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표면의 부활
  • 장혁준
  • 환경과조경 2024년 5월
[크기변환]surface 01.jpg
대전 신세계 백화점의 아트 앤드 사이언스 옥상 정원

 

포장은 결과물을 지칭한다. 과정의 단어라기보다는 결과의 단어다. 그러므로 설계를 하면서 포장을 따로 떼어내 사고하지 않는다. 후행적으로 납작한 표면의 단단한 일부를 포장이라고 규정할 뿐이다. 이미 단단해진 결과물을 논할 땐 도구적 관점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기능이 무엇인지, 가격은 저렴한지, 공사 속도는 빠른지, 충분히 튼튼한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유연한 논의가 아닌 딱딱한 정답이 기대되는 질문을 하기엔 포장에 내재된 기능이 아쉽다.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포장이 단단해지기 전으로 돌아가 과정의 단어인 말랑말랑한 ‘표면’을 이야기해보자. 설계 과정에서 표면을 대하는 태도(사실 설계 태도와 다르지 않다)와 물화된 의지의 단편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류는 인간을 재발견하면서 대성당의 시대를 종결했다. 나아가 데카르트가 영혼의 세계에서 물질의 세계를 분리해내자 주술의 신앙이 아닌 합리적 이성이 세상을 다스리는 근대가 시작됐다. 근대는 구텐베르크로부터 시작된 인쇄술을 날개 삼아 폭발적으로 정보를 교환했고 마침내 계몽의 시대가 도래했다. 근대는 실로 괄목할 만한 과학적 발견을 이뤄냈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은 더 이상 의학의 참고서가 아니라 관찰과 이해의 대상이 됐다. 산과 바다는 두려운 미지가 아니라 정복의 대상이 됐다. 인류는 지구와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진보의 미래를 꿈꾸었다. 근대가 선사한 이성이라는 빛은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근대의 마지막은 전쟁과 독재였다. 인류라는 함선의 등대 같았던 빛은 실로 화염이었다.

 

옛날이야기를 한 이유는 지구를 뒤덮었던 화염의 불씨가 우리의 일상 공간과 더 나아가 표면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성, 정확히 말해 도구화된 이성은 공간 영역에서도 과학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제일의 가치로 설정했고,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지역, 신화, 개인, 역사, 전통, 장식, 감정, 자연과 같은 것들을 거세시켰다. 그리하여 도시는 자동차를 연료로 하는 기계가 됐고 주거는 아파트라는 화폐가 됐다. 그리고 우리가 딛고 있는 표면은 한 변이 200mm인 정사각의 투수형 콘크리트 블록으로 수렴하고 있다.

 

사실 콘크리트 블록은 잘못이 없다. 싸고 제작이 쉬우며(그러나 다른 규격을 쓰긴 어렵다. 물량이 많지 않은 이상 새로운 규격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시공이 쉽고 빠르다. 게다가 물 순환에 도움을 주지 않는가. 나쁜 게 하나도 없다. 단지 두려운 것은 이 합리성 뒤에 숨은 폭력이다. 감성을 미천한 것으로 취급해온 근대의 불씨가 표면에도 남아 있다. 콘크리트 블록은 정답이 되어가고 있다. 인구의 60% 이상이 아파트에 살면서 똑같은 표면을 걷는다. 공간은 행동을 지시한다. 남들과 다른 것을 참지 못하는 지금 한국 문화에 대해 표면의 도플갱어들도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이 다스리는 사회에서 대중문화는 필연적으로 비참해진다고 했다. 내일의 표면은 오늘보다 슬퍼져야만 하는 것일까. 

 

연약한 개인이자 공간 문화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전투원으로서 내일의 표면을 상상하며 소소한 저항을 시도하고 있다. 합리적 설계안과 재료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 그다지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원탁 위에 함께 올려두자, 스테인드글라스가 강화 유리로 진화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우리 주변엔 쓸데없어 보이지만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 많다.

 

[크기변환]장혁준 1.jpg
에테르노 청담 표면 계획도(확대본)

 

 

직물을 모방한 화강암

집합 주택인 에테르노 청담의 표면은 카펫이다. 운 좋게 서울 초호화 집합 주택 프로젝트 몇 가지를 연달아 하게 됐다. 그 중 두 번째 프로젝트가 에테르노 청담이다.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가 건축에 참여했고 아이유와 송중기가 분양 받았다고 해 세간에 오르내렸던 곳이다. 물론 수백 억의 분양가가 더 큰 화제가 됐지만. 설계를 시작하고 기존 도서들을 확인해 보니 생태 면적 확보를 위해 지상 모든 표면이 투수형 콘크리트 블록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걸 걷어내지 않는다면 화제성에 걸맞은 표면을 선사하기 어려워 보였다. 표면을 제외하고 생태면적률을 높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검토했다. 먼저 건축과 토목 분야에 간절한 호소문으로 협조를 구해 각자 영역에서 마른 수건을 짜내 최대한의 점수를 선물 받았다. 그리고 분양자들에게 사전 고지를 하고 분양된 각 세대의 테라스와 옥상 녹지까지 포함한 모든 종류의 녹지를 법이 요청하는 면적으로 삽입해 겨우 자유로운 표면을 만들어 냈다. 상상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초호화 주택의 조경에 대해 조금 솔직히 말해 보자면, 사치품이다. 학계와 산업의 최전선에서 외치고 있는 도시의 역할, 나아가 전 지구적 기후위기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이 명품백 구매의 이유가 되긴 어렵다. 물 순환과 탄소 순환을 위해 수억 원을 들여 정원을 조성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이용률이 높지도 않고 특별한 기능이 있지도 않으니 말이다. 명품백은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싶어 사는 것이다.

