쳐본다. 본지가 주최한 ‘제3회 젊은 조경가’ 수상자 최영준 특집으로 1월호를 꾸렸다. 중국과 미국, 한국을 넘나들며 다국적 조경설계사무소 랩디에이치Lab D+H를 이끌고 있는 최영준. “디자인을 통해 희망과 사회적 책무를 구현”하는 그의 젊은 조경 정신을 특집 지면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같은 호에 올린 ‘춘천 시민공원 마스터플랜 설계공모’ 수상작들은 동시대 한국 조경의 생생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2월호에는 『LA+』의 실험적 기획인 ‘생물체 설계공모’, 한국전쟁의 민간인 희생자를 기억하는 ‘진실과 화해의 숲 설계공모’, 신도시의 조경 네트워크를 짜는 ‘행정중심복합도시 5-1생활권 조경 설계공모’를 동시에 실었다. 서로 다른 성격의 세 가지 공모전은 조경의 넓은 스펙트럼을 새삼 확인하게 해주었다. 어린이놀이터 프로젝트 13개를 3월호에 모았다. 서울의 초등학교에 놓인 신상 놀이터부터 저 멀리 터키 이스탄불과 스웨덴 스톡홀름의 어린이공원에 이르기까지, 틀에 박힌 놀이터 디자인의 전형을 깨는 갖가지 아이디어를 만날 수 있었다. 6월호에 실은 ‘서울국제정원박람회’의 도시재생형 정원들은 일회성 전시와 장식을 넘어 코로나에 지친 시민들에게 안온한 위로의 공간을 제공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8월호는 1982년 7월 창간한 『환경과조경』의 통권 400호였다. 1월호부터 7월호까지 편집부는 한국 현대 조경의 성장사를 기록하고 저장하며 조경 설계와 이론의 쟁점을 발굴하고 그 지평을 확장해온 『환경과조경』의 발자취를 다각도로 되짚는 특집 지면들을 기획했다. 1월(393호)부터 7월호(399호)에 걸쳐 실은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에서는 편집자 김모아, 남기준, 배정한, 윤정훈과 편집위원 박승진, 박희성, 최영준, 최혜영이 옛 『환경과조경』을 50권씩 나눠 맡아 재독하고 재조명했다. 4월호에는 그동안의 표지와 책등을 한데 모은 특집 ‘표지 탐구, 책등 탐방’을 구성했다. 5월호 특집 ‘편집자들’에는 본지를 거쳐 간 추억 속의 편집자들을 초대해 그들이 엮었던 옛 기사와 꼭지를 당시의 시각으로 다시 살폈다. 6월호에 올린 ‘읽는 행위를 설계하는 법’에서는 『환경과조경』의 편집 디자인 변천사를 다뤘다. 7월호 지면에는 독자 대상 설문 ‘다시 읽고 싶은 연재는?’의 결과에 편집부의 기획을 보태 옛 연재 여덟 꼭지를 재구성한 ‘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꾸렸다. 통권 400호(2021년 8월호)에는 『환경과조경』 400권의 목차를 모두 모았다. 39년 역사를 세로지르는 총목차는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 현대 조경의 궤적을 담은 아카이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9월호에서 많은 독자의 시선을 붙잡은 건 ‘416 생명안전공원 국제설계공모’ 수상작들일 것이다. 세월호 7년, 함께 실은 평문이 질문하듯, 모두의 기억은 모두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 10월호에는 서울공예박물관(오피스박김), 블랙메도우, 메도우카펫, 가든카펫(이상 김아연), 일분일초(안마당더랩), 어반 포레스트 가든(김봉찬+신준호), 나의 정원(정영선), EV6 언플러그드 그라운드 성수(HLD) 등 모처럼 국내 조경가들의 다양한 근작과 전시를 담을 수 있었다. 11월호에는 제18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수상작들과 ‘오목공원 리모델링 지명 설계공모’ 초청작들을 실었고, 최근의 주목할 만한 완공작인 마포새빛문화숲(이화원)과 남산예장공원(호원)의 면모를 꼼꼼히 짚었다. 이번 12월호에는 본지가 한국조경학회, 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와 함께 진행한 설문조사 ‘한국 조경 50’의 결과를 담았다. 303명의 전문가가 뽑은 한국 현대 조경의 대표작, 지난 50년의 성과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50년을 설계하는 기획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번 호에는 매년 본지가 주최하는 ‘올해의 조경인’과 ‘젊은 조경가’ 선정 결과를 싣는다. 제24회 올해의 조경인으로는 한국경관학회 회장을 맡아 조경계획의 확장에 힘써온 주신하 교수(서울여대), 제4회 젊은 조경가로는 다양한 조경설계 프로젝트와 실험적 기획을 가로지르며 활동해온 조용준 소장(CA조경)이 선정됐다. 다가오는 2022년은 한국 조경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전망이다. 한국조경학회가 설립 50주년을 맞는다. 7월에는 『환경과조경』이 창간 40주년을 맞는다. 8월 말에는 광주에서 세계조경가대회IFLA World Congress가 열린다. 창간 40주년을 준비하며 『환경과조경』은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고 더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조경 저널리즘의 새 좌표를 찾아 나설 것이다
