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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ye Seowon
  • 환경과조경 2010년 3월

남계서원

Namgye Seowon which is located in 586, Wonpyeong-lee, Sudong-myeon, Hamyang-gun, Gyeongsangnam-do is 4,810㎡ area. It was given the name “amgye”in the 19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1566). It is the oldest seowon, the next to Sosuseowon, and it was reconstructed after burning down in the time of war, Jeongyujaeran. Gaeam Kang-Ik, Dongye Jeong-On, and Noigye Yu-HoIn are enshrined in the shrine. The aesthetics of adaption is connected spatially, topographically, and functionally with Jundo-gate, Jeonsacheong, Myeongseongdang, Gyeonpangak, Yangjeongjae, Aeryeonheon, Boinjae, Yeongmaeheon, and Pungyeongru. It was appointed as national historical relics no. 499 in 26th of May, 2009.

남계서원은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번지에 위치하며, 면적은 4,810㎡로 조선조 성리학에 있어 오현의 한 사람인 일두一정여창鄭汝昌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건립을 결의한 후,조선 명종 19년(1566) “남계 溪”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이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복원하여 개암介庵강익姜翼, 동계桐溪정온鄭蘊, 임계林溪유호인兪好仁 등을 배향하고 있는 국내에서 소수서원 다음으로 오래된 서원으로, 풍영루, 명성당, 양정재, 보인재, 경판각, 애련헌, 영매헌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2009년 5월 26일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었다.

造營_남계서원은 일두一정여창(鄭汝昌, 1450-1504)1 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명종 14년(1559) 강당, 1561년 사당, 1564년 동재와 서재 그리고 연당을 완성하면서 그 후 1566년 서원 곁의 시내 이름을 따서“남계 溪”2라는 사액을 받았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선조 38년(1605)에 나촌羅村으로 터를 옮겼다가, 선조 43년(1612)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중건되었다.3 이후 숙종 1년((1675) 동계 정온,(1569~1641)이 서서西序에, 숙종 15년(1689) 강익이 동서東序에 추가 배향되었다. 그리고 별사別祠에는 임계 유호인(1445~1494)과 정홍서가 배향되었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별사는 훼철되었다. 현재는 교육적 기능이 없어지고 제향기능만 남아있으며, 『어정오경백편』·『고려사』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立地_남계서원은 연화산(443.2m)을 주산으로 백암산을 안산으로 득수 형국을 이루는 구릉에 위치하여‘신향인좌申向寅坐’‘, 전저후고前低後高’의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지형 및 수계적 측면에서는 서원 앞으로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이 흐르며, 안산인 백암산이 사원을 마주보고 있다. 한편 근경으로는 원평마을 일대가, 원경으로는 남계천 너머 개평마을 이차경된다.4 주변 환경으로는 함양 상림, 화림구곡 등이 있다.

空間構成_1)配置形式
서원의 공간구성은 홍살문, 하마비, 풍영루 등의 진입공간, 애련헌, 영매헌, 연지 등의 유상공간, 명성당, 양정재, 보인재 등의 강학공간, 내삼문, 사당 등의 제향공간, 고직사 등의 지원공간을 가지는‘전학후묘前學後廟’ 의 배치구조를 보이고 있는 바,5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원 입구에는 하마비와 홍살문이 위치하고 있으며,6 이를 지나 정문이자 외문인 풍영루를 들어서면 전면에 앞뜰과 중정 마당 전면으로 두 개의 연지가 있으며 강당인 명성당을 마주하게 된다. 또한 강당과 누문사이에는 동재인 양정재와 서재인 보인재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으며,7 보인재 남측에 묘정비각이 있다. 한편 강당 좌측, 고직사 입구 전면에는 제향전날 제관들이 제례물을 올려놓고 품평을 하는 세단으로 된 석조 생단牲壇이, 강당 우측에는 경판각이 있다. 한편 명성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있고, 삼문을 들어서면 담장을 둘러 별도의 영역을 마련한 사당이 있으며, 또한 사당 내 전사청이 북향해 위치하고 있다. 전면에는 제향시 사당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기 위해 대야를 올려놓는 시설인 관세대와 정료대가 있다.