 

아름답고 누구나 쉽게 가지지 못하는 물건을 당신에게 선사한다는 게 여기에선 더 중요하다. 타 분야에 협조를 구할 때 이런 식으로 말했다. 걸어 다닐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한 번을 걷더라도 그 한 번의 경험이 우리 집 정원의 인상을 좌우할 수 있지 않을까. 근대는 개인적 취향이 깃든 사치품을 필연적으로 사멸한다 했지만 과거의 낭만적인 사치품이 지금의 예술품이 되지 않았는가. 사치품은 잘못이 없다. 가능성을 닫아버린 우리의 오만함을 되돌아볼 시간이다.

 

사실 처음부터 화려한 카펫을 깔고 싶었다. 카펫은 중동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실내 온기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으나 권력과 무역의 발달에 힘입어 예술적 가치를 얻게 됐다. 레드카펫은 도구가 아닌 상징이다. 카펫에 내재된 아우라를 장소화하고 싶었다. 넓은 외부에 진짜 카펫을 깔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직물이 갖는 패턴과 섬세한 디테일을 두 종류의 석재로 번안했다. 큰 면적에서 읽히는 패턴을 짜고 직물을 자세히 볼 때 눈에 들어오는 실 한 올의 유려함까지 번안하기 위해 5cm 폭의 얇은 돌을 패턴 사이에 교차시켰다. 남은 과제는 어떤 실을 사용해야 하는가다. 국내에서 흔히 쓰이는 화강암은 대부분 회색톤이다. 어디에나 무난하게 어울리고 때도 덜 타며 비교적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다. 건축 외장으로 사용된 흰색 세니아 스톤을 보니 내 직관은 초록색 카펫을 떠올렸고 석재상에 초록빛이 나는 화강암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2주가 지났을까, 저 멀리 북유럽에서 건너와 은은한 초록빛을 발사하는 화강암 샘플이 사무실로 도착했고 곧이어 현장에도 깔렸다. 에테르노 청담의 카펫은 그렇게 석화되어 물건에서 장소가 됐다.

 

[크기변환]surface 03.jpg
초록빛이 나는 화강암을 5cm 폭의 얇은 석재 패턴 사이에 교차시켰다.

 

땅을 발견한 콘크리트

대전 신세계 백화점 아트 앤드 사이언스Art and Science 옥상 표면은 깊고 무한한 땅이다. 모든 백화점 옥상 공원이 모든 시민에게 열려있으나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지상과 옥상을 24시간 연결하는 엘리베이터가 이곳이 공공 공간임을 웅변하고 있기때문이다. 이곳은 모두에게 열린 ‘옥상 정원’이다. 그렇기에 설계 핵심은 옥상 같지 않은 땅을 만드는 것이었다. 축구장 두 개가 넉넉히 들어가는 넓이의 옥상에 고저차 3m가 넘는 역동적 지형을 만들었다. 근원적으로 땅은 깊지만 표면은 얇다. 깊은 땅은 얕은 표면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표면은 우리를 매개한다. 다시 표현하면 얕음으로써 깊음을 취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땅의 형태를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단단히 굳힐 수 있는 콘크리트를 표면 재료로 선정했다. 시간이 더해지기 전 콘크리트는 점성이 높은 유체이기에 거푸집만 있다면 어떠한 형태든 만들어 낸다. 이곳의 거푸집은 비정형의 땅이고, 이 형태를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기에 콘크리트가 적절한 재료였다. 100mm 두께의 콘크리트를 단단함이 필요한 표면 위에 부었다. 콘크리트가 경화되어 밝게 빛나면서 땅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콘크리트는 근대의 상징과도 같다. 철근 콘크리트가 근대적 공간 문화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기계적 재료에 인간성의 향기를 입히기 위해 마감에 수공예 감성을 더했다. 콘크리트가 다 굳기 전에 일정 방향으로 빗자루질을 해 불규칙한 줄무늬 패턴을 입혔다. 옥상에 올라간 땅은 아무리 깊어도 3m가 넘지 않는다. 만약 진짜 깊음이 있다면 표면은 자칫 도구로 전략할 것이다. 표면은 없는 깊이를 있도록 하며 모두에게 다른 깊이를 상상하게 한다. 추동의 힘을 가진 예술이 진리보다 값지듯 얕음은 때론 깊음보다 가치 있다.