  • [칼럼] 50년, 반세기 조경
    2022년 새해에는 한국조경학회가 탄생 50주년을 맞는다. 1972년 봄꽃이 기지개를 필 무렵, 대대적인 국토 개발을 이끌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에서 조경에 관한 첫 세미나가 개최됐고 7월에는 건설부에 공원녹지과가 신설됐다. 그해 겨울에 서울대와 영남대에서 조경학과가 설치 인가를 받았다. 같은 해 12월 29일, 한국조경학회 창립총회가 개최되면서 한국에 ‘조경’의 탄생을 알렸다. 그로부터 어언 50년 세월이 흘러 내년에는 사람의 나이로 치면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명을 깨닫는다는 나이에 이르렀다. 반세기 동안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발전과 함께 조경 산업 또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고, 그 중심에는 늘 조경학회의 헌신적 노력이 있었다. 학회는 본연의 임무인 학술 관련 사업으로 학회지 및 학술지를 발간하고, 한‧중‧일 국제 조경전문가 회의, 세계조경가대회IFLA 참여 등 국제 교류를 통한 학문적 정보 교환에도 앞장서 왔다. 학생들을 위한 조경디자인캠프와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을 매년 개최하고 조경 업계의 발전을 위해 대한민국 조경문화대상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산림조합법 개정 반대 투쟁’(1988년)과 ‘건설산업기본법 개정 반대 투쟁’(1997년)처럼 조경 분야가 위기에 직면할 때면 업계와 함께 분야의 권익을 위해 선두에 나섰다. 기후 위기와 포스트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 앞에서 조경학회도 새로운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있다. 새로운 50년을 준비하는 조경학회의 힘찬 발걸음에 응원을 보낸다. 이제 미래의 50년을 목표로 반세기에 접어든 한국 조경의 과거를 차분히 뒤돌아보고 새로운 변화에 선도적으로 대응할 전략을 세우고 발전을 위한 전기를 마련해야 할 때다. 먼저, 조경계에 이렇다 할 구심점이 없는 상황에서 단일의 대표 단체인 조경학회에서 파생되어 나간 여러 관련 학회와 협회 등 많은 단체 사이의 협력과 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시대적 변화에 발맞춰 과거 권위적 형태의 중앙집권적 단일 조직은 지양해야 한다. 분야의 다양한 요구를 하나의 목소리로 대변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중앙 조직의 결정을 모든 단체에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상명하달 방식의 운영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 여러 단체의 다양성과 독립성을 존중하면서 조경 분야 전체의 단결된 목소리가 필요할 때는 함께 연합해 힘을 모으는, 공감 능력을 극대화한 ‘느슨한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지난 2017년 3월 3일, 조경의 날 기념식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공식 출범했다가 총재 사퇴 후 결국 해체 수순을 밟은 ‘대한환경조경단체총연합’의 뼈아픈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 조경 분야에도 이제 세대교체가 필요하다. 급변하는 시대에 대응해 미래 성장을 위한 혁신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전략적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젊은 조직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조경 분야의 여러 단체와 조직은 대개 학연, 지연에 얽매여 나이나 학번 순으로 수장을 결정해왔다. 