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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기반시설, 그 새로운 가능성: WPA 2.0 공모전
  • 환경과조경 2010년 5월

The New Possibilities of Urban  Infrastructure: WPA 2.0

레비아탄(Leviathan)
콜린 로우(Colin Rowe)는 그의 저서『선한 의도의 건축(The Architecture of Good Intentions)』에서 모더니즘은 스스로를 “선한 과업(the Good Works)”이 종국에는 지상의 낙원을 이루리라 믿었던 종교로 여겼다고 지적한다. 모더니스트들은 계획의 가치를 믿었으며 도시를 혼란에서 질서의 세계로 이끌어줄 명확한 이념의 가능성을 신봉했다. 계획을 적용하는데 있어 모더니즘은 그 무엇보다도 기반시설에 중점을 두었다. 우리가 오스만 남작의 파리 개선 계획, 토니 가르니에(Tony �Garnier)의 산업 도시, 그리고 안토니오 산엘리아(Antonio �Sant’Elia)의 신도시 계획이 그려낸 전기 문명에 대한 환상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의 근대성은 기반시설에 달려있었다. 그 이상을 실현시키는 기반시설이 없었더라면 모더니즘 건축은 낡은 본체에 새로운 옷만 입힌 모조품에 불과했다. 르 꼬르뷔제는 “기술자들은 우리를 자연의 법칙과 조화시킨다”라고 말한다. 건축가들이 아직 환영에 불과한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기술자들이 기반시설을 건설할 필요가 있었다.
모더니스트들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기반시설이 지배하는 새로운 도시 문명에 대한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도시의 물리적 실체는 기반시설에 의해 규정된다. 전기송전시설, 상하수도 체계, 고속도로, 그리고 쓰레기 처리시설까지, 그 어느 하나라도 작동을 멈추어 버린다면 오늘날의 도시는 단 하루라도 존재할 수 없다. 모더니즘의 묵시적 예언이 예견했듯이 현대 도시 문명은 과학과 기술이 이룩한 기반시설 위에 다시 건설되었다. 하지만 기반시설은 도시의 생산적 활동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보조적 장치였을 뿐 그 자체로는 의미를 지니지 못했으며 그래야 할 필요도 없었다. 기반시설은 항상 다양한 변수들이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도시적 흐름의 일부가 아니라 항시 예측가능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공학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기반시설의 목적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전기를 공급하며, 지역 간의 이동 시간을 단축시키고, 치명적인 오류를 예상하고 대처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속도와 효율성, 그리고 예측 가능성, 이것이 기반시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덕목들이었으며 이는 20세기의 근대성이라는 이념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확히 일치했다.
새로운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신(巨神)들은 인간의 거주 영역을 극한까지 확장시켰다. 인간이 살 수 없었던 사막이 거대한 도시로 바뀌었으며, 도시의 영역은 수백 킬로미터로 확장되었다. 기반시설이 거대해지고 효율적이 될수록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던 물리적, 인식적 경계는 점점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에 따라 모더니즘이 그리던 유토피아의 풍경은 점점 디스토피아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효율과 속도의 신화는 어느 한 변곡점에서 붕괴된다. 고속도로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정체 현상은 더욱 극심해졌으며, 속도의 환상이 가져다주리라 예상했던 쾌적함 대신 치명적인 오염이 도시를 습격했다. 효율적인 수해 조절을 위해 건설된 수백 킬로미터의 콘크리트의 수로들은 악취가 풍기는 하수구가 되어버렸다. 항시 가치중립적인 기술의 영역에 속해있던 기반시설은 이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님비(Not in my backyard)’. 이 정당한 집단적 이기주의는 다름이 아닌 기반시설에 대한 단적인 혐오의 표현이었다. 이제 도시의 거대 기반시설은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도시의 조직을 단절시키며, 지가를 떨어뜨리고 지역의 발전을 저해하는 흉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의 도시는 기반시설이 만들어 놓은 체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기생수의 촉수가 이미 숙주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고들어간 두 유기체처럼, 도시는 복잡하게 얽힌 기반시설이 공급해주는 영양분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 혐오가 증가될수록 기반시설은 그 혐오를 자양분으로 삼아 거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혐오의 극단은 또 다른 유토피아적 환상을 제시한다. 보스턴 시내를 관통하던 I-93 고속도로는 20년에 걸친 공사를 통해 지하화되고 그 자리에는 공원이 들어섰다.
