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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원 - 희원, 시간을 디자인하다
  • 환경과조경 2005년 1월

희원(熙園), 시간을 디자인하다

… 전략 …

공간과 시간의 조화
호암미술관이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보여주는 많은 미술품들을 담고 있고 미술관 건물 또한 전통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유수한 미술관들이 아시아 정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한국 정원을 제대로 보여주는 미술관이 국내에서조차 아직도 없는 실정이었으므로 희원이 한국 전통정원의 복원과 창조를 그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통성을 살린 정원을 만든다는 것은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다. 여차하다간 전통성 시비에 휘말릴 우려도 있고 복원과 창조 사이에서 어디에 비중을 둘 것인지도 숙고해 보아야할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정원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희원이 가지는 중요한 조경사적 의의는 우리 정원 속에 담겨있는 전통의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해 조경의 담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서구의 조경 실천 경향에 온통 이목을 집중하였던 조경계의 흐름에 비해 한국적인 것에 대한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 개인 정원이 아닌 공공부분에서 한국정원을 풀어낼 프로젝트가 드물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희원프로젝트는 부지의 목적과 환경 조건, 발주자의 기호, 설계가의 강한 의욕 등 모든 요인들이 딱 들어맞았던 조경계의 빅 이벤트였다.
오늘 우리가 희원에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각 재료가 가진 물성을 잘 살려내었다는 점일 것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그 자리에 있어온 듯한 자연스러움이 재료들로부터 느껴지는 것이다. 아울러 정원으로서 갖추어야할 디테일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고유섭(高裕燮, 1905-1944)선생의 ‘무기교의 기교’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희원이 보여주는 물성을 살려낸 세심한 디테일은 한국정원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좋은 교훈이 된다.
희원의 또 다른 장점은 전통적 모티브의 도출이 적합하게 이루어 졌다는 점이다. 희원은 전통정원의 백화점 같다. 문과 담, 정자와 연못, 돌과 재식 등 정원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 속에서 전통정원의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설계 당시 가동할 수 있는 전통정원에 관한 정보를 총망라한 듯한 느낌이다. 각 부분마다 드러나는 전통 정원의 편린들은 모티브 과잉인 듯한 느낌마저 들어 오히려 정원의 자유로움을 억제한다는, 다시 말해 전통이란 것에 너무 얽매여 있다는 느낌마저 들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것은 안전한 선택이었다.
세 번째는 전통의 조각들이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는 부지의 지형과 경관의 씨줄과 날줄 속에서 결을 따라 용의주도하게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힘들게 찾아낸 전통정원의 모티브들을 단순하게 꼴라주하거나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부지의 조건과 미술관이라는 기능에 충실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원야(園冶)>의 표현을 빌리자면 합의득체(合宜得體)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희원에서 보다 돋보이는 점은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이 프로젝트의 주된 화두는 시간이라 할 것이다.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보물들, 미술관 주변에 널려 있는 석물들은 전부 시간의 산물이다. 그리고 정원이 지향한 한국 전통조경의 복원과 창조 또한 시간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다. 전통이란 하나의 양식으로 우리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만 실은 보이지 않게 쌓여 있는 시간의 두께가 우리들에게 전통이란 개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무에게 나이테가 생기듯 시간의 나이테가 전통인 것이다. 한 날 한 시 한 장소에 모아 놓은 정원의 요소들은 제각각의 일정대로 진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이 수십 년 수백 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싱크로나이즈 되면서 도달하게 되는 상호간의 조화를 우리는 전통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전통정원을 복원 혹은 재창조한다고 하였을 때 전통성이란 단순한 형태의 모사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시간을 얼마나 적절하게 담아내느냐가 키포인트가 된다. 이런 점에서 희원의 디자인은 뛰어나다. 대석단과 그 앞의 소나무에서부터 계류 속에 놓여진 돌들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디자인을 이루었다. 물론 모두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직도 담장과 정자의 기와는 어제 만들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도무지 시간이 깃들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희원을 통해 조경가의 손길은 공간만을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기는 내용의 시간에까지도 미쳐져야 함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돌아오는 차속에서 나는 희원이 또 하나의 전통이 되어주기를 기원했다. 희원의 대석단과 소나무 위에, 그리고 담장의 기와 위에 시간이 눈처럼 쌓이고 그것이 녹고 또 쌓여 희원도 전통정원으로 남게 되길 바랐다. 희원으로 인해 전통이 박물관속에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에 숨쉬며 진화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리움’ 같은 현대미술관에 한국정원을 조성한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모습이 될까? 이 모든 새로운 미래의 출발점에 희원이 있다.


이 유 직 Lee, Yoo Jick
밀양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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