몇몇 단체는 여전히 원로나 고문의 입김이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경 원로 1세대를 존경하고 그 공로에 감사하지만, 보수적인 한국의 정치판에서도 30대 정당 대표가 나오는 현실을 볼 때 조경계는 세대교체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연공서열보단 능력과 성과주의에 바탕을 둔 세대교체 바람이 변화에 대한 열망과 미래 세대의 역동성을 담아내는 용광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내년 8월 광주에서 열리는 세계조경가협회IFLA 한국총회를 계기로 모든 조경인이 힘을 모아 분야의 성장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는 IFLA가 주관하는 글로벌 조경인들의 대표 행사다. 2022년에는 개최국 한국으로 전 세계 조경가들이 모이게 된다. 세계조경가협회는 전 세계 77개국 2만5천여명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글로벌 조직으로, 1948년 영국에서 설립된 이후 현재는 유럽, 아시아‧태평양, 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5개 지회가 활동하고 있다. 한국은 1981년 협회에 가입해 1992년 IFLA 총회를 서울, 경주, 무주에서 개최한 바 있다. 당시 국내 조경계가 일치단결하여 대회를 잘 준비한 결과 34개국 305명의 외국 정회원 참석자를 포함해 총 1천 3백여 명의 참가자에게 한국의 조경을 알리고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으며 한국 조경의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학회, 협회 등으로 구성된 IFLA 조직위원회가 얼마 남지 않은 대회 준비를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지만, 손길이 부족하고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범조경계 차원의 많은 관심과 아낌없는 협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경 분야도 여러 대선 캠프에 조경 정책을 제안할 수 있도록 테스크포스팀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최근 여러 난관에 봉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경 단체는 여전히 적절한 대응을 위한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고, 분야 전체 생태계가 침체에 빠질 위기에 처해있다. 유일한 희망인 ‘조경진흥법’조차 실효적 사업을 거의 담지 못한 상태다. 타성에 젖은 조경계가 현실에 안주하면서 자초한 측면이 크다. 이제라도 더 적극적으로 정책을 개발하고 조경 분야의 목소리를 제도에 담아내려면 내년 대선이 좋은 기회일 수 있다. 국토교통부, 환경부, 문화체육관광부, 산림청 등으로 분산된 조경 관련 사업을 아우르고, 나아가 통일 한국의 전 국토를 우리 손으로 푸르게 가꿀 수 있는 강력한 녹색 정부 부처를 만들어보자. 백년대계를 바라보고 함께 큰 그림을 그려보자. 이번이 기회다. 열 살 터울인 국내 유일의 조경 전문지 『환경과조경』은 2022년 새해에 창간 40돌을 맞는다. 그동안 한국 현대 조경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조경 분야 대표 언론으로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자부하는 본지는, 2014년 1월 대대적 리뉴얼과 함께 조경 언론으로서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기반으로 ‘조경 문화 발전소’를 꿈꿔 왔다. 급변하는 인터넷 정보화 시대의 물결에 발맞추어 ‘e-환경과조경’을 오픈했고, 전국 조경학과 학생들이 참가하는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을 주관했다. 조경 분야 발전에 공헌한 분의 업적을 기리고 미래의 조경을 이끌어갈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올해의 조경인상’과 ‘젊은 조경가상’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서울정원박람회’와 ‘LH가든쇼’를 진행해 정원 문화 확산과 정원 산업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제 창간 40년을 맞이하여 『환경과조경』은 한국 조경의 또 다른 50년을 준비하며 미래를 향한 좌표를 설정하고, 변화의 시대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 나갈 것이다.