보스턴 빅딕(Big dig)의 세배 규모에 달하는 마드리드 M-30 고속화도로도 지상부를 강과 도시에 내어주고 지하로 감춰줬다. 서울시의 흉물이었던 청계고가도로는 철거되어 깨끗한 물이 다시 흐르는 새로운 청계천으로 다시 태어났다. 도시기반시설을 지상에서 추방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도시의 녹지 공간으로 만드는 이 혁신적인 발상은 성공적인 도시 재개발의 사례로 모든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6.5km의 고속도로를 공원으로 바꾸는데 22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간 빅딕이 수천 킬로미터의 고속도로가 얽혀 있는 기반시설의 도시 로스앤젤레스를 자유롭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기반시설과 도시가 함께 공존해야할 수밖에 없다면, 그 공존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WPA 2.0 공모전은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WPA 2.0
UCLA 건축학과 소속의 연구실인 시티랩(cityLAB)은 기반시설을 주제로 한 공모전을 개최한다. 오늘날의 도시적 상황 속에서 기반시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 열린 WPA 2.0 공모전은 특정한 대상지도, 제약 사항도 주지 않은 자유로운 형식의 아이디어 공모전이었다. 공모전이 제시한 기반시설이라는 주제의 범위 역시 도시적 활동을 지원하는 모든 물리적, 비물리적 장치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광범위하였다. 공모전의 대상은 공원, 학교, 수변 공간 등의 공간적인 요소가 될 수도 있었으며, 도로, 매립지, 상하수도와 같은 고전적인 기반시설도 가능했고, 법·제도, 자금 지원책, 인터넷 시스템과 같은 무형의 제도적 장치여도 상관이 없었다. 때문에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 이 공모전의 첫번째 과제는 기반시설과 관련된 의미 있는 문제를 찾아내는 데서 출발해야 했다. 참가자들이 선택한 주제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당위성을 지녀야 하지만, 아이디어 공모전이라는 특성상 그 해답이 자명한 문제는 피해가야 했다. 혹은 문제 자체는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만 그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이 아직까지 제시되고 있지 못하거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략이 제시되어야 했다.
신선한 공모전 주제 못지않게 이 공모전의 진행 방식 역시 일반적인 공모전과는 전혀 달랐다. 첫 단계를 통과한 팀들은 구체적으로 안을 더욱 발전시켜 최종적인 안을 만들게 된다. 최종 경쟁팀으로 선정된 팀들은 워크숍에 필수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기반시설이 이룩한 상징적인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첫째 단계에 제시한 안들을 정책, 에너지, 공학, 농업, 계획, 시장 분석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발표하고 조언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 뒤 각 팀들은 얼마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워싱턴 D.C.에서 심포지엄에 참여한 뒤, 심사위원단, 기반시설 전문가들, 그리고 오바마 정부의 기반시설 지원책을 만드는데 참여한 정부 관료들 앞에서 최종안을 발표하게 된다. 이 때 발표 양식은 반드시 동영상이어야 했다. WPA 2.0은 공모전이라기보다는 마치 학교의 스튜디오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공모전은 참여한 팀들에게 상금을 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답사, 토론, 워크숍, 심포지엄 등 혁신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안을 발전시킬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분명 이 공모전은 단순히 몇 가지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이 공모전의 목적은 도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지만 도시적 담론에는 속하지 못했던 기반시설을 다시 생각하고 도시기반시설과 오늘날의 도시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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