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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헤라클레스의 모험
  • 환경과조경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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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놀드 뵈클린(Arnold Böcklin)의 1886년작 ‘성림(Sacred Grove)’. 고대 그리스에서 성목으로 여겼던 플라타너스와 올리브 나무 수림에서 제를 지내는 장면

 

 

#69

헤라클레스, 올림피아에 가다

 

헤라클레스는 고대 그리스가 낳은 영웅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긴 신화를 가졌다. 알고 보면 인류 문화 최초의 연작물 주인공이기도 하다. 구조적으로 볼 때 그의 신화는 현대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혹은 본 시리즈(본 아이덴티티 등) 등과 많이 닮았다. 하나의 영웅을 두고 이야기를 자꾸 만들어 낸 것이다. 기원전 800년경 처음 언급되기 시작해 이후 수백 년 동안 수없이 작가가 교체되었고 주인공 헤라클레스의 캐릭터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는 ‘살아있는 병기, 문제 해결사’라는 특수 임무를 띠고 세상에 나타난 모든 영웅의 선조이기도 하다. 타이탄들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제우스가 특별히 계획하여 낳은 아들이었는데, ‘인간의 아들’만이 타이탄을 죽일 수 있다는 예언이 있었기에 정실 부인을 놔두고 어느 인간 여성의 몸을 빌려 탄생시켰다. 그 때문에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이 헤라클레스를 몹시 미워하여 평생 괴롭혔다. 툭하면 정신착란증을 내려 보내 발작하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그는 초인간적인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통과 고뇌에 시달리던 불완전한 영웅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 같다. 그런점에서는 오히려 제이슨 본과 유사하다. 슈퍼맨, 배트맨뿐만 아니라 이제는 제임스 본드까지 만화적 완벽성을 버리고 점차 개인사를 지닌 인간적 캐릭터로 변하고 있는 추세다. 말하자면 헤라클레스의 모습과 점점 닮아가고 있는 것 이다. 생각할수록 그리스 신화는 21세기에도 따라잡기 어려운 모던함과 심오함을 지니고 있다.