1‘.우강(右江)함양’의 기틀을 이룬 정여창은 세종 32년(1450년)서원 북서쪽에 위치한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에게 글을 배운 후 학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의 학문은 성리학사에 있어 하나의 큰 자취를 남겨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2.남계(溪)라는 명칭은 수동의 물 수(水)자와 연관되며, 넘칠‘濫’, 계곡‘溪’명칭은 풍수적으로 남계서원이“물 위에 떠있는 연꽃[蓮花浮水形]”을 이루는 장소에 위치하고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3.서원은 조선시대 사회윤리를 보급하고 향촌 질서를 재편성하며 지역공동체를 이끌어간 핵심공간이자 도학을 이상으로 삼던 사림세력들의 관념세계가 반영된 성리학적 이상세계이다. 이에 서원은 대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산수가 뛰어나고 조용한 산기슭이나 계곡 또는 향촌에 입지하였으며, 성격에 따라 절터 또는 퇴락한 사찰을 이용하였다. 더러는 선현의 연고지에 건립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관학인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행정적으로 조정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서원 제도에 함유된 유가적 운둔사상 등과도 연계되어 있다고 사료된다.
4.남계서원은 주변 자연 경사지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는 서원 배치가 풍수사신사의 형세를 반영함은 물론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완경사지 자연지형을 활용한 공간 및 시설배치를 통하여 담 밖의 경관을 효과적으로 차경함에 있다. 즉, 담으로 둘러쳐진 서원영역은 심리적 경계일 뿐 서원 안팎의 자연은 연속성을 갖고 공유되며 통합적 시계구조를 가진다.
5.서원은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의 중심축을 일치시키고, 건물들이 직각과 평행을 이루도록 정연하게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남계서원은 진입공간에서 풍영루까지의 축과 풍영루에서 명성당까지의 축 그리고 다시 강당에서 사당까지의 축이 동일 직선상에 형성되지 않고 각각 1°와 2°씩 우측으로 편향된 별도의 축선 상에 놓여있다. 또한 연지 또한 직교축선상에서 약간 벗어난 부축 상에 놓여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6.풍영루를 지나면 열린 공간이 전개되며 그 너머 동·서재 측면으로 마당이 돌출된 듯 지각된다. 이는 경사진 땅에 건물을 배치하고 적정 규모의 연지를 조성하여 시각적 균형감을 확보하였음을 의미한다.
7.남계서원의 강학공간은 중심성이 상하, 좌우대칭 구도로 명확하게 분리되고 있다. 특히 강당건물은 짝수 4칸의 칸수구성이 적용되고 있는데 이는 예제적 원칙이 준용된 것으로 사료된다.

2)空間構成要素
식물 _서원의 현존 수목은 서원 조영 당시와는 차이가 있으며, 또한 정확한 고증을 위한 자료 또한 부족한 실정이다. 당시 동·서재 전정의 연지에는 홍백련을 심고 그 주변에 매화와 죽을 심었는데,8 현재는 은행나무 1주와 버드나무 1주가 있으며 주변에는 무궁화, 구상나무 등이 식재되어 있고 지당내는 수련과 창포가 식재되어 있다. 또한 서원 입구와 사당 후면에는 송림이 울창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사당 후면에는 소나무 등의 일부 잔존하고 있으며, 사당 입구에는 배롱나무9가 대식되어 있다.

건조물 _1. 풍영루 _ 이층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서원 내의 경물과 동산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동시에 원경으로 멀리 전개되는 산하를 차경하기 위한 경관집점 역할을 하고 있다.
2. 명성당 _ 정면 4칸으로, 중앙의 2칸 마루와 양쪽 협실 각 1칸으로 되어있으며, 왼쪽 협실은 거경재居敬齋, 오른쪽 협실은 집의재集義齋이다. 강익이 쓴『남계서원기』에 의하면“강당 이름“명성明誠”은“중용”의 밝으면 성실하다明則誠”는 뜻을 취했고“, 왼쪽 협실을“거경居敬”, 오른쪽 협실을“집의集義”라 한 것은“정자가훈程子家訓”의“경敬에 거해서 이를 궁구한다”는 내용과 맹자의“의義를 모아 산다集義以生”는 뜻에서 취했다고 한다.
3. 사당 _ 정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전면에 툇 칸을 두었으며, 내부에는 정여창을 주벽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4. 양정재, 보인재10 _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인데 각각 1칸은 온돌방이고 1칸은 누마루로, 서재의 경우 증자의‘이우보인以友輔仁’에서 학문수양의 인성론을, 동재의 경우 역경의‘몽이양정蒙以養正’에서 교육의 목적론을 성리학적 가르침 등과 연계하여 건물명에 표상화시켰다.
5. 경판각 _ 강학공간에 부속되는 건물로 선현 등의 문집 등을 보관, 판각하여 서적을 펴내는 목판을 보관하는 곳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우진각 지붕이며, 경판을 보호하기 위해 지면의 바닥을 높여 마루를 설치하였고 벽체도 판벽을 하였다.

