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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의 식물이야기(6): 고대 약용식물 이야기 2, 한국 약초 오디세이
  • 환경과조경 2010년 10월

오래 된 약장
손 위의 언니가 정신여중을 다녔는데, 그때는 제기동 근처에 학교가 있었던 것 같다. 사년 터울이니 언니가 중학생일 때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방학 때 언니를 따라 가끔 정신여중에 갔었다. 언니가 방학동안 도서실에 다녔었던 것 같다. 지금처럼 놀 거리가 풍부하던 시절이 아니었고 과외나 학원도 없이 자유로운 몸이었으므로, 책을 좋아하고 언니를 좋아해서 귀찮게 따라갔었다. 도서실에서 책을 읽다가 지루해지면 혼자 제기동길을 어슬렁거렸던 기억이 난다. 약재상 구경을 나간 거였다. 한약은 그때까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지만 나무껍질 같은 것들을 수북하게 쌓아놓은 노점이며 어깨를 서로 맞대고 늘어서 있던 좁은 약방골목과 무엇보다도 독특한 향이, 책에서 읽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신기한 세계에 못지않아 보였다.
나중에 카이로 등을 다니며 바자를 구경했지만 그때 느꼈던 약간의 두려움이 섞였던 경외감, 신비감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귀국 후 제기동 약방골목이 그대로 있을 뿐 아니라 아예 명물이 된 것을 알고 꽤 반가워했었다.
그때 이미 약령시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불렸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약령시라는 어휘자체를 몰랐던 시절이다. 최근에 대구 약령시에 관한 기사가 보도되면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약령시의 전통이 꽤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약령시란 조선 후기에 형성, 발전된 향시의 일종으로서 한약을 채취하는 봄과 가을, 즉 음력으로 2월과 10월에 대대적으로 열린 약재시장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대구, 원주, 전주, 공주, 진주, 청주, 충주 등의 도읍에 개설되었지만 약재의 출회가 많았던 대구, 전주, 원주의 약령시만이 제 기능을 하게 되었으며 일제 강점과 더불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약령시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15~16세기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한국 의학의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나온『향약집성방』,『향약채취월령』,『 의방유취』등의 의서는 의학 지식을 널리 보급시키는 데에 일조하였으며 특히『동의보감』의 출간으로 한국의학이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들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하기로 한다.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 역시 파라셀수스Paracelsus며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등 유명한 의사들이 배출되었고 의약제조법 관련 서적들이 연이어 선을 보였다. 15세기는 그런 시대였던 것 같다. 유럽이야기도 좀 더 미뤄야 할 것 같다.

십여 년 전 쯤 되었나 보다. 베를린의 한인상점에서 우연히 전통 약장을 보았다. 골동품은 아니고 분명 장식용의 모조품이었지만 반가운 나머지 구입해버렸다. 지금도 물론 그 약장을 가지고 있다. 서랍이 모두 마흔 여섯 개이고 각 서랍에는 한자로 약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굳이 한약 이름을 알고자 하지 않았고, 알았다 하더라도 약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약장을 가졌다는 사실만 즐거워하며 서랍마다 독일 허브를 채워 넣었었다. 최근에 그 약 이름들을 좀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필체가 상당히 조악하다는 게 눈에 띄었다. 필체 탓만 할 것이 아니라 나 또한 한자를 써 본지 오래된 터라 다 해독할 수가 없어서 옥편을 꺼내 먼지를 털었다. 약 이름은 모두 두 글자씩으로 되어 있는데, 어릴 때 제기동 추억을 제외한다면 한약과의 관계가 전무한 나로서는 한약이름은 모두 두 글자로 되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약을 찾다 보니 세 글자 이상으로 된 이름이 꽤 있고, 약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편의상 두 글자로 생략한 것 같다. 예를 들면 천남성이 남성으로, 현호색이 현호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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