  • [풍경 감각] 흐르지 않는 물길
    교실 한구석에서 내가 선물했던 그림을 주운 적이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친구들이 자기도 그려달라고 졸랐기에, 스프링 연습장 한 장을 북 뜯어 건네곤 했다. 그렇게 준 그림 하나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구겨져 있었다. 누구에게 준 것인지, 무엇을 주제로 한 것인지 잊었을 정도로 특별한 그림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겨진 종이의 주름과 여기저기 검게 번진 얼룩은 여전히 기억 속에서 선명하다. 작업실 근처 백화점의 아케이드를 걸을 때마다 그 주름과 얼룩이 떠오른다. 아케이드가 완공되었을 때, 그곳엔 LED 화면으로 만든 시냇물이 흘렀다. 픽셀로 이루어진 네모난 물결이 반짝였고 사람들은 픽셀 수련 잎 아래로 헤엄치는 픽셀 금붕어를 따라 픽셀 물길 위를 걸었다. 예쁜 풍경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픽셀 물길 표면은 작은 흠집이 생겨 뿌예졌고 전원이 꺼져 있는 날이 많아지는가 싶더니, 결국 검은 시트지에 뒤덮이고 말았다. 이제 아케이드에는 특별 기획 행사 부스들이 계절마다 번갈아 들어선다. 주름 혹은 얼룩 같기도 한 그 검은 시트지 위로. 픽셀 시냇물을 설계한 사람의 발걸음이 이곳을 향하지 않길 바란다. 그가 그려낸 시냇물을 폭 덮어버린 시트지가 그의 기억에도 선명히 남을 것 같아서. 아무도 없는 늦은 밤, 이제는 그 어떤 픽셀도 흐르지 않는 물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본다. 연습장 북 뜯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환경과조경404호(2021년 12월호)수록본 일부 조현진은 조경학을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다. 2017년과 2018년 서울정원박람회, 국립수목원 연구 간행물 『고택과 어우러진 삶이 담긴 정원』, 정동극장 공연 ‘궁:장녹수전’ 등의 일러스트를 작업했고, 식물학 그림책 『식물 문답』을 출판했다. 홍릉 근처 작은 방에서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린다.
  • [나의 미개봉작 상영기] 조경업개론
    업과 학 나누자는 것도 합쳐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직업적으로 다를 뿐인데 사고방식 자체가 나뉘어 그 안에만 머물고, 주어진 역할에 성실히 임한 나머지 각자의 가능성이 확장되지 못하거나 직위가 여러 가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세태가 아쉬울 뿐이다. 학자와 업자는 따로 있지 않다. 모두 자신이 맡은 업을 할 뿐이고 배우며 살아간다. 모든 일은 신성하다. 공공을 대상으로 하는 조경 일은 더 그렇다. 약 2천 년 전에 비트루비우스가 쓴 『건축십서』 제1서 제1장에는 이런 글이 있다. “지식은 이론과 실제의 소산인바, 실제란 조형 의도에 따라 필요한 재료를 써서 작품을 완성하는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실기의 적용 방식이고, 이론이란 완성된 작품을 비례 원칙에 따라 증명해주고 설명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에 입각하지 않고 단지 손으로만 숙련되려고 노력하는 건축가는 그 수고에 합당할 만큼 명예로운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지만, 이론과 학문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근본이 아닌 환상만을 좇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양쪽을 다 겸비한 이는 훌륭하게 무장한 군인과 같이 그 목적을 이루어 응분의 권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모리스 히키모건, 오덕성 역, 2011). 이 글을 소개하는 목적은 훌륭한 전문가가 되기 위함도, 응분의 권위를 차지하기 위함도 아니다. 세계가 나눈 기준에 맞추다 각자의 가능성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자, 조경을 하며 맞닥뜨리는 현상을 다각도로 인지하고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고 연구하며 실험하는 학자적 업자가 되길 바라는 스스로의 다짐이자 목표이기도 하다. 논리와 직관, 기술과 감각 흔히 논리와 직관을 구분하여 생각한다. 하지만 논리와 직관은 다르지 않다. 직관을 설명하는 것이 논리다. 설계 작업은 논리와 직관을 넘나들며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형태에 담는 작업이다. 논리와 직관, 기술과 감각을 나누어 생각해선 안 된다. 논리란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보편적 상식과 지식으로 풀어헤쳐 설명하는 것이고, 직관은 경험과 기술을 통찰하는 수준 높은 정신적 산물이다. 누구에게나 직관은 있다. 