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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하지운이다
Editorial: Her Name Is Ha Ji Un
  • 환경과조경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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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의 봄, 한두 주짜리 단기 프로젝트를 열 개정도 진행하는 기초 디자인 스튜디오 첫 시간, 떨리는 마음으로 출석부의 이름을 정성껏 부르다 마지막 줄에서 눈이 멈췄다. 한 여학생 이름 옆 칸의 소속이 경제학과로 적혀 있었다. 네, 하고 대답하는 쪽을 보니 얌전한 인상의 여학생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손을 들고 있었다. 기본적인 드로잉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을 테고 또 과제물이 적어도 매주 이틀은 밤을 새워야 할 분량인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고 지치면 알아서 관두겠지, 흘려 생각하며 수강을 허락했다.

다음 주, 그는 출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석이 아니라 외모가 몰라보게 달라진 것임을 곧 깨달았다. 조용하고 수줍은 여학생이 한 주 만에 레게 머리의 힙합 걸이 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넘어갔다. 세 번째 주는 복고풍 세라복에 단발이었다. 한 주가 또 흐르자 노란색 긴 머리와 빨간 원피스의 조합이었고, 그 다음 주엔 검은 커트 머리에 타이트한 스커트의 오피스 걸 룩. 매주 화장 색조와 톤이 급변했고, 목과 귀와 팔과 발의 장신구가 달랐음은 물론이다. 이 다채로운 변신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의 설계 작업에 주목하지 못했다. 학기가 삼분의 일이나 흐른 뒤에야 겨우 알아차렸다. 그의 머리, 의상, 화장, 장신구가 모두 주별 디자인 프로젝트의 일부라는 것을. 디자인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매체로, 또 때로는 설득하는 도구로 자신의 신체까지 사용한 셈이다. 설계 성과물의 일부인 그의 외양은 학기말까지 매주 달라졌다. 순전히 설계안의 개념 때문이었다. 인형을 동반하기도 했고, 장난감 권총 같은 소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최종 발표 때는 급기야 뽀글뽀글한 ‘아줌마 파마’를 하기에 이르렀다.

가을 학기에도 그 여학생이 조경학과에 나타났다. 조경을 복수 전공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연구실로 불러 물었다, 조경이 좋니? 네. 조경이 뭔 거 같아? 잘 모르겠어요. 의외로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그럼, 왜 조경이 좋은데? 그러자 매우 논쟁적이지만 아주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일상적인 공간에, 장소에, ‘나를 표현’할 수 있어서요.” 그 학기에도, 학회가 주최하는 여름 디자인 캠프에서도, 또 졸업 작품 때도 평범한 선생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작품’을 들고 왔다. ‘설계 잘 하는 학생’이라는 어떤 관례적 기준으로 보자면 그의 결과물은 모범답안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표준화된 스튜디오 시스템과 관성에 젖은 설계 교육에서는 생산되기 힘든 독특한 생각, 그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설득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지운이다.

조경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학생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어 나는 “조경하기 참 아깝다”는 생각을 여러 번 속에 묻었다. 졸업 작품 리뷰에 초청한 한 조경가도 똑같은 말을 내 귀에 속삭였다. “쟤는 조경시키기 아까운 애다.” 물론 이 말은 우리 조경 현실이 그런 독창성과 상상력을 포용하고 배가시켜 줄 수 있을 만큼 풍요롭지 못하다는 아쉬움과, 꼭 탄탄한 실력을 갖춘 조경가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동시에 담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졸업 무렵 지운이는 광주아시아문화전당 프로젝트에서 인턴을 잠시 하게 되었다고 알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조경설계사무소에 취직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사오 년이 흘렀을까, 한 심포지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예전의 그 하지운이 아니었다. 악수 외 몇 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지만, 조경에 찌들고 지친 지극히 평범한 조경설계사무소 대리급 직원으로 변한 그가 한눈에 보였다.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운이다! 얼마 전 한 페이스북 친구가 링크한 기사를 읽고 평소에는 거의 안 해본 ‘공유’라는 걸했다. 그리고 아쉬움과 반가움과 기쁨이 뒤섞인 마음으로 바로 이렇게 적었다. 하지운이다! 베를린의 샤우뷔네Schaubühne라는 극단이 공연하고 있는―240시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진행하여 화제를 모으고 있다는―드라마 ‘미트Meat’를 다루며 출연 배우를 인터뷰한 기사다. 드라마의 내용과 진행에 대한 긴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 한국에서 배우 지망생이었나요? 여배우 하지운의 답이 이어진다. “원래는 조경가였어요.

5년간 회사에 다니기도 했고요. 연기자는 어릴 때부터 꿈이었어요. 다만 집안이 보수적이었기에 이를 말하기가 쉽지는 않았었죠. … 베를린에서는 독립영화를 찍기도 했고, 본디지 페이리즈Bondage Fairies의 ‘헤드 온Head On’이라는 뮤직비디오 촬영에도 참여했지요.” 하지운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 다른 형식의 조경 설계를 실천하고 있다.

이번 호 ‘설계 교육’ 특집을 의식해서 쓴 에디토리얼의 초벌 메모 파일을 지웠다. 표준화된 설계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다, 설계 교육은 조경가로서의 기본기를 연습시키는 전문 교육일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안목과 자기 주도적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는 교양 교육이기도 하다, 조경 교육 인증 제도가 필요하다는 류의 이야기를 적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지운을 다시 만나니 하지운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설계 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아직 불안정한 게 한국 조경학의 현실이니 보편적인 틀을 고민하는 게 먼저겠지만, 평균의 그물을 빠져나가는 잠재력과 가능성에도 시선을 줄 필요가 있다. 하지운을 다시 생각하니 이번 호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 자꾸 겹쳐서 떠오른다. 머리카락만으로 공간 만들 생각을 한 조리나 소장 같은 조경가로 하지운을 자라게 할 방법은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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