타이탄과의 전쟁을 위해 특별 제조된 비밀 병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타이탄 전쟁에 대해서는 신화 속에서 잠깐만 언급된다. 임무를 마친 뒤 신화 속을 걸어 나와 유유히 사라져버려야 마땅했겠으나 사람들이 그를 보내주지 않았다. 그의 진짜 커리어는 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현대의 연작물은 우선 상업적 이익 때문에 만들어질 것이다. 고대에 헤라클레스 시리즈가 계속 만들어졌던 이유는 일차적으로 건국 신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 헤라클레스를 건국 시조로 삼는 것이 유행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모험을 겪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이사이 아들도 무수히 낳아야 했다. 흑해 연안에서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 이르기까지 헤라클레스의 아들 누구누구가 세웠다고 주장하는 나라들이 속속 나타났으며 그 덕에 헤라클레스의 신화는 눈덩이처럼 부풀어갔다. 그의 신화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초월하여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거쳐 프랑스혁명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컴퓨터의 시대가 오면서 게임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이렇듯 세상에서 가장 긴 시리즈의 주인공으로서 헤라클레스는 수 없는 일화를 만들기 위해 지구를 몇 바퀴 돌고 지하 세계는 물론 파라다이스까지 다녀왔다. 그러니 정원에 연루된 것도 하등 이상할 것 없다.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헤라클레스는 어린 시절, 신분과 임무에 걸맞은 특수 교육을 받았다. 당시의 교육이라면 우선 신체 훈련을 뜻한다. 레슬링, 복싱, 수영, 활쏘기를 배웠고 나중에는 마차 경주도 배웠다는데1 이쯤에서 이야기에 혼선이 온다. 그가 마차 경주를 고안해냈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받은 교육 과목은 최초의 올림픽경기 종목과도 일치한다. 아닌 게 아니라 헤라클레스는 올림픽 경기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언제 틈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매일 새벽 경기장에 나가 연습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연습하기 전에 우선 바닥을 뒤덮은 아칸투스를 벌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 헤라클레스가 운동 연습을 하던 장소를 당시에는 ‘김나지온’3이라고 불렀다. 김나지온은 “고대 그리스 건축 문화사 중에서 가장 포착이 어려운”4 곳이다. 일종의 종합 시설로서 종교·스포츠·교육·문화 시설이 융합된 장소였다. 말하자면 정치를 제외한 모든 사회 생활이 이루어지던 장소였다. 그 시작은 ‘성림sacred groves’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대개 도시 바로 외곽에 있는 숲 속, 샘물이 흘러나오는 장소에 성소를 마련했다. 지역에 따라 커다랗고 신비스러운 플라타너스나 올리브나무 군락을 성림으로 삼기도 했다. 숲 속이나 큰 나무에 신들이 내려온다고 여겼으므로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정기적으로 제를 올렸는데 이런 점은 어느 문명권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리스인의 경우 신에 대한 정기적인 기도와 제사 외에도 영웅 숭배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대개는 각 도시 국가를 최초에 세운 전설적인 영웅들을 위해 성림을 따로 마련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 때 제물을 바치고 조용히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제사와 함께 운동 경기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신체적·정신적 훈련, 의식과 제례, 영웅 숭배가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되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것이 나중에 올림픽 경기로 발전하게 된다. 처음에는 제단 옆에 자리를 마련하고 씨름이나 복싱 경기를 했겠지만 차츰 제대로 된 경기장이 들어섰다. 가장 먼저 들어선 것이 레슬링장이었다. 정방형의 모래밭을 가운데 두고 사방을 주랑으로 둘렀으며 주랑 바깥에 탈의실, 욕실, 휴게실, 대기실 등의 방을 배치했다. 이런 시설을 ‘팔라이스트라palaestra’라고 불렀다. 그 다음에 세워진 것이 기다란 달리기 코스였다. 우천 시 혹은 겨울에도 연습을 할 수 있게 여기에 지붕을 덮어실내 체육관을 만들고 이를 ‘키스토스xystos’ 라고 했다. 지붕을 덮지 않은 경기장은 ‘스타디온’이라고 했으며 이것이 모든 운동 경기장의 기원이 된다. 팔라이스트라와 키스토스 혹은 스타디온 사이의 공간에 산책과 휴식을 할 수 있는 정원이 조성되었고 이들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전체를 담으로 둘렀는데 이 복합 시설이 바로 김나지온이었다. 김나지온은 또한 선수들을 전문적으로 훈련시키고 청소년을 교육하는 학교의 기능도 겸했다.5 올림픽 경기가 활성화되 면서 시설이 점점 확대되어 관람석, 야영장, 숙박 시설은 물론 야외극장도 들어서는 등 거대한 콤플렉스로 성장했는 데, 특이한 것은 본래 있던 성림 주변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올림피아 유적지의 배치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신전과 김나지온이 한 장소에 조성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이런 구조는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김나지온에서 교육을 받았던 헤라클레스가 나중에 영웅이 되어 모험을 다니다가 우연히 올림피아에 들르게 된다. 마침 경기를 하고 있었는데 뙤약볕에서 전차 경주하는 모습을 보고 북쪽에 있다는 파라다이스에 후딱 가서 올리브 나뭇가지들을 가져와 경기장 주변에 심었다는 것이다. 영웅이 심은 것이니 아마도 바로 숲이 되었나 보다. 그 잎을 따서 화관을 만들어 승자에게 씌워주었다.6 이것이 김나지온 주변에 나무를 열 지어 심어 그늘을 만들고 산책로를 조성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므로 그에 잇대어 수림을 조성하거나 아니면 주변에 남아있던 숲을 공원처럼 개조하여 산책과 휴식의 장소로도 제공했다. 이렇게 김나지온은 운동과 교육의 장소였을 뿐 아니라 성림, 가로수 산책길, 공원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 조경 시설로도 성장해 갔다. 대개 정원의 역사는 지배자들의 거대한 궁전이나 영지에서 시작되지만, 왕의 궁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던 고대 그리스는 시민들의 복합 문화 공간 김나지온이라는 독특한 장소를 탄생시켰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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