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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세 도시 이야기
  • 환경과조경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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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소금 마을 전경. 지금은 박물관, 호텔 등으로 쓰이고 있다. ⒸSalineroyale Arc-et-Senans

 

#51

독인가 약인가 - 이상 도시 쇼Chaux

 

원로 건축가가 하루아침에 감옥에 던져진 신세가 되었다면, 그리고 감옥에서 종이와 펜을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면,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살아나갈 궁리를 할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머릿속에서 세상을 다시 설계할 것이다. 프랑스의 건축가 클로드 니콜라 르두Claude-Nicolas Ledoux(1736~1806)의 이야기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그는 왕실 전속 건축가였다. 루이 15세와 16세의 신임을 얻어 중요한 프로젝트를 여러 건 의뢰받았다. 다만, 당시 프랑스 왕실의 재정이 파산 상태였기 때문에 으리으리한 궁전 등을 지을 형편은 못 되었고 중요한 국가시설들이 그에게 맡겨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파리의 새로운 성벽, 세관 건물, 왕립 제염소다. 여기서 파리의 성벽이란 중세에 축조된 방어용 성벽이 아니라 1785년에서 1788년 사이, 즉 혁명 전야에 세워진 새로운 성벽을 말한다.

표면상으로는 밀수품을 통제하기 위해서 새로 축조했다고 하지만 실은 파리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통관세를 걷기위 해서였다. 새 성벽은 총 연장 24km에 총 60개의 관문을 세워 물샐 틈이 없었다. 그 60개의 관문 중 42개를 르두가 설계했다. 르두의 주요 프로젝트인 세관 건물과 제염소는 서로 판이한 운명을 맞게 된다. 세관 건물은 혁명의 날분노한 파리 시민들에게 파괴당했다. 그 반면 제염소는 파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덕에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뿐만 아니라 1920년 프랑스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을 얻었다.

18세기, 소금은 왕실 전매품으로서 왕가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프랑스의 아르케스낭Arc-et-Senans이라는 곳에 중요한 제염소가 하나 있었는데 시설이 몹시 낙후되어 다시 지을 필요가 있었다. 이 지역은 지하수에 염분이 섞여 있어 고대 로마 시대부터 내륙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다. 소금이 엄청 비쌌던 시절이었으므로 소금 도둑이 많아 철통같은 담장을 둘러 지켰는데,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점점 비좁아지니 위생 문제와 더불어 화재의 위험도 커졌다.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주변의 숲을 모조리 벌목하여 불을 땠으므로, 땔감 수급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르두는 구 제염소를 개조하는 것보다는 숲이 있는 곳으로 이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경우 제염소 전체를 새로 설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는 새 제염소의 기본 틀을 반원형으로 잡고 건물과 동선을 방사형으로 배치하여 향후 사업이 확장되더라도 외곽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르두가 설계한 아르케스낭의 소금 마을 배치도 참조). 이 반원형의 구조를 좀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가장 외곽에는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정원과 건물이 번갈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가장 남쪽에 반원형을 그리며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는 건물군은 기숙사다. 정중앙의 캐노피가 입구 겸 경비실이며 양쪽으로 각각 재판소와 유치장이 배치되어 있다. 북쪽의 일직선을 보면 중앙에 소장의 관사가 우뚝 서 있다. 여기가 바로 컨트롤 타워이며 힘이 집중되는 구심점이다. 이곳에는 예배당도 마련되어 소장의 감시 하에 모두 함께 미사를 드렸다. 소장의 관사를 양 옆에서 호위하고 있는 건물들이 바로 생산 공장이다.

이 제염 마을의 배치도에는 르두의 세계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계몽 왕조였다. 즉, 왕정과 신분 사회를 유지하여 계급 사이에 선을 분명히 긋되, 계몽 정신에 의거하여 각 신분의 존엄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몽 정신보다 더 우위에 둔 것은 건축이었다. 이 사실은 그의 건물 설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건물의 창을 아주 작게 만들었고, 공장의 굴뚝도 생략했다. 자신의 건축 미학을 훼손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공장 내부는 통풍이 잘 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만성 호흡기 질환에 시달렸고 일찍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느 모로 보나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바스티유 감옥에서 13개월을 보내는 동안 르두는 소금 마을을 이상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종이와 연필이 없으니 일단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가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종이에 옮겼다. 우선 그는 반원을 확장시켜 완전한 원으로 만들고 개별 건물을 디자인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숲의 이름을 따서 이상 도시쇼1라고 이름 붙였다(118쪽 아래 그림 참조). 이상 도시 쇼의 설계도는 마치 백설 공주의 계모가 내민 사과와 같다. 반쪽에는 독이 들어있고 나머지 반쪽에는 독이 없는 사과처럼 쇼 마을의 반은 참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북쪽의 새로운 반원 마을이 이상 도시에 해당된다. 이곳은 ‘도덕적인 이상에 따라 사는 곳’2이었다. 18세기 계몽 시대에 정원이나 건물을 지을 때 항상 ‘도덕성’을 내세우는 이유는 그동안 신의 계율에 따라 살았으나 이제는 인간 중심의 세상을 만들어 스스로를 지켜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신의 계율이 아닌 인간의 도덕성이 관건이 되었다. 루소나 조지프 에디슨 등이 정원에서 도덕성을 찾았다면 르두는 공동 생활체 개념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숲 속에 세노비Cénobie라는 공동 주택을 설계했다. 총 16가구가 모여 사는 주택이다. 르두에 따르면 사람은 다른 이와 교류를 통해 좋은 사람으로 다듬어지기도 하고 방종하게도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즐거운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만 행복해진다. 고요한 숲 속에 지어진 세노비에서 현인들의 지도 아래 단순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활하면서 전설 속의 황금기를 구현하고자 한 곳이 바로 이상 도시 쇼다.

혁명 이후, 아무도 전 왕실 건축가에게 일을 주려 하지 않았으므로 르두는 나머지 생을 건축 이론을 완성하는 데 바친다. 그 결과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책3을 집필했고 총 364장의 도판을 삽입했다. 이상 도시 쇼는 1권에서 설명하고 있다. 책의 제목 『예술과 관습과 법의 맥락에서 고찰한 건축』에서 나타나듯, 그는 세상의 모든 이치에 답을 주는 것이 건축이라고 주장했다. 건축가는 공간만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해법을 제시한다며 혁명 와중에 공석이 되어 버린 종교와 왕의 자리에 건축을 슬며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건축가는 신과 경쟁하는 자다. 모든 것이 그의 영향권 안에 있다”라고 비약하기에 이른다. 르두의 이상 도시는 그의 사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20세기 초, 경제 대공황을 겪으며 다시금 격변의 시대가 왔을 때, 일거리가 별로 없는 건축가들이 이상 도시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르두의 작품들이 재조명되었다. 르 코르뷔지에4가 르두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독일에서도 한 젊은 건축가가 르두의 작품에 깊이 심취하게 된다. 히틀러의 전속 건축가가 되는 알베르트 슈페어였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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