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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언어의 정원
  • 환경과조경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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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 | 김효은 역 | 대원씨아이 | 2015

 

비가 오는 날은 아무래도 좀 별로다. 출근길에 귀찮게 우산도 챙겨야 하고 땅은 질퍽질퍽, 하늘은 또 왜 이렇게 우중충한지, 몸은 비를 피해 건물에서 건물로 빠르게 옮겨 다니는 신세다. 평상시에도 회색탑에 갇혀 사는 건 똑같지만 공간의 선택권을 빼앗긴 기분이랄까.

그래도 가끔은 비를 즐긴다. 정확히 말하면 프레임 속에 채워진 비오는 풍경이 좋다. 대부분은 비를 피해 건물 속에 웅크리고 바깥은 쳐다보지도 않지만, 어떤 장소냐에 따라 그 풍경은 사뭇 다르게 보인다. 막걸리집에서 파전에 동동주 시켜놓고 잠깐씩 창밖을 응시하면, 처마를 타고 현악기의 줄처럼 길게 늘어지는 빗줄기가 시야를 적신다. 마음이 착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커피향 은은한 카페에서 내다보는 풍경도 좋다. 특히 처마가 없는 유리창이라면 빗줄기가 씻기듯 흐르는 선은 가히 예술적인 모습이다. 비 내리는 공원은… 글쎄, 좀 애매하다. 비 오는 날 공원을 찾는 이가 있을까? 『언어의 정원』에는 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비 오는 날 공원에 가본 적은 없지만, 이 작품을 보면 왠지 낭만적이어서 ‘가볼 걸’ 하는 후회가 든다. 어쩌면 내 인연이 더 빨리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헛된 생각이 들 정도다.

『언어의 정원』은 2013년에 개봉한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감독이 직접 재구성한 소설이다. 남녀가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알게 되고 소통하면서 겪는 내면의 치유와 성장을 다룬 일종의 감성 멜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공원을 중심으로 비 내리는 풍경을 묘사하고, 두 남녀 주인공과 공원, 비의 표현에 초점이 맞춰졌으나, 소설에서는 비의 영역을 확대하고 등장인물을 모두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영상에서 담지 못했던 내용을 해석하듯 각 인물의 이야기와 내면을 자세하게 다룬다. 『언어의 정원』의 원제는 ‘고토노하노니와言の葉の庭’다. 고토하言葉는 말이나 언어를 뜻하는데 한자를 직역하면 ‘말을 적은 잎’이다. 종이가 없던 시절에 파피루스나 나뭇잎에 글을 적었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을 보다 시적으로 표현한 말이 고토노하言の葉인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만요슈』를 인용한 의미가 제목에 담긴 것으로 보인다. 고전 소설은 시를 읊어 인물의 마음을 묘사하는 기법을 쓰는 특징이 있다. 『언어의 정원』은 이러한 기법을 활용해 인물의 내면을 표현함으로써 서정적 분위기를 북돋운다. 그 언어를 구사하고 관계가 시작되는 장소로 공원이 등장한다. 제목은 정원이라는 용어를 채택하고 있지만, 이는 공원과 정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거나 보다 부드러운 표현으로 정원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우렛소리 희미하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그대 붙잡으련만”(『만요슈』, 11권 2513번). 떠날 것 같은 남자를 붙잡는 여자의 노래다. 비가 내려 남자가 떠나지 못하길 바라는 내용이다. 『언어의 정원』에서 비는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진다. 감독은 이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비’라고 할 정도로 영상 표현에 신경을 기울이고 소설 속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한다. 비가 내리면 세상은 이어진다. 서로 떨어져 있는 하늘과 대지가 비를 통해 만나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하이데거는 비가 내리는 모습을 “하늘과 대지의 결혼식”이라고 표현했다. 하늘의 태양과 대지의 자양분이 내밀한 관계를 맺어 포도나무가 열매 맺는 모습을 ‘결혼식’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가치를 높였다. 여기서는 비가 만남을 주선하는 중매인으로서 역할을 한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상처를 가지고 있다. 소설 속에서 다루기엔 소소해 보일 정도지만, 우리 일상에 대입해 봤을 때 누구나 하나씩 가진 상처 혹은 사연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감정이 이입된다. 현대인은 치열한 경쟁 체제 속에 피로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로 인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현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청자가 바로 ‘비’로 은유된다. 서로의 영역에서 혼자가 되고 상처 입은 두 사람은 피난처로 공원을 찾았다. 상처는 혼자보다 같이 이겨내는 게 더 쉬운 법이다. 그런데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건 쉽지 않다. 어른이 되어 학교나 직장이 아닌 곳에서는 더욱이 그렇다. 두 사람은 공원이라는 공공 공간에서 처음 만나고 서로를 통해 치유의 과정에 도달한다. 공원은 개인의 영역이 아니다. 누구의 영역도 될 수 있다. 이에 서로 모르던 두 사람이 대화의 기회를 갖게 되고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공원이 소통의 매개체가 된 셈이다.

“소년의 손이 살그머니 엄지발가락 끝에 닿았다. 뜨거운 숨결이 닿는 감촉에 차디찬 발끝이 흠칫했다. 심장이 콩닥콩닥 뜀박질을 했다. 혹여 소년이 들으면 어쩌나 겁이 날 만큼 고동소리와 숨소리는 격렬했다.” 구두 디자이너를 꿈꾸는 타카오는 마음이 가는 이성 유키노에게 구두를 만들어주고자 공원에서 그녀의 발을 이리저리 만지며 치수를 잰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사실상 베드신이다. 영화 ‘일대종사’(2013)를 보면 양조위와 장쯔이가 겨루는 장면이 있다. 겨루는 과정에 서로의 신체와 호흡이 맞닿고 눈빛이 마주치는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이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하고 교감의 지점을 클로즈업해 관객에게 보여준다. 베드신은 관객에게 등장인물의 심리적 교감을 전달하는 극적 장치다.

『언어의 정원』에서는 이를 구두 치수를 재는 장면으로 대체했다. 감독은 “사랑, 그 이전의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단순히 『만요슈』의 시구만 인용하지 않고 1,300년 전에 쓰인 옛날 가요의 ‘사랑’이란 단어가 담은 정서를 모티브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지금의 ‘사랑’이란 단어의 정서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사랑’이란 단어를 통해 언령言靈을 확인하려 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전략이 가슴을 두드렸다. “우렛소리 희미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 머무르오 그대 가지마라 하시면”(『만요슈』, 11권 2514번). 사랑의 언어가 비와 함께 파문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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