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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 아르누보
먼 길을 헤매다가 다시 20세기로 돌아왔다. 익숙한 세상에 오니 안도감이 든다. 하지만 비행기, 고층 건물, 기계와 자동차 등 온갖 기술 문명으로 복잡하기도 하다. 이 가운데 정원의 흔적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정원의 흔적을 찾기 위해선 우선 걷어내야 할 것들이 많다. 이를 위해서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1863~1957)의 자취를 한번 따라가 보고자 한다. 벨기에 출신의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였던 반 데 벨데는 혹시 에르퀼 푸아로의 오리지널이 아닐까 싶게 작은 체구에 에너지 넘치는 심미주의자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아르누보’와 ‘바우하우스’의 중간 지점에서 맹활약하며 이 둘을 서로 연결한 인물이었다.
아르누보art nouveau란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으로 1880년경부터 25년 정도 유럽을 휩쓸었던 디자인 경향이다. 매우 심미적이고 우아했다. 직선을 배제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썼으며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꽃, 식물 줄기 등을 그래픽처럼 다룬 것이 특징이었다. 전반적으로 여성적인 디자인이어서 긴 머리의 키 크고 날씬한 여인이 물결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새로운 예술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혁신은 아니었다. 외모에만 손을 댔다. 산업화의 결과로 도시에 부와 제품이 넘쳐났으나 이들을 제대로 포장할 디자인이 없었다. 그래서 지나간 시절의 양식들을 두서없이 모방했던 데에 대한 저항으로 출발했다. 고딕 양식부터 루이 14세 스타일, 르네상스, 고전까지 난무하며 세상을 어지럽히던 시절이었다. 이를 역사주의historicism라고 하는데 이에 대응하여 새로운 것을 찾던 끝에 나타난 것이다. 가장 먼저 영국에서 반응하여 미술공예운동이 시작되었다.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가 주동 세력이었다. 이들은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량 상품이 문제라고 여겼다. 전통적인 수공업과 공예를 다시 불러들임으로써 해법을 찾고자 했다. 이로써 미술공예운동은 아르누보 스타일이 탄생하는 데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존 러스킨은 예술 평론가, 작가, 화가, 사회 개혁가로서 19세기 후반 영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많은 글을 써서 산업 사회를 비판하고 수공업과 공예의 가치를 칭송했다. 윌리엄 모리스 역시 화가였으나 그림보다는 글을 잘 썼고 손재주가 좋았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수공예 회사를 차려 제품을 직접 디자인하고 수작업으로 제작했다.
바로 이런 움직임이 멀리 브뤼셀의 미술학도 앙리 반 데 벨데에게도 전해졌다. 1888년 모친상을 당한 앙리는 슬픔에 잠겨 칩거하며 철학 서적을 읽었다. 그러다가 러스킨의 글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미술공예운동에 주목했다. 그렇지 않아도 순수 미술이 자신의 세계를 충분히 표현해 주지 못한다는 불만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결국 회화를 포기하고 응용 예술의 길을 걷기로 한다. 일단 런던으로 갔다. 미술공예 움직임에 동참하여 작업했다. 디자인 감각을 타고났으므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했다. 그는 선線에 매혹된 사람이었다. 특히 식물 줄기의 자연적인 선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푹 빠져있었다. 선에서 시작하여 디자인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선에 역동적 에너지가 내재해 있어 스스로 변화하며 새로운 형체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고 했다. 건축 설계에도 도전했다. 그리고 건축이 가진 무한대의 디자인 가능성을 발견했다. 건축의 외피며 실내 구조뿐만 아니라 인테리어, 가구, 촛대, 식기, 전등까지, 무엇을 보나 디자인할 대상이었다. 그는 건축이야말로 모든 디자인 분야를 흡수하는 종합예술로 보았다. 브뤼셀로 돌아가 결혼하고 신혼집을 지을 때 건축과 인테리어는 물론 가재도구에서 티스푼까지 백 퍼센트 직접 디자인했다. 의상도 디자인했다. 그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겠다는 여성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결국 그의 아내가 입어야 했다.
1900년, 반 데 벨데가 베를린에 나타났을 때 그는 이미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폴크방 박물관을 설계하고 베를린의 스타 헤어 디자이너 펠릭스 하비의 의뢰를 받아 미용실 인테리어를 해주었다. 건축부터 문고리까지 다 설계한다는 반 데 벨데에게 설계를 의뢰하려는 고객들이 줄을 섰다. 그러나 그는 좀 더 높이 도약하고 싶었다. 베를린 장안의 멋쟁이 케슬러 백작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가 전환점을 제시해 주었다. 외교관, 미술 수집가, 작가였던 케슬러 백작은 예술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는 반 데 벨데의 내면에 훨씬 큰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보고 함께 바이마르에 가자고 제안했다. 바이마르를 제2의 피렌체로 만들자고 했다. 당시 바이마르와 작센을 통치하고 있던 빌헬름 대공에게 반 데 벨데를 추천하여 예술 자문으로 부름을 받게 했다. 반 데 벨데는 1902년, 만 32세의 나이로 아내와 자녀들을 동반하고 세계도시 베를린을 떠나 바이마르로 향했다. 여기서 1917년까지 지낸 십오 년이 그의 최전성기로 꼽힌다. 대공으로부터 공예 학교를 설립하여 제품 디자인에 힘쓰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공예 세미나를 통해 그는 예술, 산업과 수공업을 결합하고 실무와 이론을 일체화시켜나갔다.
완벽한 디자인은 용도에 정확하게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제2의 피렌체’를 위해 부지런히 마스터플랜을 꾸렸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