빛나는 콘크리트가 수직적 깊이를 드러낸다면 흰 바다의 물고기 떼처럼 흘러가는 검정 띠는 수평적 무한함을 강조한다. 검정 띠는 검은색 안료를 섞은 골재 노출 콘크리트다. 눈을 사로잡기 위해 흰 표면과 대조적인 색을 섞고 마감도 바탕 표면과 다른 골재 노출 방식을 선택했다. 검정 띠는 울퉁불퉁한 지형과 휘몰아치는 선형 위에 얹혀 있기에 그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곳에서 표면의 끝은 가려진다. 표면은 가려짐으로써 무한함을 상상하게 한다.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와의 그림 대결에서 캔버스의 반을 차지하는 커튼을 그려 제욱시스로 하여금 걷어내는 행위를 하게 했다. 아름다움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했던가. 제욱시스는 호기심을 품은 자신에게 패배를 선언했다. 모름의 깊이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고 행동하게 한다. 여기 빛나는 콘크리트 표면은 알 수 없는 땅의 깊이를 생각하게 하고 가려진 저곳으로 발걸음을 떼게 만드는 커튼이다.

 

surface 05(참고).jpg
콘크리트가 다 굳기 전에 일정 방향으로 빗자루질을 해 불규칙한 줄무늬 패턴을 입혔다.Ⓒ조민경

 

사라짐을 애도하는 점판암

온천 호텔 유원재의 리셉션을 담고 있는 환영의 못 표면은 돌너와 지붕이다. 유원재는 한국식 온천 문화 활성화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사명감을 안고 탄생했다. 충청북도 충주 수안보는 한국 최초 천연 온천수가 자연적으로 솟아올랐던 지역으로 먼 옛날부터 왕의 온천으로 불렸으며, 1980~1990년대에는 매년 5백만 명 이상 찾은 관광지였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던 탓일까. 지금의 수안보는 유령 도시라는 수식어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니 유원재는 아스라이 잊힌 한국 온천 문화에 대한 애도이자 부활의 장소다.

온천 도시에 있는 온천 호텔이니 방문객이 물을 반길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건축이 리셉션을 별동처럼 뽑아주니 그 주위를 얕은 물로 채웠다. 물과 반영 효과가 중요하니 물에 잠긴 수조 표면은 튀지 않도록 검은색의 평평한 석재를 깔거나 쇄석을 포설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엔 물을 투과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질감을 가진 점판암을 겹쳐 깔았다. 한반도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옥천 습곡대라는 습곡-단층대가 가로지르고 있다. 이 습곡대가 충북 지역에도 분포하는데, 이곳에서 퇴적암이 강한 압력으로 변성되어 점판암이 만들어진다. 과거 이 지역에 짚이나 기와를 구하기 힘든 산지에 사는 사람들이 산에서 구한 점판암을 기와처럼 널어 용의 비늘 같은 지붕을 만들곤 했다. 제작술과 운반술의 한계가 인간의 아이디어와 만나 탄생한 풍경인 이 지붕을 돌너와 지붕이라 하며 돌너와 지붕을 가진 집을 돌너와 집이라 한다. 이 용의 비닐은 과거엔 정주 환경을 구축하는 도구로서 가장 높은 곳에서 존재를 보이지도 않은 채 우릴 지켜주었으나 지금은 아름다움으로 남았다. 과거가 현대에 용의 비늘을 선물했다. 허나 이를 개선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에 의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애도의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말이다.

가장 위에서 물을 막았던 점판암은 이제 유원재의 가장 아래에서 물을 담는다. 50mm 얕은 물은 온천 문화 부활의 성소인 건축 그리고 사람을 표면에 반영해 풍경화를 그린다. 그리고 얕음으로 인해 점판암에 빛을 선사하는데, 빛을 받아 존재하게 된 점판암은 물이 그린 풍경화 위에 자신의 모습을 덧칠한다. 그리하여 표면은 건축을 감싸 안았다. 돌너와 지붕은 이제 가장 낮은 곳에서 새로운 온천 문화를 지키는 용의 비닐로 부활했다. 장소가 사라진 문화를 애도하고 부활을 마중하듯 표면은 사라진 구축술을 체화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surface 06.jpg
유원재 환영의 못 표면에는 물을 투과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질감을 가진 점판암을 겹쳐 깔았다.Ⓒ박영채

 

정말 이것이 저것을 죽였을까. 2019년 노트르담 대성당에 화재가 발생해 첨탑과 목조 지붕이 붕괴됐다. 슬퍼했던 이들이 흘렸던 눈물은 관 속에서 시체를 꺼내 안은 기만이었을까. 배우지 못한 자들로의 성서로서 성당은 죽었을지 모르나 영혼은 예술로서 부활해 수백 년간 빛을 내뿜었다. 그러므로 부활은 복제가 아닌 새로운 세상으로의 날개 짓이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님은 육신이 아닌 정신으로 20세기를 넘게 살고 있다. 표면은 부활을 꿈꾼다.

 

장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도시조경설계연구실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짓기 욕망에 충실하고자 조경을 하고 있다. 이야기와 형태의 합주에 관심이 많다.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