기술은 논리와 직관에 따른 결과물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감각은 주관을 가진 주체가 세계를 느끼는 오감의 상태다. 직관적 설계와 논리적 설계,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조사‧분석‧연구 등 논리적 방법론을 통해 만든 계획이 직관적 디자인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높은 직관에는 설명하기 힘든 논리가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 공모 작업은 결과물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조사 분석을 기초로 한 논리를 계획안에 담는 작업이다. 하지만 직관을 먼저 내세우고 직관을 설명하기 위한 탄탄한 근거를 내놓는 것 또한 좋은 조경 계획을 만드는 방법이다. 아인슈타인의 많은 이론은 본인의 감각과 직관을 사고 실험으로 수없이 검증하고 그것을 본인 이외의 세계와 소통하고 알리기 위해 수학‧물리학 등의 기술을 사용해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환경과조경404호(2021년 12월호)수록본 일부 김지환은 영남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씨토포스와 스튜디오엘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현재는 조경작업장 라디오의 대표다. 스스로를 작업반장, 설계공이라 칭하듯 설계와 시공 사이의 중재자(신호등)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해 그 관계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사회적 대기업을 만들어 도시 내 모든 디자인을 손대고 싶어 하는 야망과 유명 건축가와 조경가의 작업을 보며 절망과 환호를 즐기는 이상주의적 성향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고 믿는다. 때론 못다 한 말을 해시태그로 덧붙이기도한다. #라디오에이스 #정원작가 #은근히낯가려요 #조경뚱
  • [숲자락 식재 탐험기] 숲자락을 정원에 적용하기
    “난 풀떼기는 잘 모르겠어. 네가 알아서 해.” 조경설계사무소에 다니는 3년 차 L양은 온갖 참고 자료를 뒤져 간신히 식재계획도 지피ㆍ초화 리스트를 작성했다. 꽃의 색깔, 성장 높이, 개화 시기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식물들을 고르느라 고생했는데 다시 이것을 조합하고 배치해야 한다니. 요즘 유행하는 피트 아우돌프 식의 도면 표현 기법을 흉내 내보고도 싶지만 쉽지 않다. 결국 종전에 선배가 작성한 도면을 토대로 늘 해오던 식의 블록 식재를 그린다. 앞선 연재를 통해 식재 디자인의 새로운 흐름을 이해하고, 서식처 기반 식재 디자인에 필요한 요소(생육 환경, 생장 방식 등)를 중심으로 식물을 어떻게 관찰 기록하고 정보를 축적해나가야 하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어떤가. 식재 디자인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은 상승했을까. 여전히 낯선 식자재를 모아 두고 어떤 형태로 다듬어야 할지, 구워야 할지 아니면 튀겨야 할지, 어떤 순서로 솥 안에 넣어야 할지 주저하는 초보 요리사의 마음은 아닌가. 필자들을 비롯해 이 글을 읽는 다수의 숙련된 조경가에게 개개의 식물 특성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식물을 ‘생태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하나의 군락’으로 디자인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일 듯싶다.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지난달에 소개한 숲자락에 서식하는 자생 여러해살이풀을 실제로 어떻게 조합해 디자인에 적용하면 좋을지 소개할 차례다. 자연에서 식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토대로 식물 공동체를 구성 배치하는 방법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방법에 따라 식물탐험대가 직접 숲자락 식물들을 배치해본 사례를 제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환경과조경404호(2021년 12월호)수록본 일부 식물탐험대는 2021년 봄,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의 식물적용학 수강생 42명이 결성한 그룹이다. 강보경, 김은정, 김장훈, 노진선, 오세훈, 이양희, 정은하 등 42명의 대원을 대표하는 일곱 명의 집필진은 정원·조경 분야의 실무자와 학계, 수목원·식물원의 연구자 등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이들이다. 숲자락의 단면을 정원에 도입하기 위해 떠난 흥미롭고 유익한 탐험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