8.연지에 홍백련을 심었다는 문헌 기록을 통해 유추하여 보건대, 연못에 각각 홍련과 백련을 구분하여 재식한 것은‘홍동백서(紅東白西)’의 개념에 근거해 동쪽은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 떠오르는 생명탄생과 관련 있는 홍련을, 서쪽은 음향오행의 상징색인 흰색의 백련을 재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9.배롱나무는 꽃이 오래간다 하여 목백일홍 또는 자미화라고도 불리는데 수피가 맨들거려 마치 살이 없는 백골과도 같아 보인다는 함의를 담는 식물로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였던 조선조 선비들이 선호하였던 성리학의 상징목이다.
10.건물구조는 기본적인 온돌과 마루 2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한 칸을 누마루로 할애하고 있다. 동·서재의 마루인 헌(軒)은 순수한‘마루’형식에서 벗어나 지면과 이격된 루(樓)의 형태를 갖춤으로써‘당(堂)’인 마루형식과 차별화되고 있다. 이 중에 방은 땅 위에, 마루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여서, 하나의 건물 안에 전혀 다른 내용의 장소가 공존하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또한 명칭도 동재인 양정재의 누마루는 애련헌으로, 서재 보인재의 누마루는 영매헌으로 각각‘연꽃’과‘매화’완상을 통해 격물지치(格物至治)할 수 있는 장소성을 갖는다.

수공간 _연지의 경우 지내로 내려갈 수 있게 자연석의 6단(W 1.5m × L 1.5m) 계단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너비 6.35m, 길이 5.5m, 깊이 1.5m(저면 5.8m×5.3m) 규모로 수련과 창포 등이 재식되어 있지만 원래 연꽃을 심어 관상하던 공간이다. 유교에서는 연꽃을 청렴의 상징으로 보았으며, 연꽃의 텅 빈 뿌리와 줄기는 학문의 관통 즉, 학문의 기초에서부터 통달에 이르기까지 대성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그것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의 모습을 칭송하여“꽃 가운데 군자花之君子者也”라 하였다.

結_ 본 고는 조선중기 주자가례와 강독의식 같은 당대의‘예제적 틀’을 적용하여 초창기 서원 형식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점유하고 있는 남계서원의 경관건축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한 조영실제, 입지·공간구성 중심으로 기술한 바,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영은 일두 정여창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명종 14년(1559) 강당, 사당, 동재와 서재 연지를 완성하면서“남계”라는 사액을 받았고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선조 43년(1612)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중건 이후 향사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둘째, 입지는 연화산을 주산으로 백암산을 안산으로 득수 형국을 이루는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원 앞으로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이 흐르며, 안산인 백암산이 사원을 마주보고 있으며, 주변 환경으로는 함양 상림, 화림구곡 등이 있다.
셋째, 공간구조은 사당, 강당인 명성당 그리고 양정재, 보인재, 풍영루, 묘정비각 등의 건물이 강당을 중앙으로 마루와 양쪽 협실로 배치되어 있는데, 왼쪽 협실은 거경재이고 오른쪽 협실은 집의재이다. 동재인 양정재와 서재인 보인재는 애련헌, 영매헌이 연결되고 중정 마당 전면으로 두 개의 연지가 있는데 전체적 배치형식은 완경사지에‘전학후묘’의 배치구조를 가진다.
넷째, 구성요소는 식물과 건조물, 수공간, 점경물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식물의 경우 사당 일원에는 배롱나무, 소나무 군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연지에는 수련과 창포 등이 재식되어 있으며, 건조물의 경우 강학의 기능을 담당하는 명성당, 동·서재, 전사청, 서원의 서비스 기능을 담당하는 고직사 등이 있다. 수공간은 동, 서재 전면부의 연지 등이 있으며, 점경물로는 제향의식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정료대 등이 있다.
이로 인해 16세기 중반 조영된 강학과 제향의 기능을 담당하던 공간으로서 남계서원은 조선시대의 여타의 서원과 비교하여 주자가례 등의‘예제적 틀’을 적용하여 초창기 서원 형식이 지니는 정형성을 잘 보여주면서 축선의 어긋남을 통해 구성의 변형을 꾀하고 있다. 또한 차경을 이용해 건물과 자연의 연계된 경관구조를 이루며, 구성미가 뛰어남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러한 경관건축은 해당지역의 지형조건 등의 자연적 요소와 당시의 성리학에 바탕을 둔 사상체계, 정치체계 등의 인문적 요소가 상호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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