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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입금과 이스트와 불꽃
  • 환경과조경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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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공간이다. 도심형 생활 주택은 저소득자나 사회 입문자에게 주거 기회를 주는 취지로 시작되어 구시가지의 블록별로 시행되었다. ⓒ오형석

 

 

7 입금을 대하는 디자이너의 자세

오래전 학교 수업 시간이었나, 졸업 작품 크리틱 시간이었나. 눈망울 초롱초롱한 ―아차 ‘초롱초롱하다’는 표현이 떠오르는 걸 보니, 졸업 작품 크리틱 때는 아닌 듯하다― 학생, 그러니까 어린이(학부생부터 대리 미만의 직원을 이르는 매우 주관적인 용어)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교수님, 언제 설계하길 잘했다고 느끼세요”

“설계에서 보람은 어디서 찾으시나요”

“좋은 설계를 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 이런 초롱초롱한 질문에 난 몹쓸 답변을 하고 말았다.

“난 입금 될 때.”

 

입금은 좋은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지녀야 하는 여러 덕목 중 가장 으뜸을 꼽는다면 단언컨대 ‘입금’일 것이다. 입금의 효과에 대해 순차적으로 알아보자.


입금이 되면

1. 할리우드 스타는 영화 촬영 전까지 식스팩과 S라인을 만들고, 가수는 행사장까지 가속 페달을 밟을 것이며, 주부는 투 플러스 한우를 굽겠지만, 디자이너는 플러스펜과 롤지를 안고 밤샐 준비를 할 것이다.

2. 아름다운 안(최소한 본인의 마음에 드는 계획안)을 만들기 위해 밤을 지새우고, 몸이 피곤해도 맑은 정신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으며, 클라이언트의 사소한 변경도 달갑게 수용할 것이다.

3. 거의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그러하듯이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처리해야 할 일과 설계 변경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 그럼에도 디자이너는 마지막 입금을 생각하며 최종 마무리에 여념이 없다.

4. 완료되었다(설계안 제출, 준공, 납품, 털어냄, 던져줌, 끝, 쫑과 같은 다양한 용어가 난무함). 그리고 입금이 되면 디자이너는 뒤풀이(과도한 취미 생활, 가족 행사, 골프, 술, 여행 등)를 꿈꾸며 또 다시 밤샐 준비를 한다.


그러나 보통 이런 질문에는 

‘나의 노력으로 지구가 조금 아름다워졌고…’,

‘나의 작품에 다른 사람들의 좋은 평가가 수반되고…’,

‘나의 수많은 관찰과 애정으로 자신과 공공의 선을 위해 노력할 때…’ 등,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답변을 해야 한다.

 

“난 입금될 때”라는 답변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로직을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당시에 나의 머릿 속의 95%는 ‘다음 달 월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항산항심1에 근거한 사고방식에 젖어 있던 것이다. 비슷한 속담으로 ‘쌀독에서 인심난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아니할 놈 없다’ 정도를 들 수 있겠다. 보다 훌륭한 안(플랜, 디자인)을 위한 열정이 폭발하기 위해서는 ‘입금’이라는 촉매가 필요하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고, 입금은 디자이너의 열정을 끓어오르게 한다. 그 당시 질문했던 어린이가 지금이라도 이런 속사정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8 돈이 전부가 아닌 가치에 대한 탐구

언젠가 예비군 소집일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한 15년 만이던가 순간 반가운 마음에 호구조사로 화제가 넘어갔다. 초등학교에는 이과 문과의 구분도 없어 추측할 길이 없으니, “뭐해서 먹고 사냐”, 또 “살만하냐” 뭐 이런 식의 질문이 오고갔다. 그 동창은 구로에서 간판 회사를 한다고 했다. 하도 쓰러지고 새로 생기는 가게가 많은 와중에 자리를 잘 잡아 돈을 쓸어 담고 있다고 했다. 중학교 졸업 후 바로 간판 사업에 뛰어들었고, 잔뼈가 굵어져 지금의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고 했다. 그 당시 내가 버는 것의 열 배 정도 버는 것 같았고, 이젠 좀 살만하다며 뿌듯해 했다. 그는 나에게 많은 야근과 적은 봉급으로 어떻게 생활을 하냐며 측은해 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난 이렇게 생각했다. ‘디자인과 조경 설계는 공공의 선을 위한 일이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평생 직업이므로 상관없다…’라는 생각이었느냐고 아니다. 솔직히 그것보다는 ‘예비군 훈련 끝나고 납품해야 하는데…’라는 생각밖에 없었고, 그러다가 ‘야근하느라월급 쓸 시간이 없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순간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돈은 생각보다 (혹은 예상대로) 많이 벌지 못했다(그래도 생활은 했으니 벌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도 아직까지 조경 설계를 직업으로 갖고 있고 그래서 ‘그리고’ 있다. 이유가 뭘까?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설계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걸까?’

물론 몇몇 조경 디자이너는 많은 돈을 벌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그저 중산층 정도의 수입으로 수수한 삶을 살아간다. 사실 적당하고 일관된 보수의 확보는 어느 직업이든 중요한 문제이지만, 조경 설계는 오늘날 부의 기준에서 돈버는 분야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조경 설계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이유에서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보통 사람들은 설계를 한다고 하면 건축 설계, 인테리어 설계를 떠올리는데, 조경 설계를 한다고 하면 이런 반응이 대부분이다.


“아… 예, 좋은 일 하시는 거죠”

(좋은 일이죠…)

“고속도로 변에 많은 그거죠”

(그러니까요…)

“돈 많이 벌 수 있다던데.”

(뭐 그럴 수도…)

“아! 공원 설계, 그거죠”

(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데…)

“그거 전망이 좋다던데요”

(20년 전에도 그랬지…)

 

 

오형석은 새로운 조경 문화를 고민하던 젊은 조경가 7인과 의기투합해 만든 프로젝트 그룹을 기반으로, 2005년도에 디자인로직을 설립했다. 만 10년 동안 디자인로직을 이끌며 새로운 외부 환경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으며, 또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을 갈구하고 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 후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서인조경과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LH 조경 부문 자문위원, 인천시 도시디자인 자문위원, 코레일 조경 심의위원을 역임했고, 한국도로공사 사옥, 한남더힐 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되었으며, 세종문화회관예술 정원, 호텔 롯데 제주, 용현 SK VIEW 등을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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