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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마감에디토리얼을 쓰다가
  • 환경과조경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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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의자 하나 사드릴게요!” 얼마 전 남기준 편집장이 던진 진심어린 농담이다. 사연은 이렇다. 봄과 여름이 때 이른 줄다리기를 하던 어느 날, 마감전쟁을 치르는 동료들을 나 몰라라 뒤로 한 채 학회 참석을 구실로 이탈리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안한 마음에 에디토리얼이라도 빨리 넘겨야겠다고 작심했다. 굳은 결심의 효과였을까. 어깨를 펼틈도 없이 좁은 이코노미 좌석은 집중을 넘어 몰입의 경지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구상, 검색, 커피, 흡연, 산책 등 글쓰기의 필수 과정이라고 여겼던 일련의 습관을 강제로 생략당하니 글이 단숨에 풀렸다.

육필로 휘갈겨 쓴 원고를 옆 자리 승객에게 빌린 노트북으로 타이핑한 후 모니터를 휴대폰으로 찍었다. 착륙 후 와이파이 터지는 곳에서 ‘원고 사진’을 카톡으로 보냈다. 원시와 첨단이 뒤섞인 이 이상한 프로세스에 아마 독자들은 물음표를 던지실 것 같다. 몸은 바다 건너 멀리 있었지만 그 어느 달보다 빨리 끝낸 원고를 칭찬하며 편집장은 한 달에 한번 마감 때마다 국내선이라도 꼭 탈 것을 권했고, 마침내 비행기 의자 선물이라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까지 떠올린 것이다.

이제 2년 반이 넘었으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매달 잡지의 첫 지면에 무언가를 쓴다는 게 영 어색하다. 한두 시간이면 충분한 A4 두 장의 짧은 글, 하지만 한 달 내내 어깨를 내리누른다. 사례는 나의 힘! 서점과 온라인을 두루 헤매며 국내외 저명 전문지는 물론 잘 나간다는 상업 잡지의 에디토리얼을 사례 연구하기도 수차례. 그러나 답은 없다. 근사한 스타일로 간명하게 독자들을 사로잡는 멋진 글들을 흉내 내보지만 결국 아류의 티를 보정할 수 없다. 그달에 실리는 내용을 두루 안내하면 모범생이 쓴 교과서 서문처럼 재미가 없어진다. 공들여 기획한 특집에 한 명의 독자라도 더 끌어들일 요량으로 특집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중언부언이 되기 십상이다. 약간의 메시지를 담거나 주장을 넣으면 진부한 계몽이나 어설픈 설교의 곁길로 샌다. 최근에 마음 꽂힌 책이나 작품에 초점을 두면 먹물 버릇이 발동해 당장 고루한 논문이라도 쓸 태세다. 이른바 조경계의 현안(?)이란 걸 다루자니 수영복 입고 지하철 타는 기분이고, 그 현안을 다른 프레임으로 진단하자니 매국노 취급당할 게 뻔하다.

재치를 발휘한답시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프로 편집장과 편집팀장, 그리고 아마추어 편집주간이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거나 아이디어를 메모하거나 수다를 떠는 용도로 쓰는 ‘단톡방’의 대화내용을 버무려 집단 창작이라는 미명 하에 이 지면에 적은 적도 있다. 잡지 리뉴얼 때부터 지금까지 어려울 때마다 고견을 들려주고 있는 몇몇 선배들로부터 얻어내는 아이디어나 정보를 가공해 싣기도 한다. 연구실 대학원생들과 함께 한 세미나의 줄거리를 옮긴 적도 몇 차례. 심지어 어느 제자와 나눈 대화를 조금 살을 붙이고 가다듬어 기록하기도. 고백하자면 어느 학기의 종강 때 수강생들에게 나눠주었던 편지를 에디토리얼에 재탕으로 우려 싣기도 했다.

참으로 놀랍고 곤혹스러운 사실은 의외로 이 지면을 읽는 독자가 많다는 점이다. 정확한 통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편집부에 들려오는 여러 소문을 종합해 보면, 비교적 열독률이 높은 지면은 에디토리얼과 잡지 제일 뒤쪽의 코다CODA, 본문 중간중간의 텍스트 양이 많지 않은 짧은 연재 글들이라고 한다.

특히 잡지의 첫 쪽이다 보니 이 지면을 펼치고 잠시 시간을 투자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지만, 에디토리얼보다는 열심히 만든 특집, 그달에 힘준 작품, 필자의 많은 공이 들어가는 연재 글들에 시선을 던져 주십사 이 자리를 빌려 독자들께 부탁드린다. 앞에서 구구절절 징징거리며 늘어놓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 에디토리얼 지면은 매달 잡지의 마감일을 지연시키는 주범이 된다. 디지털 출력본의 교정까지 끝내고 인쇄소로 넘어갈 준비가 완료된 상황, 모두가 목을 빼고 내 원고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 대략 난감이다. 또 한 달이 흐르고 어김없이 만난 막다른 길, 머릿속을 산만하게 떠다닌 글감 세 조각을 소개한다. 원래는 다음의 세 가지 주제가 강력한 후보로 경쟁했는데 마감에 몰려 쓰다 보니 어디론가 휘발된 모양이다.

첫 번째 후보는 조경에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 최정민 교수(순천대학교 조경학과)가 “조경, 다른 이름을 가지는 것은 어떤가”(라펜트, 2016년 7월 10일)라는 칼럼을 통해 6월호 에디토리얼 “조경이라는 이름”의 문제의식을 확장해 주었다. 공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는데, 이 지면보다는 조금 더 넓은 공간에서 깊이 있게 다루는 게 나을 것 같다. 그가 명쾌하게 진단하고 있듯이 “조경이라는 이름이 조경이 하는 일이나 결과물을 대변하지 못하고 … 조경이 하는(할 수 있는) 일을 제한하고 있다”면, 40년 넘게 정든 이름이라 아쉬움 가득하지만 개명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조경은 조경에 갇혀 있다.

경합을 벌인 두 번째 후보는 용산공원. 수면 아래에서 잠잠하던 용산공원이 지난 4월 이후 심심찮게 언론을 타고 있다. 공원에 들어갈 ‘콘텐츠’를 선정하는 공청회 이후의 일이다. 2012년의 국제 설계공모 이후 당선작을 바탕으로 기본설계가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실종되었던 용산공원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하지만, 쟁점의 생산 과정이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그 핵심 이슈가 시간을 역행하는 양상이라 우려된다. 특히 일부 정치인들의 비논리적인 주장에 대응할 수 있는 전문가의 책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긴 호흡으로 천천히 추진하는 것과 예산의 전액 삭감에 따른 계획 중단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슈다. 심도 있게 기획해 본문에서 다시 다룰 것을 약속드린다.

마지막 후보는 이번 특집인 파빌리온이었다. 짐작하시겠지만 8월의 특집 ‘파빌리온’은 무더위에 지친독자들을 의식한 계절형 기획이다. 폭염으로 가득한 한여름의 도시, 어딘가에 숨겨진 나만의 자유의파빌리온을 찾아보시길.

참고로, 비행기 의자 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갔다.

중고로 나온 물건도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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