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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
  • 환경과조경 2010년 7월

Piram Seowon
造營_ 필암서원은 조선시대 김인후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23년(1590), 변성운 등이 그가 살고 공부하며 제자를 가르쳤던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이것이 1597년 정유왜란 때 소실되자 인조 2년(1624) 그가 태어난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사우를 지었다. 이후 현종 3년(1662)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필암’2 이라 는 액호를 하사받고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현종 13년(1672) 서원의 입지조건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다고 하여 다시 지금의 추산秋山으로 옮겨 지어졌고, 1786년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鼓巖梁子徵(1523〜594)도 함께 모셔졌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패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았으며, 현재는 보물 제587호로 지정된 고문서3와 인종이 하서 선생에게 하사했다는 묵죽도, 하서유묵 등 60여 건의 자료가 남아있다. 매년 4월에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열린다.

立地_서원은 축령산을 조산으로 증산을 배경으로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원 내 우동사, 내삼문, 청절당, 확연루가 서원 앞 들판으로 이어져 자연과 합일하고 있으며, 한편 앞쪽으로는 장수호에서 연계된 아곡천이 흐르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경관구조를 가진다. 주변 환경으로는 백양사, 홍길동 생가, 흥법사지 석탑, 가산서원, 두동사, 표의사, 진원현 이척산성, 삼성산성 등이 있다.

1. 김인후(1510〜560)는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이며 장성 출생으로 1531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그 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과 교우가 매우 두터웠다. 1540년 권지승문원(權知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부수찬(副修撰)·현감 등을 지냈으나,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장성으로 낙향하여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문집인《하서집(河西集)》과《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등을 남겼다. 정조 20년(1796)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필암서원 외에도 옥과 영귀서원(玉果詠歸書院), 노봉서원(露峰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우리나라 18현을 열거하면 신라의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 고려의 회헌 안향(晦軒 安珦. 후에‘裕’로 개명),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조선조의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一鄭 汝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退溪 李滉), 율곡 이이(栗谷 李珥),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우계 성혼(牛溪 成渾),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신독재 김집(愼獨 齋金集), 중봉 조헌(重峯 趙憲),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俊吉),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이다.
2. 연재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고종 9년(1872)에 쓴 필암서원 묘정비문에 의하면, 필암서원이 창건된 기산 동구(洞 )의 바위가 깎인 듯이 서 있는 것이 마치 붓처럼 예리한 형상을 했으므로 붓바위, 즉 필암으로 사액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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