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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잡지를 만드는 어떤 방식
  • 환경과조경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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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아는, 『연필 깎기의 정석』이라는 책이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만화가이면서 연필 깎기의 장인을 자처하는 데이비드 리스가 쓴 책이다.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어떻게 연필을 ‘날카롭게’잘 깎을 것인가! 주머니 칼, 외날 휴대용 연필깎이, 다구형 휴대용 연필깎이, 이중날 회전식 연필깎이 등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연필 깎는 방법을 소개하는데, 완독은 달랑 2시간이면 충분하다. 작가는 “닳아서 뭉툭해진 연필 촉을 깎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보석을 닦아서 더 반질반질 윤이 나고 원래의 완벽한 형태가 더 잘 드러나도록 하는 일과 비슷하다”며 연필 깎는 행위에 콧기름을 바른다. “인간이 만든 이 단순한 물건(연필)은 개인의 권능을 배가시킨다”고 어느 공학 칼럼니스트가 말했다지만, 그래봤자 하찮은 연필 깎기 따위가 뭐라고. 하지만 천성이 ‘호갱’과라 책을 읽은 뒤 한동안 연필 깎는 재미에 빠졌다. 솔직히 말하면 다양한 형태의 연필깎이 모으는 재미를 누린 거지만. 

얼마 전 우연히 인사를 나눈 한 건축가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떤 잡지를 만들고 싶으세요” 우물쭈물하다 던진 엉성하고 짧은 답이 이랬다. “혹시 『연필 깎기의 정석』이란 책 보셨나요? 어떤 잡지를 만들고 싶다기보다, 그런 방법으로 잡지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 덜 떨어진 이상주의. 절지류 더듬이만큼 감각을 가동해도 생존할까 말까인 게 흔히 말하는 상업 잡지의 숙명인데, 한가롭게 연필심이나 다듬는 스탠스를 입에 올리다니. 맞다. 한 달단위의 상업 매거진을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꾸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엔터테인먼트 소식을 부모님 안부 묻듯 챙겨야 하고, 유명 해외 도시 통신원을 써서라도 인구 서베이하듯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확인해야 하고, 브랜드들의 제품 프레젠테이션 행사에 쉼 없이 출석 도장을 찍어야 하고, 시즌마다 열리는 패션 컬렉션에 기자를 보내 두 계절 앞선 스타일 동향을 곳간에 쌓아둬야 안심이 될까 말까다. 노출 빈도가 빈번해진 배우 차승원과 최지우가 같은 소속사에 몸담고 있다는 디테일은 기본, 요즘 트렌드의 최고봉인 ‘먹방’ 프로그램에 등장한 셰프 몇몇과 안면 정도는 트고 있어야 기자들과의 기획회의에서 말발이 선다. 직접 라임을 타진 못해도, ‘언프리티 랩스타’ 파이널 라운드에 치타와 제시와 육지담이 올랐고 최종 우승은 치타의 차지였다는 걸 줄줄 꿰고 있으면 반 발자국 앞선 안도를 누릴 수 있다. 정리하면, 상업 잡지의 최전선에서 승리하려면 링 위에 오른 복서처럼 전신의 감각이 팽팽하게 살아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도 당대의 복서 매니 파퀴아오처럼.

흥미로운 건 이 ‘어마무시’한 각축장에도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전문지가 아닌 종합지의 독자는 말 그대로 이동 타깃이다. 연령대와 성별 정도만 거칠게 가를 뿐 나머진 복불복이다. 전문지가 해당 분야의 선도적 담론 앵글에 전력 투구를 한다면, 종합지는 다양한 길 앞에서 서성거리는 운명을 타고 난 셈이다. 매 호마다 빠지지 않는 고명 같은 기사 소스가 연예인인 건 그 때문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만한 만인의 관심사는 없으니까. 상업지의 꽃이라 불리는 여성 패션지 발행일 직전의 포털사이트에는 각각의 매체가 진행한 연예인 화보가 경쟁하든 디지털 가판에 늘어선다. 아쉬운 건, 한때 ‘기사의 꽃’이라 불렸던 스타 화보의 감도를 좀체 찾을 길 없다는 점이다. 사진에 찍힌 워터 마크를 지우면 이게 어느 매체의 결과물인지 알 방법도 없다. 상업적 경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전방 공격수로 연예인을 내세웠지만, 골 결정력은 계량되지 않는다. 다른 어느 장르보다 트렌드에 민감해야하는 상업지의 요즘은, (주관을 잔뜩 묻혀 전하면) 그래서 더 재미없다. 회고조로 읊자면,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매체 각각의 개성이 묻어나던 시절이었다. 필드 위에서 기사 소스를 묻고 찾던 시절이었다.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 기사 소스의 베이스 캠프는 포털과 케이블 TV와 SNS인 게 현실이다. 트렌드를 좇는다고 천지 사방을 누볐지만 그게 사실은 모니터 속 포털 화면이거나 리모컨으로 핸들링한 케이블 TV이거나 엄지로 재단한 SNS 세계인것. 역설은 여기서 생겨난다. 누굴 찍어도 흔하고 뻔한 화보로 귀결되듯, 차별적 경쟁을 위해 진행한 기사의 결과 역시 도긴개긴인 것. 그 와중에 세 개의 베이스 캠프에서 조성된 트렌드에선 인공 감미료 맛이 풍긴다. 복기하면 그 획일적 맛을 매체가 각자 취향을 앞세워 따로 느낀다고 생각할 뿐, 아예 트렌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물론 시장에서의 생존을 위해 연예인과 트렌드라는 두 축을 다루지 않을 도리는 없다. 월간 『인터스텔라』가 아닌 다음에야,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행성에 발붙이고 종이 잡지와 운명을 같이 하는 중이니까. 단지 바람이 있다면 잡지 볼륨의 한 귀퉁이에라도, 연필을 어떻게 깎아야 잘 깎는 것인지 말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두툼한 트렌드 기사와 셀레브리티 화보를 앞세워 많이 팔리는 잡지도 필요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생각을 전하는 한 페이지짜리 기사가 ‘앙꼬’처럼 곳곳에 숨어있는 잡지도 필요한 거 아닐까. 오로지 흥미본위뿐인, 팔리기 위해서라면 도핑도 불사할 것 같은 요즘 상업지 시장에서 딱 낙오될 소리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잽을 잘 치는 복서가 훅 한 방에 승부를 거는 복서보다 유능하고 매력적이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지 않은가.

 

 

문일완은 남성지로 입문해 여성 패션지, 종합지, 현재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에 이르기까지 20년 넘게 잡지를 만들고 있다. 경력의 대부분을 남성 라이프스타일을 다루는 일로 채웠지만, 정작 남자들의 본능적 로망으로 불리는 시계, 자동차, 패션 등엔 별 관심이 없다. 김성근 야구와 혼자 영화보기, 그래픽 노블과 르포물을 사들이는 게 최근의 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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